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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NEWS 더 뉴스, 아시아를 읽는 결정적 사건 9 - 아시아 언론의 눈으로 본 아시아

딸기21 2008. 12. 16.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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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NEWS 더 뉴스, 아시아를 읽는 결정적 사건 9. 

아시아네트워크/푸른숲. 쉐일라 코로넬 외. 오귀환 옮김 




▷ 필리핀 시민들은 곧 아키노의 무능과 무경험에 좌절했다. 말썽 많던 그녀의 대통령 임기가 끝나는 1992년, 시민들은 보다 전문적인 지도자를 원했다. 국방장관과 군 참모총장으로 오랫동안 정부조직을 이끌어왔던 피델 라모스(Fidel Ramos)가 적임자로 보였다. 그는 필리핀을 아시아의 차세대 호랑이 경제국가로 만들겠다는 비전을 지녔고 실제로 필리핀은 높은 경제성장을 기록했다. 그러나 1997년 말 몰아닥친 동아시아 경제위기로 희망은 사라져 버렸다. 필리핀이 한때 맛본 번영은 거품일 뿐이었고, 대다수 필리핀 시민들은 거품 밖 현실로 내팽개쳐졌다.


▷ 1770년 샤(Shah) 왕조는 무력으로 지역 일대를 통일해 네팔을 세웠다. 지금까지 네팔을 통치해오고 있는 샤 왕조의 역사는 음모와 내부투쟁으로 점철돼 있다.1854년 한 정군이 왕궁에서 귀족 40명을 학살했다. 그때부터 104년 동안 네팔 권력은, 총리직을 독점하며 실권을 행사해온 친영파 라나(Rana) 가문에게 넘어갔다. 그리고 1950년 신생독립국 인도의 도움으로 권력을 되찾을 때까지 샤 왕조의 국왕들은 이름뿐인 국가수반이었다.

네팔은 1959년 첫 선거를 통해 민주적으로 선출한 총리가 영국식 의회를 주재했다. 그러나 1960년 마헨드라(Mahendra) 국왕이 쿠데타를 일으켜 총리를 투옥하고 의회를 해산한 뒤 정당을 금지하며 철권통치를 시작했다. 그는 세 아들(비렌드라·갸넨드라·디렌드라)을 라나 가문의 세 자매와 나란히 결혼시켰다.

1972년 마헨드라 국왕이 서거하자 비렌드라가 왕위를 계승했다. 그는 유럽에서 교육받은 말씨가 부드러운 자유주의자였다.1989년 피플 파워의 물결이 카트만두를 휩쓸었을 때, 비렌드라는 다당제 민주주의를 회복시키고 입헌군주가 되었다.

그러나 1990년 이후 왕족의 권력과 영향력 상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왕궁 강경파들이 권력을 되찾으려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사실은 차트만두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갸넨드라는 전제군주적인 성향을 지녔고, 계모인 라트나(Ratna) 대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중 1996년 마오쩌둥 사상을 신봉하는 반군이 정부 전복을 목표로 무력 투쟁을 시작했다. 카트만두 정당들의 정치적 무능과 부패가 불러일으킨 시민들의 환멸은 마오이스트에게 기회를 제공했고 2000년에 이르러 그 영향력은 네팔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비렌드라 국왕은 헌법이 자신에게 부여한 역할을 진지하게 여겼고 사태에 개입하지 않았다. 그래서 비렌드라 국왕은 인기가 높아졌고, 대중이 진심으로 좋아하고 존경하는 인물이 됐다.

...왕족들이 지나치게 방자하다는 이야기가 자주 들려왔다. 왕족의 욕심과 재산, 사업 이권 개입은 곧잘 사람들의 화젯거리가 되판 했다.


▷ 나는 권력과 유니온 카바이드의 유착관계에 대해 하나씩 베일을 벗겨나갔고, 1982년 9월부터 1984년 6월 사이 이 회사로부터 특혜를 받은 사람들의 명단을 확보해 보도했다. 정치가와 현직 관료의 친척들 여러 명이 유니온 카바이드에 고용되어 높은 임금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퇴직하고도 높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감사원장은 주요기밀에 대해 발설하지 않도록 유니온 카바이드와 비밀유지계약을 맺은 상태였다. 또 보팔 고지대 호수 뒤편에 멋지게 자리 잡은 유니온 카바이드 영빈관은 고위 정치인들이 가고 싶어 하는 곳으로 인기가 높았다.

국립 병원인 하미디아(Hamidia) 의사들 사이에서 유니온 카바이드라는 단어가 곧 ‘함구령’ 이라는 말로 통했다. 화학물질에 노출된 유니온 카바이드 노동자들이 자주 찾는 이 병원은, 유니온 카바이드가 특별 사설 명동 하나를 설립해 자금을 지원해왔기 때문에 모든 것을 비밀에 붙일 수 있었다. 일부 선임 의사들은 유니온 카바이드와 ‘한패’나 다름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젊은 익사들은 나를 많이 도와주었다.

...‘믿음 작전’ 이 끝나자 ‘은폐 작전’이 시작됐다. 마디야프라데시주 정부홍보처는 언론계 친구들이 유니온 카바이드의 보상 문제에 초점을 맞추도록 유도했다. 시민 생명 보호에 실패한 주정부의 범죄적 태만은 무관심 속에 덮여버렸다.

이러한 비밀캠페인은 구급차 추적자들로 불리는 미국 변호사들이 당도하면서 더욱 기승을 부렸다. 그들은 인도 주정부와 똑같은 말들만 해댔다. 하루 두 끼 식사를 해결하기 위해 힘겨운 투쟁을 벌이고 있는 사람들에게 수천 달러를 주겠다고 공수표를 날렸다.

...또 다른 배신이 꼬리를 물었다.1985년 중앙정부는 피해자들의 개별적 보상요구 투쟁을 전면 금지시켜버렸다. 중앙정부는 국가가 아버지처럼 친권을 행사한다는 이른바 국친 개념을 들고 나왔다. 뿐만 아니라 유니온 카바이드의 총 보상액 한도를 4,700만 달러로 정해버렸다. 사법부도 한편에 섰다. 대법원은 1989년 유니온 카바이드 간부직원들을 처벌할 수 있는 형사재판을 기각해버렸다.

...보상금 분배가 시작되자 저마다 수백만 달러씩 받으리라고 꿈꾸며 기다려 왔던 사람들은 또다fms 충격에 휩싸였다. 희생자 가운데 90퍼센트가 넘는 사람들에게 불과 500달러씩이 건네졌기 때문이다.

피해자들은 쥐꼬리만 한 액수를 받으면서도 또 속을 뻔했다. 2004년 지루한 보상비 분배 과정이 최종국면에 접어들었을 때, 1989년 인도준비은행에 예금과 보상비 원금은 달러 환율 변동과 이자 동으로 두 배가 넘는 금액으로 불어나 있었다. 그런데도 환율 변동을 고려하지 않고 액면 그대로 보상금을 지불하려던 것이다.

최종집계 결과. 보상신청은 56만 6,786건이었다. 이 가운데 약 95퍼센트가 최소 금액인 500달러를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약 4%가 700-1,250달러를 받았고, 불과 1%만이 2,000-4,000달러를 받았다. 그리고 사고 당일 밤, 보팔에 있지도 않았던 사람들의 명단이 길게 동장했다. 이들은 모두 막대한 보상금을 타냈는데, 기자·정부관리·정치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판사는 한술 더 떠 보상금을 앞으로 6개월 동안 은행에 예치시키라고 명령했다.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이 보다 효율적인 소비 계획을 세울 시간을 두도록 강제한다는 법령에 따른 것이다. 거금 수백만 달러를 6개월 동안 은행에 묶어두려는 판사의 속셈이 무엇인지 이상한가. 예금 유치에 혈안인 은행의 생리를 아는 사람이라면 쉽게 알아챘을 게다.


▷ 자와히리 박사는 1998년 8월 이후로 4개월 동안 전화를 하지 않았다. 나는 다음 전화를 기대하면서도 동시에 오사마 빈 라덴이 탈레반 지도부와 갈등을 해결한 뒤에야 전회를 할 수 있으리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탈레반 지도자 물라 오마르는 1998년 5월 하순 코스트에서 오사마 빈 라덴이 나를 포함한 파키스탄 기자들을 초청해 대 미국 이스라엘 ‘성전’을 선포하자 화를 냈다. 물라 오마르는 자신이 지도자라는 것을 오사마 빈 라덴이 인정하고, 또 탈레반과 다른 나라 관계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행동을 자제하기 바랐다. 탈레반 관리들은 물라 오마르가 코스트에 있는 오사마 빈 라덴을 소환해 기자회견에 대해 심문했다고 귀띔해 주었다. 자와히리 박사는 오사마 빈 라덴이 물라 오마르의 지도권을 받아들였고, 물라 오마르를 충실한 신자들의 사령관. 이라 부르는 내용이 담긴 성명을 나에게 전했다

우리가 이슬람 전사 훈련 캠프가 6개 있는 자와라(Zhawara)에 도착했을 때는 거의 한밤중이었다.

모두 캠프 6개로 구성된 이곳은 아프간 무자헤딘 사령관 마울비 잘랄루딘 하카니(Maulvi Jalaluddin Haqqani)가 설립했다. 코스트 정복자로 알려진 그는 게릴라전 전문가로 존경을 받아왔다. 1994년 후반 급부상한 탈레반에 합류한 하카니는 탈레반 정권에서 장관직까지 맡았다. 1996년 9월 탈레반이 당시 대통령 부르하누딘 랍바니(Burhanuddin Rabbani)와 국방장관 아마드 샤마수드(Ahmad Shah Masood)가 이끄는 무자헤딘 정부를 물리치고 수도 카불을 빼앗은 뒤의 일이다.

하카니는 노령임에도 현재 코스트, 팍티아(Paktia). 팍티카(Paktika)를 비롯한 아프간 남부에서 미국이 주도하는 연합군에 맞서 싸우고 있는 탈레반 최고 사령관 가운데 하나다. 미국은 물라 오마르 다음가는 특급 수배자 하카니를 잡겠다고 정보제공자에게 거액의 보상금을 내건 상태다.

또 다른 아프간 무자헤딘 지도자는 굴바딘 헤크마티아르(Gulbaddin Hekmatyar)다.

6개 캠프 기운데 하나는 아랍인들이 독점 사용해왔기 때문에 아랍캠프 또는 오사마 빈 라덴 캠프라 부른다.


오사마 빈 라덴 캠프에 도착해 기다리고 있던 우리는 크게 놀랐다. 캠프 전사들이 귀가 멍멍해질 만큼 총을 쏘아대며 환영 행사를 별인 탓이다. 오사마 빈 라덴의 값비싼 랜드크루저가 호위 차량들을 달고 캠프에 도착하는 순간 로켓발사기, 기관총, AK47소총(칼라슈니코프)이 일제히 허공을 향해 불을 내뿜었다. 검은 복면을 한 중무장 정예요원들이 경호차량에서 뛰어내려 오사마 빈 라덴이 탄 차의 문을 열고 그를 에워쌌다. 극적인 순간이었다. 기자들은 깊은 인상을 받았다. 오사마 빈 라덴이 기자회견장으로 정한, 캠프에서 기장 큰 방으로 천천히 걸어 걸어갈 때까지 총소리가 이어졌다.

환영식에 참가한 전사 대부분 오사마 빈 라덴의 무장조직 소속이 아니라고 밝혔고, 알카에다를 늘어본 적 없다고 했다. 캠프에 있는 아랍인들이 오사마 빈 라덴의 도착에 맞춰 총을 쏘아 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사마 빈 라덴의 약삭빠른 ‘전매특허’ 수법이었다.


▷ 1988년 베트남군은 캄보디아에서 철수했다. 그러나 캄보디아는 여전히 베트남이 조종하는 괴뢰정부가 지배했고 민주캄푸치아는 게릴라전으로 맞서고 있었다. 크메르루주(민주캄푸치아)는 전쟁에서 패배하지는 않았으나 승리하지도 못했다. 1990년 캄보디아 바깥세상의 도움이 필요했다. 유엔 개업을 환영한 것은 베트남이 아니라 캄보디아였지만, 베트남은 교활하게 서구 언론의 대대적인 반(反) 크메르루주 캠페인에 힘입어 국면 전환에 성공했다. 유엔이나 훈 센(Hun Sen)을 지지하는 베트남을 포함해 누구도 민주캄푸치아 세력을 없앨 수 없었지만, 민주캄푸치아는 정치에서 벗어나 스스로 변방에 고립되는 길을 걸었다.

이런 흐름은 1997년 훈 센 쿠데타로 달라졌다. 폴 포트는 훈 센을 배후조종하는 베트남에 대한 완고한 강경노선으로, 손 센(Son Sen)과 타 목은 협상노선으로 갈라졌다. 결국 폴 포트는 손 센이 배신했다고 의심해 처형하고, 다른 지도자들을 가택 연금시켰다. 그러자 타 목이 반란일 일으켜 폴 포트를 체포했다 그러나 이 상황은 추측일 분, 정확한 증거는 나오지 않은 상태다.

1996년 이앵 사리가 민주캄푸치아 주류에서 이탈해 훈 센에게 투항하면서 결국 민주캄푸치아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탄이 됐다. 그 뒤 현실주의자인 폴 포트 조카 손 홍(Son Hong)은 타 목이 통제하던 병력 일부를 설득해 진영을 빼버렸다. 그렇게 해서 민주캄푸치아는 훈 센과 군사적으로 맞서 싸울 수 있는 힘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 폴 포트 시신은 젊은 병사들이 직접 싼 나무관 속에 누워 있었다. 나는 그 관이 태국산 기성제품이 아닌 것을 확인하고 마음이 놓였다. 마지막 길을 가는 혁명가를. 그 공과는 역사에 맡기고, 그래도 캄보디아 나무관에 담아 보냈으면 히는 바람 탓이었다. 관은 큰 통나무 둥치들과, 폐타이어 그리고 그가 마지막까지 썼던 매트리스 위에 올려져 있었다.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붙였다. 검은 연기가 당렉산맥 정글 위로 힘차게 솟구쳐 올랐다.

폴 포트 사망 뒤, 모든 것이 급격히 무너졌다. 민주캄푸치아 마지막 거점이었던 안롱벵과 자치권을 인정받았던 파일린(Pailin)은 실질적으로 훈센 정부 손에 넘어갔다. 이로써 민주캄푸치아는 역사 속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길고 긴 캄보디아 역사라는 관점에서 볼 때. 폴 포트의 죽음은 프랑스, 미국. 베트남의 침략으로 이어져온 지난한 민족항전사의 종말을 알리는 서곡이었다. 인도차이나반도를 호령하는 대 크메르제국을 건설했던 크메르민족은 바야흐로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 “우리는 독일 통일을 반대하지 않는다.”

예상 밖의 대답이었다. 왜냐하면 독일 통일은 단순히 하나의 국가가 된 것이 아니라 서독이 동독을 흡수한 형태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독일 통일이 한반도에 중대한 영향을 줄 것이라 생각했다. 한국 국영방송까지도 흡수통일에 강한 반감을 드러냈다. ‘결코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다’ 는 김 주석의 한 마디는 오히려 그가 독일 통일에 대해 얼마나 심각하게 생각해왔는지 잘 보여 준 셈이다.


▷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1920년대 마지막 절대군주였던 국왕 라마7세 때는 훨씬 자유로웠다. 불경죄 위반에 대한 최고 형량은 우익 군부세력이 쿠데타로 정부를 장악한 1976년에 이르러서야 3년에서 15년으로 늘었다.

사실 주류 신문에서 이런 끔찍한 검열 규칙 준수에 충분히 민감하지 (순종적이지) 않은 사람은 편집국 부장이나 논설위원으로 승진할 수 없다. 부장이 되려면 왕실에 대한 비판정보를 철저히 걸러낼 수 있는 식견을 신문사주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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