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흑의 핵심. Heart of Darkness
조셉 콘래드. 이상옥 옮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그 상앗빛 얼굴에서 나는 음침한 오만, 무자비한 권세, 겁먹은 공포, 그리고 치열하고 기약 없는 절망의 표정이 감도는 것을 보았거든. 완벽한 앎이 이루어지는 그 지고(至高)한 순간에 그는 욕망, 유혹 및 굴종으로 점철된 그의 일생을 세세하게 되살아보고 있는 것이었을까? 그는 어떤 이미지, 어떤 비전을 향해 속삭이듯 외치고 있었어. 겨우 숨결에 불과했을 정도의 낮은 목소리로 두 번 외치고 있었어. <무서워라! 무서워라!>”
재작년부터 책을 읽다 보니 <암흑의 핵심>에 계속 발이 걸려 넘어졌다. 꽤 여러 책에서 이 소설이 언급됐던 것 같다. 그 중 로버트 카플란의 <Coming Anarchy>와 스벤 린드크비스트 <야만의 역사>는 이 소설을 주요 모티브로 삼아 아프리카를 살펴보는데, 두 책의 내용과 저자들의 성향이 정반대임에도 불구하고 한 지점에서 만난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카플란은 여러 책에서 <암흑의 핵심>과 함께 <노스트로모>, <로드 짐> 등 콘라드의 소설들을 거론했던 것으로 보아 어쩌면 콘라드의 팬인지도 모르겠다.
<암흑의 핵심>, <어둠의 심장>, <어둠의 속> 등등 이 책의 제목을 우리말로 옮길 때 여러 가지가 통용되는 것 같다. 그 중에 <암흑의 핵심>이 제일 그럴싸하게 들리는데, 내가 읽은 민음사 버전은 영문학자 이상옥 서울대 교수가 번역을 했다. 옛날 분이 번역을 해서 그런지 문장도 좀 예스럽고 좀 억지로 만들어 붙인 듯한 한자어들도 눈에 보인다. 책의 분위기하고는 잘 어울린다.
어찌어찌 책장을 다 넘기기는 했다.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느껴야하는지를 정리는 잘 되지 않지만 어쨌든 인상적이다.
책은 ‘말로’라는 이름의 한 선원이 아프리카의 내륙에 강을 타고 들어가 상아를 실어 나르는 배의 선장으로 일하던 때의 이야기를 주변 동료들에게 들려주는 형식으로 돼 있다. 기나긴 독백 형식의 소설들이 그렇듯 지겨운 포맷인데다가 내용도 암울하기 그지없다. 말로는 식민주의를 자랑스러워하지도, 창피해하지도 않는다. 그냥 담담하게 ‘묘사’할 뿐이다. 그 ‘뻔뻔함’ 혹은 ‘담담함’이 오히려 잔혹함을 더욱 효과적으로 드러내 준다.
말로는 영국 출신의 선원이다. 그는 식민지에서 흑인들의 손목을 잘라가며 상아를 채취하는 한 벨기에 무역회사에 고용돼, 위험을 무릅쓰고 콩고강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는 항로에 오른다. 항행의 목적은 현지 관리인이 내륙에 모아놓은 상아더미를 싣고, 관리인을 데리고 내려오는 것이다. “어릴 적부터 지도의 빈 부분을 보면서 ‘가고 싶다’는 꿈을 키웠던” 말로는 ‘비어있는’ 아프리카 땅에서 인간 같지도 않은, 그러나 인간이 아닌 것도 아닌 검은 존재들을 본다. 그들 사이사이에 들어가 악행을 벌이는 비겁하고 안일하면서 이기적인 백인들을 본다. 그는 아프리카의 속살(암흑의 핵심!)을 향해 점점 다가간다.
내륙에 몇 년 째 체류했다는 관리인은 현지 직원들에게는 영웅 대접을 받는데, 실제로는 흑인들 머리를 잘라 울타리 기둥 장식을 하는 종류의 인간이다. 말로는 애써 “나는 자네들이 지금 생각하는 것만큼 충격을 받지는 않았어”라고 말하지만, 말라붙어 오그라든 천연 ‘기둥장식’은 켜켜이 쌓인 상아더미 뒤에 가려진 식민지의 진실을 너무나도 냉담하게 전달한다.
엽기적인 기둥 장식을 해놓았던, 흑인들의 숭배를 받았다던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는 말로가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허망하게 쓰러져 죽는다. 그가 남긴 말은 두 마디, “무서워라! 무서워라!”였다. 무시무시하고 야만적인 식인종들, 저 어둠의 자식들을 백인 식민주의자의 마지막 말. 그를 두려움에 떨게 만든 ‘암흑의 핵심’은 무엇이었을까. 아프리카의 끔찍한 야만인들? 말로가 보았던(죽어가는 상아회사 관리 스스로가 만들어낸) 식민지의 잔인한 진실들? 그 모든 것을 가능케 한 인간의 내면 그 자체가 사실은 ‘암흑의 핵심’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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