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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아이덴티티

딸기21 2017. 3. 29.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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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아이덴티티

앤드류 심슨 엮음. 김현권, 김학수 옮김. 지식의날개


읽는 데에도, 스크랩하는 데에도 꽤 오래 걸렸다. 방통대 출판문화원에서 나온 책인데 국내에서 접하기 힘든 아프리카 언어에 대한 자료다. 오래 전 재미있게 읽은 로버트 게스트의 <아프리카, 무지개와 뱀파이어의 땅>도 이 브랜드에서 나왔다. 이것 말고도 아프리카에 대한 책 두어권을 더 내놓은 것 같으니 찾아봐야겠다.



북아프리카의 이집트와 모로코도 포함해, 아프리카 대륙의 여러 지역에서 대표성을 띈다고 할 수 있는 나라들의 언어 상황을 총괄했다. 각기 쓴 사람이 달라, 나라별 챕터마다 서술 양식은 약간 다르다. 모로코의 경우 '언어와 젠더'에 초점을 맞출 것처럼 시작하더니 의외로 관련된 내용이 거의 없어서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그 외에는 각국의 언어 사정을 충실히 설명하고 있어서 전체적으로 재미있었고 참고가 많이 됐다.


언급된 나라들은 이집트, 모로코, 수단, 세네갈, 말리, 시에라리온, 가나, 코트디부아르, 나이지리아, 카메룬, 콩고민주공화국, 케냐, 탄자니아, 아프리카의 뿔(에티오피아, 에리트레아, 지부티, 소말리아), 잠비아, 남아프리카공화국이다. 서부와 동부, 북부와 남부를 대체로 포괄하고 있는데다, 언어 문제에 배어 있는 그 나라의 역사와 정치·사회적 배경까지 설명하고 있어 '아프리카 개론서'로 읽어도 되겠다. 고군분투하며 지켜온 DRC의 의 통일성 부분이나, 처음 접하는 잠비아에 대한 내용이 특히 재미있었다.

다만 원문이 그런 것인지 번역의 문제인지, 중언부언에 군더더기 수식어들이 좀 많다. 차드어군을 '차딕어군'이라 한 것이라든가, 살짝살짝 어색한 표현도 눈에 띄지만 읽는 데에는 전혀 지장 없음. 고유명사 영어표기를 악착같이^^ 해놓은 것도 장점.



많은 국가에서 독립 이후에 나타난 언어와 관련된 중대한 영향력은 식민지배를 받던 당시에 이미 존재했다. 이는 다양한 종종과 언어 집단을 미래 국가의 한 국민으로 묶어 버린 국경이 설정되고, 언어와 관련된 구체적 활동과 정책이 있었기 때문에 생겨났다. 식민정부의 일반적인 접근 방식은 서구 언어 교육이었다. 즉, 영어나 프랑스어 구사력을 갖춘 말단 관리를 필요한 만큼만 훈련하면 충분했던 것이다. 대다수 현지 국민에 대한 교육은 선교단체의 산발적인 활동에 맡겨졌다. 그 결과 두 가지 아주 중대한 결과가 초래되었다. 한편으로 기독교 확산을 위한 선교 활동과 그러한 활동이 교육과 연계됨으로써 아프리카 토착어가 선교에 빈번히 사용되었고, 이로 인해 다양한 토착어를 처음으로 표준화하고 공식적으로 기술하는 것이 필요해졌다. 공식적인 지위 승격을 위해 선택된 언어는 더 높은 지위를 얻어 교통어로 확산됐다.

20세기 중반에 많은 식민지가 독립했을 때, 식민지배자의 언어는 소수의 토착민만이 누릴 수 있는 경제적, 사회적 특권으로 자리매김했다. 많은 아프리카 국가가 독립 이전 식민시대의 기본 언어 정책을 계승했다. 행정에 깊이 침투해 있고, 고학력자가 구사하는 식민지배자들의 언어를 국가 공용어로 받아들인 것이다. 반면 광범한 국가 정체성을 새롭게 형성하기 위해 국어를 선택하고 격상하려는 조치는 없었다. 

일반적으로 식민지배자의 언어를 폐기하는 것을 주저한 이유는 대다수 식민 영토에 주민의 절대다수가 구사하는 단일 토착어가 없다는 점이었다. 대부분의 경우, 식민지화 정책에 따라 같은 국경 내에 아주 이질적인 주민을 인위적으로 묶어 놓았기 때문에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독립을 쟁취한 국가들은 다수의 토착어 중에서 국가의 (단일) 공용어를 선택할 수 없었다. 지역적으로 중요하면서 규모가 큰 종족 집단이 있는 국가의 소수종족들은 이들의 지배를 받는 것을 무척 두려워했다. 소수 집단들은 과거 식민지배자의 언어를 종족언어적으로 중립적인 언어로 여겼다.

-6쪽


식민지배 시절의 언어였던 영어와 프랑스어는 교육제도, 정부, 첨단상업 활동에 확고한 뿌리를 내렸고, 많은 아프리카인이 이러한 제반 영역에 널리 참여하고 배우면서 꾸준히 확산되어 균등하지는 않지만 도시 지역에 매우 집중적으로 분포한다. 아텍비자(Adegbija 2000)는 서아프리카인의 약 30퍼센트 이상이 과거 식민지배 시대의 언어 중 한 언어를 이해하고 말하는 것으로 추정한다. 영어와 프랑스어는 20세기 초반보다 더 널리 알려졌다. 영어와 프랑스어 그리고 이 두 언어보다 못하지만 포르투갈어의 확장세는 후퇴하기보다는 증가하고 있으며, 많은 국가의 일상생활의 특정 영역에서 확고한 발판을 내리고 있다. 

-13쪽


새로운 혼합어 형태로 출현한 언어도 있다. 카메룬과 나이지리아에서는 영어에 기반을 둔 피진어가 오늘날 상당수 화자의 제2언어로 은밀하게 특권적 지위를 획득한 것으로 보인다. 시에라리온에서는 원래 피진어였던 언어가 크레올어(Creale)로 발달해서 19세기 후반에 토착 화자의 실질적 다수가 사용했고, 오늘날 크리오어(Krio)는 모어 화자의 10퍼센트를 넘었다. 현재 시에라리온 주민의 약 95퍼센트가 일상적으로 알아듣고 사용한다 

최근에는 제2의 혼합어 형태도 출현했는데, 이 변이형은 여러 나라의 도시와 마을의 젊은 세대에서 발달한 도시 은어다. 케냐의 솅어(Sheng: 주로 스와힐리어 기반), 카메룬의 캄프랑글레어(Camfranglais: 대부분 영어. 프랑스어, 카메룬어의 흔합으로 생겨났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쪼찌어(Tsotsisaal)와 짱토어(Isicamtho), 시에라리온의 사비스만 크리오어 (Savisman Krio: 주로 마약을 하는 소외계층의 젊은이가 사용하는 크리오의 변이형)가 그것이다. 

-15쪽


제3장 모로코: 언어, 민족주의, 성 


프랑스 식민지배자들은 모로코 사회를 토착어와 토착 문화에서 분리하려고 했고, 두 종족 집단(아랍인과 베르베르인)으로 나누어 식민지배를 했으며. 1930년에는 소위 베르베르 칙령(le Dahir Berbere)으로 알려진 조치를 시행하고자 했다. 베르베르 칙령은 모로코의 언어인 아랍어와 베르베르어뿐만 아니라 모로코의 국가 정체성과 영토통일에 충성심을 갖고 있던 베르베르어권과 아랍어권 학자, 정치 지도자와 일반인의 비판을 강력히 받았다.

모로코에는 아랍어 사용 집단과 베르베르어 사용 집단이 있다. 역사적으로 후자 집단은 마그레브(모로코, 알제리, 모리타니, 튀니지, 리비아)의 최초의 주민이었다. 전자 집단은 8세기에 새로운 정치제도, 아랍어, 신종교인 이슬람을 가지고 아랍 반도에서 건너왔다. 독립 이후 모로코는 이슬람과의 관계로 고전 아랍어(Classical Arabic)를 공용어로 채택했다. 1960년대 이래로 모로코는 국가 건설이라는 미명 아래 아랍어화 정책을 실시했는데, 이는 곧 베르베르인을 아랍어화하고, 모든 생활에서 프랑스어를 고전 아랍어로 대치하는 것을 의미했다. 

-67쪽


다수의 학자는 아랍화 정책이 이슬람 근본주의 발달에 간접적으로 기여했고, 이슬람주의자의 요구를 증진하는 길을 마련했다고 주장한다. 프랑스어 사용을 꺼리는 무슬림 근본주의 지도자들은 권력 투쟁에 대중을 동원하기 위해 고전/표준 아랍어를 이용한다. 하지만 아랍어화가 이 지역의 근본주의 탄생과 성장에 기여한 유일한 요인은 아니다. 거기에는 사회경제적 요인과 국제적 요인도 있다. 1980년대 이래 모로코가 겪은 심각한 경제 위기로 인해 교육을 받은 청년의 대량 실업사태가 발생했다. 고(故) 하산 2세는 1999년 7월 8일에 프랑스 잡지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와의 인터뷰에서 “빈곤과 경제 난관은 흔히 극단주의를 양산한다”면서 “이로 인해 서구에는 약물 중독자와 범죄자가 발생한 반면 북아프리카에는 무슬림 근본주의자가 탄생했다”고 언급했다. 

-73쪽


오늘날 성의 영향을 가장 분명하게 받는 언어는 프랑스어이다. 프랑스어는 교육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도시의 상위어이자 제2언어이다. 대부분의 모로코 여성은 프랑스어에 쉽게 접근할 수 없음에도 일반적으로 남성보다 프랑스어를 더 선호한다. 문화 정체성과 별로 관계가 없는 프랑스어가 표준 아랍어 사용과 통제를 통해 남성 중심이 된 모로코 사회에서 남성 지위를 위협하지 않기 때문이다. 

-82쪽


제4장 수단: 다수 종족어, 소수 종족어, 언어 상호작용 


나일사하라 어족에 속하는 누비아어가 아직도 수단 최북단 이집트와의 국경지대에서 사용되고 있다는 시실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언어적·인종적 관점에서 볼 때, 나일강 계곡의 남쪽과 북쪽 강안의 풍경은 매우 다채롭다. 인류사의 여명 이래로 이곳은 문자 그대로 민족이동의 통로였다.

16세기부터 엘리트 계층은 아랍어 및 이슬람과 결탁했고, 정치적 지배를 받는 남부도 그러했다. 전반적으로 수단의 아랍 정체성은 과거처럼 명문 세도가와 인척을 맺을 수 있느냐에 크게 달려 있다. 북부 주민은 부친을 통해 아랍인 가문을 계승하면서도 모친이나 외할머니 가계와 맺은 개인적 관계를 통해 누바인(Nuba), 딩카인(Dinka), 푸르인(Fur)과 연계를 맺을 수 있었다. 다르푸르(Darfur) 분쟁을 서술한 글들에서 보듯이, 아랍인과 아프리카인을 구별하는 잔혹한 인종분리는 최근의 산물일 뿐이다. 과거의 술탄국과 핵심 엘리트는 오늘날의 언론 용어로 아프리카 흑인인 푸르인이었는데, 이들이 주변의 유목 ‘아랍인’과 경제적으로 협력하거나 종족 간의 결혼을 통해 상호관계를 다양하게 맺었다는 점이 흔히 간과된다.

-91쪽


언어의 지위와 사용에 대한 토론은 수단의 현대 정치투쟁사의 한 장을 구성한다. 1898년에 영국과 이집트의 동거정부가 설립된 이래 아랍어와 영어는 국가행정 언어로서 자격이 동등했지만, 1930년경에 영어가 남부 정부와 교육의 공식어가 되었다. 북부를 기반으로 한 민족주의자 정치가들은 이 조치에 반발했고, 1956년에 독립한 후 아랍어는 북부뿐만 아니라 남부의 주요 국어로 선포되었다. 마침내 2005년 포괄적 평화협정에서 수단 전국의 아랍어/영어의 지위 평등이 문서상으로 합의되었다. 아랍어는 수단 전국의 다수 주민이 사용하는 문어이자 교통어이다. 하지만 이 진술에는 엄청나게 복잡하고 다양한 사실이 은폐되어 있다. 오늘날 언어학자들에 따르면, 약 4,000만 명의 주민 가운데 주로 북부의 1,500만명이 수단 구어 아랍어를 주요 언어로 사용하고, 2만 명이 아랍 크레올어인 남부권 아랍어 즉 주바 아랍어(Juba Arabic)를 사용한다. 

-94쪽


수단의 언어는 역사적으로 볼 때 오래된 어족에 속하며, 기원이 다양하다. 아프리카의 주요 대어족 중 세 어족이 수단에서 출현하는데, 그것은 북부와 동부의 아프로아시아 어족, 주로 수단 서부를 잇는 벨트와 기타 지방의 나일사하라 어족, 서부와 남부로 확장된 나이저-콩고 어족이다. 

-97쪽


수단의 식민통치 시대의 제1언어였던 터키어는 지역행정, 경찰, 군사제도에 많은 흔적을 남겼으나 일상어로 더 이상 사용되지 않고 소멸했다. 오스만 제국에 항거한 마흐디스트운동(Mahdist movement)이 성공하자 수단은 1885년 이슬람 색이 짙은 민족주의적 의제를 갖고 독립했고, 행정언어로 아랍어가 재정착했다. 1898년에는 영국과 이집트가 수단을 재정복하면서 영어가 정부의 지배적 언어로 정착했고 55년간의 영국과 이집트의 동거정부(흔히 영국 식민시대로 불린다)를 거치면서 엘리트 사회에 깊이 침투했다. 

1956년에 수단이 독립한 이래 영어와 아랍어는 수단의 정치와 교육의 핵심 의제로 남아 있다. 하지만 언어 문제는 이 두 언어의 경합 문제만이 아니었다. 여기서 핵심 역할을 한 요인은 남부 주민이 벌인 정치투쟁이었다. 수단이 독립했던 1955년에 발발한 최초의 내전과 함께 동거 통치시대에 만연한 아랍어와 무슬림의 생활양식에 남부 주민은 크게 실망해 있었다. 그들에게 이 모든 사회악은 아랍어를 사용하는 북부 수단인이 남부로 무모하게 이주하면서 생겨난 것이었다. 

1950년대 후반 1차 내전이 점차 격화되면서 남부 불만세력의 발생에 일조한 영국 식민정책에 대한 비판이 고조되었고, 1963년에는 남부에서 활동하던 모든 외국 선교단체가 추방되었으며 1964년에는 누바산과 남부 청나일강 지역에 있던 선교단체도 추방되었다. 1969년에 북부 중등학교의 주요 교육어를 영어에서 아랍어로 교체했다. 1980년대 초에 아랍어는 카르툼 대학교와 대부분의 학교에서 주요 학습언어로서 지위를 넘겨받았다.

1969년에 니메이리의 좌파 인민혁명은 남부의 통합정부를 인정한 1972년의 아디스아바바 평화협약의 기초를 닦았다. 하지만 1983년에 니메이리는 개인적으로는 더욱 종교적인 입장을 취하며 남부 지방정부의 폐쇄를 공표했고, 이와 더불어 엄격한 샤리아(sharia) 법을 강제로 적용하면서 평화협약의 기반을 붕괴시켰다. 내전은 다시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10년의 평화 기간(1972~1983)에 남부의 수도였던 주바에서는 나일어 화자 집단과 비나일어 화자 집단의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에콰토리아(Equatoria) 주민은 이것을 ‘딩카인의 지배’로 보았다. 당시 카르툼의 사주를 받아 일어난 이 두 언어 집단의 경쟁으로 니메이리 정부의 지방정부 폐지 결정이 내려졌고, 결과적으로 1983년 내전 재발의 직접적 도화선이되었다. 

-112쪽


1989년의 오메르 엘 베시르의 쿠데타에 이어 출현한 이슬람 정치는 그 후 수단 역사를 지배했다. 남부와 더불어 수단인이 거주하는 에티오피아, 우간다, 케냐의 난민촌에서 초등교육은 놀라울 정도로 어려움을 잘 극복했는데, 지원봉사 교사는 부서진 건불과 나무 아래서 수업을 하고 중등교육은 다른 곳에서 해야 했다. 특기할 점은 남부와 북부에서 동아프리카와 이집트, 중동국가, 서방세계로의 대량 강제이주로 인해 복합적 이산주민이 생겨났고 이러한 환경에서 수단인이 자녀를 양육한다는 사실이었다. 서부에 사는 수단인은 영어에 능통해지고, 동아프리카에 사는 수단인은 스와힐리어에 능통해져서 이제 남부 수단에서도 스와힐리어를 들을 수 있다. 

-105쪽


제5장 세네갈: 국가 교통어의 출현 


세네갈은 사하라 사막 남쪽의 반건조 사바나 기후대에 걸쳐 있는 사하라 지역 국가이다. 농업 인구는 주로 땅콩이나 기장을 경작하는 농부(Pelissier 1966)와 풀라르어(Pulaar)를 사용하는 소수의 유목민이다. 인구의 약 94퍼센트는 서아프리카의 수피 전통을 따르는 무슬림인데, 이 전통은 이슬람권 곳곳에 퍼져 있는 티자니야(Tijaniyya)와 카디리야(Qadiriyya) 같은 수피 종파와 무리디야(Muridiyya 또는 Murid), 라예네(Layene)라고 불리는 두 토착 종파를 주축으로 한다. 1960년에 독립한 이래 세네갈은 정치적 동요가 거의 없이 상대적으로 안정된 다당제 민주주의를 실시해 왔으며 초대 대통령이었던 레오폴 세다르 셍고르(Leopold Sedar Senghor)도 무슬림이 대부분인 이 국가에서 가톨릭을 신봉했다. 

세네갈의 북부 지역은 감비아 강이 통과하는 좁다란 소국가인 감비아로 인해 남쪽 지역과 크게 분리되는데, 이는 유럽 식민지 확장정책의 부산물이다. 감비아는 영국 식민지였고, 세네갈은 프랑스 식민지였다. 두 국가는 식민지로 출발해서 탄생했지만, 북부와 남부 간의 지리적 분리는 문화적 분할이기도 하다. 잘 알려진 세네갈의 문화 동질성은 서로 유사한 계층적 사회구조를 가진 집단이 지배히는 감비아 북부 지역에 더 잘 들어 맞는다. 

-121쪽


탄자니아의 줄리어스 니예레레(Julius Nyerere)는 식민종주국의 언어에 더해 스와힐리어라는 아프리카언어의 공용을 추진했지만 셍고르는 세네갈의 모든 제도권 생활에서 프랑스어 사용을 장려함으로써 근본적으로 다른 길을 택했다.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는 지식인층 사이에 월로프어 우호 운동이 나타났다. 철학자인 셰이크 안타 디오프(Cheikh Anta Diop), 언어학자로서 나중에 합류한 파테 디아녀(Pathe Diagne), 영화제작자 셈벤 우스만(Sembene Ousmane), 작가이자 수학자인 사커르 티암(Sakhir Thiam) 등이 월로프어를 적극적으로 지지한 지식인이었다. 1971년에는 토칙어의 지위를 조금이나마 인정한 셍고르가 6개 언어를 국어로 공식 지정했다.

철학자이면서 정치가인 동시에 시인이자 언어학자로서 셍고르의 프랑스어 경력이 정점에 달했던 것은, 흑인 최초로 프랑스학술원(Academie Francaise) 회원으로 선출되었던 때이다. 프랑스어와 관련된 이러한 유산은 셰이크 하미두 카네(Cheikh Hamidou Kane)부터 파투 디오메(Fatou Diome)까지 프랑스어권 아프리카문학에서 차지하는 세네갈 작가의 유명세에서 찾아볼 수 있다. 2002년에 압두 디우프 전 세네갈 대통령이 프랑스어권국제기구(Organisation Internationale de la Francophonie) 사무총장으로 취임한 사실도 그 사례이다. 

세네갈의 식민 역사와 셍고르의 지적 유산으로 인해 프랑스어가 세네갈에서 널리 사용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개인생활과 공적 영역에서 프랑스어는 상당히 제한적으로 사용된다. 그 대신 북부 대서양어인 월로프어가 세네갈의 교통어다. 인구의 약 40퍼센트만이 월로프인이지만, 월로프어를 모어나 제2언어로 사용하는 인구는 거의 90퍼센트에 달한다.

-127쪽


세네갈인은 오래전부터 이주 네트워크에 참여해 왔다. 세네갈 무역업자는 코트디부아르, 가봉, 남아프리카공화국을 포함하여 많은 아프리카 국가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며, 미국을 비롯하여 프랑스와 그 밖의 유럽국가에 상당히 큰 이주민 사회를 형성하고 있다. 아주 최근에는 아프리카인의 불법적 유럽 이주와 관련하여 세네갈이 논란의 대상이 되었는데, 그 이유는 이주자를 가득 태운 보트가 세네갈에서 출발하여 카나리아섬으로 향하기 때문이었다.

서로 다른 언어 배경을 가진 세네갈인이 고향을 떠나 세계 도처의 세네갈 사회에 진입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언어는 월로프어이다. 세네갈 무역업자는 대부분 무리드 수피 종단을 중심으로 발달한 사회와 상업망에 의존한다. 무리드 종단은 20세기 초 세네갈의 월로프어 중심지에서 생겨났으며, 신도는 고향뿐만 아니라 종교활동과 해외 상업활동에서 아랍어와 더불어 월로프어를 사용한다. 

-144쪽


프랑스어권(francophonie)은 다소 복잡한 개념이다. 이 개념 자체가 프랑스 및 예전 식민지와 모순관계를 의미하고, 세계어로 사용되는 영어에 대한 불안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세네갈을 프랑스어권 국가라고 부르는 이유는 프랑스어 사용 인구가 압도적으로 많아서가 아니라 이 나라가 과거에 프랑스 식민지였고, 프랑스어가 현재 국가 공식어이기 때문이다. 어떤 국가를 프랑스어권 국가라고 하는 것은 다양한 층위에서 해당 국가가 국제적 동맹관계에 있음을 의미한다. 


제6장 말리: 문화와 언어의 다원주의의 옹호 


말리는 가나(Ghana), 말리(Mali), 가오(Gao)와 같이 위대한 서아프리카 제국(8-16세기)이 있던 빛나는 과거를 자랑한다. 이 ‘황금시대’는 오늘날 말리의 대다수의 종족 집단의 주요한 역사적 관계를 형성하며, 국민 사이에 공동체 소속감이 큰 이유를 대부분 설명해 준다. 제국들을 건설한 소닝케인(Soninke), 마닝카인(Maninka) 또는 말링케인(Malinke), 송하이인(Songhay)은 말리의 핵심 종족이다. 그러나 세 제국이 존속하던 당시에 이미 광활한 영토에 많은 인구가 살고 있었다. 말리 내의 다문화주의와 다언어주의는 이러한 과거 유산의 일부이다. 

가나제국(8~11세기)은 오늘날의 모리타니와 말리의 교차 지역에 있었으며, 동일한 언어를 사용한 여러 소닝케 씨족집단이 세운국가였다. 말리제국(13~15세기)은 1235년에 순자타 케이타(Sunjata Keita)가 통일할 때까지 동일 언어와 문화를 가졌음에도 동족 간 전쟁을 벌였던 마닝카인이 건설했다. 순자타가 영토를 서쪽으로 크게 확장하면서 말리제국의 세력은 대서양의 니제르 강과 사하라 남쪽의 열대우림까지 뻗어 나갔다. 말리제국의 통치 하에 이슬람이 기반을 닦으면서 팀북투와 젠네가 학문의 중심지로 부상 했다.

15세기 중반에 말리제국이 쇠퇴하고, 가오제국이 발흥했다. 여러 송하이인을 통일한 손니 알리 베르(Sonni Ali Ber)가 팀북투, 젠네, 마시나(Macina. 오늘날의 말리 중부)뿐만 아니라 모씨 왕국(Mossi. 오늘날의 부르키나파소)까지 정복했다. 그의 후계자 중의 한 사람인 아스키야 모하메드(Askia Mohammed)는 백성에게 이슬람을 믿도록 강요하는 한편 대서양에서 오늘날 나이지리아의 하우사인 도시인 카노(Kano)와 카씨나(Katsina)에 이르는 서아프리카 대부분의 지역을 차지할 정도로 제국을 방대하게 확장했다. 16세기 말까지 수도 가오는 서아프리카 최대 도시였지만, 연이은 내분으로 왕조가 곧 쇠약해져 1591년에 결국 모로코인에게 정복을 당했다.


타마세크어는 북부 팀북투 인근에서 투아렉인이 사용한다(Touareg의 단수는 Targi). 투아렉인은 베르베르인의 후예로 말리에서 가장 사막화된 아드라르 데지포라(Adrar des Iforas) 지방에 산다. 낙타, 소, 염소를 기르며, 사하라에서의 소금거래로 생업을 유지한다. 송하이인과의 갈등이 잦고, 지방 정부기관과도 분쟁하며, 그들이 사는 모든 나라(리비아, 알제리. 말려. 니제르, 부르키나파소)의 정부기관과도 사이가 나쁘다(Bernus 1992: 24). 현대에 와서 투아렉인은 말리에서 발생한 소요에 책임이 있으며, 이들 소요는 종족적 문제보다는 주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문제에서 비롯한 것이다. 지리적으로 중앙권력에서 소외되고, 혹독한 기후 조건과 유목생활 관습, 강한 독립 요구와 같은 요인이 소요의 원인이다. 투아렉인은 외세에 항상 저항했고, 자녀를 프랑스어 학교에 보내기를 거부했다. 그들은 고유 문자인 티피나그(tifinagh)를 가진 유일한 베르베르인으로, 이 문자는 고대와 현대의 사하라 바위에 새겨져 있다. 

-172쪽


소규모 종족 집단이 구사하는 하싸니야 방언을 제외하고, 아랍어는 말리의 모어가 아니다. 그러나 고전 및 근대 표준아랍어의 문자다양성은 역사적으로, 종교적 이유로 중요하다. 이슬람 학자들의 기록 언어인 아랍어는 이 지역에서 6세기 동안 지속된 최초의 문어였다. 말리와 가오 제국 치하에서 팀북투와 젠네는 국제적으로 잘 알려진 이슬람과 아랍어 교습의 중심지였고, 최근 팀북투에는 17세기 저명한 학자의 이름을 따른 아흐메드 바바센터(Ahmed Baba Centre)가 지어졌다.

현대화된 이슬람 학교인 마드라사(madrasa)에서는 종교와 프랑스어를 포함한 세습적 주제를 모두 가르치며, 살아 있는 외국어로서 아랍어를 현대식으로 교육해 좋은 결과를 내고 있다. 이 방식은 부모에게 매우 인기가 있어서 취학아동의 약 30퍼센트가 마드라사에 다니며(Bouwman 2005: 1). 마드라사는 공교육체제의 일부분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는 국가 모스크와 함께 내무부의 관할 아래 있는 전통 꾸란학교와는 전혀 다른 사례이다. 정부는 이슬람 학교에 전혀 재원을 대지 않으면서도 “학교를 통제하고, 프랑스어를 사용하게 하며, 세속화하려고 한다.” 아랍국가, 특히 사우디아라비아가 와하브주의를 전파하기 위해 재정지원을 하는 것과 반대로, 말리는 수피 성향이 강한 세속국가이기 때문이다. 

-176쪽


제7장 시에라리온: 크리오어와 국가 통합의 모색 


시에라리온이란 명칭은 1462년에 포르투갈의 항해자였던 페드로 다 친트라(Pedro da Cintra)가 이 지역을 발견했을 때 부여한 시에라 리우야(Sierra Leoya. 암사자 산)에서 파생했다. 17세기에는 많은 노예가 조지아와 사우스캐롤라이나와 같은 남부 주에 세워진 농장에서 일하기 위해 북아메리카로 송출되었고, 18세기에는 노예무역이 전성기를 맞았다. 얼마 후 영국에서 노예무역에 반대하는 여론이 들끓었을 때 해방 노예를 후에 프리타운이 된 해안 지역에 이주시키려는 시도가 수차례 있었다. 최초로 ‘해방된 아프리카인’ 집단은 ‘검은 빈민(Black Poor)’으로 불렸고 1787년에 런던으로부터 시에라리온 현지 템네인에게 사들인 땅으로 이주했다. 

5년 뒤인 1792년에 미국의 독립전쟁에서 영국을 위해 싸우는 대가로 자유를 얻은 1,100명의 두 번째 노예집단이 해방되었고 이들은 험한 악조건 속에서 살았던 노바스코샤에서 프리타운으로 이주했다. 시에라리온에 주둔하던 영국인의 보호를 받던 ‘노바스코샤인’은 1800년에 ‘머룬인(Maroons)’으로 알려진 500명의 자메이카 출신의 세 번째 자유 노예집단과 합병되었다. 당시 머룬인이 들어오면서 이들이 사용하던 영어 기반의 피진어도 같이 들어왔다. 1808년에 영국의 노예제 폐지법으로 대서양 횡단 노예무역에 영국민의 참여가 금지되었고, 서아프리카와 아메리카 대륙을 정기적으로 오가는 다른 국적의 노예선을 나포하기 위해 영국 해군이 동원되었다(Cole 2006: 36). 그 결과1808~1864년에 프리타운지역에 약 5만명의 노예가 이주했다. 영국인의 보호 아래에서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한 ‘크레올인’ 혹은 ‘크리오인’은 19세기에 시에라리온에서 성공적인 상업망과 새로운 정체성을 구축했다.

-191쪽


스펜서-월터스(Spencer-Walters 2006: 236)는 해방 노예의 시에라리온 이주가 원래 ‘문명화 작업(civilizing project)’으로 인식되었으며, 이 작업의 의도는 ‘문명화된’ 아프리카 사회를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을 유럽인과 다른 아프리카 민족 모두에게 보여 주는 것이었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이 ‘시에라리온 실험(Sierra Leone Experiment)’은 혼합된 아프리카 이주민에게 서구교육을 실시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고, 기독교를 포함한 다양한 서구 문화상을 수용할 것을 장려했다. 상당수의 크리오인이 정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이용한 결과 19세기 중반 무렵부터 많은 사람이 취득한 자격증을 이용하여 식민 관료체제 하의 의사나 변호사가 되거나 기타 전문직 종사자 혹은서기가되었다. 크리오인 가운데 성공했거나 교육받은 사람들은 종종 서구식으로 자기 이름을 지었다. 또한 “많은 이가 스스로 단순히 기독교도가 아닌 ‘검은 영국인(Black Englishmen)’으로 부르는 데 자부심을 가질” 정도로 서구문화의 상징을 받아들이고 표현하는 데 몰입했다.

이들은 주로 유럽식 생활방식을 따르고, 스스로 교양 있고 교육받은 성공자로 생각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편견에 사로잡혀 다른 토착 집단을 뒤처지고 교양 없는 집단으로 멸시했다. 이러한 일부 크리오인의 행태로 말미암아 영국이 관할하던 시에라리온에서 크리오인과 다른 토착 종족 집단 간에 심각한 종족분리 현상이 발생했다. 이로인해 19세기부터 일부 크리오인과 비크리오인 집단 간의 감정이 악화되었다.

-203쪽


제9장 코트디부아르: 프랑스어의 절대 우위 


코트디부아르는 서부 아프리카에서 언어가 가장 다양한 국가 중 하나이자, 서부 아프리카 지역에서 프랑스어를 가장 많이 사용하는 프랑스어권 국가로 알려져 있다. 프랑스어가 유일한 공용어이며, 이 나라의 어떤 토착 언어도 법적 지위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248쪽


코트디부아르의 국경은 유럽 식민지배와 베를린회의(1884-1885)의 결과로 생겨났으며, 자연적인 지리적 경계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코트디부아르에는 사실상 현재의 국경 밖에 문화의 뿌리를 두고 있는 4개의 주요 종족 집단이 마구 섞여 있다. 남서부를 점유하는 크루인(Kru) 집단은 이곳의 최초 주민으로 간주되는데 이들의 문화적 뿌리는 라이베리아일 것이다. 콰인(Kwa) 집단은 주로 아산티(Ashanti) 연방 내의 불화로 10~18세기 경 현재의 가나로부터 계속 인구가 이주해서 현재 코트디부아르의 남동부와 중부에 정착했다. 10세기 후에는 구르인(Gur) 집단이 오딘네(Odienne)와 콩(Kong) 사이 지역의 북부에 정착했고 15세기 이후에 콩족이 말리제국의 팽창과 함께 남쪽으로 이주한 말링케인(Malinke)에 의해 동쪽으로 떠밀려 왔다. 아비장과 남부지방으로 이주민이 과도하게 유입되어 많은 주민이 뒤섞이면서 도시가 형성되었고, 종족 중립적인 문화가 대도시, 특히 아비장에서 발달했다. 그래서 아비장은 언어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용광로같은 도시가 되었다. 코트디부아르 역사에는 장기간에 걸친 종족 집단 간 상호작용의 사례가 많지만, 코트디부아르의 국가 정체성의 문제는 모호하다. 

-249쪽


이 나라의 주요한 종족문화적 경계는 바로 북부 무슬림과 남부 기독교의 경계이다. 두 지역의 주요 차이는 프랑스 식민지배 시기에 생겨난 것으로, 특히 식민 통치가 남부 플랜테이션에 강제노동 정책을 강화하던 시기였다. 독립 이후 이 불평등은 인적 지원과 물적 지원이 남부에 집중되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250쪽


제10장 나이지리아: 아프리카 대국의 종족언어적 경합 


현재 인구가 2,500만~3,000만 명으로 추산되는 하우사인은 나이지리아의 세 주요 종족 중에서 인구가 가장 많고, 수적으로 북부 지역을 지배한다. 나이지리아 언어 절반 이상이 나이저콩고 어족에 속하는 것과는 달리, 히우사어는 아프로아시아 어족(차드어군)에 속한다. 하우사어를 처음 사용했던 사람들은 첫 1,000년간 멀리 동쪽으로부터 나이지리아에 들어와서 남부의 우림 지역과 북쪽의 사하라가 시작하는 지역 사이의 비옥한 사바나 지역에 정주했다. 하우사인은 통일제국을 형성하기보다는 별개의 도시국가를 건설하여 북아프리카에서 온 사하라 횡단 대상과 교역을 놓고 주기적인 다툼을 벌였고, 아랍상인과의 관계를 촉진하는 과정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폴라니인은 하우사인의 지배자로서 확고히 정착했지만, 대부분 하우사어와 문화를 받아들였다. 풀라니인과 하우사인이 서로 섞인 결과 풀라니인은 현재 하우사인과 흔히 구분되지 않는다. 또한 동화된 풀라니인과 하우사인을 함께 일컫는 말로 하우사-팔라니라는 용어가 때에 따라 사용되기도 한다. 하우사어는 현재 북부 나이지리아 대부분의 지역뿐만 아니라, 니제르, 토고, 베냉, 가나, 말리와 같이 멀리 떨어진 서아프리카 지역에서도 모어와 교통어로 사용된다. 식민시대 이후 로마철자법으로 보통 표기되는데 하우사어는 또한 영국이 북부 나이지리아를 지배하는 동안 사용되어 오랫동안 부분적으로 표준화된 바 있다. 

두 번째로 큰 종족언어적 집단은 요루바로 남서부 지역을 장악하고 있다. 대부분의 역사시대에 요루바인은 공통의 정체성을 지닌 정치적으로 통일된 민족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이페(Ife), 오요(Oyo), 이제부(Ijebu), 캅바(Kabba). 온도(Ondo) 등과 같이 전쟁을 종종 벌인 여러 하위 집단과 별개 왕국으로 조직되었다. ‘요루바’는 원래 정통 요루바인으로서 오요인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하우사인과 당시 기독교 선교사 같은 외부인이 상호 의사소통이 가능한 요루바어 사용 집단을 부르기 위해 이 용어를 만들어 확산한 것으로 전해진다. 현재는 요루바어 화자가 나이지리아 남서부뿐만 아니라 유럽 식민열강에 의해 분리된 베냉과 토고에도 분포한다. 가나, 코트디부아르, 세네갈에도 요루바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상업활동을 위해 최근에 이주했다. 요루바어는 남부지역의 교통어로서 그다지 확장되지는 않았다.

남동부 이보인은 세 번째로 큰 종족 집단이다. 요루바인과 마찬가지로 식민시대 이전에는 단일 제국이나 왕국을 형성하지 않았고, 실제로는 각기 30여 개 촌락으로 구성된 200개 이상의 훨씬 더 작은 촌락 집단(village group) 단위로 살았다. 공통의 언어를 공유하지만 요루바인과 마찬가지로 서로 간에 수차례 전쟁을 겪었다. 이보인은 20세기에야 비로소 정체성을 발전시켰는데, 이는 특히 내전의 여파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보어는 하우사어보다 표기 역사가 짧지만, 표준형과 공인된 표준 맞춤법을 갖추고 있다. 부분적으로 이보인이 내전에서 패배한 결과로 하우사어나 요루바어에 비해 종족 간 교통어로서 더 제한적으로 사용된다. 대다수 이보인은 현재 기독교도이다. 

-275쪽


일상생활에서 많이 사용하는 반토착적 변이형이 나이지리아 피진 영어(NPE)다. 남부에서 주로 제2의 교통어로 많이 사용되며, 이 언어를 알고 이해하는 비율은 전체 인구의 1/3 이상이다. 지역 변이형인 포트하커트 변이형과 와리-사펠레-베닌(Warri-Sapele- Benin) 변이형이 있으며, 약 100만 명의 모어 화자가 있다. 

유럽과 나이지리아 지역의 접촉은 15세기에 포르투갈인이 들어오면서 시작되었다. 16세기에는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인이 들어왔다. 유럽인이 나이지리아에 처음 들어왔을 때 가장 번영을 누리던 지역은 하우사인이 살던 북부 사바나지역이었다. 유럽인이 해안에 정착해서 대서양 노예무역을 전개하자 교역의 상업적 중심이 남부로 바뀌기 시작했다. 19세기 초에 노예무역이 폐지되고 해상 교역으로 대치되면서 팜유, 고무, 커피 같은 산물이 담배, 총, 철 등의 유럽 물품과 교환되자 남부로의 상업 중심지 전환이 더욱 가속화되었다(FaIola 1999: 46). 남부 나이지리아의 교역활동 독점권은 당시에 영국인과 왕립나이저회사(Royal Niger Company)에 주둔하던 영국 해군이 부여했다. 특히 19세기 중반에 선교활동이 이 지역에 두드러졌다. 

북부에서는 19세기 초에 풀라니인이 일으킨 대규모 지하드로 하우사 왕국들이 멸망했다. 이전까지 이슬람은 주로 하우사 귀족층만이 숭배했다. 하우사 지도층이 셰이크 우스만 단 포디오(Sheikh Uthman dan Fodio)가 이끄는 풀라니 인으로 성공적으로 대체되면서 거대한 규모의 소코토 칼리프제국(Sokoto Caliphate)이 세워졌고, 이슬람은북부의 우세한 종교로 자리 잡았다. 

-277쪽


1930년대 세계 공황으로 더 큰 시련을 맞은 새로운 남부 엘리트층은 식민정부를 비판하는 한편 국정운영 참여를 더 많이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30년대에 일기 시작한 민족운동은 국민단체와 다종족단체가 출현하는 계기가 되었다. 

곧 독립할 것으로 보였던 1950년대에는 정치 분위기가 극적으로 바뀌었다. 범나이지리아적 이상을 강조하고 종족적으로 통일된 조화로운 국가를 일구자는 목표 대신에 선거 지지를 끌어 모으려는 방편으로 종족, 지역, 종교 분열을 조장하는 말이 새롭게 쏟아져 나왔다. 

281쪽


제11장 카메룬: 다언어 국가의 공식적 이언어 사용 


처음에 독일 식민지였으나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분할되어 2개 지역은 영국에, 5개 지역은 프랑스 관할에 편입되었다. 독일 지배하에서도 피진 영어는 교통어로서 인기를 계속 누렸다. 독일 통치를 이어받은 프랑스 식민 행정 당국은 동화정책의 기치하에 프랑스 문화의 습득과 사용을 적극 장려하는 한편 프랑스령 카메룬 지역에서 피진 영어를 금지했다. 이와 달리 영국 식민 행정 당국은 간섭이 그리 심하지 않았으며, 영국령 카메룬 지역은 학교에서 표준 영어를 교습했지만 피진 영어 사용을 금지하지 않았다. 

영국과 프랑스 관할의 두 행정 지역으로 나뉨에 따라 두 식민종주국의 언어를 각기 공공 영역에서 사용했다. 카메룬이 독립하자 결국 이 두 언어는 국가 공용어로 채택되었다. 1974년에는 모든 토착어도 ‘국어’로 부르기로 합의했다.

-317쪽


캄프랑글레어는 도시 젊은층에 급격하게 퍼지고 있는 기발한 통용어(Kouega 2003)다. 카메룬어, 프랑스어, 영어의 어두문자어(acronym)인 캄프링글레어는 프랑스어 영어, 카메룬 피진 영어, 카메룬의 다양한 토착어뿐만 아니라 스페인어, 독일어, 심지어 라틴어까지 카메룬에서 배우거나 사용되는 외국어로 구성된 프랑스어 기반의 은어다.

-324쪽


카메룬의 언어갈등에서는 영어와 프랑스어와의 갈등이 가장 뚜렷하다. 소외받는 영어권 사회집단에서 영어는 강한 충성심의 대상이다. 1961년의 연방헌법은 영어와 프랑스어가 독립 카메룬에서 동등한 지위를 가질 것이라는 잘못된 인상을 심어 주었다. 그 당시 영국이 관할했던 남부 카메룬은 서부 카메룬 연방주로 개명되고 이 주는 동부 카메룬 연방주로 개명된 이전의 프랑스 관할지역과 결합하여 카메룬연방공화국으로 탄생했다. 그러나 1972년에 아이조(Ahidjo)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연방제에 종지부를 찍고, 비연방 국가체제로 전환했다. 이때부터 인구로나 언어로나 소수집단인 영어권 카메룬인은 프랑스어가 확산되는 것에 예민해졌다. 오늘날에도 영어는 일반적으로 프랑스어 다음의 자리를 차지하거나, 군대와 같이 오직 프랑스어만 사용되는 일부 생활 영역에서 사실상 배제된다. 

-326쪽


제12장 콩고민주공화국: 언어와 ‘진정한 민족주의’ 


1960년에 벨기에령 콩고는 독립을 쟁취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심각한 위기를 맞이했다. 킨샤사에서 일어난 국민군(Force Publique 과거 식민지 국군)의 반란(1960년 7월 5-9일), 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벨기에군의 개입, 참모총장 조제프 모부투 중령의 주도 하에 콩고군이 일으킨 쿠데타(1960년 9월 14일), 카탕가의 엘리자베스빌에서 있었던 초대 총리 파트리스 루뭄바 암살(1961년 1월 17일), 1960~1963년에 서구가 사주하여 일어난, 풍부한 광물자원이 매장된 카탕가와 카사이 2개 주의 분리독립 등의 격변이 있었다. 카탕가 분리독립의 위기는 자원을 탈취하려고 한 벨기에와 다국적 회사의 욕망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이들 위기는 국가정체성 형성의 기반이 되었고, 통일에 대한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336쪽


DRC 군대와 반란 파벌 사이의 공개적인 전쟁은 2002년 12월 17일에 남아프리카 프리토리아에서 폭넓은 합의가 이루어짐으로써 공식적으로 종식됐다. 2년간의 과도정부 설립과 대통령(조제프 카빌라)과 부통령 4인(비무장 반대파/시민사회 대표자)을 두기로 합의했다. 이 협정 이후 통일정부에 대한 인식이 되살아났고 400만 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간 동부 지역의 전쟁은 일단 종식되었다. 

대통령 선거결과는 동서 분열을 보여 주었다. 벰바는 수도 킨샤사를 포함해 서부의 6개 주에서 앞선 반면 카빌라는 동부의 5개 주에서 엇비슷하게 앞선 것으로 드러났다. 이 동서 분열은 링갈라어권과 스와힐리어권의 분리로도 묘사되었다. 스와힐리어는 동부에서, 링갈라어는 서부에서 많이 쓰였다. 벰바는 응갈라(Mongala, 링갈라어 사용자)였고 카빌라는 링갈라어를 모르는 무스와힐리(Muswahili, 스와힐리어 사용자)였다.

자유정부 수립 이후 현재까지 오랫동안 고통에 시달렸던 DRC 국민의 강한 회복력과 일체감, 민족주의, ‘콩고 고유성(Congolite)’에 주목할 만하다. 서구 정치전문가들은 DRC를 ‘끝없는 위기’의 나라, ‘실패한 국가’의 전형으로 묘사해 왔다. 사회경제적 실패는 서방 국가의 내정 간섭, 경제적 이익 수탈, 민주주의 정착 노력의 의도적 무력화로 생긴 결과였다. 초창기 대부분의 연구자는 DRC가 군소 국가로 와해될 것으로 예상했지만 예측은 빗나갔다. 1998~2002년까지 침략과 파괴, 전쟁이 일어났고, 르완다는 키부 2개 주에 자국의 행정체계를 공공연히 도입하는가 하면, 콩고 프랑의 유통을 금지하고 키부 주민에게 르완다 번호체계로 된 차량번호판을 살 것을 강요하는 거센 압력을 넣었다. 하지만 DRC 국민은 이러한 국가분단에 저항했고 국가는 분열되지 않았으며, 연방주의 가능성은 사실상 단호히 거부되었다.

-340쪽


학식 있는 DRC 국민은 탈식민지 시절부터 자신을 부족민이 아니라 콩고 국민으로 간주했다. 독립 이전 종족분쟁이 있었음에도, 1960년대 이래로 특정 종족 집단이 일으킨 이렇다 할 반란이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은 이 관측을 뒷받침한다. 모부투 체제에서 카사이 주와 차탕가 주에서 정치적 이유로 자행된 인종청소를 제외하고, 독립 후 DRC에서는 동쪽의 르완다와 부룬디가 겪었던 후투인과 투치인의 종족집단 간 분쟁과 같은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렇게 다양성 안에서 일어나는 순응적이고 기본적인 평화공존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영토 보존에서 시작된 DRC 국민의 국가의식, 식민지배 하에서 겪은 고난 공유의 역사, 해방을 쟁취한 후 외부에서 작용한 약탈적 경제관행에 대한 투쟁, 국가 정체성을 강화하기 위해 콩고 정치가와 성직자가 기울인 신중한 노력이 모두 여기에 포함된다. 

-353쪽


1960년 6월 30일에 독립한 DRC는 공용어로 프랑스어만을 채택했다. DRC의 언어는 214개로 추정되는데, 주로 반투어군과 북부 소수의 나일사하라 어족에 속한다. 나이지리아(521개 언어)와 카메룬(286개 언어)의 뒤를 이어 아프리카에서 세 번째로 많다(Ethnologue 2005). 그 중 제일 많이 알려진 6개 언어는 콩고어, 스와힐리어, 링갈라어, 몽고어, 루바어, 잔데어이다. 일곱 번째 언어로 간주되는 프랑스어는 엘리트의 언어였다. 

-342쪽


DRC 국민은 자기 언어와 문화의 다양성에 강한 애착을 느끼는 진정한 다언어 사용자다. 콩고 음악은 대개 링갈라어로 제작되는데, 모어에 대한 충성심과는 상관없이 국가 전역에서 즐기는 지배적인 오락이다. 킨샤사에 있는 RTNC의 가장 인기 있는 텔레비전 방송프로그램은 프랑스어로 만든 프로그램이나 영화가 아닌 링갈라어로 만든 연속극이다. 지역별로 지배적인 언어들은 종종 프랑스어와 경쟁하며 똑같이 사용되고 인정받는다. 콩고 국민은 필요한 만큼 많은 언어를 배우고 사용하는데 흔히 언어혼합 변이형을 사용한다. 고등교육에 프랑스어가 훨씬 더 적합하다는 신화에 동의하는 것을 제외하면, 콩고 국민의 언어 사용은 매우 실용적이다. 콩고 국민은 언제 어디서나 손쉽게 언어혼합과 언어전환을 한다. 한 세기가 넘도록 전개된 의사전달 관행의 결과로, 프랑스어와 국어가 서로 차용되듯이 콩고 언어 사이에도 서로 차용어가 존재한다. 

-359쪽


제13장 케냐: 언어와 국가 정체성 탐색 

제14장 탄자니아: 국어와 공용어로서 스와힐리어의 발전


탄자니아의 줄리어스 녜레레는 반제국주의에 고무되었고, 스와힐리어로 우자마(Ujamaa)라고 알려진 사회주의적 개발노선을 따랐다. 이 모델은 무상 의무교육 프로그램, 정치·정부·행정 등 새로운 국가 건설 작업의 모든 분야에서 스와힐리어를 완벽하게 제도화하자는 주장이었다. 반제국주의 입장과 국민 중심 리더십은 강력한 민족주의와 범아프리카주의 감정을 불러일으켰고, 결과적으로 지금까지 모든 아프리카 국가가 부러워하는 국가 정체성과 광범한 결속력을 탄생시켰다. 

녜레레는 스와힐리어가 혁명적 반식민 지배와 반제국주의에 대한 열망을 나타낸다고 믿었다. 모든 거리 명칭이 바뀌었고, 대학 졸업자로 구성된 청년단이 스와힐리어로 된 교과를 가르치기 위해 전국으로 파견되었으며, 여러 서로 다른 종족의 국내 이주가 적극 전개되었다. 스와힐리어는 진정한 ‘국어’가 되었고, 이는 두 가지 중요한 결과를 낳았다. 첫째 스와힐리어를 지역적 종족 정체성과 분리했다. ‘새로운 탄자니아’는 스와힐리어의 지역방언이 아닌 표준 스와힐리어를 사용함으로써 탄생했다. 둘째, 국어로서 스와힐리어를 신속하고 광범하게 채택함으로써 탄자니아의 소수언어가 대거소멸했다.

-381쪽


스와힐리어는 국어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이를 위협할 만한 다른 탄자니아어는 없다. 독립 이후의 새로운 세대는 스와힐리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뿐만 아니라 이제는 자신들의 국가 정체성과 언어 상황을 아주 편하게 받아들인다. 녜레레의 카리스마와 지도력 덕분에 스와힐리어는 이런 지위를 반세기 동안 유지해왔으며, 확고하고 성공적으로 국민의 일상생활에 스며들었다. 

-415쪽


반면 케냐는 종족적, 종교적 이해와 통제에 초점을 맞춘 식민지배 프로젝트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이 입장은 ‘조심스러운 보수적 민족주의’를 내세운 리더십으로 구체화됐는데, 정치적 독립은 쟁취하되 몰락하는 대영제국의 식민지배 구조나 케냐의 입장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는 것이었다. 

-382쪽


제15장 아프리카의 뿔: 에티오피아, 에리트레아, 지부티, 소말리아


1991년에 멍게스투 하일러 마리얌 정권을 무너뜨린 티그레족 주도하의 정부는 기본적으로 지방분권제를 마련하여 에티오피아의 주요 종족 집단에게 전례 없는 권력을 안겨 주고, 대체로 종족 노선에 따라 행정지도를 총체적으로 재편했다. 11개 ‘주’ 혹은 지역 [암하라어로 켈렐(kellel)]이 새로 만들어졌다. 여러 주의 명칭은 그 주의 주요 종족 집단의 명칭에 따라 지어졌다. 암하라, 오로미아, 아파르, 베니샹굴-구무즈(Benishangul-Gumuz), 소말리 등이다. 1994년 에티오피아는 중앙연방정부와, 내부적으로 자체 정부조직을 가진 종족 기반의 지방자치주라는 2개 단계로 계층화된 에티오피아연방민주공화국이 되었다. 

-435쪽


에티오피아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에리트레아의 투쟁은 처음에는 에리트레아 해방전선(ELF)과 에리트레아 인민해방전선(EPLF)이 주도했다. ELF는 저지대에 살던 무슬림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이들은 범아랍 혁명 정체성을 수용했다. EPLF는 마르크스주의 경향을 띤 고지대의 기독교도가 이끌었으며, 대부분이 티그리냐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었다. EPLF가 주도권을 장악했고, 이사야스 아퍼워르끼(Isayyas Afawarqi)가 이끈 1993년에 국민투표를 거쳐 공식 독립했다. 에티오피아처럼 에리트레아 정부도 국가내의 여러 민족을 인정하고, 지위를 향상하는 계획을 기꺼이 지지했다. 에리트레아의 9개 언어 모두가 초등학교에서 사용되는데, 이전에 문자표기를했던 언어는 티그리냐어뿐이었다. 교육부는 에티오피아 음절문자의 사용을 셈어인 티그리냐어와 티그레어에만 국한하고, 아랍어를 제외한 다른 언어에는 라틴문자에 의거한 철자법을 장려했다.

-441쪽


지부티공화국에서는 소말리어와 아파르어를 각기 토착 인구의 대략 절반이 사용한다. 수도인 지부티는 홍해 바로 남쪽에 위치한 아덴만의 주요 항구도시로서 여러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모인 국제적인 장소이다. 큰 규모의 예멘 아랍어 사용자 집단이 무역과 비즈니스에 종사하면서 이 도시에 살고 있다. 다른 중요한 재외 집단은 프랑스인이다. 아파르어와 소말리어 모두 국어로서의 기능은 없다. 대부분의 주민이 일상에서 거의 사용하지는 않지만, 프랑스어와 아랍어가 국어이다. 

-443쪽


제16장 잠비아: 하나의 잠비아, 하나의 국가, 다양한 언어


19세기 후반부터 선교활동과 영국의 식민통치를 통해 다양한 유럽어가 전해졌다. 이 시기의 유산인 영어는 1964년에 잠비아가 독립한 후 공용어가 되어 현재 언어 상황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1991년에 일당제에서 다당제 민주주의로 재편된 잠비아는 7개 국어인 벰바어(Bemba), 냔자어(Nyanja), 통가어(Tonga), 로지어(Lozi), 룬다어(Lunda), 루발레어(Luvale), 카온데어(Kaonde)의 사용을 장려하는 데 중진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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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는 매체, 관공서, 비즈니스, 교육 분야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공식적 및 준공식적 맥락, 특히 도시 환경에서 광범하게 사용된다. 3대 주요 일간지인 잠비아타임스, 포스트, 데일리메일은 모두 영어로 발행되며,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인쇄매체는 주간지나 월간지로 한정된다. 잠비아국립방송사(ZNBC)의 프로그램은 주로 영어로 송출되며, 단신 뉴스 프로그램만이 국어로 송출된다. 또한 남아프리카공화국 방송사에서 주로 도시 지역에 공급하는 위성 및 케이블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영어나 남아프리카공화국 국어를 사용하며 잠비아 언어는 사용하지 않는다. 영어는 독립 이후 모든 교육 단계의 지배언어가 되었다. 다른 국어는 학과 과목으로 교육하고, 영어는 전면적인 교육매체로 사용해 왔다. 영어는 정부, 행정, 비즈니스 부문의 지배적 언어이다. 영어는 국회에서 사용하 언어이며, 국회의원에 입후보하려는 사람은 공용어를 능통하게 사용할 수 았어야 한다고 헌법에 명시되어 있다. 정부 및 공식 웹사이트뿐만 아니라 정부 간행물 대다수가 영어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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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비아공화국은 1964년 10월 24일에 공식적으로 건국되었다. 독립기념행사는 루사카의 새로 건립된 독립기념경기장(에서 열렸는데, 여기에는 영국의 왕녀와 마지막 총독인, 새 대통령인 케네스 카운다(Kenneth Kaunda)와 시몬 카프웨프웨(Simon Kapwepwe) 부통령 등이 참석했다. 독립 절차는 원만하게 진행되었다. 독립운동은 주로 차차차(cha-cha-cha)라고 하는 비폭력적인 시민 불복종 운동으로 전개되었으며, 중심 정당인 카운다의 통일민족독립당(UNIP)은 비인종적이고 비종족적인 커다란 플랫폼을 구축하려고 노력했다.

독립 당시에 잠비아는 포르투갈 식민지인 앙골라와 모잠비크,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점령한 나미비아, 1965년에 일방적으로 독립을 선언한 이후 소수 백인 정권하에서 로디지아가 된 남로디지아등4개의 비우호적인 이웃 국가를 두고 있었다. 잠비아는 탄자니아와 함께 가장 적극적인 전선(frontline) 국가가 되어 아프리카 대륙의 완전 해방을 지지했다. 남부 아프리카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한 다수의 정치인이 루사카를 거쳤고, 남아프리카공화국의 ANC를 비롯하여 다수의 독립 단체가 잠비아에 사무실을 두고 있었다. 짐바브웨, 모잠비크, 앙골라, 나미비아, 남아프리카공화국이 궁극적으로 해방되도록 지지한 잠비아의 역할은 지역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Mbeki 2004). 

공화국 초기는 케네스 카운다라는 통합형 인물과 ‘아프리카 휴머니즘’으로 대변되는 그의 국가 철학과 밀접한 관련이 었다. 아프리카 휴머니즘은 기독교에 입각한 여러 윤리 원칙을 구현한 것이다. 잠비아가 독립 이후 채택한 국시는 ‘하나의 잠비아, 하나의 국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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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장 남아프리카공화국: 국가 건설을 향한 험난한 여정 

1652년에 근대 남아공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이 발생하는데, 네덜란드가 케이프 지역에 동인도 행로의 중간 경유지를 건설한 것이다. 곧 토지와 가축을 놓고 네덜란드인과 코이산인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고, 1658년부터 마다가스카르, 모잠비크, 동인도 제도, 인도 등지에서 노예가 대규모로 수입되었다. 당시 수많은 아프리카 노예가 아프리카에서 신대륙으로 강제로 수출된 것과 달리, 아프리카 남단은 대부분이 동부에서 수입한 노예로 가득찼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코이산인은 네덜란드와의 분쟁과 특히 1713년에 유행한 천연두 등 유럽인이 퍼뜨린 여러 질병으로 격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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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너는 1850년대에 이르러 트란스발공화국(Transvaal)과 자유국(Free State)을 세웠다. 역설적이게도 아프라칸스어를 처음 기록한 사람들은 케이프 주의 백인이 아닌 무슬림 노예의 후손이었다. 이들은 특히 1868~1910년에 아랍문자를 이용하여 아프리칸스어 종교 경전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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