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얘기 저런 얘기/딸기의 하루하루 248

남양주 비루개 식물원 카페

2021년 8월 14일 토요일. 좀 멀긴 했다. 이 무렵 강화도 조양방직 다녀오고 나서 서울 근교 카페를 한동안 찾아다녔다. 회사 그만두고 놀게 되면서 주말에 아주 신이 났던 모양이다. 비루개에 갔던 날은 남양주 목향원이라는 식당에 들러서 1인당 2만원(으로 기억; ; 가물가물) 하는 숯불돼지구이와 쌈을 먹었는데 제법 훌륭했던 기억이. 수국을 많이 본 날이었다.

100년 된 물건들이 들어왔다

엄마네 집 이사를 앞두고, 오래된 물건들을 우리집으로 가져왔다. 놋쇠 상자는 외할아버지가 20대 때 만드신 거라고 한다. 외할아버지가 1900년대 초반생이시니까 100년 가까이 된 물건이다. (비포 사진이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못 찍었음.) 우리 집 재미난 여대생과 함께 어제 오후 내내 과탄산소다와 식초를 가지고 수세미로 문질렀다. 거의 암갈색이던 것을, 비록 얼룩이 남아 있긴 하지만 반짝거릴 정도로 환하게 만들었다. 안에는 금은보화를 넣어놨…..;; 외할아버지는 내가 서른 무렵에 돌아가셨지만 할아버지와 얽힌 추억은 별로 없다. 늦게 결혼하셔서 늦게 엄마를 낳으셨기 때문에 다른 집 할아버지들보다 훨씬 연세가 많았다. 그래서 내게 할아버지는 언제나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나이 드신 분이었다. 선원이었고 ..

삼각지-남영동-용리단-이태원 식당 카페

삼각지 고가차도 부근 시후쿠- 고가도로 아래 구석탱이에 있는데다 넘 작아 보여서 자리 없는 줄 알고 안 갔는데 알고 보니 안쪽에 자리가 생각보다 넉넉하게 있었음. 유케동(육회), 규동, 믹스동, 차슈면, 쿠로마요라멘을 먹어봤는데 다 맛있었음. 다음에 가면 탄탄면도 먹어보고, 꼭 음식 사진을 찍어보겠음. 밀도메인- 베르디움 1층 조그만 빵집. 청년들이 하는데 빵 겁나 맛있음. 달달이는 없고 주로 식량(?)용 빵들. 오전에 가서 갓구운 거 사다 먹은 뒤 빵에 대한 나의 세계관이 바뀌었음. 몽탄- 고기가 좀 느끼. 기름기가 많음. 내 취향은 아님. 맛은 있지만 그렇게까지 대기하고 먹을 일인지. 숯불나라가 더 좋음. 또한 몽탄은 알바와 직원들을 막 대한다고 함 용산 양꼬치- 양 통다리구이가 유명하다고 하는데 안..

봄, 산책

늘 걷는 길. 늘 예쁘고 오늘도 예쁨. '용한집' 들어오면서 산책길 대로변 코스의 분위기는 매우 어수선해졌지만. 그래도 공원 들어오면 분위기가 너무나 좋다. 용산가족공원에서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넘어 오는 길의 연못. 오솔길을 지나 박물관 마당으로. 석탑은 언제나 좋음. 호수와 정자도 좋음. 수국이 핀 걸 보니 여름인가 보다. 몇 분만 걸어 나오면 이런 풍경으로 바뀐다.

[근교 카페] 강화도 조양방직

도통 돌아다니는 일이 없었는데, 일을 그만두면서 시간이 어마어마하게 많아진 관계로 요즘 여기저기 둘러보고 있습니다. 2주 연달에 주말에 찾아갔던 곳, 조양방직. 강화도에 가본 것이 30년만입니다. 그때 나름 (인터넷 시절도 아니었는데) '맛집'이라고 찾아갔던 식당이 있었어요. 인터넷 검색해보니 너무 유명해져서 서비스와 음식이 나빠졌다고 해서 패스. 그 대신에 '대청마루'라는 솥밥집을 갔는데 매우 만족. 이제 어디 가볼까, 하다가 들른 곳이 조양방직입니다. 조양방직은 1937년 홍재용, 홍재묵 형제가 설립한 방직공장이다. 설립 당시 125,000원(현시가 60억 원 내외)의 자본금으로 시작하였으며 700여 평의 2층 건물과 50여대의 직조기를 갖추고 인견과 마직물 염색을 주로 하였다. ... 홍씨 집안이 ..

광화문의 아랍 건축, 그리고 오만 이야기

서울 광화문, 한글길을 살짝 올라가면 한국에서 보기 드문 아랍풍 건물이 보입니다. 주한 오만대사관입니다. 아마 지나치는 분들 모두 한번씩 고개를 돌려 쳐다봤을 겁니다. 건물이 정말 이쁘거든요. 이국적인 모양새 때문에 '들어가서 구경하고 싶다'고 늘 생각했는데, 며칠 전 기회가 왔습니다! 이란 전문가인 구기연 박사님 덕분에 중앙일보 채인택 선배, 한겨레 조일준 기자와 함께 오만대사관을 방문했습니다(이분들과 친하게 지내면 즐거운 일이 좀 생깁니다 ㅎㅎ).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당연히 문. 아랍/이슬람 건축에서 가장 예쁜 것은, 아니 어느 곳의 건축을 찾아가도 가장 마음에 담기는 것이 제 경우에는 문이더라고요. 문을 열고 들어가면, 지하로 내려가 대사관 건물 안으로 들어갑니다. 실내도 이쁘죠? 넓지 않..

신문기자 일을 그만뒀습니다

"니 몇년 됐노." "26년이요." "오래 했네. 고생했다." 오랜만의 통화에서 아버지는 이렇게만 말씀하셨습니다. 기자 아들, 기자 딸을 늘 자랑스러워하셨던 기자 출신 아버지. 이제는 기자 사위 하나만 남았네요. 몇달 전 제가 빌려준 난민촌에 관한 책을 읽고 난 후배가 그러더군요. 제가 밑줄 그어놓은 부분을 보니까 "당장이라도 출장을 떠날 사람처럼" 줄을 쳐놨더라고. 그 말 듣고 웃었는데 뒤에 혼자 곰곰 생각해보니 그 후배의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언제 어디를 가든 기사를 쓸 수 있도록 준비하는 마음으로 책을 읽고, 자료를 뒤지고. 하지만 기자로서 치열하게 살아왔느냐고 스스로 묻는다면 선뜻 '그랬다'고 답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항상 어딘가 딜레탕트하게, 재미있는 일만 해왔던 듯 하고요. 글을 쓰는 걸..

보스턴고사리

보스턴고사리. 12년 전 이사할 적에 여동생이 선물해준 초록둥이. 그 후로 집을 여러 번 옮겼지만 이 녀석들은 끈질기게 우리 집에서 살고 있다. 여러 화분이 모두 고르게 살아남은 것은 아니고, 처음에 들어온 화분 3개 중 하나만 살았다. 그런데 거기서 계속 번식을 시켜 늘 고사리 화분이 서너개는 초록 뿜뿜을 하고 있다. 학명은 Nephrolepis exaltata라고 한다. 딱 보면 고사리같이 생겼다. 원산지는 아메리카 대륙인데 따뜻하고 습한 곳 어디에서나 잘 자란다. 그런데 왜 하필 '보스턴' 고사리일까. 위키피디아의 설명으로는, 보스턴 가는 길에 생긴 변종 때문이라고 한다. 이 종은 원래 이파리더미(한 줄기에서 작은 잎사귀들이 갈라져나가는 '엽상체')가 곧게 서 있는데, 1894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목사님을 만나고 온 날

어릴적 난지도에 나를 데리고 가주신 목사님이 계셨다. ‘쓰레기마을 사람들’을 본 건 그 때가 처음이었다. 1983년. 그 후로 시간이 많이 흘렀고, 목사님과의 인연은 이어지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기억은 생생하다. 그분 인척이 울엄마와 아는 사이라 얼마 전 소식을 전해 들었다. 여전히 내 이름을 기억하고 계시고, 가끔 신문에 내가 쓴 글도 읽었다고 하셨댄다. 내 책의 에필로그를 쓰면서 난지도의 기억도 짤막하게 적었다. 그러면서 목사님 생각이 났다. 지난 토요일에 36년만에 목사님을 만났다. 늙으셨다. 국민학생이던 내가 쉰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으니. 내 책을 선물해드렸다. 목사님은 그 조그만 개척교회(당시엔 전도사님이셨다)를 만들 무렵에 난지도 빈민들과 함께 하고 있었고, 근육병 장애인들과 함께 하고 있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