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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죽다

딸기21 2017. 2. 12.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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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죽다

니컬러스 에번스. 김기혁·호정은 옮김. 글항아리. 



우비크어는 독자성이 강하기로 유명한 캅카스 북서부 지역에서 사용되는 언어 중 하나다. 계속된 무력 충돌에서 패배하면서 우비크인들은 터키로 집단 망명했고, 우비크족은 점점 우비크어 대신 터키어를 쓰거나 체르케스어Circassian와 아바자어Abaza 등 망명하여 정착한 캅카스 지역의 언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1930년, 흩어져 살고 있는 우비크족 원로들이 저녁마다 터키 삼순Samsun에 모였다. 기도 시간에 맞춰 말을 달려 와서는, 마당에서 저녁을 먹고 잠을자고 새벽이 되기 전에 자기네 땅으로 돌아갔다. 원로들이 저녁마다 그곳에 온 것은 프랑스의 캅카스어 언어학자 뒤메질George Dumézil과 함께 작업을 하기 위해서였다. 몇 명 남지 않은 우비크어 화자들을 모으기 위해 뒤메질이 흑해 연안의 온 마을을 돌아다녔던 것이다. 

우비크어는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다가 1992년 10엔 7일 마지막 화자가 세상을 떠나면서 사라졌다. 그는 죽기 전 자기 무덤에 쓸 비문을 다음라 같이 미리 준비해두었다. “이곳은 테브픽 에센츠의 무덤, 그는 우비크어라는 언어를 구사할 줄 아는 최후의 인물이었다."

(127쪽) 


아주 옛날의 언어 다양성을 나타내는 최초 단계는 모든 인류가 수렵채집인이었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최근까지도 사람들이 수렵채집인으로 남아 있는 지역에서는 두 가지 수치(토종 언어의 수와 언어 계통의 수) 모두에서 고도의 언어적 다양성을 찾아볼 수 있다. 언어 다양성의 두 번째 단계는 신석기말 이후 일부 지역에서 소규모로 진행되었던 농경 확장의 결과로 이뤄진다. 이 확장은 수렵채집인들의 언어를 일소해버렸지만 보다 최근의 언어 다양성을 재성장시키기도 했다. 

대략 기원전 3000년부터 기원후 1000년 사이, 국가가 형성됨에 따라 언어 다양성은 꾸준히 줄어들었다 그 결과 중국은 겨우 77개의 언어로 상대적으로 낮은 순위를 기록하고 있다. 중국 남쪽에 인접한 작은 국가 라오스보다도 적은 수치다. 지난 2000~3000년간 지속된 유사한 영향 탓에 유럽, 북아프리카 중동의 국가들도 대부분 언어 다양성 변에서 낮은 순위를 보인다. 

가장 최근에는 유럽인과 민족국가 엘리트들의 팽창주의적 식민지화 정책의 결과로 수많은 식민지 토착 언어의 다양성이 말살되었다. 지난 수 세기 동안 유럽의 식민지였던 호주, 미국, 남아프리카공화국을 보면 영어의 강력한 영향하에 매우 빠른 속도로 언어가 사라져갔음을 알 수 있다. 포르투갈어 영향하에 놓인 브라질의 대다수 지역, 러시아어 영향하에 놓인 시베리아 아랍어 영향하에 놓인 수단, 인도네시아어 영향하에 놓인 인도네시아 전역, 그리고 새롭게 국가 공용어로 발달한 톡피신어Tok Pisin 영향하에 놓인 파푸아뉴기니의 아주 외진 지역까지 세계 곳곳에서 동일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61쪽)


식민 통치국의 언어에 의해 다양성이 무너진 최근 현상의 너머 과거를 돌아보면 언어 다양성과 생물학적 다양성 간의 강한 상관성을 확인할 수 있다. 생물학적 척도 변에서 ‘초다양성megadiversity'을 띠는 상위 12개국 중 10개 국가는 언어 다양성을 기준으로 한 상위 25개국 순위 안에도 포함된다. 애리조나의 언어 문화인류학자인 더그 하먼의 연구는 생물학적 다양성과 언어 다양성이 한데 모이는 곳이 어느 지역인지도 분명히 보여준다 바로 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열대 아프리카, 그리고 인도네시아, 멜라네시아, 호주를 거쳐 서태평양에 이르는 남부아시아, 동남아시아 지역이다.

(62쪽)


그리스 문자의 궁극적 기원이 되는 이집트 상형문자는 애초에 대상을 표현한다. 그래서 이집트인과 셈족들은 점차 이 기호들의 형태를 양식화하는 한편, 이를 사용해 자음만 나타내게 되었다. 셈 어족 언어들의 독특한 문법 구조가 이러한 전환을 촉진했다고 할 수 있다. 셈어의 경우, 자음만이 단어의 ‘어휘’ 의미를 담당하고 모음은 그저 굴절 정보를 보충하기 때문에, 해당 언어를 아는 사람이라면 문맥을 통해 쉽게 모음을 추론해낼 수 있다. 모든 고대 셈어에서 발견되는 이 구조적 특정 덕분에, 상형문자 기호들을 활용해 자음문자 체계abjad를 고안해내는 역사적 과정이 순조롭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인류가 모음 표기 문제까지 확실한 벙식으로 해결한 것은 이 표기 체계가 그리스 사람들, 즉 셈어와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에게 넘어온 후였다. 실제로 어떤 학자들은 음소문자로의 진화가 순조로웠던 것은 음운적 · 문법적으로 전혀 다른 유형의 언어들로 표기 체계가 전파되었기 떼문이라고 주장한다. 굴절 정보만 갖던 셈어 모음과 달리 그리스어 모음은 단어의 기본인 의미를 달라지게 한다. 따라서 그리스어 기록이라면, 모음을 빼고 적은 문구의 의미를 문맥으로 파악하기가 어렵다. 

(77쪽)


쿠순다족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수렵채집 집단으로 힌두 문명 이전의 인도 문화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이 소수민족은 네팔의 궁벽진 정글에서 고유성을 유지하며 살고 있는데,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다른 어떤 언어와도 연관성을 찾을 수 없다.

네팔 관리들이 쿠순다어 화자를 찾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면서, 2000년에는 부모의 말을 기억하고 있는 한 남자를 찾아냈고 2004년에는 몇몇 화자를 더 찾아냈다. 네팔 당국은 이들을 카트만두로 초청해 시민권 증서를 주었다. 이 쿠순다어 화자들은 밀림 속에서 6일 정도 걸어가면 만날 수 있는 화자 몇몇을 더 알고 있었다. 

(409쪽) 


자연 재해나 종족 학살을 제외한다면, 마지막 화자의 탄생과 죽음에 상관없이 한 언어가 사라지는 데는 대개 80년이나 그 이상이 걸릴 것으로 보고 있다. 흔히는 그 과정이 더 오래 걸리기 때문에 언어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얼마나 진행되고 있는가를 진단할 수 있다. 

얼마나 많은 언어가 위험에 처해 있는지 추정하기 위해, 학자들은 지구상 모든 언어에 대해 크라우스의 진단법과 같은 점수를 집계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금세기 말이면 현재 시용되는 언어 중 90퍼센트가 사라질 것이라는 비관적인 추정도 있고, 그 수치가 50퍼센트 정도일 것이라는 좀 더 '긍정적인' 추정도 있다. 후자로 잡아도 통계상 2주에 하나씩 언어가 사라진다는 이야기다. 

(412쪽)


크로커 섬 전통에 따르면, 누군가 죽을 때 그 지역 해변에 늘어선 카수아리나 나무 하나도 죽어버린다고 한다. 이 점도 벤팅크 섬 사람들이 말한 것과 비슷하다. 그들은 죽어가는 카수아리나 나무를 향해 그 그늘에서 태어난 망자들의 이름을 큰 소리로 부른다. 나는 죽은 카수아리나 나무 하나를 발견하고는 그 발치에 카펫처럼 덮인 부드러운 잎에 앉아 누구나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한 언어가 쇠퇴함에 따라 화자는 몇몇 사람으로 줄어들다가 결국에는 단 한 명만 남게 된다. 이런 점에서 달라본 어 화자 앨리스 봄이 한 말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죽을지도 몰라"는 깊은 공명을 남긴다. 아무도 모르는 그것이 그 언어에 담긴 방대한 세계 전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448쪽)



출판 시장이 워낙 열악하다는 얘기를 많이 듣고 있고, 또 괜찮은 책인데 몇 년 지나서 사려고 보면 절판되고 없는 일이 종종 있다. 그러다 보니 책 읽으면서, 독자가 이런 걱정까지 해야 하나 생각하면서도 걱정을 하게 되는 때가 생긴다. 이렇게 좋은 책은 비록 대중적으로 널리 팔리지는 않더라도 꼭 계속해서 존재해야 하는데 금세 사라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 


얼마 전 후마니타스 사장님과 얘기하면서 폴 파머의 <권력의 병리학> 걱정을 함께 나눴다. 공중보건과 정치 실패의 문제를 다룬 '원전급'의 책이다. 진짜 중요하고 좋은 책이지만, 쉽게 술술 읽히는 에세이같은 책은 아니다. 판권 계약기간이 다 되었고, 재계약을 하기는 힘든 상황이라고 ㅠㅠ 후마니타스의 책들을 많이 갖고 있는데, 이 출판사 책들은 대개 참 좋지만 이 출판사가 돈을 벌고 있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참 좋은데 많이 안 팔렸을까봐 걱정되는 또 다른 책은 마크 마조워의 <암흑의 대륙>


그리고 어제 오늘 사이에, 이 좋은 책이 금방 사라지면 어쩌나 하는 책을 또 발견. 글항아리에서 나온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죽다>. 이건 언어학 책인데, 매우매우 재미있고 훌륭한 책이다. 이런 책을 번역해 출간한 번역자님(공동번역자 중 한 분은 책 나오는 것 못 보고 지병으로 별세하셨다고 ㅠㅠ)들도 고맙고, 이런 책을 용감하게 펴낸 글항아리 출판사도 고맙고(강성민 대표님 이런 책들 느무나 환영&감사해요). 하지만 이 책이 얼마나 팔렸을지는......... 


그러고 보니 이언 부루마의 <0년>도 글항아리에서 낸 책이로군. 무지무지 잼나게 읽었는데, 책이 사라졌다 -_- 젠장. 누가 훔쳐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