팜플렛같은 소책자여서 가뿐한 마음으로 펼쳐들었는데, 뜻밖에 알차고 재미나다. <뉴 셸터스: 난민을 위한 건축적 제안들>은 건축가들과 여러 장르의 예술가, 연구자들이 난민 문제를 놓고 벌인 전시회와 포럼 같은 작업들을 정리해 소개한 책이다. 유기견 문제에서 홍세화와 서경식의 대담까지, 얇은 책자에 여러 내용을 묶었다. 중구난방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사실은 난민 문제의 본질이다. 우리가 '남의 일' 혹은 '보기도 싫고 말하기도 실은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에 공감하고 관심을 갖는 것에서부터 세계시민으로서의 공존이 시작된다는 것, 인권과 평등과 공존은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을 되짚어보고 서로를 위해 고민하면서 이뤄낼 수 있는 가치라는 것.
무엇보다 이런 작업을 하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반갑다. 난민 문제에 대한 전시회가 열리고 그걸 정리한 책이 나온다 해서 우리 사회가 뭐 그리 변했느냐고 물어서는 안 된다. 이런 일이 이뤄진다는 것, 누군가는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 사회가 달라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마치, 등대의 불빛처럼. 바다 전체가 깜깜해도 이런 등대가 있으면 최소한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생각은 해보게 되지 않겠느냐는 얘기다. 우리 각각의, 여러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생각이 모이면 사회가 나아지고, 난민들의 삶이 바뀐다.
건축과 관련된 타이틀이 붙어 있지만 이 책에서 무언가 새로운 '난민 하우스'의 형태나 건축 아이디어를 찾으려고 해서는 곤란하다. 난민들의 삶을, 그들이 살아가는 공간을 어떻게 좀 더 나은 것으로 만들 수 있을지를 고민하면서 건축가들과 연구자들이 염두에 둔 것은 '지금 있는 것을 낫게 만드는 방법'이다. 김찬중 건축가의 표현을 빌면 "기본적으로 우리 사회는 타지 사람이 들어와 살 공간적 여유는 충분하다. 기존 인프라를 잘 연구하고 활용하는 것, 셸터와 개인을 어떻게 매칭해 최적의 장소에서 머물 수 있게 하느냐가 중요하다. '뉴 셸터'라는 것은 우리의 기본 인프라를 가지고 해결할 수 있다"(20쪽).
국제규약상 난민의 범주는 매우 좁다. 이 책에 실린 작업을 한 이들은 이주노동자들, 탈북민들, 북한 비상사태시 발생할 수 있는 잠재적 탈북민들까지 모두 난민의 범주에 넣고 이들과 토착민들이 어떻게 함께 살아갈 수 있는지를 살핀다. 빅데이터를 이용해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뭔지, 어떤 곳에서 어떤 관계를 맺으며 기뻐하고 슬퍼하는지 수요와 공급의 계획을 세울 프로세스를 만들자는 제안이 눈에 띈다. 한국에 건물이 모자라는 것도 아니고, 난민촌을 세울 시급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작업자들이 보는 '기존의 인프라'에는 "현재 우리가 가진 물적 토대를 네트워크 또는 어떤 관계 속에 위치시키느냐가 중요하다는 의미"가 들어가 있으며, 이것이 곧 시스템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20쪽).
현재 한국의 이주민, 난민들의 주거현실은 열악하다. 책에는 비닐하우스에서 몇 명씩 생활하는데도 매달 '월세'를 고용주에게 30~40만원씩 내는 농촌 여성 이주노동자들의 사정이 나온다. SoA라는 건축사무소에서는 이런 이주노동자들의 주거 실태를 조사한 시민단체의 자료들을 모아 '주거도감'을 만들었다고 한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열악한 주거환경을 뛰어넘는다. 가령 화장실이 없거나, 문고리가 없어서 문을 잡고 잔다거나, 전류가 흘러 벽에 손을 갖다 대면 전기가 통한다거나 하는 수준이다. 남녀 혼방도 많다. 그들이 무료로 사는 것도 아니고 적지 않은 월세를 지불함에도, 집주인이 막 들어와 물건을 꺼내기도 한단다."(50쪽)
자물쇠도 없는 '집'에 살면서 성폭행 같은 위협에 노출돼 있는 이들을 착취하고 또 착취하는 구조. 이들에게 필요한 집의 모양을 넘어, 이들이 제대로 된 주거공간에 살 수 있게 해주는 인프라가 필요하다는 말에 전적으로 공감. 대안은? "비닐하우스 외에 대안이 없다면 그 비닐하우스라도 쾌적하게 만들어주어야 하지 않느냐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우리는 그게 더 위험한 발상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주노동자가 모일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한다든지, 그래서 그들 스스로 아이디어를 모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더 실질적인 효과가 있을 것이다. 이주노동자들을 실제로 만나보면 매우 적극적이다. 단지 노동시간이 너무 길어서 여유가 없을 뿐이다. 여유가 있다면 충분히 자신이 살 공간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52쪽)
건축가들이 이주민과 난민들의 자발적 참여와 인프라를 얘기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최소화된 주거'의 필요성은 거주나 정주가 아닌, 거기 머무르는 사람들이 거쳐간다는 것을 전제로 말할 수 있는 거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이주노동자들은 사실 '살아가고' 있다. 이 나라에 있는 동안만큼은 우리의 일상과 똑같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인 것이다. (52쪽)
난민이나 이주자들은 자기 나라를 떠나오기 전에 우리와 똑같이 평범한 일상을 꾸려왔던 사람들이다. "안전이란 개념은 없고, 휴식을 취할 수조차 없는 거리와 집의 경계지가 이주여성의 '집'이다. 한국 사람들은 경제 빈국에서 온 사람들은 그런 환경에 익숙해져야 하거나 감수해야 한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필자가 방문해본 이주자 본국의 집은 비록 현금이 부족하여 시설은 열악하지만 주거 환경은 매우 풍요로운 경우가 많았다. 이들이 떠나온 캄보디아나 베트남의 집은 넓은 공간에 자는 곳과 요리하는 곳이 잘 분리돼 있고, 망고 등의 과일나무로 그늘이 드리워져 있으며, 각종 채소가 자라고 닭과 개들이 뛰어노는 것이다. 또한 동네 사람들과의 친밀감과 오랜 신뢰로 지역사회로부터 안전과 도움을 제공받을 수 있었다."(87쪽)
한국에 난민이 대량으로 유입되는, 이를 테면 북한의 유사시 탈북민이 대규모로 밀려들어오는 상황을 가정해보는 것도 분명 필요한 일이다. 그래서 이미 있는 인프라, 즉 전국 곳곳에 있는 예비군 훈련장을 캠프화하는 문제를 황두진 건축가가 연구했다. 그는 "이 프로젝트를 위해서 기발한 시스템이나 물건을 만들려 하지 말고, 우리 사회가 보유한 상당한 자원을 어떻게 소싱하느냐의 문제에 집중하자"고 말한다. 그는 이런 상황이 벌어졌을 때 우리가 동원할 수 있는 제도나 조직, 사회적 자원의 집합체로 군, 건설산업, 렌탈산업, 캠핑산업을 꼽았다.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기준'들을 받아들이되 우리가 이미 보유한 자원을 활용하자는 것이다. 예비군 훈련장을 캠프로 바꾸되 '마을' 개념을 적용하자는 문제의식이 눈에 띈다. "임시의 잠정적 시설이긴 하지만 일상생활, 북한 커뮤니티의 삶이나 방식도 존중돼야 한다. 오랜 기간 인류가 함께 고민해서 만들어온 국제적 기준이 우리에겐 큰 도움이 된다."(64쪽)
책의 후반부는 한국에서 난민들이 사람다운 대접을 받지 못하는 이유 즉 우리 사회의 내면을 들여다본다. 고시촌으로 상징되는 우리 내부의 거주 난민, 출생국의 GDP로 그 나라 사람들의 등급을 매기는 풍토, 다양성을 경험해보지 않아 무조건 거부부터 하는 획일화된 심리와 순혈주의, 재일동포와 탈북자들이 '간첩 조작'의 희생양이 됐던 역사, 경계인은 곧 적으로 보는 배외주의, 미국이나 유럽은 '백인들의 나라'일 것이라고만 보면서 그쪽 사회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무지 등등.
고민해야 할 것들 투성이다. 실상 우리는 이주노동자를 보면 "그래 한달에 얼마나 벌어"하면서 멋대로 반말을 풀어놓는 수준이 아니던가. '옆집에 난민이 이사 왔다면 어떻게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나'라는 질문에 대한 김찬중 건축가의 답변. "그냥 살던 대로 살면 되는 것 같다." (22쪽)
조효제 교수는 난민들을 대하는 우리 개개인의 태도와 관련해서, 네덜란드에서 들은 얘기라며 '호의적인 무관심'이라는 개념도 있다고 소개한다. 그저 서로 다른 것을 인정하고, 서로의 라이프스타일에 관여 하지 않은 채로 "존중하면서 그냥 살자. 적극적으로 도와준다거나 적극적으로 차별하지 말고 그냥 호의적인 무관심을 갖고 소가 닭 보듯이 살자. 그것만으로도 사실 굉장히 문명화되고 개방된 사회가 아니겠느냐."(156쪽)
그리고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이러한 문제를 양산하는 근본 원인, 즉 질서라든지 식민지의 유산이라든지 강대국의 횡포라든지 전쟁을 만드는 자본주의의 문제 등에 우리가 어떻게 하면 시민으로서 이바지할 수 있을까를 계속 고민하면 세계시민으로서의 시각과 일상생활 속에서의 무덤덤한 보편적인 실천 모두 확보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157쪽)
우리 밖에서 온, 우리 안에 있던 '다름'과 '차별'을 인식하고 고쳐나가는 것. 그것이 우리 사회의 '뉴 셸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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