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877

루이스 세풀베다, 자신의 이름을 지킨 개 이야기

나는 조용히 눈을 감는다. 배도 고프고, 목도 마르다. 그래도 나는 끄떡없다. 그리고 저 사람들에게 내가 개 이상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전혀 상관없다. 기껏해야 저들은 내게 채찍질밖에 안 할 테니까 말이다. 내가 잃어버린 것의 향기가 저 어둠으로부터 희미하게 전해지고 있는 지금, 그런 것 따위에 신경 쓰고 싶지 않다. (15쪽) 반딧불이 쿠데마유의 초록 불빛이 꼭 감고 있는 내 눈가를 촉촉하게 만든다. "내가 모든 걸 잃어버린 것은 바로 그날이야." 나는 눈으로 반딧불이 쿠데마유에게 말한다. 그러자 반딧불이가 초록 불빛으로 내게 대답한다. "그날 너만 모든 걸 잃어버린 것은 아니야." (55쪽) 그 작은 양털 실오라기에서 마른 장작, 곡물 가루, 우유, 꿀, 그리고 내가 잃어버린 모든 것의 냄새가 난..

딸기네 책방 2017.04.17

뉴 셸터스: 난민을 위한 건축적 제안들

팜플렛같은 소책자여서 가뿐한 마음으로 펼쳐들었는데, 뜻밖에 알차고 재미나다. 은 건축가들과 여러 장르의 예술가, 연구자들이 난민 문제를 놓고 벌인 전시회와 포럼 같은 작업들을 정리해 소개한 책이다. 유기견 문제에서 홍세화와 서경식의 대담까지, 얇은 책자에 여러 내용을 묶었다. 중구난방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사실은 난민 문제의 본질이다. 우리가 '남의 일' 혹은 '보기도 싫고 말하기도 실은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에 공감하고 관심을 갖는 것에서부터 세계시민으로서의 공존이 시작된다는 것, 인권과 평등과 공존은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을 되짚어보고 서로를 위해 고민하면서 이뤄낼 수 있는 가치라는 것. 무엇보다 이런 작업을 하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반갑다. 난민 문제에 대한 전시회가 열리..

딸기네 책방 2017.04.03

아프리카 아이덴티티

아프리카 아이덴티티앤드류 심슨 엮음. 김현권, 김학수 옮김. 지식의날개 읽는 데에도, 스크랩하는 데에도 꽤 오래 걸렸다. 방통대 출판문화원에서 나온 책인데 국내에서 접하기 힘든 아프리카 언어에 대한 자료다. 오래 전 재미있게 읽은 로버트 게스트의 도 이 브랜드에서 나왔다. 이것 말고도 아프리카에 대한 책 두어권을 더 내놓은 것 같으니 찾아봐야겠다. 북아프리카의 이집트와 모로코도 포함해, 아프리카 대륙의 여러 지역에서 대표성을 띈다고 할 수 있는 나라들의 언어 상황을 총괄했다. 각기 쓴 사람이 달라, 나라별 챕터마다 서술 양식은 약간 다르다. 모로코의 경우 '언어와 젠더'에 초점을 맞출 것처럼 시작하더니 의외로 관련된 내용이 거의 없어서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그 외에는 각국의 언어 사정을 충실히 설명하고 ..

딸기네 책방 2017.03.29

동방의 항구들

"우리 집안은 오랫동안 동방을 통치했소." 이런 말로 시작되는 책. 소설을 읽는 것이 오랜만이고, 이렇게 매혹적인 소설을 만난 것도 오랜만이다. 저 구절을 읽는 순간 그대로 책장을 덮을 수가 없었다. 아민 말루프의 책은 을 통해 한 번 접한 적 있지만 어떤 작가인지는 잘 몰랐다. 이 책, 은 처량하고 흥미롭다. 저항과 굴종과 열정과 사랑과 이별과 분열과 겸양과 위선과 회한. 책은 그저 한 노인의 회고담이자 인생과 사랑 이야기일 뿐이지만 이것은 쇠락한 제국의 뒷이야기이자 '중동 그 자체'의 이야기다. 병적이고 암울한, 그러나 매혹적인. "돌연 그녀가 다른 이야기를, 다른 장소들을 말하기 시작했소. 거주지나 이주지가 아닌 암흑의 장소였소. 우리의 여행은 끝이 났소. 이제 길은 도시들을 연결하지 않았고, 기차..

딸기네 책방 2017.03.26

에메 세제르, '나는 흑인이다 나는 흑인으로 남을 것이다'

56년 동안 시장직을 수행한 그는 나를 오래된 시청 건물에 있는 자기 사무실에서 맞았다. 처음 만난 이 사람은 아주 정중했다. 또한 주의 깊은 반면 데면데면하기도 했고, 소심한 반면 친근하기도 했으며, 매사에 관심을 가진 반면 의심이 많기도 했다. 자기와의 대담이 가질 수 있는 의미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자신의 저작들이 예전히 반향을 일으킬 수 있다는 점을 믿고 싶지 않아 했다. 또한 런던에 있는 한 대학에서 내가 가르치고 있는 학생들이 그의 저작들, 특히 과 을 연구하고 인용한다는 사실을 알고 놀라워했다. 프랑수아즈 베르제라는 포스트식민주의 학자가 에메 세제르를 만났다. (변광배·김용석 옮김. 그린비)는 두 사람의 대화를 담은 대담집이다. 책의 분량은 매우 짧은 데다가, 뒷부분 절반..

딸기네 책방 2017.03.19

로널드 드워킨, 민주주의는 가능한가

민주주의는 가능한가로널드 드워킨. 홍한별 옮김. 박상훈 해제. 문학과지성사 아이러니다. 조지 W 부시가 재선될 무렵에 나온 책이다. 모든 이슈에서 진영논리로 갈라진 미국을 바라보며, 양 진영 간의 '대화'가 없으면 민주주의도 불가능함을 설파한다. 그리고 그 대화의 기본이 되는 전제들을 조목조목 짚는다. 동성애, 세금, 낙태, 종교 등 여러 '삶의 가치관'을 놓고 충돌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과연 이런 학자의 말을 누가 듣겠냐마는. 애당초 책은 저자가 '공화당을 지지하는 막무가내 보수파'들의 논점을 하나씩 깨뜨리는 식으로 돼 있다. 한쪽은 옳고 한쪽은 그른데, 이쪽이 옳다 생각하는 사람이 저쪽을 향해 '그러니까 내 말을 들어야 민주주의로 갈 수 있어' 하면서 설득하는 꼴이다. 그러니 그의 말이 아무리 근거가 ..

딸기네 책방 2017.02.12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죽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죽다니컬러스 에번스. 김기혁·호정은 옮김. 글항아리. 우비크어는 독자성이 강하기로 유명한 캅카스 북서부 지역에서 사용되는 언어 중 하나다. 계속된 무력 충돌에서 패배하면서 우비크인들은 터키로 집단 망명했고, 우비크족은 점점 우비크어 대신 터키어를 쓰거나 체르케스어Circassian와 아바자어Abaza 등 망명하여 정착한 캅카스 지역의 언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1930년, 흩어져 살고 있는 우비크족 원로들이 저녁마다 터키 삼순Samsun에 모였다. 기도 시간에 맞춰 말을 달려 와서는, 마당에서 저녁을 먹고 잠을자고 새벽이 되기 전에 자기네 땅으로 돌아갔다. 원로들이 저녁마다 그곳에 온 것은 프랑스의 캅카스어 언어학자 뒤메질George Dumézil과 함께 작업을 하기 위해서였다. 몇 ..

딸기네 책방 2017.02.12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다" 일본 젊은이들의 외침

일본에는 '데모'가 별로 없다. 사람들은 조용하고, 정치에 무관심하며, 부당한 일이 벌어져도 나서서 항의하길 꺼리고, '튀는 것'을 극도로 겁내고, 순응하며 조용히 살아간다. 통상 일본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이고, 어느 정도는 사실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1960년대 전공투로 상징되는 격렬한 사회변혁 운동이 분명 있었다. 적군파같은 급진주의자들까지 있었다. 일본엔 예나 지금이나 '공산당'이 있다. 정치적 스펙트럼에서 극좌파가 허용된다는 것뿐 아니라, 좀 다른 세상을 만들어보려는 풀뿌리 흐름, 비판적 지식인들의 잔잔하지만 울림 있는 목소리는 한국보다 컸으면 컸지 작지 않다. 마루야마 마사오같은 인물이 공개적으로 전쟁을 비판했던 것이나 니시카와 나가오처럼 민족주의를 끊임없이 경계하고 비판을 가하는 사람..

딸기네 책방 2017.02.08

2005년의 '문학의 해' 결심을 되돌아 보니

4권 변신.시골의사 6권 허클베리 핀의 모험 7권 암흑의 핵심 8권 토니오 크뢰거/트리스탄 11권 인간의 굴레에서 1 12권 인간의 굴레에서 2 13권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18권 고리오 영감 19권 파리대왕 21권 파우스트 1 22권 파우스트 2 25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26권 이피게니에/스텔라 27권 다섯째 아이 29권 농담 31권 아메리칸 32권 양철북 1 33권 양철북 2 36권 마담 보바리 37권 거미여인의 키스 40권 독일어 시간 1 41권 독일어 시간 2 42권 감옥에서 보낸 편지 43권 고도를 기다리며 45권 젊은 예술가의 초상 46권 카탈로니아 찬가 47권 호밀밭의 파수꾼 48권 파르마의 수도원 1 49권 파르마의 수도원 2 51권 황제를 위하여 1 52권 황제를 위하여 2..

칼 폴라니, 다호메이 왕국과 노예무역

다호메이 왕국과 노예무역칼 폴라니. 홍기빈 옮김. 길. 연말에 잼나게 읽은 책. 모두모두에게 추천하고픈 책이냐...고 묻는다면 사실 잘 모르겠다. 나는 서아프리카에 관심이 쪼마만큼 있으니 아무래도 더 재미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다호메이 지역의 구체적인 역사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더라도 이런 식의 지역학 연구, 이런 식의 비교경제학 방법론에 관심을 갖고 본다면 꽤 재미있을 수 있다. 하지만 낯설어도 너무 낯선 서아프리카 어느 구석탱이의 지나간 옛 자취라는 점이 아무래도 걸린다. 왜 지금 이 책을 읽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지금 우리가 아는 자본주의가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역사 속에는 다른 화폐, 다른 시장, 다른 체제도 많았다는 걸 알기 위해서'라는 앙상한 대답을 내놓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앙상하..

딸기네 책방 2017.0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