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히라카와 가쓰미 '골목길에서 자본주의의 대안을 찾다'

딸기21 2016. 9. 12. 11:00

일본의 ‘다른 자본주의 3부작’이라고 할 법한 책들을 쭉 훑어봤다.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는 재미있었고, 모타니 고스케의 <숲에서 자본주의를 껴안다>는 흔하고 평범한 책 정도로 읽었다. 어찌어찌 하다 보니 히라카와 가쓰미의 <골목길에서 자본주의의 대안을 찾다>(장은주 옮김. 가나출판사)도 읽게 됐다. 탈성장에 관심이 아예 없지는 않지만 깊이 관심을 가진 것도 아닌데 이런 책들이 계속 손에 들어온다. 내가 돈 주고 사는 것은 아니니, 아마도 이쪽의 책들이 최근에 많아진 탓인 듯.

3권의 책이 모두 결이 조금씩 다르지만 관통하는 게 있다. 우리는 성장 지상주의에 지쳤고, 너나없이 경쟁해서 더 많이 벌고 더 많이 쓰자는 흐름에 치였으니 이제 그런 생각은 조금 내려놓자는 것. 조금 느리게, 조금 덜 경쟁하고, 덜 벌고, 덜 갖고, 덜 쓰며 살자는 것. 경쟁에서 뒤쳐져 못 벌고 못 갖고 쓸 것 없고 못 살겠다는 사람들이 많은 시대에 어쩌면 이런 고민 자체가 뜬구름 잡는 얘기처럼 들릴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이들이 많은 시대이기 때문에 이런 고민이 필요한 것은 분명하다.



<골목길>은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에세이다. 일본어판 제목은 ‘소상인의 권유’인데, 저자가 책을 쓰면서 진도가 안 나가 고민하던 차에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읽어났다고 한다. 그래서 ‘재난 이후의 고민’이 책에 많이 담겼다. “일본 정부는 변함없이 경제성장 전략을 들먹이며 쇠약해진 노인에게 채찍을 가하듯, 성숙을 다한 일본 경제를 자극하여 끊임없이 버블의 꿈을 좇고 있”는(6쪽) 상황에서 일어난 재난을 보면서 “성장 전략이 아니라 생존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게 됐다고 썼다. 저자는 고층 건물과 고속도로 속에서 잊혀진 ‘휴먼 스케일’을 찾자는 얘기를 꺼내면서 자기가 나고 자란 도쿄 오오타구의 ‘우리 동네’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마침 그곳이 일본에 있을 때에 살았던 곳이라 더 흥미롭게 읽었다.

왜 사람들은 ‘가난하지만 꿈이 있었던 쇼와 30년대’에 열광할까, 고속 성장 속에서 일본이 잃은 것은 무엇이었는지를 짚는다. ‘모자 가게’의 비유는 재미있었다. 


“상점가에 모자 가게가 있던 시대란 어른이 존재했던 시대이며 어린이 세상의 중심인 시대이기도 했다. 동시에 아이가 아이로서 존재하는 것이 가능한 시대이기도 했다. 일정 연령이 되면 일본인은 어른이 되어야 했던 시대가 있었다.”(92쪽)


“1964년 도쿄올림픽이 있었던 쇼와 39년 이전의 도쿄와 이후의 도쿄, 그 이전의 일본과 이후의 일본에는 명확한 단절이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경제와 정신의 포지션이 역전했다는 것이다. 물건과 마음이라고 해도 좋다. 혹은 아이와 어른이라고 해도 괜찮겠다.”(93쪽)


“내가 말하는 쇼와 시대의 어른이란 아직 부(富)를 손에 넣지 못한 사람들이며 그렇기 때문에 야생과 젊음을 축적하고 있었다. 당시의 일본사회는 그런 사람들에 의해 지탱되고 있었다. 그들이 부를 손에 넣기 시작할 무렵, 즉 가구마다 TV, 냉장고, 세탁기, 에어컨, 자동차를 갖추고 아이들에게 자기 방이 생기고 주부들이 가사노동에서 해방된 그 무렵부터 일본인에게서 야생이 사라져 갔다.”(99쪽)


동네마다 있던 모자 가게, 어른의 상징이던 모자. 가난했지만 열심히 일해서 먹고 살려는 사람들, 아이에서 어른이 된 이들이 있었던 시대. 그들에게 모자를 팔면서 떼돈을 벌지는 못해도 휴먼 스케일의 장사를 하며 골목의 한 풍경에 자리 잡고 있었던 모자가게들. 남의 나라 이야기이지만 우리의 이야기, 세상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저 ‘좋았던 옛 시절’에 대한 철 지난 향수로만 볼 수는 없다. 그러기엔 우리 모두 너무나 지쳐 있다. 더 이상 성장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아직 대량생산된 물건을 마음껏 사들이지 않은 ‘블루오션’이 지구촌 이곳저곳에 남아 있다며 허풍을 치는 것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왜냐? 지구는 한정돼 있으니까. 


저자의 시선은 ‘원전’으로 향해간다. “젊음을 잃은 어른들이 부를 사용하여 힘을 떨쳐온 결과가 오늘날 원자력을 둘러싼 꼴이다. 원자력발전소는 현재 얻을 수 있는 에너지라는 부를 위해 사고의 위험이나 폐기물 처리 등의 비용을 뒤로 미루는 기획을 바탕으로 건설되었다. 카드 사회가 도래했을 때 자주 듣던 ‘Play Now, Pay Later’라는 사상이 국가 차원에서 응집된 것이 원자력발전소 건설이었다.”(108쪽)


그것은 “장래에 일어날지도 모를 비용을 현재 가치에 적용하여 가장 싼 값으로 사들이는 난폭한 방법이었다. 미래에 일어날지도 모를 위험이라는 비용, 즉 폐기물 처리라는 부담 비용을 원전이 지불하는 위로금 명목의 비용으로 과목을 변경한 것이다. 공공시설 건설이나 고용 확보, 보조금 등의 형태로 미리 지불을 끝냄으로써 근원적인 위험이나 폐기물 처리 부담에 드는 비용을 은폐해버렸다. 이런 방식으로 문제의 소재를 다른 곳으로 이전시켰다.”(109쪽)


원전 이야기에 이르자 히라카와의 말투는 격해지고 신랄해진다. 소비사회에서 잃어버린 인간됨을 향수하기에는 재난의 크기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가족이나 지연공동체가 해체되어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결정, 자기 책임으로 살아가는 시대는 소비자본주의를 추진하여 거기에서 이익을 얻는 자들의 목적에 합치했음을 의미한다. 동시에 그것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개인’을 발견하여 그것을 어디까지든 추진하려는 결과이기도 했다. 이것이야말로 민주주의가 진전한 결과이며, 그런 의미에서 역사적인 필연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 귀결로서 정부의 간섭을 배제하는 글로벌리즘을 받아들여 빈부격차, 도시와 농촌의 격차가 확대되었다면 그것은 민주주의의 필연이며 우리가 바란 결과이기도 하다. 자기 책임, 자기 결정, 자기실현 같은 글로벌리즘이 장려했던 개인 윤리는 글로벌한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개인 윤리이기도 했다.”(169쪽)


그는 “개인의 권리 일부를 공동체에 양보하는 데서 시작한 근대라는 것이, 개인을 발견함으로써 다시 약육강식의 세계를 불러들인다는 역사의 야유”를 얘기하면서 “민주주의가 글로벌리즘을 낳았지만 글로벌리즘이 민주주의를 멸망시키려는 광경”(170쪽)을 우리가 지켜보고 있다고 말한다. 


이런 시대를 누가 만들었을까? 어느 한 사람의 책임도, 한 집단의 책임도 아니다. 내 탓은 더더욱 아니다. 나는 그저 이런 시대에 태어나 성장의 혜택인 풍요를 누리며 살아왔을 뿐인걸. 그런데 이제 성장은 더 이상 불가능하니, 더 자랄 생각 말고 ‘어른이 되어라’라고 말한다. 어른이 되는 길은 하나뿐이다. 내 탓은 아니지만 내가 ‘지금 여기’에 책임을 가져야 한다는 것. 


“상품경제를 핵심으로 하는 지금 여기에 태어나 이곳에서 살아가는 것은 우연이며 이에 대해서는 어떠한 책임도 없다. 동시에 우리 중 누구나가 상품경제의 가담자다. 상품경제라는 시스템이 팽창하여 끝내 지구 규모로까지 확대되었고, 그 속에서 다양한 욕망이 인간성을 훼손하고 자연을 파괴하고 있는 데 대해서도 우리는 어딘가에서 가담자다. 나는 우리가 만들어낸 현재에 대해서는 책임질 일이 없고 실질적으로 책임이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도 다시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살아가는 데 긍지를 가질 수 있을까, 혹은 ‘지금 여기’에 애정을 가질 수 있을까 하고 묻는다면 나는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단, 한 가지 조건이 있다. 본래 책임이 없는 ‘지금 여기’에 대해 책임을 갖는 것이다.”(175쪽)


그것은 곧 불합리한 것으로 매도돼 외면 당해온 공동체 정신이다. 


“쇼와 시대에 세상의 부모들은 자기 자식뿐만 아니라 이웃 아이들에게도 책임을 갖고 있었다. 무상으로 지역 활동을 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소셜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말하는 ‘눈 치우기’도 마찬가지다. 그는 소설 <댄스 댄스 댄스>에서 누구도 고맙다고 말하지 않고 누구도 하고 싶어 하지 않지만, 누군가는 해야하는 일을 ‘문화적 눈 치우기’라고 형용했다. 불리한 역할을 맡는 사람이 있어야 비로소 지역에 피가 통하고 공동체가 소생할 수 있다. 누군가가 최초로 증여적인 행위를 해야 공동체가 움직인다. 합리주의적으로는 불리한 역할이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그렇다고만 할 수 없다. 책임이 없는 일에 책임을 가질 때 비로소 ‘지금 여기’에 살아가는 의미가 생기기 때문이다.”(177쪽)




* 책 앞부분에 마셜 살린스를 인용해놓았다. 


“살린스는 그것이 정부의 간섭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신고전학파 경제학이든 큰 정부가 조정해야 한다는 케인스 경제학이든 현재 상품 가치에 한정된 경제학의 사회적 위치 그 자체를 상대화했다. 밀턴 프리드먼은 현실에서 행하는 경제정책에 관해 분석하고 뉴딜정책 지지자들이 주장하는 수정자본주의를 철저히 공격했다. 하지만 살린스는 훨씬 더 사정거리가 긴 지점에서 현실을 대치해보려 시도했다. 인간사회는 돈의 움직임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인간사회를 이해하려면 인간 그 자체를 봐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살린스는 석기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인간사회를 관찰했다. 어쩌면 석기시대까지 거스를 필요가 전혀 없었을지도 모른다.”(41~42쪽)


살린스의 책들을 더 찾아봐야겠다.



쇼와 30년대 일본에 과연 ‘남는 시간’이라는 개념이 존재했을까? 남는 시간, 즉 ‘여가’라는 개념이 정착한 것은 그 훨씬 이후부터였다. 이 여가라는 개념에야말로 전후 민주주의의 비약과 쇠퇴의 비밀이 숨어 있다. 여가의 출현은 사람들이 먹기 위해 살아가는 시대에서 즐기기 위해 살아가는 시대로 방향을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내각부에 설치된 국민생활심의회는 1973년 제4차 총회에서 “여가가 생활방식을 규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여가가 국민 복지의 중요한 분야를 차지하게 되었다”, “고복지 시대에 여가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 단순히 경제적 충족에 머물지 않고 심신 모두 풍요로운 생활을 보내는 데 빠뜨릴 수 없는 요소가 되었다”고 규정했다. 주5일제가 기업에서 시행된 것은 1980년대 중반 이후다. 주5일제 시행이야말로 일본인이 노동의식과 생활의식을 크게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진보적인 철학자인 요시모토 다카아키가 시사평론가이자 소설가인 하니야 유타카와의 대담에서 차례차례 펼친 ‘꼼데가르송 논쟁’에서 주5일제는 임금노동자의 해방이라고 했던 말에 나는 그야말로 눈이 확 뜨였다. 

주5일제가 시행되면서 일한다는 것의 의미가 조금씩 변해갔다. 사람이 일을 하는 것은 단순히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일해서 번 돈으로 여가를 충실히 보내기 위함으로 바뀌었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면 노동이라는 인간 고유의 활동을 통해 사람들이 만들어낸 가치관과 윤리관이, 소비가 만들어낸 가치관과 윤리관에 급속히 침식당했다는 것이다. 살아가는 것과 일하는 것을 같은 의미로 받아들이던 사고방식보다 돈을 위해 일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 되었다.

(79~81쪽)



시장이 성장할 여지가 없어진 현대사회에서는 개인의 기호를 세분화하고 시간을 쪼개어 소비 창구를 늘리는 것 외에는 수요의 확대를 유지하기란 원칙적으로 곤란하다. 따라서 대량생산, 대량소비를 계속하려면 상품이 폭발적으로 시장에 침투함과 동시에 상품 수명이 짧아서 기존 상품이 후속 상품에 시장을 양도하는 것이 필요조건이 된다. 

(85쪽)



도쿄올림픽 이후 수십 년에 걸쳐 가장 크게 변화한 것이 생산자와 소비자의 관계다. 생산자 혹은 대기업과 소비자의 관계는 점점 비대칭이 되었다. 대량생산의 시대에 생산자에게 소비자란 투입한 자본의 회수, 즉 이윤만이 부각되는 수이자 기호이다. 

전 세계 선진국에서 욕망을 펼치던 소비자들은 이제 거의 사라졌다. 글로벌리즘 속에서 큰 회사는 이제 일본에는 소비자가 없다며 중국을 비롯한 신흥 발전국으로 관심을 돌리고 있다. 그러나 그것도 한 바퀴 돌고 나면 이제 지구 상에는 새로운 개척지로서의 소비지는 남지 않는다.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시대가 영원히 계속되리라는 사고에는 근본적으로 무리가 있다.

(8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