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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메 세제르, '나는 흑인이다 나는 흑인으로 남을 것이다'

딸기21 2017. 3. 19.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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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년 동안 시장직을 수행한 그는 나를 오래된 시청 건물에 있는 자기 사무실에서 맞았다. 처음 만난 이 사람은 아주 정중했다. 또한 주의 깊은 반면 데면데면하기도 했고, 소심한 반면 친근하기도 했으며, 매사에 관심을 가진 반면 의심이 많기도 했다. 자기와의 대담이 가질 수 있는 의미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자신의 저작들이 예전히 반향을 일으킬 수 있다는 점을 믿고 싶지 않아 했다. 또한 런던에 있는 한 대학에서 내가 가르치고 있는 학생들이 그의 저작들, 특히 <식민주의에 대한 담론>과 <귀향 수첩>을 연구하고 인용한다는 사실을 알고 놀라워했다.

 

프랑수아즈 베르제라는 포스트식민주의 학자가 에메 세제르를 만났다. <나는 흑인이다 나는 흑인으로 남을 것이다>(변광배·김용석 옮김. 그린비)는 두 사람의 대화를 담은 대담집이다. 책의 분량은 매우 짧은 데다가, 뒷부분 절반은 베르제가 포스트식민주의에 대해 설명하는 내용이다. 정작 세제르의 목소리는 그리 많이 담겨 있지 않다. 그럼에도 울림은 얕지 않다. 세제르는 카리브해의 프랑스 영토(해외도)인 마르티니크 사람이자 ‘프랑스 옛 식민지의 흑인들’을 상징하는 인물이며 탈식민주의를 대표하는 사상가이자 정치가다. 인터뷰를 한 베르제는 역시 프랑스의 해외도인 레위니옹 출신이다. 이 인터뷰 자체에 눈길을 주지 않을 수 없다.

 

 

명예·인정·영광 등은 세제르에게 큰 의미가 없었다. 심지어 그는 이런 것들을 무시하는 듯 보였다. 그는 더 영광스러운 많은 제안을 물리친 채 마르티니크에 사는 것을 선택했다. 여러 번에 걸쳐 내게 반복해서 말한 것처럼 그는 자기가 태어난 섬을 좋아했다. 하지만 그가 항상 프랑스령 앙티이(카리브의 프랑스 옛 식민지 섬들)에 대해 부드러운 태도를 취한 것은 아니었다. “앙티이를 역사적인 면에서 상기하는 것, 그것은 앙티이와 끝장을 보려는 내 의지이다. 그러니까 역사의 가장자리에서 기아·기근·억압이라는 이름 붙일 수 없는 막장 상태를 끝장내려는 내 의지이다.”

이와 같은 그의 단언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가 동시에 포함되어 있다. 하니는 열대 섬에 대한 낭만주의의 거부이다. 다른 하나는 <귀향 수첩>의 도입부에서 볼 수 있는 그 유명한 구절이다. “굶주리고 천연두 딱지가 닥지닥지 내려앉은, 술에 절은 앙티이인들. 돌다 돌다 떠돌다 이 부두의 진창에, 이 도시의 속진에 좌초한, 속절없이 가라앉은 앙티이인들.” 또 다른 하나는 “사랑과 도덕의 질서정연한 장소”인 마르티니크에 대한 깊은 애정이다. 그는 마르티니크인들에게 “공감”을 가지고 있다.
(8쪽)

 

이제는 ‘탈식민’을 이야기하는 것조차 유행 지난 것처럼 느껴지는 시대에 세제르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더군다나 2017년의 한국에서. 이 대담집은 에메 세제르 선집으로 묶여나온 네 번째 책이다. 일본의 프랑스문학자이자 탈식민주의 학자인 니시가와 나가오의 책에서도 세제르와의 짧은 대화를 엿본 적 있는데, 베르제의 이 책에서 느껴지는 정조는 뭐랄까, ‘회한’에 가깝다. 하지만 한 가닥 희망과 열정을 놓칠 수 없는 그런 회한.

 

세제르와 같은 피부색을 지니고 있는 사람인 까닭일까. 베르제가 이 노인에게 집요하게 파묻는 것은 ‘흑인’ 혹은 ‘흑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이다.

 

널리 퍼져 있는 주장들은 식민주의에 대한 논의에서 세제르에게 돌아가야 할 몫을 부정하고 있고, 그 몫은 오히려 프란츠 파농, 파트리크 샤무아조, 에두아르 글리상에게 돌아가고 있는 실정이다. 내가 보기에 ‘흑인’에 대한 세제르의 접근방식은 파농의 그것보다 현재 논의되고 있는 ‘흑인 문제’에 훨씬 더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세제르에게 ‘흑인이라는 것’은 대륙횡단적 역사를, 특히 전 세계에서 이루어진 디아스포라의 원천인 아프리카를 가리킨다. ‘흑인이라는 것’은 잉여의 무엇이 아니라 다른 무엇이다.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노예무역과 노예제도의 역사에 대한 기억과 기술이 공적 토론의 대상이 되고 있는 동안, 노예제도가 정착되었던 식민지 출신이자 프랑스의 공공 교육을 받았던 한 사람의 저작을 다시 읽는 작업은 매우 중요해 보였다. 여전히 식민 지배를 받고 있던 섬에서 태어났고, 프랑스 엘리트의 산실인 고등사범학교 학생이었던 한 사람, 그것도 1930년대에 학교를 다녔던 한 사람의 저작을 말이다. 그의 저작들에는 그가 살던 시대의 역사적 중요성이 잘 나타나 있다. 투생 루베르튀르에 대한 그의 에세이는 물론이거니와 그의 극작품, 연설, 그리고 아이티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여러 글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14쪽)

 

평생을 고뇌와, 싸움과, 때로는 비난과 맞서 싸워온 세제르에게 마르티니크인이라는 것의 의미는 절절하고, 복합적이다. 그는 마르티니크를 떠나던 어린 시절의 기쁨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특히 상고르와의 만남을 회고한 부분은 인상적이었다. 세제르와 함께 프랑스 ‘식민지 지식인’을 대표하는 상고르 아닌가.

 

나는 아주 기뻤습니다. 속으로 이렇게 말했어요. ‘마침내 파리에 입성했군. 마르티니크는 지긋지긋했어. 난 이제 꽃을 피울 거야!’ 나는 그 길로 고등사범학교 준비 1학년 반에 등록했습니다. 사무실에서 나오면서 한 남자와 마주쳤습니다. 그는 중간 키, 아니 작은 키에 회색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곧장 나는 그가 이 학교 기숙생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는 허리 끝에 빈 잉크병이 달린 줄을 두르고 있었습니다. 그는 내게 다가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안녕, 이름이 뭐야? 어디에서 왔어? 무엇을 하니?” “난 에메 세제르야. 마르티니크에서 왔고, 고등사범학교 준비 1학년반에 등록했어. 넌?” “난 레오폴 세다르 상고르야. 세네갈 출신이고, 준비 2학년 반이야.” 그러고 나서 그는나와 가볍게 포옹했습니다. “반가워, 반갑다.” 이 일이 루이르그랑 고등학교에 도착한 바로 그날에 일어났어요! 그 이후 준비 2학년 반에 있던 그와 1학년 반에 있던 나는 아주 친한 친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매일 만났고 토론했습니다. 그는 조르주 퐁피두와 준비 2학년 반에 있었고, 아주 친했습니다.
상고르와 나는 아프리카, 식민주의, 문명에 대해 끝없이 토론했습니다. 그는 그리스와 라틴 문화를 화제로 삼는 걸 좋아했습니다. 그는 아주 훌륭한 헬레니스트였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함께 성장했던 것이고, 그렇게 해서 다음과 같은 첫번째 질문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난 누구지? 우린 누구지? 백인들 세계에서 우리는 무엇이지?” 중요한 질문들이었죠. 두번째 질문은 도덕적인 것이었습니다. “난 뭘 해야 하지?” 세번째 질문은 형이상학적인 것이었습니다. “뭘 희망할 수 있을까?” 이 세 질문은 그 당시 우리의 주요 관심사였습니다.
전쟁 후에 파리에 다시 갔을 때 나는 예복을 입은 키 작은 사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상고르는 세네갈에서 국회의원이 되었고, 나는 마르티니크에서 국회의원이 되었던 겁니다. 우리는 다시 포옹을 나누었습니다. 성격과 많은 면에서 차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우정은 그대로였습니다. 그는 아프리카인이었고, 니는 앙티이인이었습니다. 그는 가톨릭 신자였고, 정치적으로는 인민공화국운동에 가까웠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에 나는 프랑스 공산당 당원이었거나 ‘공산주의에 가까워지는’ 상황이었습니다. 우리는 서로 언쟁을 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좋아했고, 성징하는 과정에서 서로 영향을 많이 주었다고 할수 있습니다.
(24-25쪽)

 

한 흑인이 아프리카에서 납치되어 노예선 바닥에 실려 묶인 채 얻어터지고 모욕을 당하면서 대륙으로 이송되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사람들이 그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고 합시다. 이 모든 것이 그에게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을까요? 이 모든 것이 내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런 일을 겪은 적이 없습니다만,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역사가 분명 무겁게 작용하는 것입니다.
(30쪽)

 

‘자유·평등·박애’, 프랑스 본국인들은 이 세 종류의 가치를 항상 권장할 겁니다. 하지만 언젠가 그들은 정체성 문제가 제기되는 것을 보게 될 겁니다. 어디에 박애가 있습니까? 왜 사람들은 이 박애를 경험하지 못합니까? 그것은 바로 프랑스가 정체성의 문제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네가 모든 권리를 가진 인간, 다른 사람들의 존중을 받아야 할 인간이라면, 나 역시 한 명의 인간이고, 나 역시 모든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 나를 존중해 주기 바란다. 그 순간에 우리는 형제가 되는 것이다. 서로 포옹하자. 그것이 바로 박애이다.’
(38쪽)

 

혹인 노예 지지자들의 말만큼이나 나를 화나게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박애주의자들이, 분명 선량한 마음으로, 모든 사람은 사람이고, 백인도 흑인도 없다고 주장하는 소리를 듣는 것이오. 그건 제멋대로 생각하는 것이고, 이 세상 밖의 일이오, 부인. 모든 사람이 같은 권리를 갖고 있다. 나도 그것엔 동의하오. 하지만 공동 운명에는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의무를 가진 사람이 있소. 그것에 불평등이 있다오. 명령의 불평등 말이오.
(62쪽, 에메 세제르 <크리스토프 왕의 비극> 중 크리스토프의 대사)

 

아래는 베르제가 후기에서 설명한 포스트식민주의 이론의 역할.

 

‘포스트식민성’ 개념은 권력들의 새로운 지도를, 본국과 식민지 사이의 접촉 지대들을, 그리고 식민지들 사이의 접촉 지대들을 가시적인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한다. 포스트식민 이론은 대규모의 가속화된 이주와 사회적 구조의 상실, 잔혹함과 폭력이 곧 권리인 정책들의 재출현, 정체성의 후퇴, 폭력의 폭발, 모든 것이 상품이며 판매될 수 있는 자유시장경제 담론의 헤게모니적인 지배와 같은 새로운 동요들을 설명하고자 노력한다. 포스트식민 이론은 학제 간 학문이 되고자 하고, 부차적인 표현들과 ‘소수자들’에, 새로운 저항의 장소들(음악, 조형예술, 도시 문화 등)에 관심을 기울이고자 하며, 권력과 착취의 새로운 형태들, 지역들과 새로운 교역로들과 국제 도시들의 출현을 목도하는 데 관심을 두고자 한다. 역사는 선형적인 것이 아니다. 게다가 식민지의 역사가 이주와 유배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것의 구성 원칙인 ‘민족’은 더 이상 최고의 준거 대상이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뿌리 또한 더 이상 가치를 높게 평가받거나 찬양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86쪽)

 

파농이 포스트인종주의적 사회를 건설하려고 시도한 바로 그 지점에서, 그 ‘피부색’이 더 이상 신원 판별의 기준이 되지 않는 바로 그 지점에서, 세제르는 그 어떤 부정적인 신원판별도 그것과 결부되지 않으면서도 흑인이 되는 것이 가능한 사회를 강력하게 주장한다. 이것은 역사에 대한 반환청구이고 노예무역과 노예와 세계를 가로지르는 디아스포라에 대한 반환 청구인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Blackness without Ethnicity’는 유효하다. 이때 네그리튀드는 “체험된 경험들의 합”, “참아낸 억압 공동체”, “역사속에서 역사를 사는 하나의 방식입니다. 다시 말해, 정말이지 한 공동체의 역사의 경험이 그 공동체 인구의 강제 이주, 한 대륙에서 다른 대륙으로의 인간 이송, 요원한 믿음에 대한 기억들, 말살된 문화의 폐허들과 함께 독특한 것으로 드러납니다.” 이는 “기억으로서, 충실성으로서, 연대로서의 차이에 대한 의식화이다. “억압에 대한 거부”인 네그리튀드는 “투쟁”이며, 또한 “지난 수세기 동안에 구성된 것으로서의 문화 시스템”에 맞서는, “유럽의 환원주의에 맞서는” “저항”이다.
(98쪽)

 

번역은 껄끄럽다. 아리스티드(아이티 전 대통령을 가리키는 듯)를 지명으로 옮긴 것도 그렇고...
세제르의 <귀향수첩>을 읽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