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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고레비치, '내일 우리 가족이 죽게 될 거라는 걸, 제발 전해주세요!'

딸기21 2016. 9. 8. 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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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를 이야기하면서 조셉 콘라드의 <암흑의 핵심>을 떠올리지 않아도 되는 날은 과연 언제일까. 그런 날이 오기는 올까.


르완다 내전을 다룬 고만고만한 읽을거리인 줄 알았다. 내전이 발생하고 1년 뒤인 1995년부터 수차례 르완다를 방문한 저자는 보고 들은 것뿐 아니라 느끼고 생각하고 고민한 것들까지 가감 없이 책에 풀어놨다. 책을 펴들자마자 순식간에 책장을 넘겼다. 생각할 거리가 너무 많았다. 폴 카가메와 요웨리 무세베니가 가진 의미, 당시 내전을 다룬 서방 언론들의 문제, 아프리카에 대한 세계의 고정관념, 그리고 무엇보다 대학살의 참상. 



보미가 르완다 다녀와서 쓴 '행복기행' 시리즈 기사를 보면서, 아니 그 전에 르완다가
여성평등을 가장 열심히 추진하는 나라이고 여성 의원이 전체 의원의 64%라는 조사결과를 보면서, 좀 의아했다. 이 나라는 어떻게 해서 그런 변화를 이뤄냈을까. 사실 못 미더웠다. 과연 정말일까. 


다녀온 보미는 르완다를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했다. 그래도 믿을 수가 없었다. 한때 좋은 의미에서 '빅맨'이던 우간다의 무세베니는 요즘 독재의 길로 향해가고 있으며, 국제사회의 칭찬을 받던 우간다의 발전은 빛이 바랬다. 르완다 또한 그 길로 가는 게 아닐까. 폴 카가메가 이제는 독재를 하려고 하는 것일까. 카가메나 무세베니 역시 제 3세계의 뻔한 장기집권자가 되는 것 아닐까. 더군다나 나는 카가메에 대해서는 무세베니에 대해서만큼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르완다의 변화를 상상하기가 힘들었다. 아프리카에서 그런 변화가 가능할까 라는 생각이 있었던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이 책을 읽다 보니 의문을 풀 실마리가 조금은 보인달까. 현재 상황에서 르완다에 점수를 매기기는 쉽지 않지만(남들이 매기는 그런 점수 따위, 르완다인들이 거부할 것이다) 카가메와 르완다 애국전선, 그리고 제노사이드 이후의 새 정부가 생각한 것은 단순한 정권 교체가 아니었다. 그들은 혁명을 한 것이었다! 라틴아메리카 좌파들은 좌우 이데올로기 속에서 혁명을 위해 싸웠으나 무세베니와 카가메(그리고 뒤에 실망을 많이 안겼지만 카빌라)는 아프리카의 혁명을 했다. 

제국주의로부터 해방된 뒤에 다시 토착 독재정권에 신음했던 아프리카인들은 제2의 해방에 나섰고, 그 과정이 툭 불거져나오게 한 것이 르완다의 제노사이드였다. 서방의 지원을 받는 토착세력이 부를 챙기고 권력을 독점하면서 소수집단에 대한 분노를 선동하고 제노사이드를 벌이자 새로운 해방운동 세력이 결집했고, 그들의 지도자가 부상했다. 자이르 내전은 이 지점에서 르완다와 만난다. 자이르 내전과 모부투 축출은 '중앙 아프리카의 해방'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자 결정적인 장면이었다. 르완다의 단련된 전사들, 정치 학습과 게릴라전으로 단련되고 카가메 밑에서 새 나라를 세우던 사람들이 연대했기에 자이르의 반군은 이겼다. "카가메가 콩고에서 이끌어낸 범아프리카 동맹군의 승리가 국제 사회 입장에서는 패배였디는 말은 사실이었다. 그 승리로 서구 열강과 인도주의 단체들은 무대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411쪽) 


책은 엄청나게 흥미진진했으나 표지의 분위기는 사실 책의 장점을 거의 가리고 있다. 아프리카의 정치 상황에 대해, 무세베니와 카가메에 대해 관심 가질 국내외 독자들이 얼마나 될까. 그래서인지 책은 그저 '아프리카의 슬픈 역사, 르완다 대학살'을 애절하게 고발하는 듯한 외양을 띠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의 강점은 그것이 아니다. 어느 고민 많은 저널리스트가 본 '학살, 그 이후'의 고통과 혼란과 투쟁을 담고 있다. 식민 시절의 역사에서부터 아프리카의 현재, 그늘진 미래, 그 속에서도 희망을 찾아야 하는 현실, 나아가 프리모 레비의 표현을 빌면 '이것이 인간인가' 하는 통찰까지 다 들어있다. 



기콩고로에서 만난 피그미족 남자는 인류가 자연의 일부이고, 다 같이 평화롭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똘똘 뭉쳐 자연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집단 폭력의 경우도 조직화가 필요하다. 집단 폭력은 악연하게 일어나지 않는다. 심지어 폭도들이 일으키는 난동에도 계획이 있기 마련이며, 엄청난 폭력을 유지하려면 커다란 야심이 필요하다. 집단 폭력은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수단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새로운 질서를 떠받치는 이념의 경우 범죄 성향을 띨 뿐만 아니라 객관적으로도 매우 어리석어 보일지라도 누구도 거부할 수 없을 만큼 단순하면서도 절대적인 성격을 띈다. 제노사이드를 일으키는 이데올로기는 모두 그렇다. 르완다의 경우에는 ‘후투 파워’라는 뻔뻔한 명분 아래 제노사이드가 자행되었다. 

(26쪽)



르완다는 원래 동굴 생활을 하던 피그미족의 땅이었다. 그들의 후손은 오늘날 트와족으로 불리는데 전체 인구의 1퍼센트도 채 되지 못해 선거권마저 행사하지 못하는 소수족으로 전락했다. 후투족과 투치족은 나중에 이주해 왔다. 하지만 그들이 언제, 어디서 이주해 왔는지에 대해선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후투족은 르완다에 최초로 정착한 반투족의 일파로 남쪽과 서쪽에서 이동해 왔고, 투치족은 나일 강 유역에 살던 부족으로 북쪽과 동쪽에서 이주해 왔다는 설이 있지만 이런 가설은 문헌에 나오는사실보다는 전설에 기초를 두고 있다.

(62쪽)



후투족과 투치족


후투족, 투치족이라는 이름이 문제였다. 이름에는 의미가 부여된다. 이름을 놓고 계급 이 어떻다느니 '지위’가 어떻다느니 ‘신분’이 어떻다는 둥 의견이 분분하지만 이름이 두종족을 구별 짓는 근원이라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후투족은 농사꾼이었고 투치족은 목자였다. 따라서 처음부터 불평등한 관계에 놓여 있었던 셈이다. 가축은 농작물보다 더 값이 나가는 재산이기 때문이다. 물론 가축을 기르는 후투족도 있었고 농사를 짓는 투치족도 있었다. 하지만 투치족이라는 이름은 정치, 경제적으로 ‘엘리트'의 동의어로 자리 잡았다. 그러한 계층화는 1860년 투치족 출신 '음와미' 키게리 르와부기리가르완다의 왕위에 오른뒤 일련의 군사 원정을 통해 왕국의 영토를 거의 현재 수준으로 넓혀 지배권을 다지면서 더욱 가속화된 것으로 보인다. 

(63쪽) 


당시 유럽에서는 ‘인종학'이 크게 유행했다. 중앙아프리카를 연구하던 사람들이 신봉한 핵심 이론은 존 해닝 스피크가 1863년에 제시한 이른바 ‘함족 가설’이었다. 스피크는 아프리카에서 거대한 호수를 발견해 거기에 빅토리아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 호수가 나일 강의 수원이라는 사실을 밝혀내 유명해진 영국인이다. 그의 인류학 이론은 중앙아프리카의 문화와 문명은 모두 키가 크고 날렵하게 생긴 사람들에게서 발원했다는 날조된 전제에서 출발했다. 스피크는 그 사람들이 에티오피아에서 기원한 코카서스 인종, 즉 성서에 나오는 다윗 왕의 후예이며 따라서 흑인 원주민보다 훨씬 더 우월한 종족이라고 생각했다. 

스피크는 처지가 딱한 ‘흑인들과’ 함께 살면서 '아비시니아 최고의 혈통임을 나타내는 섬세한 계란형 얼굴, 큰 눈망울, 높은 코로 미루어 보잘것없는 원주민과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우수 인종’을 발견했다. 이 ‘인종’ 은 와투시족(즉 투치족)을 지배하는 위치에 있었다. 스피크를 가장 놀라게 한 것은 그들의 외모였다. 그들은 오랜 혼혈의 결과로 머리가 곱슬곱슬하고 피부가 검었지만 ‘콧날이 없는 펑퍼짐한 코가 아니라 아시아인처럼 콧날이 우뚝한 코'를 지니고 있었다. 스피크는 모호한 과학 용어로 자신의 가설을 그럴 듯하게 포장하는 동시에 성서의 역사적 권위를 빌려 그들을 셈족의 피가 절반 흐르는 함족, 곧 사라진 기독교인의 후예로 규정하고 영국식 교육을 조금만 받으면 자신과 같은 영국인처럼 ‘모든 점에서 우월’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66-68쪽)


벨기에인들은 굳이 르완다에 질서를 가져다주는 척하지 않았다. 대신 기존의 문명에서 지배와 종속개념에 부합하는 특성을 추려내 자신들 목적에 맞게 고치는 쪽을 선택했다. 식민화는 폭력이고, 그러한 폭력을 실행에 옮기는 방법은 수두룩하다. 벨기에인들은 군사와 행정 업무를 담당하는 공무원과 성직자 외에 과학자도 르완다에 파견했다. 과학자들은 저울과 줄자와 양각 측정기를 들여와 르완다인의 체중과 두개골의 크기를 재고, 톡 튀어나온 르완다인들의 코를 비교 분석했다. 아니나 다를까, 과학자들은 오랫동안 믿어온 바를 확인할 수 있었다. 투치족은 ‘거칠고 흉포한 후투족'에 비해 더 ‘고귀하며’ 귀족의 면모를 좀 더 ‘자연스럽게’ 풍겼다. 예를 들어 ‘코의 크기’를 보면 투치족은 코 중앙이 후투족에 비해 약 2.5밀리미터가 더 길고 거의 5밀리미터가 더 가늘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내로라하는 유럽인 관찰자들 다수가 투치족은 세련되고 고상하다는 맹신에 단단히 사로잡혀, 르완다의 지배 종족이 이틀란티스의 사라진 도시 멜라네시아에서 왔다는 등 스피크가 무색할만큼 말도 안 되는 주장을 늘어놓았다.
(72쪽)


부족주의는 또 다른 부족주의를 낳는다. 벨기에도 ‘인종 계보'를 중심으로 계층화된 사회였다.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소수의 왈론인이 플라망어를 사용하는 다수를 몇 세기 넘게 지배했다. 하지만 오랜 사회 혁명을 거치며 벨기에는 인구학 측면에서 훨씬 더 평등한 시대로 들어섰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르완다에 진출한 플라망인 사제들은 후투족에게 동병상련을 느끼며 그들에게 정치 개혁에 대한 열망을 불어넣었다.
그 무렵 벨기에 식민 정부는 유엔의 신탁 통치 아래 놓여 있었다. 이는 식민 정부가 르완다 독립에 필요한 기초를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되는 압력에 처했다는 의미였다. 후투족 정치 운동가들은 다수의 통치와 사회 혁명을 요구했다. 하지만 르완다에서의 정치 투쟁은 평등 추구가 아니라 양극화된 사회에서 어느 인종이 주도권을 잡을 것인가 하는 문제로 초점이 맞춰졌다. 

(75쪽)



하비아리마나 정권


“우리는 하비아리마나가 정권을 잡았을 때 거리로 뛰쳐나와 춤을 췄어요. 최소한 투치족을 죽이지 말라고 지시한 대통령이었으니까요. 1975년 이후 우리의 삶은 안전했어요. 물론 배척당하는 일은 여전했지만요."

사실 르완다는 하비아리마나 정권 밑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심하게 통제받았다. ‘개발’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정치 슬로건이었을 뿐 아니라유럽과 미국의 원조 증여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는 뛰어난 솜씨로 그들의 비위를 맞추며 이익을 챙겼다. 또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기 위한 도구로 ‘국가개발혁명운동’(MRND)이라는 대통령 직속 정당을 만들어 온 국민이 당원이 되게 하는 법률을 제정했다. 르완다 국민들은 정부의 허가 없이는 거주지를 옮기지 못한다는 법 조항 때문에 사실상 꼼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물론 투치족에게는 과거와 마찬기지로 인구의 9퍼센트를 차지하는 소수 인종에 대한 법률이 그대로 적용되었다. 군인들에게는 투치족과의 결혼이 금지되었다. 물론 그들 스스로도 투치족과 인연을 맺으려 들지 않았다. 하비아리마나의 허수아비 국회에는 투치족 의원이 두 명 배정되었고, 대외용 전시 차원에서 내각에도 투치족이 한 명 기용되었다.

(89쪽)


1959년 이후 다른 나라로 피신한 투치족과 그 자녀들은 약 100만 명으로 불어났다. 당시 르완다의 대량 난민 사태는 아프리카 난민 중에서 큐모도 제일 크고 가장 오랫동안 미해결인 채로 남아 있던 문제였다. 난민의 거의 절반이 우간다에 거주했는데, 1980년대 초반 들어 그곳으로 흘러든 르완다 젊은이 상당수가 잔언한 독재자 밀턴 오보테 대통령에 맞서 싸우던 반군 지도자 요웨리 무세베니 밑에 들어갔다. 1986년 1월 무세베니의 승리가 확실시되면서 대통령 취임 초읽기에 들어갔을 무렵 그의 군대에는 수천 명의 르완다 난민이 들어가 있었다. 하비아리마나는 여기에 위협을 느꼈다.

(93쪽)


국제 원조단체들이 보기에 르완다는 식민통치에서 벗어난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에 비하면 에덴동산이나 마찬가지였다. 아프리카 대륙 어디를 둘러보나 냉전시대의 열강을등에 업고 약탈과 살인으로 국가를 다스리는 독재자가 즐비했고, 독재에 저항하는 반군들은 백인 개발 담당자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반제국주의 구호를 소리 높여 외쳐댔다. 하지만 르완다는 북서쪽의 휴화산들처럼 조용했다. 도로여건도 좋았고, 교회 출석률도 높았으며, 범죄율도 낮았고 공중위생과 교육수준도 꾸준히 높아지고 있었다. 만일 우리가 해외 원조 예산을 집행한다면 거짓말을 하거나 변명을 늘어놓는 능력보다는 매년 회계 연도를 마감할 때마다 누구나 만족할 만한 통계보고서를 제출하는 능력에 따라 전문관료로서의 성공 여부가 판가름 날 것이다. 그런 곳으로는 르완다가 제격이었다.
벨기에는 옛 식민지에 돈을 쏟아부었고, 프랑스도 아프리카에 프랑스어권 국가를 늘린다는 신식민주의 정책에 따라 1975년부터 하비아리마나 정권에 군사 원조를 제공하기시작했다. 스위스 또한 다른 어떤 나라 못지 않게 르완다에 개발 원조를 아끼지 않았다. 이 밖에 워싱턴, 본, 오타와, 도쿄, 바티칸시티도 키갈리와 자매결연을 맺고 구호금을 보내왔다. 르완다 산지마다 은연 중에 하비아리마나의 영광을 위해 일하는 젊은 백인 일꾼들이 북적였다. 
그런 가운데 1986년 르완다의 주요 수출품인 커피와 차 가격이 국제 시장에서 폭락했다. 쉽게 이윤을 남기려면 거짓으로라도 외국의 원조를 유치해 횡령하는 길밖에 없었다.  

(97쪽)


대통령이 보잘것 없는집안 출신이라는 사실, 심지어는 자이르나 우간다 이민자의 자손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아는 비밀이었다. 반면 대통령의 부인 아가트 칸징가는 쟁쟁한 집안 출신이었다.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파리에서 흥청망청 쇼핑하기를 좋아했던 영부인은 권좌를 지탱하는 힘줄이었다. 그녀의 가족과 측근들은 후광처럽 하비아리마나 뒤에 버티고 서서 대통령을 위해 정보원 노릇도 하고 은밀히 살인을 저지르기도 했다. 1980년대 후반 국가 재정이 어려워지기 시작하자 외국 원조로 부당 이익을챙겨 배를 불린 사람들이 바로 이 아가트 여사의 일가붙이였다. 

(98쪽) 


미테랑 대통령은 하비아리마나를 좋아했다. 무기 상인이자 한때 프랑스 외무부에서 아프리카 담당 위원을 지낸 미테랑의 아들 장 크리스토프 역시 그를 좋아했다. 1994년 학살 직후 프랑스는 르완다에 막대한 군사 장비를 실어 날랐다. 1990년대 초반에도 프랑스 군대는 줄곧 르완다의 원군으로 활동하면서 항공 교통 관제와 르완다 애국전선 포로들의 신문에서부터 일선 전투에 이르기까지 사실상의 전권을 행사했다. 

(113쪽) 



5년이 지나 나는 다이앤 포시가 르완다에서 누군가의 칼에 찔려 죽었다는 신문기사를 읽었다. 한참 뒤 르완다에서 재판이 열렸는데 그 과정이 아무래도 미심쩍었다. 르완다인 피고가 법정에 나와 진술을 하기도 전에 감옥에서 목을 매단 채 발견되었다. 포시 밑에서 공동으로 연구를 진행하던 미국인 조수 한 명만이 결석재판에서 유죄가 인정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재판은 종결되었지만 의문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지금도 르완다인들은 아가트 여사의 사촌 또는 사돈 중 한 명이 배후에서 살인을 지시했다고 말한다. 당시 살해 동기를 둘러싸고 소문이 돌았다. 포시의 연구 기지 주변 국립공원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지던 금괴와 마약밀매, 또는 고릴라 밀렵이 관련되어 있다는 내용이었다. 

(100쪽)



후투 파워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냉전의 승자가 된 서유럽과 북아메리카는 아프리카 종속국들에 민주화를 요구했다. 거의 협박이나 다름없는 요구였지만 하비아리마나는 가장 비중이 큰 후원자였던 프랑스의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진 뒤, 1990년 6월 르완다에 다수당 체제를 도입해야 할 시기가 왔다고 깜짝선언을 했다. 

그런 가운데 1990년 10월 1일 오후, 우간다에 본부를 둔 반군 조직인 ‘르완다 애국전선'이 하비아리마나 정권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고 독재와 부패와 ‘난민을 양산하는' 추방정책을 종식할 정치개혁을 요구하며 르완다 북동쪽 국경을 침공했다. 

르완다 애국전선의 침공은 하비아리마나 독재정권에 다원주의의 싹을 자를 수 있는 최상의 무기를 쥐어주었다. 그 무기란 바로 결속력을 다지는 데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공동의 적’이라는 망령이었다. 국가의 정체성이 곧 정치이고 정치가 곧 국가의 정체성이라는 국가 이데올로기의 논리에 따라 투치족은 모두 르완다 애국전선의 ‘동조자'로 간주되었고, 그런 견해를 수용하지 않는 후투족은 투치족을 지지하는 반역자로 몰렸다.
(105쪽) 


10월 11일, 그러니까 르완다 애국전선의 공격이 있은 지 정확히 열흘 만에 기세니의 키빌리라 마을 관리들은 후투족에게 그 달에 채워야 할 공동 작업 의무를 투치족 이웃을 처단하는 것으로 대체하자고 제안했다. 그 마을 투치족은 그들과 최소한 15년을 평화롭게 살아오고 있었다. 후투족은 북을 치고 노래를 부르며 공동 작업을 시작했다. 살육은 사흘이나 계속되었다. 그 결과 300명의 투치족이 살해되었고, 3,000명의 투치족이 고향을 버리고 달아났다. 

(107쪽) 


1987년 '캉구카'라는 신문이 등장했다. '깨어나라!’ 를 뭇하는 이 신문의 발행인은 저명한 투치족 사업가를 후원자로 둔 남부 출신의 후투족 인사였다. 신문은 하비아리마나 정권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캉구카'는 여타의 신문과 달리 르완다의 삶을 종족갈등이 아니라 경제 갈등에 비추어 분석했다. 

1990년 초, 아가트 여사는 은밀히 아카주의 지도자 몇 명을 불러 이 신문에 맞설 신문을 발행하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들은 야바위 기술은 삼류요, 자화자찬 기술은 일류라고 할 수 있는 하산 은게제라는 인물을 발행인으로 기용했다. 그는 원래 버스 차장으로 일하다가 장사를 시작해 기세니에 있는 한 주유소 밖에서 신문과 음료수를 팔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런 경험을 밑천 삼아 '캉구카'의 유머 넘치는 길거리 통신원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108쪽)


대통령 부인의 눈에 들어 한낱 무명인 신분에서 일약 궁전 광대 지리에 오른 하산 은게제는 후투 우월주의자로 행세하며 다가오는 후투족 십자군 원정의 시나리오를 쓰고 있었다. 그가 쓴 가장 유명한 기사는 1990년 12월에 나온 「후투 십계명」이었다. 

처음 세 가지 계명은 르완다를 방문하는 백인과 후투족 특권층의 취향을 통해 끊임없이 강화되어온 끈질긴 인식, 곧 투치족 여성의 미모가 후투족 여성의 미모를 능가한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었다. 은게제의 주장에 따르면 투치족 여성은 모두 투치족 앞잡이였다. 투치족여성을 아내나 친구나 ‘비서나 첩'으로 둔 후투족 남성은 반역자로 간주해야 마땅하고, 후투족 여성은 투치족 여성을 사랑하려는 충동에 빠지지 않도록 후투족 남성을 지킬 의무가 있었다. 

그런 다음 은게제는 성에서 사업으로 화제를 옮겨 ‘투치족의 유일한 목적은 자기 종족의 패권’이라며 투치족은 모두 사기꾼이라고 선언했다. 따라서 투치족과 거래하는 후투족 역시 종족의 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논리는 정치 생활에도 고스란히 적용되어 후투족이 정치, 행정, 경제, 군사, 안보 분야의 요직을 모두 장악해야 했다. 나아가 후투족은 공동의 적인 투치족에 맞서 일치단결해 1959년 혁명의 ‘후투 이데올로기’를 공부하고 널리 알려야 하며, 이 이데올로기를 공부하거나 널리 알린다는 이유로 ‘후투족 형제를 핍빅하는’ 후투족은 누구든 반역자로 간주해야 마땅했다. 「후투 십계명」은 전국으로 배포되어 크게 인기를 끌었다.

(112쪽)


후투족 젊은이로 구성된 민병대가 속속 꾸려져 ‘민방위’ 훈련을 받았다. 그 중 ‘인테라함웨’는가장 먼저 발족한 민병대였다. ‘함께 공격하는 이들’ 이라는 뜻의 이 말은 MRND와 아카주가 후원하는 축구 팬클럽 이름에서 기원했다. 1980년대 말 경제가 무너진 뒤로 몇만 명에 이르는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찾지 못해 빈둥거리며 불만을 쌓아가고 있었다. 민병대 모집은 그들에게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와도 같았다. 인테라함웨를 비롯해 그와 유사한 (후일 모두 인테라함웨에 홉수된) 조직들은 제노사이드를 무슨신니는 놀이처럼 받아들였다. 

(118쪽) 


아카주 지도자들은 인테라함웨를 관리하며 자금을 지원했을 뿐만 아니라 제로 네트워크’와 ‘불리츠’ (Bullets) 같은 살인 부대를 직접 운영하기도 했다. 하비아리마나 여사의 세 오빠도 영관급 장교들과 마피아를 방불케 하는 북서쪽 지역의 사업가들과 손잡고 살인 부대를 결성해 인테라함웨와 더불어 1992년 3월의 부게세라 학살에 가담했다. 하지만 부게세라에서 가장 두드러졌던 혁신은, 국영 방송을 활용해 학살의 명분을 제시하면서 ‘우리와 저들’이라는 대결 구도로 몰고가 살해하거나 살해당하는 일이 불가피하다는 분위기를 조성했다는 점이었다. 

결국 제노사이드는 공동체 건설을 앞두고 이루어진 일종의 실습이었다. 전체주의 체제가 흔들림 없이 유지되려면 지도자의 음모에 국민을 끌어들여야 한다. 제노사이드는 그런 목적을 달성히는 가장 뒤틀리고 기장 과격하며 가장 포괄적인 수단이다. 1994년의 르완다는 혼란과 무정부상태가 쇠약해진 정권과 결합할 때 어떤 결과가 일어나는지를 전 세계인에게 보여주었다. 사실 제노사이드는 질서와 권위주의의 산물, 다시 말해 현대 정치사에서 가장 세심한 행정을 실시하던 국가에서 몇십 년에 걸쳐 진행된 이론화와 세뇌의 결과였다. 

(120쪽) 



호텔 르완다


폴 루세사바기나는 1987년에 밀 콜린스 호텔이 처음 팩스를 구입할 당시 팩스 전용으로 보조 전화선을 설치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1994년 4월 중순 정부가 호텔 교환실로 연결되는 전화션을 모조리 잘라버렸을 때 폴은 옛 팩스선에서 여전히 신호음이 잡힌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는 그것을 기적 이라고 표현했다. 그에게 그 선은 호텔에 있는 사람들을 보호하는 데 더없이 요긴한 무기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벨기에 국왕에게 전화를 걸 수도 있었지요. 프랑스 외무 장관에게 당장 연락할 수도 있었고요. 결국 우린 백악관의 빌 클린턴에게 여러 통의 팩스를 보냈습니다."

그는 "팩스를 보내고, 전화를 걸고, 온 세상과 접속하느라” 보통 새벽 네 시까지 뜬 눈으로 새웠다. 

무엇이 폴을 그처럼 강하게 만들었는지가 궁금했다. 그는 나에게 그 이유를 말하지 못했다. 그는 "사실 저는 강하지 못했어요. 결코 그렇지 못했지요. 다만 나는 다른 사람들이 꺼리는 방법을 사용했다고 할까요”라고 말할 뿐이었다. 나중에야 그는 “사람들이 그때 일에 관해 말할 때” 비로소 자신이 보기 드문 행동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제노사이드 당시에는 몰랐어요. 그때만 해도 나처럼 행동하는 사람이 많을 거라고 생각했지요. 왜냐 하면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 그렇게 행동할 수 있다고 믿었으니까요."

폴은 자유의지를 믿었다. 그는 제노사이드 기간에 자신이 한 행동을 개인의 선택으로 생각했고, 다른 사람들의 행동도 그러한 관점에서 이해했다. 그는 자신이 의인으로 불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다만 다른 사람들이 범죄를 저지르는 바람에 그렇게 보였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그는 그런 식의 비교조차도 거부했다. 그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가 비참한 죽음보다 훨씬 더 두려워한 것은, 그의 표현을 따르면 “바보처럼” 살거나 죽는 것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죽이는 것과 죽임을 당하는 것 사이의 선택은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바꾸어 표현할 수 있다. ‘무엇을 위해 죽이고, 무엇 때문에 죽임을 당하는가?’ 하지만 이런 질문은 당시 사람들에게 아무 의미가 없었다. 폴은 그토록 많은 동포들이 기꺼이 인간성을 포기하는 쪽을 선택했다는 사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폴은 보기 드문 양심을 지니고 있었고, 그 때문에 외로웠다. 하지만 그는 밀 콜린스 호텔의 피란민들 편에 서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결과만 보면 그가 그들을 구한 것도 아니고, 또 구할 수도 없었다. 그는 오로지 술, 전화기 한 대, 유명한 국제단체 주소, 저항 정신만으로 무장한 채 다른 누군가가 그들을 구하러 올 때까지 그들을 보호했을 뿐이다. 

(177-179쪽)



국제사회의 외면


르완다 주둔 유엔군의 철수는 후투 파워가 그 때까지 거둔 가장 큰 외교상의 승리였다. 이는 거의 미국 단독의 공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백악관은 소말리아에서의 패배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와중에 '대통령령 제25호'로 불리는 문건의 초안 작업을 막 끝낸 상태였다. 이 문건에는 미국이 유엔의 평화유지 활동에 참여하지 않아도 되는 구실이 조목조목 열거되어 있었다.

미국 국회의원 대다수와 언론은 르완다 사태를 덮는 데에만 급급한 클린턴 행정부의 수치스러운 행동에 강한 불만을 드러냈다. 심지어 국무부 대변인 크리스틴 셸리가 워싱턴에서 장황하게 이야기를 늘어놓는 동안 이스탄불에 있던 국무장관 워렌 크리스토퍼는 기자들에게 “그 문제를 제노사이드라고 부를 수 있도록 해주는 특별한 비책이 있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그렇게 말하겠습니다"라며 못마땅해 했다.

(192쪽)


우간다에서 르완다 난민으로 성장한 카가메는 영어를 사용했다. 그는 프랑스가 대량학살범을 지원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면서, 르완다가 영어권에 편입될까 봐 두려워하는 프랑스의 태도에 고소를 금치 못했다.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이곳에 살기를 원한다면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죽이는 일을 거들지 말았어야지요." 

“UNAMIR는 무장을 하고 이곳에 주둔해 있었습니다. 병력 수송 장갑차와 탱크를 비롯해 온갖 무기를 다 갖추고 있었지요. 사람들은 그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살해당했습니다. 나 같으면 그런 일을 절대 가만두고 보지 않았을 겁니다. 그(달레르 장군)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 상황이었다면 나는 행동을 취했을 겁니다. 비록 유엔을 위해 일하고 있다고 해도 나라면 사람들을 보호하는 쪽을 택했을 겁니다'라고요. 사람들이 무방비 상태로 죽어가는 상황에서 병사들도 있고 무기도 있는데 그들을 보호하지 못한다면 장군으로서 수치가 아니냐고 그에게 말했던 기억이 납니다."

1997년 9월, 전 UNAMIR 사령관 달레르 장군은 유엔 사무총장 코피 아난으로부터 벨기에 상원의 증언 요청에 응해서는 안 된다는 엄명을 받기 직전 캐나다 텔레비전 방송에 출연해 이렇게 술회했다. “열 명의 벨기에 군인들과 다른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일, 유엔군 몇몇이 부상을 당했지만 의약품이 동나는 바람에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한 일, 56명의 적십자 봉사단원들이 희생된 일, 200만 명의 사람들이 고향을 등지고 피란민으로 전락한 일, 약 100만 명의 르완다인들이 살해된 일은 모두 제 불찰입니다. 제가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빚어진 일이며, 따라서 책임을 통감합니다."

달레르는 유엔에 책임을 떠넘기는 것을 거부했다. 대신 그는 유엔 안보리와 유엔 총회 회원국들에게 책임을 물었다. 그는 제노사이드에 직면해 각국 정부가 자국 군인들이 위험에 처할까봐 두려워한다면 “군인들 말고 보이스카우트를 보내라"고 말했다. 카메라 앞에 선 달레르는 군복 차림에 희끗희끗한 머리를 짧게 깎고 각진 턱을 굳게 다문 채 가슴에는 훈장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어조에서는 동요하는 기색이 역력하게 묻어났다. 그는 절제된 표현을 사용했지만 분노나 마음의 상처를 감추지 않았다. 

(209쪽)



후투 난민촌, '보복 학살'이라는 거짓말


키베호 난민촌은 '국내피란민’을 위해 튀르쿠아즈 지역에 세운 수십 개의 난민촌 가운데 하나였다. 1994년 8월 말 프랑스 군대가 철수했을 때 그 지역 난민촌에는 최소한 40만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들은 새로 충원된 UNAMIR와 유엔인권기구 및 국제 인권 단체들의 감독과 보호 아래 있었다. 새 정부는 난민촌들을 즉시 폐쇄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국내 피란민들은 난민촌을 떠나는 데 난색을 보였다. 구호단체 덕분에 먹을 것도 잘 얻어먹고 치료도 잘 받는 데다가, 여전히 난민촌에 막강한 영항력을 행사하고 있던 제노사이드 주동자들이 르완다 애국전선에서 후투족을 대량으로 처단하고 있다는 소문을 퍼뜨렸기 때문이다. 국경의 난민촌과 마찬가지로 그곳에서도 인테라함웨 단원들이 키베호를 떠나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협하고 공격하길 서슴지 않았다.

(231쪽)


키베호조사위원회는 르완다 정부의 제안으로 소집되었다. 이는 난민촌을 폐쇄하면서 빚어진 유혈 사태가 르완다에서 흔히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1994년 10월, 하비아리마나의 암살 직후에 발생한 학살을 조사하기 위해 유엔 안보리가 전문가들로 꾸린 그와 비슷한 성격의 위원회는 보고서에서 “양측의 무력 충돌로 르완다에서 반인륜 범죄가일어났고 ...... 후투족이 투치족을 상대로 저지른 대량멸족 사건은 사전 합의에 띠라 계획적이고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이루어진 행위인 바 제노사이드에 해당한다"고 명시했지만 투치족이 후투족을 멸족하려는 의도로 그와 같은 행위를 저질렀다고 보이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결론 내렸다. 이 보고서는 유엔 총회가 1948년에 제노사이드 관련 협약을 통과시킨 이후 유엔이 그러한 범죄를 인정한 최초의 사례다. 키베호 조사위원회의 결론 또한 마찬가지로 매우 인상적이었다. "키베호의 비극은 르완다 당국이 특정 종족을 말살할 목적으로 고의로 저지른 행위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전에 막을 수 없었던 우발적인 사고도 아니었다."

(251쪽) 


규정에 따르면 유엔난민기구는 난민, 즉 자국에서의 명백한 박해 위협을 피해 국경을 넘은 사람들에게만 도움을 주어야 하며, 기소 상태로 도피 중인 범죄자들은 보호 대상에서 제외하게 되어 있다. 아울러 이 기구의 도움을 받는 사람은 자신이 난민 지위를 얻는 데 이무 문제가 없다는 점을 입증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난민촌의 르완다인들은 심사도 거치지 않고 무조건 난민 자격을 얻었다. 선별 작업이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자이르 난민촌 상황과 관련해 한 가지 확실한 통계치는 운영비가 하루에 최소한 100만 달러가 들어간다는 점이었다. 하루에 한 사람당 1달러가 든다고 치면 그 돈의 최소한 70퍼센트가 일반경비, 보급품, 장비, 직원 숙소, 월급, 수당, 그 외 이런저런 경비의 형태로 구호팀과 공급상에게 돌아간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그다지 많지 않게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돈이면 난민 한 사람당 하루에 겨우 25센트씩만 쓴다고 해도 일일대비 대부분의 르완다인 1인당 소득의 두 배에 가까운 액수였다. 세계은행은 제노사이드 이후 르완다의 연간 평균 소득이 80달러로 떨어지면서 르완다가 세계 최빈국이 되었다고결론내렸다. 전체 인구의 최소한 95퍼센트가 일 년에 60달러 또는 하루에 16센트에 가까운 돈으로 생활하고 있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런 처지에 비하면 난민촌에서의 생활이 오히려 나았다. 특히 후투 파워의 후원 체계 아래 들어가면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난민들이 장사로 벌어들인 수익은 많은 곳으로 흘러들었지만 대부분이 뒷거래를 통해 무기와 탄약을 구입하는 데 곧장 들어갔다. 국제개발처 책임자 리처드 매콜은 자이르를 제노사이드 주동자들이 ‘자유롭게 무기를 실어 나를 수 있는 통로'라고 정의했다. 유엔난민기구도 그 비슷한 발언을 했지만 난민촌에 계속 더 많은 돈을 쏟아부었다. 

(332쪽)


1996년 7월 카가메 장군은 워싱턴을 방문해 국제 사회가 난민촌에서 자라고 있는 괴물을 처리할 수 없다면 자신이 처리하겠다는 의사를 또다시 밝혔다. 사람들은 그가 허세를 부린다고 생각했다. 르완다가 자이르를 공격하겠다니 리히텐슈타인이 독일이나 프랑스를 공격하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모부투는 여전히 그 지역에서 워싱턴의 희망이었다. 파리도 이 점에 대해서는 견해가 일치했다. 프랑스 외무부의 아프리카 전문가들이 카가메의 경고를 대하는 태도는 해볼 테면 해보라는 식이었다. 

(355쪽)



르완다 애국전선


르완다 애국전선은 말다툼에 쓸데 없이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그들은 프랑스 군대를압박하기 위해 전면 공격에 나섰다. 7월 2일에는 부타레를 장악했고 7월 4일에는 키갈리까지 손에 넣었다. 

7월 18일 르완다 애국전선은 집중 포격 끝에 기세니를 손에 넣은 데 이어 자이르와 인접한 북서쪽 국경 지역 장악에 니섰다. 7월 19일 후투 피위에 반대했던 야당 지도자들과 르완다 애국전선이 연합해 키갈리에 새 정부를 수립했으며, 뉴욕에서는 쫓겨난 제노사이드 정부의 유엔 주재 대사가 유엔 안보리의 결정에 따라 의석을 내놓고 물러났다. 그 후 르완다 애국전선은 르완다 애국군으로, 패주한 르완다 정부군은 전(前) 르완다 정부군으로 명칭이 비뀌었다. 

(196-203쪽)


”르완다 애국전선 사람들은 목적의식이 놀라울 만큼 확고했습니다." 제노사이드 당시 키갈리에서 일했던 캐나다 의사 제임스 오빈스키는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물론 그들이 세운 옳고 그름의 기준은 상황에 따라 자주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들의 생각과 행동은 그른 쪽보다는 옳은 쪽에 훨씬 더 가까웠습니다. 그들의 군복은 늘 빳빳하게 다림질돼 있었고, 얼굴은 항상 말끔하게 면도돼 있었고, 군화도 언제나 반짝반짝했습니다. 그들은 싸울 때는 인정사정 두지 않았지만 어떤 곳을 점령해도 아프리카에서 흔히 볼수 있는 약탈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키갈리를 점령했을 때 병사 하나가 어떤 집에서 라디오를 한 대 들고 나오다 그 자리에서 걸려 라디오를 빼앗기고 총살당했던 게 기억납니다."

(271쪽) 


이전 세대의 아프리카인들이 '해방'을 언급했을 때, 그 말은 유럽 제국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했다. 르완다 애국전선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그 외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아프리카 대륙에서 반군 활동을 전개했던 여섯 개의 무장 세력에게 ‘해방’은 냉전과 신식민주의의 이익을 대변하는 위탁 독재 정권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했다. 표면상으로나마 자유롭고 독립적인 아프리카에서 성장한 그들은 탐욕스러운 지도자들을 수치스러워하면서 그들이 미숙하고 비열할 뿐만 아니라 국민의 운명을 책임지기에는 너무나 무능하다고 보았다. 아프리카 국가 대부분을 괴롭혀온 부패는 단지 부패 자체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 아프리카의 영혼까지 위협했다.

비록 식민 통치 이후에 아프리카인이 겪는 고통이 서구나 소비에트 공화국에 큰 책임이 있다고 해도, 이 새로운 세대는 아프리카인이 아프리카인에게 고통을 가하고 있다는 현실이 두려웠다. 반군을 이끌고 피비린내 나는 폐허에서 우간다를 재건해 르완다 애국전선을 고무했던 무세베니는 아프리카가 명실상부한 독립을 달성하는 데 실패한 것을 두고 더 이상 외국인 탓을 해서는 안 된다면서 언젠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오히려 나약하고 조직적이지 못한 토착 세력의 책임이 더 큽니다."

(266쪽)



폴 카가메


카가메는 외국인이었다. 아프리카 대부분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우간다 인구도 수많은 부족과 부차 집단으로 이루어져 있어 크고 작은 소수 집단만 있을 뿐 다수 집단이 없다. 우간다에서 후투족이냐 투치족이냐 하는 꼬리표는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투치족은 거의 모두가 정치적인 난민이었던 데 비해, 후투족은 주로 식민지 이전 시대의 정착민이나 경제적인 이유로 이주한 사람들의 후손이었다. 조국을 등진 르완다인들은 우간다, 케냐, 탄자니아 등지에서 평화롭게 어울려 지냈다. 1990년대 초반 후투 파워 정치가 자이르에서 그런 공존관계를 뒤집어엎기 전까지는 그랬다.

(260쪽) 


카가메는 캔자스의 포트리븐워스에서 르완다 애국전선의 침공 소식을 들었다. 당시 그는 우간다인 신분으로 장교 훈련을 받고 있었다. 전쟁 이튿날 프레드 르위그예마는 살해당했다. 르위그예마가 사망한 지 열흘 만에 카가메는 캔자스에서의 훈련을 중단하고 아프리카로 돌아왔다. 그는 우간다 장교직을 버리고 살해당한 친구의 뒤를 이어 르완다 애국전선 야전 사령관에 취임했다. 서른 세 번째 생일을 며칠 앞두고의 일이었다. 

군 관계자들은 르위그예마가 남긴 오합지졸로 그가 만들어낸 군대와 그가 1994년에 벌인 전투를 보기 드문 천재의 작품으로 간주한다. 그가 박격포, 로켓 추진수류탄, 그리고중고 칼라슈니코프만으로 승리를 거두었다는 사실은 전설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카가메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문제는 장비가 아닙니다. 중요한 건 언제나 장비 뒤에 있는 사람입니다. 무엇 때문에 싸우고 있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가 생각할 때, 권력 외에는 아무것도 내세울 게 없는 부패한 정권의 군인들은 정치 개혁이라는 일관된 목표 아래 각오를 다지면서 엄격하게 훈련받은 전사들의 상대가 될 수 없다. 르완다 애국전선은 군대를 일종의 야전 대학교로 여겼다. 전쟁 내내 르완다 애국전선은 장교들과 병사들에게 군사 훈련뿐만 아니라 정치 교육도 꾸준히 실시해, 누구든 스스로 생각하고 말할수 있도록 독려하고, 강령을 따르면서도 그것에 대해 토론하고 논쟁하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카가메는 이렇게 설명했다. "우린 집단 책임 의식을 기르려고 노력해왔습니다. 르완다 애국전선과 정부와 군대에서 내가 지금껏 맡아온 주 임무는 어떤 상황에서든 책임질 수있는사람들을 양성하는 것이었습니다." 

게릴라 군대 시절 르완다 애국전선은 정치 교육과 더불어 엄격한 규율로도 명성이 자자했다. 아프리카 대부분의 지역에서 군인의 제복과 총은 일종의 약탈 허기권으로 간주되어왔다. 르완다에서 4년을 싸우는 동안 르완다 애국전선은 간부들에게 결혼은 물론 연애까지 금지했다. 도둑질을 할 경우 채찍으로 처벌받았고, 살인이나 강간 같은 범죄를 저지를 경우에는 장교든 사병이든 가리지 않고 처형되었다. 

카가메 장군은 이렇게 말했다.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심한 짓을 하고도 멀쩡하게 지낸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무장한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할수 있는 자유를 주어선 안 됩니다. 무기를 함부로 사용해선 안 됩니다. 무기를 함부로 사용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 사람은 매우 큰 위험이 될 수 있습니다. 분명한 점은 군인의 임무는 사회를 보호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270쪽) 


정치 지도자들은 종종 어린 시절에 대해 말하길 좋아한다. 행복했든 슬펐든 돌이켜보면 그때부터 큰 인물이 될 싹수를 보였다는 분위기를 풍기면서. 하지만 카가메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공과 사가 분명하고 당당했다. 자기 생각을 놀라울 만큼 직선적으로 드러냈지만 그렇다고 허세를 부리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누가 보아도 그는 르완다 사람들 입에 가장 자주 오르내리는 인물이었지만 공직 생활에서 매력적으로 보이거나 시쳇말로 카리스마 있어 보이려고애 쓰지 않았다. 여간해서는 흥분하지 않았지만 그런 냉정함이 오히려 위엄을 뿜어냈다. 사람들이 꽉 들어찬 방에서도 그는 혼자 두각을 나타냈다. 그리고 그는 전술가였다. 그의 뒤에는 군 정보부, 정찰대, 게릴라 부대가 버티고 있었다. 그는 상대방의 움직임을 파악해 예측하고 있다가 불시에 허를 찌르곤 했다. 

(262쪽) 


나는 이따금씩 제노사이드 이후의 르완다가 도저히 손을 쓸 수 없는 나라같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 카가메는 그런 쓸데없는 생각에 빠져드는 사치를 스스로에게 허용한 적이 한 번도 없는 듯했다.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원래 나쁜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교육을 어떻게 받느냐에 따라 나빠질수도, 착해질수도 있습니다." 

그는 특유의 무뚝뚝한 말투로 언제나 아주 차분하게 말했다. 저 앞에 끝도 없이 놓여 있는 실망과 수그러들 줄 모르는 고통을 설명할 때도 그랬다. 그는 작고, 폐허로 변한 조국이 겪는 그 모든 불행을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로 바라보았고, 도전을 즐기는 듯했다. 그는 보기 드문 사람이었다. 행동가이면서 인간과 정치에 대한 통찰력이 어느 누구 못지않게 날카로웠다. 그는 자신이 태어나 만들어가고 있는 나라의 역사를 온갖 각도에서 이미 다 파악한 듯했다. 다른 사람들이 패배를 보는 곳에서 그는 기회를 보았다. 어쨌든 그는 혁명가였고, 15년 넘게 더없이 열악한 상황 속에서 독재자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했다. 

그에게 열려 있는 유일한 길은 해방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해방을 추구했다. 나는 해방이 그가 원하던 것이었다는 점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279쪽) 



르완다라는 나라


1980년대 후반 무세베니는 군대와 정부에서 르완다인들을 내쫓고 르완다인 농장주들의 땅을 몰수하라는 국내의 격렬한 압력에 직면했다. 그 때문에 그는 르완다 애국전선을 조직한 장본인이라는 비난을 종종 받는다. 하지만 1990년 10월의 침공 때 르완다 출신 장교와 병시들이 우간다 군대를 대거 이탈하자 그는 충격과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우간다 군대에 있던 르완다인들의 비밀 엄수보다 훨씬 더 놀라운 사건은 르완다 애국전선이 전 세계를 상대로 벌인 캠페인이었다. 이 캠페인을 통해 르완다 애국전선은 해외에 거주하는 르완다인들의 지원을 끌어냈다. 캄팔라에서 만난 한 우간다인은 이렇게 말했다. "어이가 없었지요. 1980년대 후반 들어 이 르완다인들 상당수가 자신들의 유산에 깊은 관심을 보이면서 가족단위 모임을 조직하더군요. 들 모여서 각자 알고 있는 다른 르완다인들의 이름, 나이, 직업, 주쇼 등을 적어 일종의 가계도를 만들었지요. 나중에 알고 보니 그런 식으로 공동체 전체의 데이터베이스를 작성하고 있었더군요. 비단 우간다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전역, 유럽, 북아메리카까지 아우르는 데이터베이스 말입니다. 약혼식, 결흔식, 세례식 같은 게 있을 때면 그 데이터베이스를 이용해 돈을 거두어들였지요. 부조야 흔히 있는 일이긴 하지만 많이 내라는 압력도 있었고, 또 돈을 어디다 쓰는지 알 수도 없었어요. 어떤 두 거물의 결혼식에서는 5만달러가 들어왔습니다. 돈이 그렇게 많이 들어왔으니까 잔치를 크게 벌이겠지 싶었더니 웬걸요, 아무것도 없더라고요. 어쨌든 그 당시만 해도 우린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267쪽)


해외 난민들은 피가 채 마르기도 전에 르완다로 꾸역꾸역 돌아오기 시작했다. 수만 명이 르완다 애국전선의 바로 뒤를 따라 돌아왔고, 곧이어 수십만 명이 그 뒤를 이었다. 투치족 귀환자들과 도망치는 후투족 군중이 국경에서 서로 마주쳤다. 

아프리카 전역에서뿐만 아니라 저 멀리 취리히와 브뤼셀, 밀라노, 토론토, 로스앤젤레스, 라파스에서도 돌아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르완다 애국전선이 키갈리를 해방하고나서 9개월 뒤, 망명해 있던 투치족 75만 명 이상이 (100만 마리에 가까운 소 떼와 함께) 르완다로 돌아왔다. 이는 사망자를 거의 대체하는 숫자였다. 그 나라에서 몇 달 지내고 나자 내가 만나는 르완다인 가운데 나보다 더 오래 그 나라에서 지낸 사람을 찾기가 어려웠다. 사람들에게 돌아온 이유를 물어보면 그때마다 주로 누가 살았는지 보려고, 자신들이 도울 수 있는 일이 무언지 알아보려고 왔다는 대답이 나왔다. 그러면서 거의 매번 이렇게 덧붙였다. “고향에 오니까 좋아요."

기묘하고 작은 나라 르완다는 또다시 전 세계에 역사상 전례가 없는 대서사를 보여주었다. 오랫동안 난민 네트워크를 운영하면서 의식화와 기금조성, 병력 모집 작업을 해온 르완다 애국전선 지도자들조차도 귀환 인파의 규모에 깜짝 놀랐다. 

과연 무엇이 한번도 르완다 땅을 밟아본 적이 없는 이 수많은 사람이 상대적으로 안정되고 안전한 생활을 버리고 묘지에 정착하도록 움직였을까? 대대로 내려온 추억이라는 유산과 망명 생활의 서러움, 나아가 조국에 대한 기억 또는그리움이 모두 그 이유였다. 제노사이드에 맞서겠다는, 하마터면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질 뻔한 나라의 당당한 일원이 되겠다는 공동의 의지도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경우 그러한 의지와 금전상의 이득을 보겠다는 마음이 함께 뒤섞여 있었다. 

하지만 일확천금만이 목표였다면 망명지에서 중산층 전문직으로 살아가던 사람들이 이웃에게 머리를 잘릴 뻔한 위험을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어린 자녀들과 기족 모두를 데리고 굳이 고국으로 돌아올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이윤 동기는 귀환이 현실적 대안이었던 이유와 몇 달 만에 미니버스 택시가 키갈리의 주요 교통수단으로 다시 떠오른 이유를 설명할 뿐이다. 상점들이 다시 문을 열고 공공시설도 대부분 복구되었으며 신권이 발행되면서 도망길에 오른 제노사이드 주동자들이 가져간 옛날 지폐는 효력을 상실했다. 

(285쪽) 


교도소를 방문하러 가는 사이에 나는 국방부에 들러 카가메 장군을 만났다. 언론에서 나쁘게 보도하는데도 르완다정부가 교도소를 공개하는 이유와 끔찍한 환경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죄수들의 태도를 그가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나는 카가메에게 만약 무고한 사람들을 감옥에 보내 정부에 대한 반감이 커진다면 그로서도 난처한 일 아니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게 문제예요. 하지만 상황에 대처하려면 그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보복행위에 희생되었더라면 문제는 지금보다 훨씬 더 심각해졌을 겁니다. 문제가 되더라도 감방에 보내는 게 낫습니다. 정의를 집행하려면 그 방법이 가장 최선이고, 또 그 사람들을 저 밖에 방치했다가는 살해당할 게 불을 보듯 뻔하니까요."
(302쪽) 



자이르와 '아프리카의 반란'


르완다의 지명 수배자들이 가장 많이 몰려 있던 곳은 자이르와 케냐였다. 부패로 악명이 높던 그 두 나라의 대통령 모부투 세세 세코와 다니엘 모이는 하비아리마나의 절친한 친구로 그의 미망인 아카트 여사를 극진히 대접했다. 특히 모부투는 하비아리마나가 살아 있을때 그를 ‘막내 동생’이라고 불렀을 정도였다.

카가메는 아프리카 독재자들이 인맥을 형성해 서로를 보호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우리 아프리카 형제들한테도 배신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리고 스산한 어조로 이렇게 덧불였다. "그들은 이곳에서 일어난 일이 어디에서나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그러니까 바로 자기네 나라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확신하건대, 그런 일이 일어나면 그들은 우리 땅으로 도망쳐 올 것입니다. 당장 내일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일들은 이미 일어났고, 또다시 일어날수 있습니다."

(313쪽)


나는 제노사이드 당시 자이르 대통령 모부투가 르완다로 무기를 실어보냈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 군대 오페라시옹 튀르쿠아즈에 기지를 내주는 등 르완다 애국전선과 싸우는 하비아리마나를 지원했다는 사실이 자꾸만 생각났다. 게다가 이제는 국경 난민촌에서 재기를 다지는 후투 파워 세력을 선동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국제 사회는 난민촌을 통해 자이르에 돈을 계속 쏟아부으면서 모부투가 제노사이드 주동자들을 부추기는 것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 묻지 않았다. 르완다 정부로선 분통이 터질 일이었다.

(341쪽)


모부투는 아프리카에서 최장기 집권을 자랑하는 독재자였다. 그는 1960년과 1965년 사이에 CIA와 다양한 백인 용병 부대의 용의주도한 지원과 집권당인 콩고국민운동의 폭압정치를 통해 권좌에 올랐다. 그의 장기 집권은 무엇보다도 이웃의 비극을 자신의 이점으로 활용하는 탁월한 능력 덕분이었다. 

냉전 시대에 들어와 미국과 동맹 세력은 중앙 아프리카의 공산주의 세력을 막는 보루로 부랴부랴 그를 내세웠다. 그 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자 모부투는 더 이상 쓸모가 없었다. 1993년 말 급료를 받지 못한 그의 군대가 폭동을 일으켜 살인과 약탈과 강간을 일삼으면서 자이르는 만 퍼센트에 이르는 인플레이션을 감당해야 했다. 모부투는 파멸이 코앞에 닥친 듯했다. 바로 그때 르완다의 제노사이드가 다시 서광을 비춰주었다. 

프랑스는 후투 파워를 구하지 못해 안달하다 이른바 '자유 세계’를 제치고 제일 먼저 자이르에 대한 원조를 재개했다. 물론 모부투는 그 돈을 퍼다가 곧장 스위스 은행 계좌에 집어넣었다. 유럽의 한 외교관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제노사이드는 모부투에게 신이 내린 선물이었습니다."

(343쪽) 


1996년 모코토 학살이 있고 나서 12일 후 유엔 주재 르완다 대사는 안보리에 '즉각 자이르 동부에서의 제노사이드를 막을 조치를 취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대해 자이르 대사는 키부 북쪽의 갈등은 '전적으로 국내 문제'이며 안보리가 관여할 사항이 아니라고 응수했다. 안보리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회의록에 '유감 표명'이라는 상투어조차 기대하지 않았다.

키갈리로 돌아갔더니 키부 북쪽의 투치족 사업가 몇몇이 키창가의 모코토 생존자들을 구하기 위해 후송대를 조직하고 있었다. 5월 말 그중 1000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르완다 국경으로 후송되었다. 투치족 난민들은 6월과 7월 내내 르완다에 속속 도착했고, 싸움이 자이르 동부 전역으로 확대되면서 훨씬 더 북쪽의 투치족들도 우간다로 피신했다. 

(353쪽)


르완다 애국전선이 1994년 키갈리를 점령한 직후 카가메의 옛 동지인 우간다의 무세베니 대통령은 그에게 로랑 데지레 카빌라라는 자이르인을 소개했다. 그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모부투에 저항하는 반군에서 활동했던 인물로, 싸움을 재개하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카가메와 무세베니와 카빌라는 모부투를 그 대륙의 안정과 발전을 위협하는 존재로 인식하는 자이르인들과 그 밖의 아프리카인들과 공조 체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1996년 중반 카가메는 반군 활동을 벌일 군대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멸족의 위협에 직면한 자이르의 투치족은 기꺼이 모집에 응했다. 자이르 전역에서 사병과 장교들이 충원되면서 키갈리는 모부투에 반대해 자이르에서의 무력 투쟁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비밀 거점으로 떠올랐다. 

키부 남쪽에는 4만여 명의 자이르 투치족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물랭게 사람들이라는 뜻의 바냐물랭게로 알려져 있었다. 17세기와 18세기에 그들의 선조가 르완다를 떠나 맨 처음 정착한 곳이 물랭게였기때문이다.

1994년 유엔이 르완다 후투족을 위해 난민촌을 세운 뒤 바냐물랭게는 광범위한 가축 약탈과 공격, 적의 어린 선전의 희생물로 전락했다. 자이르 관리들이 바냐물랭게를 공공연하게 ‘뱀’ 으로 몰아세우면서 그들의 땅을 빼앗았다. 자이르의 라디오 방송과 신문들도 르완다의 후투 파워 매체가 무색하게 흑색선전에 나섰다. 19%년 9월 초에는 바냐물랭게에 대한 조직적인 폭력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저항 한번 해보지 못하고목숨을 잃거나 망명길에 오른 키부 북쪽의 투치족과 달리 바냐물랭게는 무장을 하고 공격자와 싸워 상대방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 그와 동시에 새로 훈련을 받고 우수한 장비를 갖춘 수백 명의 반군 전사들이 르완다에서 자이르로 침투하기 시작했다.

10월 8일, 키부 남쪽의 부주지사 르와시 은가보 르와반지가 그 지역의 바냐물랭게 주민들은 일주일 안에 떠나야 한다고 선포했다. 

카가메는 바로 그런 순간에 대비하고 있었다. "우린 그들을 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아주 철저하게 말이지요. 당시 우리는 세 가지 목표에 집중했습니다. 첫째 바냐물랭게가 개죽음 당하지 않도록 구출한다. 둘째 그들이 싸울 수 있는 힘을 갖추게 하는 한편, 난민촌을 해체해 난민들을 르완다로 데려오는 동시에 전(前) 르완다 정부군과 민병대를 분쇄한다. 셋째 자이르의 상황을 변화시킨다. 이게 그 세 가지였습니다." 

그는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판단될 때까지 자이르가 대규모로 도발해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이 어리석은 자이르 부주지사가 우리에게 기회를 주었지요." 

그래서 작은 나라 르완다가 거인 자이르를 쳤다. 그와 동시에 바냐물랭게가 봉기를 일으켰고, 르완다 애국군 특공대와 로랑 카빌라의 반군 조직인 ‘콩고-자이르 해방을 위한 민주군대통맹’ (ADFL)이 키부 남쪽으로 쳐들어가 북쪽으로 진격했다. 모부투의 겁쟁이 군대는 뿔뿔이 흩어져 도망쳤다. 구호 단체 직원들에게 소개령이 내려졌고, 난민촌은 해체되었다. 

(360쪽)


무세베니는, 모부투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재개된 제2의 제노사이드가 제노사이드에 대한 공포를 다시금 불러오면서 그 여파가 ‘르완다에만 국한되지 않고 전 세계에’ 미쳤으며, “이곳 아프리카에서 우리는 제노사이드에 맞서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모부투가 무세베니의 표현대로 꼭두각시를 부리는 서구의 ‘대행인’이었다면 그 지역 전체를 또다시 피로 물들이고자 획책한 제노사이드 주동자들은 서구의 어리석은 자선 세례에 생계를 의지했다. 지금까지 국제 사회가 중앙 아프리카에 말로는 보호를 약속해놓고 극도의 폭력 앞에서 수십만 명의 시민을 순식간에 내팽개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런 무책임에 맞서 일어난 콩고에서의 반란은, 아프리카가 똘똘 뭉쳐 그 지역의 기장 큰 정치적 이익에 대항해 스스로 정치적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르완다가 아프리카에 대한 국제 사회의 무관심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사례로 떠오르기 오래전 무세베니는 이렇게 말했다. "약간 무관심한 건 뭐 괜찮습니다. 우리를 방치하면 할수록 아프리카에는 더 좋으니까요. 우린 스스로 일어설 것입니다."
바깥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콩고 혁명은 냉전 이후의 아프리카를 대하는 서구의 태도, 곧 아프리카인들은 재앙만 만들뿐 의미 있는 정치는 만들지 못한다는 생각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입증해보였다. 

고마에서 보여준 국제 사회의 무분별한 행동 덕분에 아프리카인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마음먹었고, 또 그럴 수 있는 기회도 얻었다. 카빌라를 후원하던 외국인들은 그의 능력을 대놓고 의심하면서 그를 콩고의 임시 지도자로만 보았다. 카빌라 또한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 곧 그들을 실망시켰다.
하지만 반군 동맹이 단기간에 거둔 승리는 무세베니를고무했다. 카빌라의 취임식 축사에서 그는 전쟁이 “콩고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전체를 해방시켰다"고 선언했다. 새로운중앙 아프리카 지도자들의 정치적 대부인 무세베니의 말은 파급력이 컸다. 그는 정치 발전의 선결 요건으로 국내뿐만 아니라 국가 간 결속, 경제 질서와 사회 안정을 촉구했다. 누구든 그의 말을 들으면 중앙 아프리카의 앞날이 여전히 몹시 어둡다는 사실을 잊어버릴 것 같았다. 

(395쪽) 


1990년 초반 우간다의 경제 성장률은 평균 5퍼센트에 가까웠고, 1996년에는 8퍼센트를 웃돌았다. 남부럽지 않은 도로가 전 국토에 깔렸다. 훌륭한 공립학교, 개선된 의료, 독립적인 사법부, 다소 싸우기 좋아하는 국회, 입이 거칠고 종종 반대 의견을 제시하는언론, 아직은 작지만 꾸준히 늘어나는 중산층이 있었다. 

물론 불안 요소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특히 그 나라의 북부와 서부 지방에서는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디 아민과 오보테의 손에 철저히 유린된 지 십 년 만에 우간다가 실현한 약속은 콩고나 르완다를 '손을 쓸 수 없는 나라’ 또는 ‘희망이 없는 나라’라고 부르던 사람들을 다시 한번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우간다의 수도 캄팔라는 빅토리아 호에 가까운 키갈리 북쪽에서 비행기로 겨우 한 시간 거리에 있다. 하지만 그곳은 완전히 다른 세상처럼 보였다. 희망과 활기가 넘치는 도시였다. 물론 정부에 불만을 품은 사람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불만을 야기하는 문제는 정부가 주도하는 민주화 속도가 너무 더디다거나, 너무 빠르다거나, 또는 제자리걸음이라는데서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선결과제가 신변안전인 르완다에서는두려움 없이 그저 마음껏 토론이라도 해볼 수 있기를 바라는 그런 문제였다. 

(397쪽) 


무세베니는 르완다 애국전선이 이끄는 르완다 정부가 우간다의 꼭두각시 정권으로 널리 비치고 있으며, 카빌라의 정적들이 그에게 ‘르완다-우간다’ 제국주의의 앞잡이라는 꼬리표를 붙였디는 사실에 카가메와 똑같이 분개했다. 무세베니는 르완다와 콩고를 혹평하는 이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자들은 한때 프랑스의 꼭두각시였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도 꼭두각시 아니면 주인이라고 생각합니다."

(400쪽)


1997년 12월 중순 미국 국무장관 매들린 올브라이트가 아디스아바바를 찾아 아프리카통일기구 앞에서 연설에 나섰다. "국제 사회는 1994년 르완다에서 이른바 제노사이드라는 잔학 행위가 처음 일어났을 때 좀 더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했습니다." 아프리카 순방 중 잠시 짬을 내 르완다에도 들른 올브라이트는 인도주의 원조가 “무장한 난민촌을 지탱하거나 제노사이드 살언자들을 지원하는 데” 악용되었다며 비난의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사과'로 알려진 올브라이트의 발언은 국제 사회가 변명을 일삼으며 르완다에서 제노사이드가 일어났다는 기본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던 낯부끄러운 버릇과 결별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석 달 후 올브라이트에 뒤이어 클린턴 대통령이 아프리카를 방문했다. 1998년 3월 25일, 그는 제노사이드가 있고 나서 서방 지도자로는 처음으로 르완다를 찾았다. 그는 비행기에서 나오지도 않은 채 잠깐 머물렀을 뿐이지만 그의 방문은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몇 시간 동안 제노사이드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클린턴은 올브라이트의 사과를 거듭 인용하며 학살 당시 개입을 거부한 것도, 난민촌의 살인자들을 지원한 것도, 모두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결국 클린턴은사실을 인정했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르완다에 관심을 기울이라는 압력을 받지 않았더라면 그 역시 계속 그 나라를 무시하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어쨌든 그는 제노사이드 현장을 직접 들르기로 결정했고, 비록 너무 늦긴 했지만 제노사이드를 둘러싼 전쟁에 극적으로 뛰어들었다.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의 수반으로서 그는 기록을 바로잡기 위해 키갈리로 날아왔던 것이다. 

“다들 무척이나 놀랐지요. 정치인이 이해득실이 전혀 없는데도 굳이 자기 돈을 들이면서 진실을 말하려고 여기까지 날아왔으니까요." 키갈리에 사는 한 후투족 지인이 전화로 내게 한 말이다. 다른 투치족 역시 전화로 이렇게 말했다.
"그가 우리한테 한 말의 골자는 우린 잊힌 야만인이 아니라는거였어요. 이곳 생활은 여전히 끔찍합니다. 하지만 당신네 클린턴 씨 덕분에 조금 덜 외로워졌습니다." 그는 한바탕 웃었다. "우리가 죽거나 말거나 관심도 없어 보이던 사람이 우리한테 그런 느낌을 줄 수 있다니 신기한 일도 다 있지요. 하지만 르완다 사람을 더이상 놀라게 하기는 힘들겁니다."

(4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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