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877

장 카르팡티에 등, '지중해의 역사'

묵히고 묵히던 책을 휴가 때 끝냈다. 장 카르팡티에 등이 쓰고 엮은 (강민정, 나선희 옮김. 한길)>. 두꺼운 만큼 내용도 알차다. 프랑스 학자들이 ‘지중해의 역사’를 훑었는데 시간의 길이도 길고, 공간의 범위 또한 넓다. 그리스, 로마로부터 시작해 멀리는 오늘날의 이라크, 이란까지 포괄하는 중근동을 적잖게 건드리고 있고, 북아프리카와 이베리아까지 종횡무진 넘나든다. 아쉬운 것은, 숱하게 많은 지명이 나오는데 옮긴이 주석이 없다는 것. ‘한길 히스토리아’ 브랜드로 나왔는데 이 정도 책이라면 번역자가 힘들더라도 지명마다 최소한 어느 대륙, 지금의 어느 나라 어디쯤인지는 주석을 달아줬어야 했다. 책머리 컬러 화보 대여섯 장 들어간 것 빼고는 모두 흑백인데 가격은 3만5000원. 책값이 아깝지는 않으며 번역도..

딸기네 책방 2016.08.22

스티븐 제이 굴드, '판다의 엄지'

이번 휴가는 도킨스, 굴드와 함께 보냈다. 오랫동안 쟁여두고만 있었던 도킨스의 돌베개만한 책 . 말해 무엇하리. 그리고 스티븐 제이 굴드의 (김동광 옮김. 사이언스북스). 이 책은 그동안 마음 속에(^^;;) 남겨두고만 있다가 몇달 전 결국 샀다. 교보문고를 지나가다가 매대에 올라있는 판다의 엄지를 보니... 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굴드의 글을 읽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먼저 굴드, 한동안 도킨스, 그 다음엔 에드워드 윌슨에 빠져 있었고 심지어 제임스 왓슨과 르원틴의 책도 읽었건만 언제부터인가, 왜인지, 굴드를 잊고 지냈다고나 할까. 따지고 보면 이유를 모를 것도 없다. 2002년 굴드아저씨가 세상을 뜬 뒤로 어쩐지 마음의 상처를 받은 기분이었으니. 샤르트르 대성당의 남쪽 수랑에는 중세에 만들어진 가장 ..

리처드 도킨스, '지상 최대의 쇼'

도킨스에 대한 애정을 더 이상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의 책을 읽으면 늘 속이 시원하고 즐겁고 유쾌하고 통쾌하다. 와 , , 에 이어 도킨스의 책을 읽는 것은 다섯권째인 듯. 하지만 사실 정확히 기억은 안 남. 칼 세이건의 은 분명 읽은 것 같은데, 도킨스의 을 읽었는지는 가물가물하다 -.-a 휴가 때 벽돌베개 만한 부피를 자랑하는 (김명남 옮김. 김영사)를 들고 갔다. 여행에 가지고 다니기엔 버거운 크기이지만 읽는 즐거움이 무게와 두께를 상쇄해주고도 남는다. 여담이지만 이번 휴가에는 도킨스와 함께 굴드의 도 가져갔다. 2002년 이미 세상을 떠난 굴드의 책은 오래 전, 그러니까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옛 글들을 모은 것이다. '이기적 유전자'에 대한 굴드의 비판은 신랄하다. 반면에 신랄하기..

살바도르 아옌데: 혁명적 민주주의자

살바도르 아옌데: 혁명적 민주주의자빅터 피게로아 클라크 지음. 정인환 옮김. 서해문집. 아옌데의 연설이나 일화 정도만 읽었지, 인물 전체를 다룬 책은 처음이다. 스크랩을 열심히 해두려고 했는데... 중간에 덮어두고 휴가를 다녀오니 책이 없어졌다. 아옌데를 아는 사람(즉 상당한 연식이 있는 사람), 그러나 남의 책을 책상 위에서 과감히 훔쳐갈 용기가 있는 사람의 소행이다. 젠장. 칠레인들은 일종의 섬나라 사람 같은 정서를 갖고 있다. 지리적 고립과 세계적인 사건들로부터 떨어져 있는 거리감 탓에 칠레인들은 스스로 조금은 촌스럽다고 의식하는 경향이 있다. 이 때문에 자국 출신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사람에 대해서는 대단한 자부심을 느낀다,원주민인 아라우칸 마푸체족은 300여 년 동안이나 독립을 위해 치열하게 ..

딸기네 책방 2016.08.08

이안 부루마. '0년-현대의 탄생, 1945년의 세계사'

0년-현대의 탄생, 1945년의 세계사 이안 부루마. 신보영 옮김. 글항아리 우리에게 낯익은 ‘현대’의 틀이 만들어진 1945년의 풍경들. 2차 세계대전과 나치즘을 경험한 아버지의 기억이라는 개인적인 ‘사건’에서부터 시작해, 그라운드 제로에 비견될 ‘이어 제로(YEAR ZERO)’에 일어난 일들을 여러 사람의 글과 증언과 보도를 통해 펼쳐 보인다. 교과서에는 처칠과 루즈벨트와 스탈린이라는 ‘빅3’만 등장하지만, 그 시기를 온전히 살아내야 했던 것은 폐허에서 생존하기 위해 발버둥을 쳐야 했던 세상 모든 사람들이었다. 전쟁의 상처가 ‘성(性)’ 혹은 젠더에는 어떤 식으로 투영됐으며, 전후의 보복과 숙청과 단죄는 어떤 의식 속에서 이뤄졌으며, ‘희망의 아침’을 맞아 미국과 영국 등 승전국들은 어떻게 패전국들을..

딸기네 책방 2016.07.22

샐리 그린들리, <깨진 유리조각>

나는 유리 조각을 높이 들고 흔들었다. 크리켓 공을 잡았을 때처럼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드디어 새 일터에서 첫 삽을 뜬 것이다. 나는 그 유리 조각을 살그머니 자루에 집어넣고 새로워진 힘으로 다시 쓰레기 상자를 뒤졌다. 그러나 머지 않아 샌딥과 나는 깨진 유리 조각을 모으는 일은 아무 보람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비카스가 자기 자루에 알루미늄 캔을 차곡차곡 모으는 사이에 우리는 유리 조각을 찾아내려 안간힘을 썼다. 벌써 도로 여러 곳을 뒤졌는데도 우리 둘의 자루에는 유리 조각이 조금밖에 차지 않았다. "이러니 유리 조각을 모으던 아이가 플라스틱으로 바꾼 건 당연해요. 플라스틱이라면 우리도 더 많이 모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나는 등허리를 문지르면서 말했다. 내내 숙이고 있었더니 허리가 쿡쿡 쑤셨다..

딸기네 책방 2016.06.09

숲에서 자본주의를 껴안다

숲에서 자본주의를 껴안다모타니 고스케·NHK히로시마 취재팀, 김영주 옮김. 동아시아 앞부분은 그럴싸한데 뒷부분이 좀 허망하다. 좋은 얘기들 많이 해놓고 뒤에 가서는 갑자기 '라이벌 한국', 국가경쟁력, 스마트시티 예찬이 나오네. 번역은 얼핏 매끄러워 보이지만 일본식 한자어 그대로. '텔레비전에 나오는 문화인' '헌법률' 하는 식이다. 일본어 번역하는 분들에게서 많이 보이는 문제점이다. 일본어는 한국어처럼 써도 된다? 그것도 아니면, 일본식 한자어와 한국식 한자어 구분을 못한다고 할까. 편집자가 책 꼼꼼히 안 읽었나보다. 오탈자도 몇 군데 보이고. 이 책은 원문 자체가 과장이 많고 수식어가 많은 듯. 몇 가지 내용들은 근거가 희박하고 믿기 힘든 것들도 있고. 그래도 앞부분 오스트리아 임업 얘기, 일본의 '..

딸기네 책방 2016.06.09

세계의 빈곤, 게을러서 가난한 게 아니야!

2010년 1월 아이티에서 대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세계 언론을 통해 들려오는 뉴스들은 참혹했습니다. 무너진 집들, 숨지고 다치고 병에 걸린 사람들. 무엇보다 마음 아팠던 것은 ‘진흙쿠키’를 먹는 아이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세상에, 먹을 것이 모자라서 진흙을 물에 개어 햇볕에 말려 먹다니. 흙이라도 먹고 주린 배를 움켜쥐어야 하는 사람들이 이 지구상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충격적이었습니다. 바로 이 책 (김현주 글, 권송이 그림. 사계절)에 소개된 아이티의 열 살 소년 임마누엘의 이야기입니다. 저는 세계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한국의 독자들에게 전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국제뉴스를 다룰 때에 ‘빈곤’을 어떻게 전달하고 설명할 것인지는 늘 고민거리입니다. 가난한 나라의 비참한 사람들, 특히 고통받는 아이들의 모..

딸기네 책방 2016.05.03

다카하시 겐이치로, '우리의 민주주의거든'

우리의 민주주의거든 다카하시 겐이치로. 조홍민 옮김. 글항아리 2011년 3.11 대지진을 겪고 난 뒤에 저자가 아사히신문에 쓴 논평을 모아놨다. 이 사람 저 사람의 글, 이 책 저 책, 이런 영화 저런 다큐를 다 인용하고 있어서 좀 정신이 없긴 하지만 구구절절이 밑줄 그은 데가 많았다. 책의 물리적인 무게는 가볍지만 글들이 모두 재미있었다. 글쓴이 다카하시 겐이치로는 소설가이자 평론가다. 그가 인용하고 언급한 것들은 여러 장르를 전방위로 휩쓴다. 무엇보다 다카하시는 의 작가다. 이 책은 명성을 들었을 뿐 읽어보지는 못했다. 이 평론집을 읽고 나니, 다카하시의 책들과 함께 좀 읽어봐야겠다 싶은 책들의 목록이 늘어났다. 책은 지진이 일본에 던진 충격으로 시작해, 거기서 비롯된 성찰을 쭉 펼쳐나간다. 학술 ..

딸기네 책방 2016.04.24

에리코 말라테스타, '국가 없는 사회'

"난 젤라또 아이스크림을 좀 편하게 먹고 싶은데. 분명 우리 사회에는 기아, 무지, 전쟁, 범죄, 전염병, 끔찍한 재난 같은 많은 악이 있어. 그래서 어쨌는데? 왜 네가 관심을 갖는 거지?" 질문의 마지막 문장을 "왜 내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거지?"라고 바꾼다면, 저런 마음을 갖고 있다는 걸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탈리아의 무정부주의자 에리코 말라테스타의 (하승우 옮김. 포도밭) 첫머리에 나오는 구절이다. 책의 부제는 '카페에서 만난 어느 아나키스트와의 대화'다. 조르조라는 이름의 사회주의자가 치안판사, 카페 주인, 돈 많은 부르주아, 노동자, 사회주의자, 공화주의자 등 여러 사람들과 카페에서 만나 아나키즘을 설파하는 내용으로 돼 있다. 짧고 선명한 책이라 아침 출근길에 지하철에서..

딸기네 책방 2016.0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