딸기네 책방 880

비자이 프라샤드, '갈색의 세계사'

갈색의 세계사-새로 쓴 제3세계 인민의 역사비자이 프라샤드. 박소현 옮김. 뿌리와이파리 요즘 극히 소수의 사람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책이라고. 재미있었다. 비동맹운동, 제3세계의 역사만으로 구성된 세계사책은 처음 읽는다. 장렬한 투쟁, 세계를 뒤흔들 수 있었던(한때는 뒤흔들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거대한 흐름이 굴절되고 꼬이고 결국 무너져내리는 과정이라니. 원문도 좀 뒤죽박죽인 것같고, 편집자가 원고를 안 읽었는지 오탈자 많고 일본식 표현(수상 국방성 외무성 등등)도 많아 엉성했지만 밑줄 치면서 읽을 부분이 많았다. 제3세계 구상은 수백만 인민을 흔들어 놓았을 뿐 아니라 여러 영웅을 낳기도 했다. 그런 영웅 중에는 3대 거물 정치인인 나세르, 네루, 수카르노뿐 아니라 베트남의 응우옌티빈과 호찌..

딸기네 책방 2015.11.06

이언 스튜어트, '생명의 수학'

며칠전 어떤 출판사 편집자와 수다를 떨다가 '잘 이해하지 못하는 책도 재미있을 수 있는가'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내 경우, 잘 이해하지 못하는 책도 충분히 재미있다! 어린 시절 읽었던 책들 중 대부분에는 아마도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구절, 내가 모르는 지식들이 들어있었을 터이지만 그런 건 책의 재미를 느끼는 데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다. 세세한 것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내게는 재미있게 다가오는 어떤 포인트랄까, 그런 게 있으면 언제나 재미 있다! 이 책이 그렇다. 이언 스튜어트의 (안지민 옮김. 사이언스북스)을 읽었다. 많이 재미있었다. 주제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수학은 생물학에 필요하다'. 예전에는 수학이 물리학하고만 관계가 있는 줄 알았는데 실은 생물학에서도 수학이 매..

도스토예프스키의 유럽 인상기

소설도 쓰고, 잡지를 만들어 글을 쓰기도 하는 남자가 있다. 선후관계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병든 아내(나중에 죽음)가 살아 있는 상황에서 다른 젊은 여자를 쫓아다닌 것 같다(참고로 나는 이 남자에 대해 잘은 모른다). 새 연인이 유럽 여행을 가자 쫓아가서 같이 다니는데, 이 여자는 유럽에서 그새 딴 놈에게 눈이 맞았고 그새 차였다. 그래서 쫓아온 남자한테 완전 시큰둥. 그러면 여행이나 잘 다닐 것이지 말이야. 남자는 유럽에서 도박에 빠져서 가진 돈 홀랑 날렸고, 고향에 있는 형과 동생은 물론 전처의 여동생, 자기 차버린 젊은 여성에게까지 돈 좀 보내달라고 읍소를. 심지어는 도박에 대한 소설을 써서(실제로 썼다고 함) 돈 갚을테니 빌려달라고 동네방네 문인들에게 애걸복걸. 그 전까지 유럽에 대해 글 쓰면서 프..

딸기네 책방 2015.10.25

바디우와 지젝 현재의 철학을 말하다

"먼저 버려야 할 잘못된 생각이 있는데, 철학자는 모든 것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바로 그것이다. 철학자는 텔레비전에 밤마다 출연해 현재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질문 받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진정한 철학자는 중요한 문제들이 무엇인지 스스로 결정하는 사람, 그러니까 모든 사람들에게 새로운 문제들을 제기하는 사람인 것이다." (15~16쪽) 알랭 바디우와 슬라보예 지젝의 대담집인 (민승기 옮김. 도서출판 길)를 읽었다. 읽으면서 바디우의 말에 밑줄을 쫙쫙 그었는데 정리해야지 해놓고 미적미적거리다 이제야 긁어다 놓는다. 이 대담은 이라크전이 세계의 관심사였던 2004년에 이뤄진 것이기 때문에 지금과는 조금 시차가 있다. 하지만 바디우의 말은 대체로 주옥같다. 반면 지젝의 글..

딸기네 책방 2015.10.08

아마존- 정복과 착취, 경외와 공존의 5백 년

아마존- 정복과 착취, 경외와 공존의 5백 년존 헤밍 지음. 최파일 옮김. 미지북스 영어 제목이 TREE OF RIVERS다. 책은 ‘나무의 강’인 아마존의 역사를 강물이 흐르듯 굽이굽이 따라가면서 숲과 습지와 역사를 아우르며 펼쳐 보인다. 대작이다. 책이 두껍기도 하지만, 담고 있는 시간과 공간의 무게와 깊이가 워낙 크다. 저자는 캐나다 출신으로 영국에서 활동한 탐험가라고 한다. 아마존의 역사는 물론이고 생태와 지리와 그곳 사람들의 이야기를 망라했는데, 정말 재미지다. 서양인들이 그 땅에 들어가 기웃거리기 시작하고 사람들을 죽여 없애는 시기의 역사는 참혹하다. 탐험하고, 죽이고, 잡아서 부리고, 고문하고, 죽이고, 또 탐험하고, 잡아들이고, 죽이고. 팔다리가 잘려나가는 정도의 묘사는 예사이고, 끔찍하기..

딸기네 책방 2015.08.04

작가의 망명- 프라무댜 아난타 투르와의 대화

일생에 걸쳐 싸웠고, 싸우기 위해 썼고, 가진 것들을 빼앗겼고, 오랜 세월을 갇혔고, 쓴 것들마저 빼앗겨야 했던 사람. '읽을 사람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작품을 써야 했'던 작가. 그에게 쓴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었으며, 그의 글은 어떤 것들이었을까. (여운경 옮김. 후마니타스)는 미국인 다큐멘터리 제작자 안드레 블첵과 인도네시아의 건축가 겸 작가 로시 인디라가 늙고 쇠약해진 프람(프라무댜의 약칭)을 만나 인터뷰한 내용을 담은 대담집이다. 서문부터 옮긴이 후기까지, 번역을 비롯해 모든 게 재미있고 힘이 넘치는 책이다. 베네딕트 앤더슨의 책을 읽을 때에 호세 리잘의 작품을 몰라 답답했듯이, 이 책을 읽으면서 정작 프람의 작품을 접해본 적 없어 속이 상했다. 국내에 번역된 것이 없거나 일부만 번역됐거나 혹..

딸기네 책방 2015.07.10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시간의 목소리'

밤이면 아베우 지 알렝카르는 금지된 임무를 수행했다. 브라질리아의 한 사무실에 숨어서 매일 밤 안보 관련 군사 기밀 문서를 복사했다. 고문과 암살 기록이 담긴 보고서와 조서 카드, 서류 파일이었다. 3년간 몰래 일한 끝에 아베우는 백만 쪽 분량을 복사했다. 문서는 당시에 브라질 전체의 삶과 기적 위에 군림하는 절대 권력의 마지막 시기를 보내고 있던 독재의 실체를 거의 완벽히 보여 주었다.어느 날 밤 아베우는 군사 문서를 펼치다가 편지 한 통을 발견했다. 15년 전에 쓰인 편지였지만, 편지에 찍힌 여자의 입술 자국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 이후로 그는 많은 편지를 발견했다. 각각의 편지는 주소지에 도착하지 않은 봉투와 함께 있었다. 그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미 오랜 세월이 흐른 뒤였다. 잊힌 사람들과..

딸기네 책방 2015.07.09

폴 로버츠, '식량의 종말'

식량의 종말폴 로버츠. 김선영 옮김. 민음사 폴 로버츠를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을 오래 전 재미있게 읽었는데(어, 독후감이 있는 줄 알았는데 없다?;;) 이 책도 구성과 느낌은 비슷하다. 역사와 현실과 문제점과 대안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한 권으로 이슈 따라잡기’에는 최적이다. 미국의 여느 저자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저널리스틱한 글쓰기’ 대신 정석대로 통계와 자료를 조목조목 들어가며 ‘건조하게’ 접근한다는 점. 이 책이 나온 지는 좀 됐지만 식량 문제를 들여다보는 개괄서로는 역시 최고인 듯. 산업화된 농업, 그러나 산업화에 맞지 않는 ‘식품’ 현대 식품 위기가 근본적으로 경제주의적인 것은 맞지만 이는 흔히 설명하듯 식품 회사들이 수익을 목적으로 운영했다거나 소비자들이 최적의 가격을 찾아 쇼핑했기 때..

딸기네 책방 2015.06.24

와타나베 이타루,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와타나베 이타루. 정문주 옮김. 더숲 어쩐지 지난해부터 계속해서 '탈성장'에 관한 책들을 읽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관심이 없는 문제를 굳이 골라서 파고드는 것일 리야 없지만, 그렇다고 내가 탈성장이라는 주제를 놓고 책을 골라서 읽는 것도 아닌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따지고 보면 탈성장은 이제 우리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아니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가치다. 탈성장에 대한 책들을 주로 문화부 책상자에서 주워와 읽었는데, 거푸 내 손에 잡혔다는 건 이 문제를 다룬 신간들이 그만큼 많이 나오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저성장, 뉴노멀, 신창타이, 이름들은 거창하지만 탈성장은 우리가 망가진 지구에서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가치다. 이런 책들이 계속 나오니 참 좋다. 와..

딸기네 책방 2015.06.24

마리 모니크 로뱅, '죽음의 식탁'

죽음의 식탁마리 모니크 로뱅. 권지현 옮김. 판미동 농업 관련 산업이라는 작지만 매우 강력한 세계에서는 ‘농약’이라는 말을 피하고 식물 병충해 방제 제품’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 용어도 최근에는 ‘식물 약제’라는 새로운 말로 바뀌었다. ‘농약’을 ‘식물 병충해 방제 제품’이나 ‘식물 약제’로 바꾼 것은 단순히 의미상의 속임수가 아니다. ‘생명체를 죽이기 위해 개발된 제품’을 식물의 건강과 식품의 질을 보호하는 약으로 둔갑시킴으로써 실질적으로 농부와 소비자를 속이려는 목적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46쪽) 1915년 4월 22일, 독일군은 프리츠 하버의 명령을 받고 벨기에 이프르에 가스 146t을 살포한다. 프리츠 하버는 화학전을 감독하기 위해 현장에 나가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연합군이 방독면으로 ..

딸기네 책방 2015.06.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