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국경 없는 세계에서 지역의 힘

딸기21 2017. 4. 30.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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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에서 나온 '로컬리티 번역총서' 중 하나인 <국경 없는 세계에서 지역의 힘>(헬무트 베르킹 엮음, 조관연 하용삼 안영철 옮김. 에코리브르)이라는 책을 읽었다. 독일에서 나온 여러 논문들을 엮었는데 논문들이 쓰여진 시기가 대개 2000년대 초중반이라, 언급된 통계나 자료들이 거의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에 머물러 있다. 글에 따라 질적 차이가 많이 난다. 어떤 글은 대체 뭘 말하려고 한 것인지, 왜 여기에 엮어 넣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세 사람이 번역을 했는데 누가 어떤 부분을 맡았는지는 모르지만 뒷부분 몇몇 글은 번역이 개판이라 더더욱 읽기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미난 주제들이 적지 않았다. 주로 세계화 속에서 '로컬'이라는 것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특히 국경의 재부상이라는 측면에 눈길이 갔다. 유럽이 국경 통제를 강화하고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가 멕시코 쪽에 장벽을 세우겠다 하는 시점이 아닌가. 슈테판 카우프만의 '글로벌 네트워크 시대의 국경 체제'는 밑줄 쫙쫙 그으며 열심히 읽었다.


"(국경을 통제하기 위한) 노력이 9.11 이후에야 시작된 것은 아니다. 미국-멕시코 국경의 대규모 군비 확장은 이미 20년 저부터 시작되었으며 EU-외곽 경계의 강화는 적어도 1990년대 이후부터 지속된 프로젝트다. 현대 사회의 정체성을 네트워크의 은유를 통해 묘사하는 것이 적절하다 하더라도, 국경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영토에 대한 동인도 사라지지 않는다."(45쪽)


여기서 카우프만은 세계화의 특징으로 불리는 바로 그 '네트워크'가 국경 통제의 한 방식으로 흡수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선형의 국경 설정은 네트워크 형태의 국경 설정으로 재구성된다. 재구성의 주요 효과는 국경의 중복된 기능을 융합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외부의 적으로부터 국가의 물리적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시민 체제를 형성하는 공간에 보호 담장을 둘러싸는 일이다. 


그러한 통제의 변화를 카우프만은 네 단계로 구분했다. 1) 새로운 위협의 시나리오는 더 이상 적대국가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초국적 행위자에 의한 위협을 대상으로 삼으며 2) 국경은 외부에 대한 군사적 방어선으로서 외곽으로 이동할뿐 아니라 억류소와 수용소를 지닌 '국경 지대'로 확장된다 3) 국경선 자체는 준군사지역으로 압축되고, 국경 수호는 국경 통과에 대한 통제에서 국경선 전체에 대한 지속적 감시로 바뀐다. 4) 동시에 국경은 내부로 되돌아온다. 국경 경찰의 통제와 감시 영역은 영토 내에서 전략적으로 나누어 배치되고, 감시 및 보안기술을 갖춘 경찰과 사적 기관의 네트워크와 점점 더 강하게 결합한다(46쪽)


그에 따르면 이미 미국에선 로널드 레이건 정부 때부터 국가안보의 적을 마약거래상들에게로 돌렸고, 유럽에선 1980년대부터 난민 원조를 '악마화'하는 작업이 진행됐다. '위협(적)'이 변화하는 것과 함께, 전통적인 전선이나 국경 즉 군사적 방어선도 멋대로 이동해갈 수 있다. "독일 국방장관 페터 슈트루크는 2002년 12월 독일의 안보는 힌수쿠시 산맥에서부터 방어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독일 군대의 아프가니스탄 주둔을 정당화"(52쪽)했듯이. 


이렇게 해서 '예방적 공격'은 전쟁 용어가 아닌 일상의 용어가 된다. 국경 방어는 관할지역선을 방어하는 것이 아니라 네트워크 형태로 흩어져 있는 안보 진지를 구축하는 것이 된다. "이런 이동 가능한 방어 네트워크는 군사와 치안 기능을 구분할 수 없도록 만든다."(53쪽) 군대의 경찰화가 진행되는 것이다.


군대의 경찰화와 더불어 국경통제는 양면성을 띠게 된다. "적의 개념은 동일한 힘을 가진 상대에서 공공의 범죄자로 전환된다. 이런 적은 교전에 의거한 국제적 관습을 따르지 않는다. 적이 해외 출신 범죄자인 한 그의 행동은 내국법이 아니라 지역 국가적인, 그리고 국가 간 계약에 따르는 법적 결합에 의해 처리된다"(53쪽). 관타나모 미군 수용소에 수감된 '테러범 아닌 테러용의자'들, 이라크 바그다드 아부그라이브 수용소에서 벌어진 인권침해 같은 것들이 그런 예다. 


안팎의 적을 통제하기 위한 '내부의 국경통제'와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것은 '범지구적인 집단 안보 시스템과의 결합'이다. "포괄적 안보 개념은 군대의 경찰화를 초래하고, 군사활동을 치안 작업으로 전환하며 국제화한다."(54쪽) 때론 힘을 이용해서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에 국경통제의 책임을 떠넘기기도 한다. 미국이 NAFTA를 이용해 멕시코에 마약갱들과의 전쟁을 강요한 것, EU가 동유럽 국가들에게 난민들을 통제하라고 하는 것 등이 그런 예다. 책에서 언급된 것은 유럽이 개발원조를 난민 소환협정과 연결시키는 바람에 옛 유고연방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가 자유로운 출입국 정책을 포기해야 했던 것, 알바니아가 보트피플을 막기 위해 해안을 통제해야 했던 것같은 사례다. 하지만 이런 일은 과거에 끝난 것이 아니며, 지금도 EU는 터키와 비슷한 '원조-난민통제 패키지' 계약을 하고 있다. 비인도적이며 불안정한 계약을.


그리하여 수용소가 '국경의 지형학'에 등장하게 된다. "공항의 추방 대기실부터 대도시의 기숙사, 그리고 국경 또는 영내 외곽 지역에 세운 집단 수용소 등"은 "질서유지 정책상의 대응이며 무엇보다 국경 치안상의 대응"이다. "수용소는 항상 비관할 지역의 일부이고 서구 민주주의의 기본권을 제한적으로만 인정받는 영역"이다. "수용 절차는 법적 조치에서 치안수단으로 바뀌었고, 피난처는 감금과 훈육 그리고 강화된 통제의 공간으로 변화"(57쪽)했다. 합법적 구치소로 기능하는 수용소가 확산하고 있는데, 중심부에서 "거리가 멀어질수록 수용자는 그만큼 더 권리를 상실하고 경찰의 임의적 처분에 맡겨진다."(58쪽)


일상화되고 퍼져가는 국경 통제는 '국경의 군사화를 목적으로 하는 기술공학적 프로젝트'이기도 하다. 이 부분, 좀 더 면밀히, 앞으로 두고두고 분석돼야 할 문제인 것 같다. 고전적인 군산복합체의 영역을 넘어서서 IT기술이 국경통제와 국가 안보의 기술이 되어가고 있는 것. "1990년대 이래로 국경 감시의 기술적 진보 속에서 목적지향적인 정치적 전략"이 현실이 되면서, "한편으로는 민간에서뿐만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사용할 수 있는 이중 용도의 기술 공학을 강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군사 기술의 고아범위한 영역을 경찰 투입을 위해 이용가능하도록 만든 것"(63쪽)이다. 


자, 이제 국경은 안팎이 없다. 무기와 무기 아닌 것의 경계도 허물어진다. "군사적 기능의 경찰화, 그리고 국경 경찰의 군사화를 내용으로 하는 제도의 융합은 공적인 생활영역과 사적인 생활영역의 이질적 혼합을 통한 국경 통제의 네트워킹 속에서 계속된다." 특정 검문소만이 감시 대상이 아니라, 이동하는 사람의 교통형태 자체가 감시의 대상이 된다. "통행이 있는 곳은 어디나 감시하고 통제하며 결국은 장악해버리는 경향"(65쪽)이 생겨난다. 국경 통제는 광범위한 '모니터링'이 돼 버린다. '감시사회'와 국가안보가 맞닿는 것이다. 공항처럼 극도로 통제되고 감시받는 공간만이 아니라,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이 감시와 모니터링의 대상이 된다. "그룹 지어 함께 있는 것, 플라스틱 가방을 내려놓는 것, 철도를 사진 촬영하는 것 등등이 평범한가, 아니면 의심스러운가?" 이에 대한 판단은 명백하게 관찰자의 몫이다. 즉 감시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에게 달려 있다. 그래서 국가안보는 "사회에서 소외된 아웃사이더들에 대한 감독을 강화하고 더 나아가 공공연히 이들에게 낙인을 찍는"(67쪽) 결과를 가져온다. 이젠 너무 많이 봐서 식상해질 정도가 돼버린 현상이지만, 그럼에도 끊임없이 이런 지적을 해야 한다는 것.


그런 낙인이 가져오는 또 다른 효과는 '특정 지역에서, 특정 행동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정체성 규정'을 강화한다는 것이다. 공항에서 구모씨가 사진을 찍은 게 문제가 아니라, 구모씨의 인종과 출신지와 종교가 문제의 근원이 된다. 생물학적 검증 기술이 나날이 발전하고 있는 현실에서 이제는 나의 행위를 넘어 나의 신분증과 주소지와 생물학적 특성이 안보 기준에 걸리느냐 마느냐를 결정짓는다. 생체공학 기술에 더해 데이터 수집과 분석기술이 결합되면? "데이터뱅크는 국가적, 국제적으로 나뉘어 관세청, 이민국, 비자 부서, 영사관, 사적인 운송회사, 국가 혹은 국제 경찰기구의 정보 속으로 점점 더 많이 흘러들어"갈 뿐 아니라 "흔적, 즉 각 개인에 의해 통신 및 정보기술 네트워크 세상에 남겨진 흔적의 광범위한 결합"(71쪽)까지 모니터링의 대상이 된다. 글쓴이가 재인용한대로, '혐의 문화'가 도처에서 우리를 지배하게 된다.


(여담... 정말 오랜만에 책을 펼치니 잘 읽히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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