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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 부루마. '0년-현대의 탄생, 1945년의 세계사'

딸기21 2016. 7. 22. 15:36

0-현대의 탄생, 1945년의 세계사

이안 부루마. 신보영 옮김. 글항아리

 

우리에게 낯익은 현대의 틀이 만들어진 1945년의 풍경들. 2차 세계대전과 나치즘을 경험한 아버지의 기억이라는 개인적인 사건에서부터 시작해, 그라운드 제로에 비견될 이어 제로(YEAR ZERO)’에 일어난 일들을 여러 사람의 글과 증언과 보도를 통해 펼쳐 보인다. 교과서에는 처칠과 루즈벨트와 스탈린이라는 3’만 등장하지만, 그 시기를 온전히 살아내야 했던 것은 폐허에서 생존하기 위해 발버둥을 쳐야 했던 세상 모든 사람들이었다.


전쟁의 상처가 ()’ 혹은 젠더에는 어떤 식으로 투영됐으며, 전후의 보복과 숙청과 단죄는 어떤 의식 속에서 이뤄졌으며, ‘희망의 아침을 맞아 미국과 영국 등 승전국들은 어떻게 패전국들을 문명화하려 했으며, 그 배경에는 어떤 사고구조가 숨어 있었으며 어떤 한계를 갖고 있었을까. 저자는 온갖 자료를 뒤적이며 이런 물음들에 답해가면서 그 한 해를 재구성했다. 깜짝 놀랄 정도로 재미있었다.



아버지가 거의 죽을 뻔했던 전쟁의 폐허에서 다시 새롭게 구축되는 데 일조한 세상은 바로 내가 자라온 세상이다. 우리 세대는 아버지 세대의 꿈으로부터 자양분을 공급받았다. 유럽의 복지국가, 국제연합, 미국식 민주주의, 일본의 평화주의, 유럽연합, 그리고 1945년에 만들어진 세상의 어두운 이면이다. 즉 러시아와 동유럽의 공산주의 독재, 중국 내전에서 떠오른 마오쩌둥, 냉전내가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 사람들은 도처에서 서구, 즉 미국과 유럽의 몰락을 이야기하고 있다. 만약 전후 직후에 드리워졌던 두려움이 희미해진다면 많은 꿈 역시 색깔이 바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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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여름, 해방된 나라에서 연합군 군인들이 겪은 일은 20년 뒤 비틀스가 왔을 때 일어난 일과 비견될 만하다. 당시 해방은 에로틱을 넘어 광적인 방식으로 표출되었다. 타국의 지배와 패배는 일시적으로 남성의 권위를 무너뜨렸다. 당시 네덜란드 역사가는 이런 상황을 “1940년 네덜란드 남자들은 군사적으로 두들겨 맞았고 1945년에는 성적sexually으로도 두들겨 맞았다고 표현했다. 프랑스와 벨기에를 포함해 한때 점령당했던 수많은 국가의 남자들이 같은 경험을 했다고도 할 수 있다. 전쟁의 또 다른 결과는 많은 여성이 순종을 버렸다는 점이다. 여성들은 직장을 잡았고, 레지스탕스를 위해 일했으며,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임무를 맡았다. 그녀들은 당시 매우 탐탁찮게 여겨졌던 하미나이즈hominise(인류학 용어로, 고유의 개성적 인간이 되거나 탄생하는 것-옮긴이)였다. 그녀들은 남자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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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 더미와 배설물, 살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 막사 사이를 운전해 가면서 군인들은 눈으로 직접 본 것들을 거의 믿을 수 없었다. 이 이미지는 서구 언론에 보도된 최초의 실상이었기에 영국에서 벨젠은 나치 대량 학살의 주요 상징이 되었다.

의사와 의료 봉사자들은 더 많은 음식과 의약품, 의약 장비를 구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고 상상조차 불가능한 규모의 질병과 기아에 맞닥뜨렸다. 군대는 항상 효율적인 기관이 아닌 데다 독일의 상황은 혼란 그 자체였다. 늦은 4월 어느 날에는 이상한 구호품이 도착했다. 상당량의 립스틱이었다. 나중에 립스틱은 신이 내린 선물로 알려졌다. 영국 구급차 부대의 사령관이었던 고닌 중령은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강제수용소 사람들에게 립스틱보다 더한 것은 없다고 믿는다. 시트도 없는 침대에 잠옷도 없이 누워 있던 여성들도 주홍색 립스틱을 칠했고, 어깨 위에 걸친 담요 외에는 아무것도 없이 헤매고 다니던 여성들도 주홍색 립스틱을 입술에 칠했다. 마침내 누군가가 이 수용자들을 다시 인간으로 만드는 뭔가를 해냈다. 수용소 사람들은 이제 팔 위에 새겨진 숫자가 아닌 인간이 됐다. 그들은 이제 외모에 관심을 갖게 됐고, 그 립스틱은 그들에게 인간성을 다시 돌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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립스틱처럼 성적 욕망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생존자들에게 인간성을 다시 만들어내는 기제였다. 1946년 네덜란드의 출생률이 높았지만 난민 캠프의 출생률은 더 높았다. 미국의 점령지에 있던 난민 캠프만 해도 750명의 신생아가 매달 태어났다. 미국의 점령지에 거주했던 18~45세 유대인 여성의 3분의 1 정도가 이미 출산을 경험했거나 임신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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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 유대인은 말할 것도 없고 독일인, 일본인은 확실히 프랑스인, 네덜란드인, 중국인과는 다른 경험을 했다. 외국군과의 접촉도 마찬가지로 달랐다. 아미스 Amis(미국 양키를 말하는 독일 속어-옮긴이)나 아메코 Ameko(미국 양키를 말하는 일본 속어-옮긴이), 영국군과 호주군, 캐나다군, 소련군은 해방자가 아니라 모두 정복자였다.

베를린에서 성매매 여성은 폐허의 생쥐Ruinenmäuschen로 통했다. 일본에서는 매춘이 처음부터 제도화되었다. 일본 당국은 일본군이 중국인과 다른 아시아인들에게 저질렀던 것처럼, 연합군들이 일본인에게 똑같이 할까봐 두려워했다. 일본이 항복하고 3일 뒤인 818일 일본 내무부는 지역 경찰서에 정복자 연합군을 위한 위안시설을 세우라고 지시했다. 여가유흥협회가 애국의 의무로 자기 몸을 희생할 여성들을 모집했다.


여가유흥시설은 희생을 무릅쓴 여성들이 누울 침대도 없이 급하게 만들어졌다. 성적 행위는 누울 공간도 마땅치 않은 상태에서 도처에서 행해졌는데, 대개는 바닥이거나 급조한 매춘굴의 홀이나 복도에서 이뤄졌다. 좀 더 효율적인 시설을 만드는 데에는 몇 달이 걸렸다. 대규모 격납고 같은 매춘시설이 도표 인근의 후나바시에 세워졌다. 이 시설은 국제 궁전 International Palace, 또는 IP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IP는 공장 조립라인처럼 섹스를 제공했기 때문에 디트로이트 인근에 포드가 세운 전시 폭탄 공장의 이름을 따서 윌로런 willow run’으로 불렸다. 남성이 긴 건물 입구에 신발을 벗어놓으면 나중엔 반대편에서 잘 닦인 신발을 신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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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판이라 불렸던 자유계약 성매매 여성들은 백인 상대, 흑인 상대, 일본인 상대 등으로 세분화되었다. ‘온리(오직 한 명)’라 불렸던 일부 여성은 고객 한 명만 관리했다. 좀 더 난잡한 관계를 갖는 여성은 바타푸라이(나비)’라는 별명을 얻었다. 맥아더 장군이 집무하는 본부 맞은편의 히비야 공원이나 인근의 유라쿠초 역 등 도쿄 중심의 특정 지역은 전형적인 판판의 무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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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히비야 공원에서 미군을 고르는 길거리 성매매 여성과, 키스신이 담긴 영화의 최초 상영 간에는 넓은 스펙트럼이 있다. 하지만 성적 유희에 대한 갈망과 섹스 냄새 짙은 팝음악의 높은 인기는 해방된 국가와 패전국 사람들 사이의 간극이 생각보다 크지 않다는 것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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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대부분의 조직화된 복수는 공식적인 독려가 없다면 일어나지 않는다. 성적 욕망이 곧바로 난잡한 성관계로 이어지지 않듯이, 대규모 집단 폭력도 한 개인이 주도한다고 발생하지는 않는다. 이 역시 리더십과 조직화를 요한다. 놀라운 전후 후폭풍 중 하나는 많은 독일인이 다른 독일인을 공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방인의 점령으로 고난을 공유했기 때문에 독일인들은 서로의 목을 겨누고 달려들지 못했다. 독일인의 독일인에 대한 보복은 다른 민족에 의한 독일 보복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117)

 

독일인에게 직접 보복하고 싶어 한 폴란드인들 심리는 더 이해하기 쉽다. 하지만 이마저도 일부는 계급적인 이득 때문이었다. 수 세기 동안 독일인들은 지금은 폴란드 영토가 된 실레지아나 동프로이센 지역에서 살아왔다. 브로츠와프나 단치히 같은 주요 도시에는 대규모 독일인 주민이 있었다. 독일어는 의사나 은행가 교수, 사업가 등 도시 엘리트의 언어였다. 1945400만 명이 넘는 독일인들이 여전히 소련 군대가 침략한, 예전의 독일 영토에 살고 있었다. 거의 같은 숫자의 인구가 러시아인들의 행동을 전해 듣고는 겁을 먹고 서쪽으로 도망갔다. 남아 있는 독일인 인구를 추방하려는 계획은 19455월 이전에도 이미 명확했다.

연합국 지도자들도 이 정책을 승인했다. 이에 더해 스탈린은 폴란드 공산주의자들에게 독일인들이 스스로 도망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처칠도 194412월 영국 하원에서 가능하다면 추방도 하나의 방법으로, 가장 만족스럽고 오래 지속될 방법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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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국들이 19452월 얄타 회담에서 결정한 독일 인구의 대규모 축출과 강제 이주에 동반된 잔혹 행위는 폴란드인의 보복에 따른 결과만은 아니었다. 폴란드와 소련 국경지대, 지금은 우크라이나 영토 일부가 된 동쪽에서부터 200만 명의 폴란드인 회의 Congress Poles’(1815년 빈 회의 결과, 제정 러시아 내에 독자적인 정치 체제와 군사력을 갖추게 된 왕국 출신의 폴란드인 집단-옮긴이) 인구가 독일인들이 깨끗이 청소된 실레지아와 그 인근 지역으로 이주했다. 그들은 대개 신사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독일인의 집과 직업, 재산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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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독일인을 내세운 폭력 사례 중 최악은 의심할 여지없이 무장조직이 저질렀다. 그들은 강제수용소를 운영하고 죄수들을 고문할 뿐 아니라 무작위로 죽였으며, 때로 아무 이유 없이 죄수들을 공개 비판대에 세웠다. 무장조직은 급조되다 보니 대부분 비도덕적인 인사들을 모집했는데, 거기에는 나이 어린 범죄자들도 대거 포함되었다. 가장 악명 높았던 살인자는 람스도르프 수용소의 사령관 세자로 짐보르스키로, 겨우 18세였다. 어린이 800명을 포함해 6000명 이상이 그의 지휘 아래 살해되었다.


가장 악랄한 무장조직 인사 중 일부는 독일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었다. 확실히 복수가 하나의 중요한 이유였다. 하지만 역시나 피에 대한 욕망은 물질적이면서 계급적인 질투로 인해 더욱 타올랐다. 교사나 교수, 사업가 그리고 기타 상위 부르주아 계급이 인기 있는 목표물이었다. 독일인 변절자로부터 정보를 받은 폴란드 경비대는 특히 고위 계층 죄수들을 고문할 때 즐거워했다. 1945년 여름은 계급적으로나 인종적인 측면에서 복수의 시기였다. 그리고 역시 상층부가 복수를 장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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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에서는) 적과의 협력 및 보복 문제가 다소 복잡해졌다. 전쟁 초기에는 동남아인들 사이에서 일본이 선전한 아시아인을 위한 아시아논리가 상당히 인기 있었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같은 활동가들에게 일본과의 협력은 네덜란드 식민주의를 제거할 수 있는 최상의 방안이었다. 하지만 네덜란드인들 눈에 수카르노는 적의 협력자였다. 네덜란드 입장에서 전후 인도네시아 독립을 수카르노와 협상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네덜란드는 수카르노를 반역자로 처벌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1945년 아시아인들은 복수의 분노로 타오르고 있었지만, 이 분노가 항상 유럽 식민주의자들에게 직접 향한 것은 아니었다. 복수는 종종 간접적이었고, 일본 점령 이전의 다양한 부역자들을 겨냥하고 있었다. ‘아시아의 유대인으로 불리는 동남아시아의 중국인들은 일본 때문에 가장 큰 타격을 받았다. 예를 들면 말레이시아에서 중국인을 신뢰 하지 않은 일본은 말레이인들을 더 선호했다. 일본은 피식민국 사람들이 갖는 수치심과 열등감을 교묘히 악용해서 반서구, 반중 反中 감정을 자극했다.


전시에 말레이 반도의 반일 저항 세력 상당수는 중국에서 왔다. 레지스탕스는 중국 공산당과 당시 소수파에게 매력적이었던 공산주의의 국제주의에 고무 받았고, 말레이공산당 Malayan Communist Party 이 주도했다. 말레이공산당이 특별히 반말레이인 것은 아니지만 당원 대부분이 중국계였다. 전후에 반일 군대는 일본인에게 부역한 지역민에게 신속한 보복을 개시했는데. 보복 대상 대부분이 인도계나 말레이계였다. 반일 투쟁에서 반일 말레이인민군과 긴밀하게 공조한 영국 식민 정부가 10월 중국인들에게 말레이계와 동등한 시민권을 인정하자 말레이계는 조국에 대한 지배력을 잃을까 우려했다. 이는 오늘날까지도 말레이계 정치인들을 사로잡는 두려움이다.

(161)

 


코사크인의 사례는 더 복잡하다. 러시아 내전에 참전했던 선입 장교들은 목하 육십 대였고, 이들은 나치의 소련 침공이 과거의 코사크 영토를 다시 찾을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 땅에서 18세기 용맹한 전사의 위상을 떨쳤던 조부 세대처럼 살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독일은 독일 편에서 싸운다면 이를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 전쟁 막바지에 독인은 인본이 동남아에서 그랬던 것처럼 전투를 독려하기 위해 협력한 인사들에게 영토를 나눠췄는데, 그건 마지막 순간의 뇌물이었다. 코사크인들도 이탈리아 알프스 지방에 코사키아를 건설할 수 있다는 약속을 받았다.

(204)

 


실레지아와 프로이센, 주데텐란트에서 독일인들에게 가해진 행동은 독일이 다른 민족, 특히 유대인에게 가한 행동을 비춰주는 기괴한 거울이다. 이 지역의 독일인들은 공공장소 접근이 금지됐고, N(폴란드어 ‘Niemice’, 즉 독인인)이 새겨진 표식을 달아야 했으며 달걀, 과일, 우유, 치즈도 살 수 없었고 폴란드인과 결혼할 수도 없었다. 강제 송환 과정에서 독일인이 얼마나 죽었는지는 여전히 논란거리다. 일부 독일인 역사가들은 100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고 주장한다. 그 숫자의 절반 정도라는 반론도 있다. 무엇이든 간에 충분히 나쁘다. 그럼에도 모든 독일인을 말살하겠다는 체계적인 계획은 없었다.


소련 군대와 폴란드인, 체코인들에게 마구잡이로 성폭행 대상이 됐던 독일 여성들은 스스로를 독일어로 프라이빌트’, 쉬운 먹잇감이라고 칭했다. 어떤 권리도 없이 고향을 잃은 사람들이 쉽게 목표물이 되었다. 실레지아는 1945년 여름 야생의 서부로 알려졌다. 독일령에서는 단치히로 불렸던 폴란드 그단스크의 행정관은 이를 골드러시라고 불렀다.


1945년의 인종청소는 강제 송환이나 노예화보다 훨씬 더 오래 지속되었다. 1945년 체계적으로 파괴된 것은 많은 사람이 함께 누려왔던 독일 문화였다.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옛 영토이자 제국의 위대한 도시였던 브로츠와프, 단치히, 쾨니히스베르크, 렘베르크, 브륀, 체르노비츠, 프라하 등은 독일어를 모국어로 하는 유대인들이 한때 발전시켰던 독일 고급문화의 중심지였다. 이 도시들은 이제 탈독일화되어야 했다. 거리와 상점 간판이 다시 걸렸고, 장소도 이름이 바뀌었고, 독일 도서관은 약탈당했으며, 기념비는 철거되었다. 교회나 공공건물에 있던 매우 오래된 비문도 지워졌다. 독일어 자체가 제거돼야 할 대상이었다.

(216)

 


전쟁이나 점령, 독재는 국가에 물질적 피해만 입히는 것이 아니다.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정치적 정당성도 사라진다. 시민의식은 냉소주의로 잠식된다. 폭정 아래서도 가장 잘사는 사람들은 평판이 가장 나쁘고 가장 쉽게 부패한다. 반면 정당성을 지키던 사람들은 과도기에 이어 독재가 지속되면 극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2차 세계대전에서 이 같은 대표 사례가 바로 레지스탕스에 적극 가담한 극소수의 사람들이었다.


레지스탕스는 전후에 묘하게 낭만화되었지만 사실 나치 독일과 일본제국의 군사적 패배에 기여한 역할은 미미했다. 오히려 모반을 꾀하는 저항활동은 무고한 민간인들에 대한 처절한 보복으로 이어지는 심각한 문제를 야기했다.

(229)

 

레지스탕스가 진짜 중요해진 시기는 전쟁이 끝난 뒤였다. 잘못된 것에 결연히 맞섰던 레지스탕스 영웅들은 살인 정권에 협력하고 묵인으로 일관했던 사회에 하나의 영웅담을 제공해주었다. 민주주의 재건은 이런 영웅담에 크게 의존했다.


중부 유럽과 동유럽에서 레지스탕스의 역할은 좀 더 복잡했다. 이들이 저항해야 하는 전제주의가 두 개였기 때문이다. 스탈린을 주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종종 독일과 협력했다.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유명한 레지스탕스 영웅은 우크라이나민족주의연맹 Organization of Ukrainian Nationalists의 지도자 스테판 반데라였다. 우크라이나 동부의 러시아정교회 인사들은 반데라를 1941년 나치를 도운 파시스트로 간주했다. 반데라와 민족주의자들은 1944년 폴란드인 4만 명을 살해한 책임이 있다. 독일뿐 아니라 소련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던 반데라는 당시 나치 강제수용소에 있었다. 1959년 독일 뮌헨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반데라는 소련 국가보안위원회 KGB 요원에게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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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같은 나라에서는 영웅 신화가 특히 중요했다. 프랑스 관료제와 경찰력, 사법부, 산업계 인사 그리고 심지어 예술가와 작가들조차도 비시 협력 체제와 매우 깊숙이 타협했기 때문이다. 1940618일 런던에서 라디오 방송으로 저항활동을 시작했던 드골 장군은 당시 프랑스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전쟁 초기 2년간 프랑스에서는 레지스탕스 활동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드골은 1944년 연합군이 노르망디에서 독일군을 제압한 뒤 파리를 해방시켰을 때 프랑스 군대의 선두에서 제복을 입고 자부심에 차서 진군했으며, 논쟁의 여지없는 국가의 상징적 인물로 프랑스에 복귀했다. 실제로 드골은 행진 과정에서 나치 출신 저격수의 총에 맞았지만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누구도 상처 낼 수 없는 언터처블로 보였던 이 인사는 194510월 전후 첫 선거전까지 임시정부를 구성했는데, 임시정부에는 비시 정권 가담자 상당수와 주로 공산주의자들이 이끄는 레지스탕스 인사들이 묘하게 섞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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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는 나치당 같은 정파도, 히틀러 같은 인물도.1933년 독일에서 일어난 쿠데타 같은 사건도 없었기 때문에 연합군 당국은 일본에서 군국주의’ ‘초국가주의’ ‘봉건제를 뿌리 뽑아야 할 독초로 보았다. ‘군국주의봉건제’ ‘프로이센주의등을 마치 몸의 암세포처럼 도려낼 수 있다는 생각은 보수주의자보다 좌파 연합국 관료들에게서 더 폭넓은 지지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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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주도한 전쟁에서 주된 역할을 한 조직이 있다면, 그건 관료제다. 반대자들을 감시한 내무성과 전시 산업계획을 지배했던 상공성(전시에 군수성에 흡수됐다)이었다. 재무성도 정복한 아시아 국가들로부터 자원을 착취하는 큰손이었다.


일본의 상황이 (독일보다) 다소 단순했던 것은 연합국 강대국 중 미국만이 비무장화민주화를 책임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실제적인 일본 통치는 일본 내각의 몫이었고, 일본 내각은 관료제에 스스로 개혁을 감행하라고 지시했다. 이들 조치는 매우 형식적이었다. 미국 뉴딜주의자들에게는 훨씬 더 심각하게 여겨지는 또 다른 목표물이 있었다. “미래 일본 경제를 오로지 평화적 목적으로만 끌고 가선 안 된다고 생각하는 개인들은 제거되어야 했으며, “일본 무역과 산업에서 상당한 통제권을 행사하는 기업과 은행의 연합은 해체되어야만 했다. 이 연합, 즉 재벌이 경제 분야의 주된 전쟁 유발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기업가들은 쫓겨났고 재벌 기업은 갈가리 찢겼다.


맥아더 군정 내 뉴딜주의자들에게는 이것이 가장 자랑스러운 성과였다. 재벌 해체와 토지개혁은 일본 농촌에 뿌리박힌 봉건제의 척추뼈를 부러뜨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많은 일본 좌파가 미군정의 정책에 크게 고무되었다. 점령 기간 초기 몇 년간은 워싱턴이 좌파의 가장 친한 친구로 보였다. 여성 참정권과 파업권, 노사 간 단체교섭은 미국인들이 밀어붙인 위대한 혁신이었고, 일본인들도 기꺼이 받아들였다.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이 노동조합과 고등교육 분야에서 상당한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한 가지는 확실하다. 재벌은 추적한 반면, 관료제는 다소간 내버려뒀다는 점에서 미군정이 일본의 전시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했는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하지만 이건 단순한 무지와 오해 때문이 아니었다. 새로운 일본 건설을 지원하고자 했던 이상주의적인 미국인 입안 설계자들과, 평화적 목적이기는 했지만 전시의 경제 통제권을 그대로 유지하고 싶어 했던 일본 개혁 관료들사이에는 합일점이 있었다.


미군정이 아무것도 안 한 것은 아니었다. 1948년에 90만여 명의 직업 경력을 재검토했고. 150만 건 이상의 설문지를 검토했다. 내무성은 해체되었고, 무장 병력도 해산되었으며, 관료 1800명이 숙청되었다. 하지만 대부분(70퍼센트)은 전직 경찰이었고, 내무성 출신 관료들이었다. 경제 관료들은 거의 손대지 않았다. 군수성 출신은 단지 42명만 해고되었고, 재무성은 겨우 9명 해고했다. 만주국 노예노동 책임자이면서 군수성을 운영했고, 또 대동아공영권으로 알려진 일본 제국주의 기업의 설립 계획에 참여했던 인사는 체포되었지만, 결코 전범으로 정식 기소되지는 않았다. 그는 기시 노부스케였다. 그의 생애는 감옥에서 풀려난 뒤 전성기를 맞았고, 나중에는 일본 총리가 되었다.

(251)

 


일본 침략 당시 필리핀은 식민지도 아닌, 국가도 아닌 그 중간 어딘가에 있었다. 일본은 혼마 마사하루 장군이 언급한 대로, 필리핀을 미국의 억압적 지배로부터 해방시켜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실은 더 야만적 형태로 재식민지화했다" 1943년 조제 라우렐 필리핀 대통령이 독립 공화국을 공식 선언했지만 일본이 여전히 완전한 지배권을 휘두르고 있었다. 모든 필리핀 정부 관료 뒤에는 일본인 고문이 있었고, 그 뒤에는 일본 군대와 무서운 헌병대가 있었다. 요약하면 필리핀 공화국은 가짜였다.


하지만 일본에 저항하는 강력한 레지스탕스 운동도 있었다. 반일 인민군을 의미하는 후크발라합 Hukbalahap은 일본인뿐 아니라 필리핀 대지주 가문을 적으로 삼고 있는 맨발의 농부 혁명가들이었다. 설탕과 코코넛 농장으로 부자가 된 지주들은 민주주의자로 위장하고 봉건 과두제로 나라를 통치했다. 가장 유명한 후크발라합 지도자는 소작농의 아들인 루이스 타루크였다. 또 다른 기상천외한 후크발라합은 펠리파 쿨랄라라는 거대한 제구의 여성이었다. 그녀의 가명은 다양다양 Dayang Dayang이었다. 일본인조차도 다양다양을 두려워했다.


괴뢰 정부의 조제 라우렐과 그의 지지자들인 마누엘 로하스, 베니그노 아키노 등은 후크발라합이 전복하고자 했던 엘리트 지주 가문 출신들이었다. 일본에 복무했다는 점과, 반미 감정과 범아시아주의자 명분을 강화했다는 점에서 이들도 확실히 협력자였다. 하지만 다른 서구 식민지의 아시아 민족주의 협력자들처럼 협력 동기는 복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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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오카무라 야스지 장군 산하 군대는 화학무기로 셀 수 없이 많은 민간인을 살해했다. 1942년 오카무라의 초토화 정책은 중국인들에게는 삼광작전 三光作戰’(모두 죽이고, 모두 불사르고, 모두 약탈하라)으로 알려졌는데, 이 정책으로 200만 명 이상이 죽었다. 15~60세의 모든 남자가 반일 행위를 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일본은 조직적으로 젊은 여성들을 주로 한국에서 납치해 일본군 매춘굴에서 성노예로 일하게 했는데, 이 역시 오카무라가 제안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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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내전의 핵심은 만주였다. 일본인이 건설하고 운영해온 만주의 중공업과 핵심 광산을 먼저 확보하면 거의 난공불락의 위상을 점할 수 있을 것이었다. 이미 설명한 것처럼 소련이 먼저 이곳에 도착하여 소련으로 가져갈 수 있는 모든 공업과 재정 자산을 약탈했다. 팔로군八路軍의 중국 공산주의자들이 점점 더 만주 지역으로 흘러 들어가기 시작했고, 동조적인 소련 사령관들의 도움으로 일부 지역에서는 지역 행정부를 접수했다. 팔로군은 소련과의 긴장관계는 제쳐놓더라도 괴뢰국 군대 출신의 사악한 갱들뿐 아니라 지역의 지하 게릴라 세력도 처리해야 했다. 이 게릴라들 일부는 소련에 붙어 있었고, 일부는 지역 군벌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또 일부는 국민당소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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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가을. 안둥(단둥)은 만주 출신 중국인뿐 아니라 한국인과 러시아인, 또 주둔 군인과 민간인만이 아니라 괴뢰 정부의 다른 지역에서 피난 온 7만 명의 일본인으로 가득 찬, 일종의 동북아시아의 카사블랑카 같은 국제도시였다. 일본인 민간 지도자들은 일본 여성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해 카바레’, 사실상 사창가를 세우기로 결정했다. 여성들은 일본을 위해 스스로 몸을 희생하라고 요구받았다. 그들은 일본의 여성판 가미가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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