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뉴 차르, 드라마같은 푸틴 평전

딸기21 2016. 10. 7.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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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차르'.


굉장히 재미있었다. 미국 뉴욕타임스 모스크바 지국장을 지낸 스티븐 리 마이어스가 지은 블라디미르 푸틴 평전(이기동 옮김. 프리뷰)이다. 말 그대로 '평전'인지라, 푸틴의 인생을 할아버지 시절부터 비교적 최근 상황까지 길고 자세하게 정리했다. 


우선 책 분량이 만만찮다. 각주 빼고 본문만 679쪽. 푸틴 측근들의 증언과 회고록, 그를 인터뷰한 언론, 러시아에서 나온 온갖 보도들을 종합해 생생하게 여러 상황을 재구성했다. 저자는 푸틴의 행보에 대한 '그 당시' 상황에서의 평가를 회피하지 않지만 몹시도 객관적이다. 어떤 일들이 푸틴의 성향을 만들었고 어떤 결정으로 이어졌는지 소개하고 평가하되, 악마화하지도 않고 예찬하지도 않는다. 푸틴은 금수저 출신도 아니었고 처음부터 대단한 권력을 쥐고 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갔고, 그 과정에서 '권력이 권력욕을 낳고 권력욕이 더 큰 권력을 낳는' 권력자의 사이클을 밟았을 뿐이다. 



체첸 전쟁은 권력을 잡기 위해서가 아니라 '소신 때문에' 벌인 측면이 강하며, 그것이 권력을 잡는 데에 도움을 주었을 뿐이다. 사실 이 과정을 놓고 푸틴의 '동기와 결과'를 딱 떼어내긴 힘들다. 베슬란 초등학교 인질사건은? 푸틴이 '학살'을 저질렀다고 하는 이들도 있지만 악성 루머였을 뿐, "당시 러시아 군인들은 학교를 공격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말하자면 인질극 대응을 제대로 못해 벌어진 참사였다. 푸틴은 9.11 테러 뒤 가장 먼저 부시에게 전화를 걸어 애도했고, 적극적인 협력을 다짐했고, 미국과 '친구'는 아닐지언정 적이 되지 않고서 관계를 잘 풀어보려고 했다. 


하지만 지구는 돌고 있고 세상은 변하고 푸틴도 변하고... 책의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푸틴에게서 오로지 권력욕만 두드러진다. 결정적인 전환점은 3기 집권이었다. 시기적으로 봐선 그렇지만 바로 그 직전에 리비아 내전이 있었고, 미국의 패권주의에 대해 푸틴이 경계할 이유가 충분했다. 러시아는 자기들의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이미 1980년대에 10년 동안 치렀고, 그 전쟁이 가져온 지하디스트 부메랑을 체첸에서 겪었다. 리비아 내전 당시 푸틴이 지하디스트의 부활을 경고했던 것은 의미심장하다. 최소한 그것은 현실주의자의 판단이었고, 여기서 푸틴의 '의도'를 이야기하는 것은 이제는 무의미해 보인다. '결과'는 결국 그의 경고대로 됐으니까. 버락 오바마의 천진난만한 이상주의는 무능력할 수밖에 없었고, 결과는 지하디스트의 글로벌 복수혈전과 대량살상이다. 아이러니다.


푸틴은 결국 크림반도를 합병함으로써 루비콘 강을 건넜다. 국내외 비판에 부딪친 그의 행보는 결국 '러시아 민족주의'와 '우리식 민주주의(주권 민주주의)'와 반대파 탄압으로 향해간다. "러시아의 운명은 이제 푸틴 자신의 운명과 한데 엉켜 있다. 둘 다 고골리의 <죽은 혼>에 나오는 트로이카처럼 미지의 문명을 향해 질주할 것이다. 그저 앞을 향해 돌진할 뿐, 어디로 가는지는 푸틴 자신도 모를 것이다. 맹렬히, 흔들림 없이, 뒤돌아보지 않고 돌진할 뿐이다."(679쪽)



KGB 


푸틴은 자신의 과거를 지워버리려고 하는 대신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탄압과 실패로 끝난 보수 쿠데타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KGB가 저지른 범죄행위들과 자신을 분리해서 대응했다. 국제경제 파트너들이 소브차크 시장의 보좌진에 KGB 스파이가 포함돼 있다는 사실을 알면 의심의 눈초리를 갖지 않을까라는 질문에 대해 그는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은 CIA 국장을 지냈는데 아무도 그 사실을 문제 삼지 않는다는 말로 대꾸했다. 푸틴은 스포트라이트 속에 커밍아웃을 감행하면서 자신을 철저한 민주인사로 내세웠다. 

쿠데타가 실패로 끝나고 그해 10월에 소브차크는 서독을 방문해 헬무트 콜 총리와 만났는데 이때 푸틴은 통역을 맡아 훌륭하게 업무를 처리했다. 키신저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방문했을 때 푸틴은 공항에 나가 그를 영접해서 시장 관사까지 안내했고, 도중에 자신의 KGB 전력을 놓고 환담을 나누었다. “훌륭한 사람은 모두 정보기관에서 일을 시작했지요. 나도 그렇소.” 키신저가 이런 말을 해서 푸틴은 너무 기분이 좋았다.

(90-91쪽)



상트페테르부르크


어떤 회사들은 러시아 제품을 실어내보낸 다음 홀연히 자취를 감춰버렸다. 수백만 달러 어치에 달하는 물품대금은 해외계좌로 빼돌렸을 게 뻔했다. 이들 가운데 유리 코발추크와 블라디미르 야쿠닌 등 몇 명은 푸틴의 측근으로 자리를 잡았다. 코발추크와 야쿠닌 두 사람은 회사를 새로 만들어 알루미늄과 비철금속 수출허가를 받아 이득을 챙겼다. 블라디미르 스미르노프가 실질 소유자인 네프스키 돔이라는 회사도 있었다. 키리시네프테오르그신테츠라는 회사를 세운 겐나디 팀첸코도 있었다. 이들 가운데 부정혐의로 기소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당시 이들은 무명에 가까운 인사들이었지만 시장실의 젊은 관리 블라디미르 푸틴과 친분을 쌓아 불과 몇 년 뒤 새 러시아의 거물 기업인들로 성장했다. 

(98쪽)


푸틴은 유능하고 능숙하고 단호하고, 그러면서 시장에게 철저히 충성하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여러 사람이 시장 곁을 떠났고 그 중에는 서로 얼굴을 붉히며 갈라선 사람도 있었지만, 푸틴은 초지일관 시장 곁을 지켰다. 그러면서 영향력도 커져갔다. 시 행정이 부패의혹에 휘말려도 그는 끄떡없었다. 러시아 전역이 정치적인 논란에 휩싸였지만 초연한 위치에 서서 업무에만 집중했다. 정치적으로 어느 쪽에 동조하는지 일체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의 비서였던 마리나 옌탈체바는 이렇게 말했다. “직원들에게 일단 일을 맡기면 그 일이 어떤 방식으로 처리됐는지, 누가 맡아서 했는지 도중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따지지 않았다. 시킨 대로 일이 처리되었으면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102쪽)



모스크바, 옐친

크렘린의 재산관리를 맡고 있던 푸틴은 모스크바로 온 지 7개월 만에 새로운 보직을 받게 되었다. 알렉세이 쿠드린이 재무차관으로 승진해 가면서 자기가 맡고 있던 중앙통제국장에 푸틴을 추천한 것이었다. 대통령행정실 부실장을 겸임하는 막강한 직책이었다. 푸틴의 임무는 정부와 경제 전체를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있는 만연한 부조리를 종식시키고 하루빨리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업무를 진행하며 어쩔 수 없이 나라를 갉아먹는 부패와 맞닥뜨리게 되었고, 권좌에 있는 사람들을 적발해내는 정치적 위험을 감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옐친과 파벨 그라초프 전 국방장관이 10억달러 규모의 탱크를 비롯한 각종 무기를 아르메니아에 불법으로 판매한 의혹을 받고 있었다. 

푸틴은 두 사람이 이 스캔들과 관련이 없다고 공식 선언했다. 푸틴은 언론 인터뷰에서 무기판매가 이뤄진 사실을 확인해주고 책임자가 누구인지도 밝혀냈다고 말했지만 누구인지 밝히기는 거부했다. 

새 직책을 맡고 나서 푸틴은 검찰청을 비롯해 연방보안국(FSB)을 포함한 보안부서 사람들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러면서 러시아 정부가 얼마나 제 기능을 못하고 있는지 실감했다. 그는 기소권은 갖고 있지 않았지만 크렘린의 위세를 무기로 예산과 계약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조사를 통해 방대한 양의 자료를 확보했다. 필요하면 언제든 써먹을 수 있는 자료들이었다. 그 정보들은 그에게 힘과 영향력을 안겨주었다. 상사들은 그가 열심히 뛰며 크렘린의 권위를 회복시키고 있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물론 감사는 선별적으로 진행되었고 그렇게 해서 정부의 금고는 다시 채워지고 있었다. 상사들도 그의 표적이 되었다. 푸틴이 새 직책을 맡을 때 부총리에 임명된 보리스 넴초프는 전임 부총리 추바이스가 만든 재단의 비리를 푸틴이 감사를 통해 적발해냈다고 했다. (144-145쪽)


중앙통제국을 맡은 지 일 년이 지나자 푸틴은 결론이 뒤죽박죽으로 나는 조사에 싫증이 났다. 자신이 적발해내는 부패행위는 대부분 사법체계로는 결론이 나지 않는 사건들이었다. 1998년 초 푸틴은 ‘이름 없는 중간 관리자들의 혁명’이라고 불린 현상에 휩쓸리게 되었다. 옐친은 국가적 재앙을 막고 자신의 정치적 파멸도 피하기 위해 이들 얼굴 없는 젊은 관리들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옐친 정부의 혼란으로 푸틴에게는 새로운 기회의 문이 열렸다. 그는 크렘린에 입성한 지 불과 2년도 채 안 된 1998년 5월에 세 번째 직책을 맡게 되었다. 당시 그는 옐친 가까이 다가가 본 적이 없고, 옐친이 꾸미는 음모 속의 등장인물이 될 만한 권력을 손에 쥔 적도 없었다. 오직 업무능력과 충성심으로 관료조직의 계단을 하나씩 올라갔다. 이번에 옐친은 그를 대통령행정실 제1부실장으로 임명했다. 

(154-156쪽)


“푸틴은 내가 제의한 뇌물을 거절한 유일한 관리였다. 나는 그 일로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베레조프스키는 말했다. 이 말이 사실인지와 상관없이 푸틴은 당시 유능하고 절제할 줄 아는 관리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옐친은 그가 중앙통제국에 근무할 때부터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푸틴이 올리는 보고는 한마디로 ‘명확’했다. 쓸 데 없이 말이 많고 술수를 부리는 다른 보좌진과 달리 푸틴은 대통령에게 이래라저래라 요구하는 법도 없었고 불필요한 말로 사람을 귀찮게 하지도 않았다. “나는 그와 이야기를 더 하고 싶은데 그는 대통령과의 개인적인 접촉은 가급적 피하려고 했다”고 옐친은 말했다. “원래 타고난 천성이 그런 사람”이라고 이해하게 됐다고 했다. 옐친은 푸틴을 FSB 국장에 임명했다.

옐친은 장군으로 승진시켜주겠다고 했지만 푸틴은 거절했다. 자신은 1991년 8월 쿠데타 때 KGB를 떠났으며 그날 이후 민간인 신분임을 상기시키며 이렇게 말했다. “저는 민간인입니다. 그리고 이런 권력기관의 장을 민간인이 맡는다는 것은 대단히 의미 있는 일입니다.” 그렇게 해서 푸틴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민간인 신분의 FSB 국장이 되었다. 

(160-163쪽)


옐친은 푸틴에게 훨씬 더 중요한 역할을 주문했다. 대통령을 버린 자들을 이길 수 있는 정당을 만들어서 이끌어 달라고 한 것이다. 푸틴은 보통 때와 달리 한참을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저는 선거운동 하는 거 정말 싫어합니다.” 푸틴은 마침내 이렇게 입을 열었다. “저는 그런 자들을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도 모르고 그런 자들을 싫어합니다.”

옐친은 직접 선거운동을 지휘할 필요도 없다고 푸틴을 달랬다. 지금 자기한테 부족한 것을 대신 맡아서 해달라고 주문했다. 그것은 바로 신뢰, 권위, 그리고 국민들이 갈망하는 군인다운 태도 같은 것이었다. 이 가운데서도 옐친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군인다운 태도’였다. 옐친은 당시 푸틴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회고했다. “분부하신 곳으로 가서 일하겠습니다.” 그 말에 옐친은 이렇게 덧붙였고, 푸틴은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제일 높은 자리라도 괜찮겠지?” 그에게 대통령 후계자 자리를 제안한 것이었다. 

(200-201쪽)



체첸

8월 7일 체첸 전사들이 다게스탄공화국으로 침범해 들어가 3개 마을을 포위했다. 두 명의 유명한 사령관이 체첸군을 지휘했다. 한 명은 포악한 반군 지도자인 샤밀 바사예프이고 또 한명은 ‘하타브’라는 가명으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는 자였다. 사우디 국적의 하타브는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에 침공해 들어갔을 때 무장 저항운동을 주도한 이슬람 반군 지도자였다.

8월 9일 텔레비전 연설에서 옐친은 “국민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는 인물을 총리로 지명키로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푸틴을 공식 후계자로 지명하지는 않았지만 2000년 6월로 예정된 대선을 언급함으로써 작은 체구에 아직은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이 지도자에 대해 유권자들이 신뢰를 가져주었으면 하는 희망을 나타냈다. 유명한 공산주의 전략가인 레오니드 도브로호토프는 “이것은 죽음의 키스이다”라고 말했다. “대다수 국민이 옐친에 대해 엄청나게 염증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훌륭한 정치인이라고 해도 그가 후계자로 지명하는 순간 무덤으로 향하는 길로 들어서게 된다.” 

(202-203쪽)


바사예프가 다게스탄을 침공한 이후 푸틴은 큰 야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는 옐친에게 전 안보 부처를 총괄해 군사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절대 권한’을 달라고 요청했다. 군통수권을 넘겨달라고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옐친은 그렇게 하겠다고 동의했다. 8월에 총리로 지명된 바로 이튿날 푸틴은 다게스탄에서 러시아군의 지휘체계를 재편할 것이라고 밝혔다. 8월 13일 러시아 폭격기와 공격용 헬기들이 체첸 전사들이 장악하고 있는 마을들을 폭격했다. 

8월 16일, 두마는 푸틴의 총리 인준안을 근소한 표차로 통과시켰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바사예프가 이끄는 체첸 전사들은 다게스탄에서 물러났다. 두 주 간의 러시아군 공습으로 마을은 철저히 파괴됐다. 이튿날 푸틴은 기자들을 대동하고 다게스탄으로 날아갔다. 정치 신인이 연출한 정치적 쇼 무대였다. 열정에 넘치는 젊은 총리와 늙고 병약한 대통령이 대비되었다. 실의에 빠지고 분열된 나라가 정치색이 없는 젊은 총리가 만들어낸 승전을 자축하고 있었다. 

(206-208쪽)


옐친은 이렇게 적었다. “푸틴은 정치적 가미가제처럼 행동했다. 자신의 정치적 자산을 모조리 전쟁에 쏟아부어 태워버렸다.” 하지만 푸틴은 전쟁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정치적 역학관계에는 관심이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옐친이 표현한 것처럼 “그는 체첸 사태 이후까지 자리를 지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푸틴은 체첸군이 다게스탄에 침공해 들어간 것을 대단한 치욕으로 받아들였고, 따라서 반드시 응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푸틴이 시작한 전쟁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가 엄청났다. 옐친을 비롯해 많은 이들이 깜짝 놀랐다. 

총리로 임명된 8월에 그는 차기 대통령 후보 여론조사에서 불과 2%의 지지를 받았다. 그런데 10월에는 프리마코프에게 불과 1% 뒤진 27%로 뛰어올랐다. 

(220-221쪽)



크렘린으로


12월 선거에서 모스크바 시장에 재선된 루즈코프는 대통령직을 놓고 푸틴과 경쟁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프리마코프도 출마를 포기했다. 2월 초,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되기도 전에 푸틴의 주요 라이벌들은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지방 주지사들까지 하나둘씩 푸틴 지지로 돌아섰다. 옐친이 임기 말년에 그토록 걱정했던 대선은 극적인 드라마 없이 싱겁게 진행됐다. 그것은 후보자들끼리 공정하게 겨루는 민주적인 선거가 아니라 이미 대통령직에 오른 사람을 놓고 실시하는 국민투표 같은 성격을 띠었다.

푸틴은 후보들에게 배정된 텔레비전 시간을 “광고 시간이나 마찬가지”라며 자신은 쓰지 않겠다고 했다. 공개적으로는 그렇게 말하면서 푸틴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데려온 젊은 보좌관 드미트리 메드베데프를 책임자로 하는 선거운동 지원팀을 구성했다. 이들은 치밀한 작전계획을 수립했다. 현대 선거기법은 모두 동원하면서 민주적인 과정은 중요시하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푸틴의 이미지를 정치적이 아니라 정치 위에 있는 사람으로 만들려고 했다. 그런 전략은 예상 밖의 대성공을 거두었다. 

(239쪽)


대통령 선거일을 엿새 앞두고 푸틴은 처음으로 그로즈니를 방문했다. 국민 대부분은 푸틴이 체첸에서 벌이는 전면전의 어두운 면을 알지 못했고, 크게 신경 쓰지도 않는 것 같았다. 푸틴은 소련 시절에 만든 2인승 전투기를 타고 그로즈니에 도착했다. 그는 전쟁영화의 주인공처럼 파일럿 비행복 차림으로 한껏 멋을 부리며 군용 비행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후 자신의 이미지를 교묘하게 꾸며서 텔레비전 화면에 내보내는 스턴트같은 행동은 푸틴 정치의 단골 메뉴가 되었다. 어떤 작가는 이를 ‘비디오크라시’라고 불렀다. 

(246쪽)



9.11 


2001년 9월 11일 그들은 회의실에서 민간 항공기들이 뉴욕 세계무역센터와 펜타곤으로 날아가 충돌하는 장면을 텔레비전 생중계로 지켜봤다. 러시아는 오래 전부터 알카에다가 체첸 반군을 지원한다는 주장을 펴왔다. 푸틴은 KGB에서 같이 일한 오랜 동료이자 친구인 세르게이 이바노프를 쳐다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도울 일이 뭐 없을까?”

나중에 많은 이들이 당시 푸틴이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했다. 하지만 테러 공격이 일어난 직후 몇 시간 동안 그는 민첩하게 움직이며 미국을 돕겠다는 생각을 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통화를 시도했지만 연결되지 않았다. 에어포스원이 미국 내 곳곳의 상공을 빙빙 돌아다녔기 때문이다. 콘돌리자 라이스가 이바노프에게 전화를 걸어오자 푸틴이 직접 수화기를 들었다. 그는 라이스에게 미국이 전시 태세에 돌입하더라도 러시아는 군의 경계 단계를 격상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실제로 그는 경계 단계를 더 낮추고 태평양 지역에서 전날 시작한 군사훈련을 취소시켰다. 미국과의 핵전쟁을 가상한 군사훈련이었다. “우리가 도울 일이 더 있겠습니까?” 그는 라이스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 말을 듣고 라이스는 순간적으로 이런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이제 정말 냉전은 끝났구나.’

그는 이어서 블레어와 슈뢰더에게도 전화를 걸어 끔찍한 테러리즘에 맞서 전 세계가 하나로 뭉쳐야 한다고 역설했다. 

9월 12일 부시가 답례전화를 걸어왔다. 푸틴은 미국과 연대의 표시로 애도 묵념 시간을 갖기로 선포하고, 자기부터 솔선수범해 그동안 러시아 정치를 지배해 온 반미정서를 당분간만이라도 자제하기로 했다. 많은 국민들이 푸틴의 뜻에 따랐다. 미국 대사관 바깥에 조화를 가져다 놓았고, 관영 텔레비전의 논조도 눈에 띄게 바뀌었다.

(278-279쪽)



호도르코프스키

너무나 많은 부(富)가 옐친의 어깨에 달려 있었다. 보리스 베레조프스키, 미하일 프리드만, 블라디미르 구신스키, 미하일 호도르코프스키, 블라디미르 포타닌이 바로 그들이었다. 만약 옐친이 재선에 성공하지 못한다면 이들의 운명은 위험에 처할 것이 분명했다. 이들은 사업에서는 서로 경쟁관계에 있었지만 옐친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인 공산당 지도자 겐나디 주가노프와 맞서 싸워야 한다는 공통된 목표를 갖고 있었다. 

옐친 정부는 혼란과 무능, 과두정치로 지지율이 바닥에 머물러 있었다. 그래서 베레조프스키, 구신스키, 호도르코프스키, 그리고 또 다른 금융계 인사인 블라디미르 비노그라드포프는 1996년 2월 만찬 자리에 함께 앉아 ‘다보스 결의’라는 걸 했다. 힘을 모아 6월로 예정된 대선에서 옐친을 재선시키자고 다짐한 것이었다. 이들은 푸틴과 함께 소브차크 시장의 수행원으로 일했고, 자기들이 수억 달러를 벌 기회가 된 사유화 계획을 입안한 아나톨리 추바이스를 선거관리자로 옐친 캠프에 합류시켜 달라고 추천했다. 추바이스는 옐친의 딸인 타치아나 디아첸코와 함께 무려 20억 달러의 선거비용을 쓰면서도 회계처리를 워낙 기발하고 복잡한 수법으로 해서 자금흐름이 추적당하지 않도록 했다. 

(133쪽)


2003년 모임 당시 호도르코프스키는 러시아 최고의 부호였고, 푸틴은 가장 높은 지위에 오른 권력자였다. 카테리나홀의 돔 천정 아래서 호도르코프스키는 상공인연합 회원들을 대표해 연설하면서 러시아 전역에 부패가 만연해 있다는 여론조사와 정부통계를 소개했다. 푸틴이 끼어들어 너무 과장됐다고 지적했지만 호도르코프스키는 발표를 계속했다. 이번에는 국영 석유회사 로스네프트를 향해 포문을 열었다. 먼저 소규모 석유 생산업체인 노던 오일을 거금 6억달러를 주고 인수한 데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과다지불된 매각비용은 로스네프트 경영진과 정부 관리들에게 리베이트로 돌아간 것이 뻔하다고 했다.

너무 나간 것이었다. 푸틴의 분노가 폭발했다. 푸틴은 다른 기업과 마찬가지로 로스네프트도 예비자금이 필요했던 것이라고 했다. 그러고는 직설적으로 물었다. “유코스는 예비자금을 너무 과도하게 갖고 있는 것 아닌가? 그건 도대체 어떻게 마련한 거요?” 그리고 유코스는 세금 처리에 문제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도대체 세금 문제가 왜 일어난 건가?” 푸틴은 그렇게 말하며 희죽 웃었다. “당신 차례니 한번 대답해 보시오.”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은 유코스나 정부 모두에게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규모의 매각 건을 놓고 푸틴이 이렇게 개인적인 감정을 여과 없이 쏟아내는 것을 보고 놀랐다. 대통령 경제보좌관 안드레이 일라리오노프는 푸틴이 그렇게 심하게 화내는 것은 처음 보았다고 했다. 푸틴은 로스네프트를 강력히 옹호해줌으로써 방안에 있던 사람들이 미처 생각지 못했던 사실을 분명히 드러냈다. 그는 단순히 편을 들어준 것이 아니라 로스네프트와 개인적인 관련이 있었던 것이다. 호도르코프스키는 다른 사람이 감히 엄두도 못 낸 일을 한 것이다. 알라리오노프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몰랐다. 몰랐으니 그런 말을 했다. 푸틴이 로스네프트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절대로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호도르코프스키는 자신의 비판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미처 생각하지 못했지만 얼마 되지 않아 만천하에 드러났다. 유코스 이사 알렉세이 콘다우로스는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우리 손으로 우리 사망증명서를 발급한 짓이었습니다.” 구신스키와 베레조프스키의 뒤를 이어 호도르코프스키도 해외도피를 권유받았지만 그는 거부했다. 자기가 가진 힘과 돈, 그리고 진실의 힘이 자기를 지켜줄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311-313쪽)


1990년대 중반 들어서 푸틴은 블라디미르 리트베넨코 광산연구소 소장의 후원으로 비공식 모임을 정기적으로 가졌다. 리트베넨코 소장이 푸틴의 논문 지도를 맡았다. 당시 이고르 세친, 빅토르 주브코프같은 친구들과 함께 공부하며 만든 아이디어들이 광대한 석유, 가스 자원에 대한 국가 통제를 부활시키겠다는 전략의 토대가 되었다. 이 전략은 차근치근신중하게 실행에 옮겨졌다. 2001년에 그는 역시 상트페테르부르크 보좌관 출신인 알렉세이 밀러를 가즈프롬 사장에 앉혔다 푸틴은 또한 국영 석유회사 로스네프트에 대한 국가통제도 강화했다. 1992년 국영 기업으로 출발한 로스네프트는 1990년대 내내 경쟁 기업과 투자자, 폭력조직이 덤벼들어 지분을 나누어 빼가며 경영 위기가 계속되고 있었다. 푸틴은 집권하자 로스네프트 회생 작업의 지휘봉을 이고르 세친에게 맡겼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절 푸틴의 가방을 들고, 시청으로 푸틴을 찾아오는 손님을 문간에서 맞이하는 일을 하던 자였다. 

푸틴이 권력 상층부로 함께 데려온 인사들은 대부분 옐친 시절에 큰 이득을 챙기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거부에다 정책에 영향력까지 행사하는 자들에 대한 불만이 적지 않았다.

(315쪽)


유엔과 이라크의 ‘석유-식량 프로그램’에 따라 러시아는 이라크가 수출하는 석유의 상당 부분을 사 주었다. 이 과정에서 수백 만 달러에 달하는 이권과 리베이트가 러시아 기업인과 정치인들에게 돌아갔다. 블라디미르 지리노프스키와 푸틴의 비서실장인 알렉산드르 볼로신, 별로 알려지지 않은 석유 수입회사 군보르 등이 수혜자였다. 러시아의 민영 및 국영 석유회사들 모두가 이라크의 미개발 유전들에 이권을 갖고 있었다. 

푸틴은 부시 대통령과 완전히 결별하지는 않았지만, 이라크 사태는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푸틴은 미국이 이라크 침공으로 진짜 야욕을 드러낸 것으로 보았다.

(317쪽)


2월에 있은 크렘린에서의 충돌 이후에도 호도르코프스키는 경제, 정치적인 야망을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4월에 유코스는 러시아 5위 석유 생산 업체인 시브네프트와 합병 협상을 시작했다. 생산규모가 쿠웨이트를 능가하는 세계 최대 석유기업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었다. 시브네프트 회장은 북극오지 추코트카 지역의 젊은 주지사 로만 아브라모비치였다. 한때 베레조프스키의 사업 파트너였던 그는 시브네프트를 넘긴 돈으로 그해 영국의 명문 축구구단 첼시를 사들였다. 

(320쪽)



베슬란


잉구세티야 공화국의 대통령을 지낸 루슬란 아우셰프는 러시아 당국이 이미 학교를 급습할 작전을 세워놓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사실은 푸틴의 명령에 따라 특공대 2개 팀이 현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비슷한 학교 건물을 만들어 놓고 공격 훈련을 하고 있었다. 아우셰프는 협상을 진행해 인질을 추가로 데리고 나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사흘째인 9월 3일 살해된 인질들의 시신을 재난대책부 요원 4명이 수습하기 시작히는데 요란한 폭발음이 체육관 건물을 뒤흔들었다. 22초 뒤에 두 번째 폭발음이 울렸다. 폭발로 건물 지붕이 날아가고 벽에는 큰 구멍이 뚫렸다. 수십 명이 그 자리에서 숨졌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걸려 넘어지고 하면서 놀라 달아나기 시작했다. 건물 밖에 있는 군인들이나 안에 있는 인질범들 모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 채 10분 넘게 치열한 총격전을 벌였다. 나중에 러시아 군인들이 학교 안을 향해 총을 쏘기 시작하며 공격이 시작됐다는 음모론이 제기됐지만 당시 학교 밖에 있던 군인들은 아무도 공격을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360쪽)


푸틴은 베슬란 비극 이후 가진 대국민 연설에서 약속한 개혁조치에 곧바로 착수했다. 정보기관은 손대지 않았다. 협상과정을 망친 군과 경찰 지휘부도 문책하지 않았다. 대신 민주 정부의 흔적들을 모두 씻어내고 정치에 대한 크렘린의 통제를 한층 더 강화하겠다고 했다. 9월 13일 푸틴은 주지사와 시장을 비롯해 러시아연방 내 많은 자치 지역과 연방공화국들이 대통령을 뽑는 지방 선거를 모두 폐지한다고 발표했다. 의회인 두마 450석 가운데 절반을 차지하는 지역구 대의원 선거도 폐지했다. 

옐친은 베슬란 사태 이후 러시아는 전혀 다른 나라가 되고 말았다고 한탄했다. “우리는 1993년 국민투표로 채택한 새 헌법 정신을 포기하도록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고 민주적인 권리를 축소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테러범들에게 승리를 안겨주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옐친은 자신이 후계자로 지명해 권좌에 앉혀준 푸틴에 대해 큰 실망감을 표시했다. 

(365쪽)



러시아의 정체성


베슬란 인질사건을 겪고 난 다음 치러진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는 푸틴과 러시아 모두에게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처음에 그는 서방과 완전한 연합은 아니더라도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의 정치적 힘이 강해지고 러시아의 경제력이 커지면서 이러한 생각은 차츰 줄어들었다. 푸틴은 소련연방 해체라는 ‘대재앙’과 함께 철학자 이반 일린의 이름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이반 일린은 철학자이자 종교 지도자로서 볼셰비키들의 손에 수차례 체포되며 탄압을 당하다가 1922년 결국 러시아에서 추방되었다. 푸틴은 이반 일린의 철학을 자신이 추구하는 러시아 재건작업의 정신적인 토대로 심었다. 푸틴은 이후 정치적 논쟁에서 그의 철학을 빈번하게 인용한다. 볼셰비즘에 반대한 백계 러시아인인 일린은 정교회에 기반을 둔 러시아 정체성을 옹호했다. 푸틴은 이반 일린의 저서들에서 자신이 건설하고자 하는 국가의 모습을 발견했다. 러시아 고유의 주권을 강조하는 ‘주권 민주주의’ 개념도 그의 철학에서 따온 것이다. 푸틴은 소련 체제의 붕괴를 아쉬워하는 것이 아니라 러시아라는 역사적인 정체성이 무너진 것을 아쉬워했다. 

(390쪽)


유라시아경제연합은 푸틴이 측근들과 함께 오랫동안 키워온 꿈을 실현시키는 것이었다. 러시아에서 유라시아주의는 매우 보수적인 철학으로, 그동안 소련 체제의 국제주의 이데올로기에 밀려 지하로, 해외로 숨어서 떠돌았다. 유라시아주의는 1990년대 들어서 다시 부상하는데, 철학자 이반 일린 같은 망명객들이 신봉하는 종교적인 신앙과 군주제에 대한 신념이 한데 뒤섞여 나타났다. 여기에 새퍼드 매킨더가 주장한 지정학적인 이론이 가미됐다. 그는 ‘핵심지역’으로서 유라시아라는 개념을 제안했다. ‘세계의 섬’인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의 광대한 대륙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에서 유라시아가 중심축이 돼야 한다는 이론이다. 이는 보수 정치이론가인 알렉산드르 두긴이 저서와 논문을 통해 퍼트리며 주류 이론으로 부상했다. 

이러한 지정학적인 이론은 러시아 국내정치에서 부상하기 시작한 보수주의 성향과 합쳐졌다. 러시아정교회와 이슬람의 가르침을 따르는 정치저 보수주의는 신성모독을 범죄로 규정하고, 어린이들에게 ‘동성애를 받아들이는 선전선동’을 금지하는 새로운 법안이 채택되도록 만들었다. 푸틴의 심복인 야쿠닌은 서방의 문화적 가치를 러시아에 전파하려는 움직임을 해양세력과 육지세력이 벌이는 역사적, 지정학적인 투쟁에서 새로 형성된 전선으로 보았다.

아이러니는 이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신봉하는 러시아 엘리트들의 생활방식이 지극히 서구화되었다는 점이었다. 이들은 자기들이 그처럼 욕하는 나라들에 가서 휴가를 즐기고, 그곳에 재산을 보유했다. 야쿠닌의 아들도 런던에 살았다. 

(634-635쪽)



측근들


이고르 세친은 직급이 낮고 투박한 외모였지만 많은 나라를 여행한 경험이 있고 포르투갈어를 구사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푸틴의 대학 동기생으로 1980년대 모잠비크와 앙골라에 주재하는 소련군 무관 통역관으로 일했는데, KGB나 군 첩보기관 소속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많았다.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푸틴의 최측근 보좌관으로 일했는데 당시 푸틴의 사무실에는 소련 제국이 무너지며 낭인 신세가 된 세친 같은 사람들이 많았다. 

(88쪽)


푸틴은 2004년 9월 가즈프롬과 로스네프트의 합병 계획을 승인했다. 그렇게 탄생할 새 거대 기업이 유코스 계열사인 유간스크네프테가즈 입찰에 응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푸틴의 측근인 알렉세이 밀러가 대표로 있는 가즈프롬은 로스네프트와의 합병에다 유간스크네프테가즈까지 인수하는 데 대해 회의적이었다. 

이고르 세친은 가즈프롬이 아니라 로스네프트를 러시아 대표 에너지 기업으로 키우겠다는 거창한 비전을 갖고 있었다. 로스네프트를 가즈프롬에 완전히 흡수시키지 않고, 로스네프트가 독자적으로 유코스의 지분을 취득하겠다는 뜻이었다. 12월 23일, 로스네프트는 유간스크네프테가즈 인수 사실을 발표했다. 거대 석유기업이 된 로스네프트는 가즈프롬과의 합병을 피하고, 독자 기업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안을 모색했다. 

국가 소유 지분을 차지하기 위해 푸틴의 측근들끼리 벌이는 힘겨루기는 점점 더 치열해졌다. 푸틴은 이를 중재하기 위해 메드베데프와 밀러를 가즈프롬에, 이고르 세친을 로스네프트에 배치했다. 양측의 갈등은 크렘린 밖으로까지 알려질 정도였다. 

(407쪽)


유코스 사건은 일부에서 우려한대로 사유화 과정을 국유화로 되돌리는 전조는 아니었지만 국가가 중요 산업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해 나가는 데 하나의 모델이 되었다. 푸틴은 민간 손에 넘겨 줄 수 없는 기업 수십 개를 법으로 지정한 다음, 거대 국영기업을 여러 개 만들어 해당 산업을 확고하게 장악하는 방법으로 국가경제를 통제하기 시작했다. 그 일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데려온 옛 동료들에게 맡겼다. 이들 가운데 다수는 해당 분야 장관으로 재직하면서 기업 직책도 겸했다. 어느 날 갑자기 러시아 제2의 석유 생산 기업으로 부상한 다음, 일 년 뒤에 곧바로 1위 생산업체가 된 로스네프트는 이고르 세친이 회장직을 맡았다. 당시 국방장관이던 세르게이 이바노프가 어느 날 갑자기 연합항공기제조회사 회장직을 차지했다. 민간 항공기와 군용 항공기 제작을 독점하기 위해 만든 회사였다. 블라디미르 야쿠닌은 러시아철도공사 사장이 되었다. 드레스덴 시절부터 푸틴의 동료로 가까이 지낸 세르게이 케메조프는 독점 방산업체인 로소보론엑스포르트 회장을 맡았다. 이들 가운데서도 가장 막강한 기업은 가즈프롬이었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회장이나 알렉세이 밀러 사장 모두 이 분야의 전문성이 아니라 푸틴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그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었다. 

(411쪽)


물리학자였던 유리 코발추크는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자본주의 실험을 하던 초기에 푸틴과 함께 일한 사람으로 소련 시절에 설립된 방크 로시야를 계속 이끌어왔다. 푸틴 밑에서 첫 총리를 지낸 미하일 카시야노프는 방크 로시야라는 은행 이름도 소유주가 누군지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방크 로시야는 2004년 주식시장을 통해 가즈프롬 계열의 보험회사 소가즈 지분 절반가량을 5800만 달러에 사들였다. 가즈프롬이 비핵심 자산을 처분한 것은 처음이었다. 푸틴이 매각작업에 직접 개입해 방크 로시야에 지분을 넘겨주라고 지시했다. “푸틴이 ‘방크 로시야!’라고 한마디 했고, 그것으로 끝났습니다.” 에너지부 치관을 지낸 블라디미르 밀로프는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그때부터 사업은 일사천리로 굴러갔다. 야쿠닌이 사장인 러시아철도공사와 이고르 세친이 장악한 로스네프트같은 국영 기업체들이 잇따라 소가즈와 보험 계약을 체결했다. 사업은 순식간에 성장했고, 방크로시야는 금융계열사와 미디어 지주회사 등 가즈프롬의 자산을 소리 없이 차지해 나갔다. 푸틴 시대에 맞춰 탄생한 새 세대 올리가르히들은 하나같이 음침하고, 정치적 색깔이 없고, 비밀스럽고, 무명인 자기들을 키워준 사람에게 절대적인 복종을 바치는 자들이었다 

로스네프트는 유코스의 알짜 핵심자산을 취득한 다음 자사 석유 거래 계약의 대부분을 겐나디 팀첸코에게 몰아주었다. 팀첸코는 푸틴과 로텐베르그 형제의 유도클럽을 후원했다. 이 클럽은 KGB 출신들과 함께 푸틴의 정치적 리더십을 구성히는 데 큰 역할을 하며 ‘유도크라시’ judocracy라는 이름을 만들어냈다. 

2000년 대통령 취임식 전야에 푸틴은 국영 회사 한 곳을 설립했는데, 수십 개에 달하는 보드카 제조공장을 통합해 정부가 지배권을 가졌다. 푸틴은 로스스피리트프롬이라는 이름의 이 회사 경영권을 유도크라시에게 맡겼는데 아르카디 로텐베르그가 최고경영자 자리에 앉았다. 회사는 전국 알코올 시장 매출의 거의 절반을 장악했다. 당국은 철저한 규제 장치를 도입하고, 경쟁 업체들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는 식으로 이들을 도왔다. 

(423쪽)



리비아와 시리아


막후에서 바이든은 러시아 방문을 통해 메드베데프에게 리비아 무력개입을 승인하는 유엔 안보리 결의안을 지지해달라고 압박을 가했다. 메드베데프는 인도적인 명분 때문에 동의했다. 푸틴의 길에서 위험스러울 만치 너무 멀리 나간 것이었다. 불과 몇 주 전 푸틴은 리비아를 비롯한 아랍국들에서의 대규모 반란은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의 부상을 가속화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독재자들을 몰아내겠다는 단견을 가진 서방 동조세력들이 극단주의를 부추기고 그들에게 힘이 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극단주의의 부상에 대한 그의 우려는 틀린 말이 아니었다. 

옛 소련 영토 바깥에서 유일하게 러시아 군사기지가 있는 곳이 시리아였다. 푸틴의 진짜 걱정은 그보다 훨씬 더 깊은 곳에 미치고 있었다. 그의 마음 속에는 민주화에 대한 열망과 극단주의의 부상, 선거와 혼란 사이에 어두운 상관관계가 있었다. 그는 선거가 치러지면 혼란은 피할 수 없다고 믿고 있었다. 

메드베데프의 결정에 러시아 외교관과 안보 관련 관리들은 반발했다. 리비아 주재 러시아 대사인 블라디미르 차모프는 중요한 동맹국을 잃을 것이라고 경고하는 전문을 대통령 앞으로 보냈다. 메드베데프는 그를 해임했고, 대사는 모스크바로 귀환해 대통령이 국익에 반하는 행동을 하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이틀 뒤 나토가 첫 공습을 감행해 리비아의 방공망을 초토화시켰다. 많은 러시아 국민들은 메드베데프가 미국이 주도하는 또 하나의 전쟁에 공모자가 됐다고 생각했다.

공습이 시작되자 푸틴은 안보리 결의안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 나토의 목적이 단순히 민간인 보호에만 있는 게 아니라 카다피 정권을 전복시키는 데 있음을 알게된 것이다. 푸틴은 메드베데프가 서방의 농간에 놀아났다고 생각했다. 

(550-551쪽)



3기

오바마는 재선되고 나면 조금 더 유연성을 발휘하겠다는 생각을 했을지 몰라도 푸틴은 이전보다 더 강경한 태도로 바뀌었다. 오바마 행정부 측에서는 시리아 대통령 알아사드를 망명시킬 계획을 세웠지만 이는 푸틴이 그에게 망명을 떠나도록 설득한다는 순진한 가정 하에 세운 계획이었다. 푸틴은 미국이 주권국가의 지도자를 몰아내기 위해 개입하는 일은 허용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아사드 정권은 주요한 무기 구매자인 동시에 지중해 연안의 타르투스항에는 러시아 해군기지가 있다. 푸틴의 가장 큰 관심은 미국이 또다시 극단적인 무력행사를 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었다. 

워싱턴을 비롯한 서방국 관리들은 푸틴의 언동들을 외부의 적에 맞서 자국민의 애국심을 자극하기 위한 것으로 과소평가했다. 하지만 미국에 대한 푸틴의 감정은 그보다 훨씬 심각했다. 자신의 크렘린 복귀에 국제사회가 보인 명백한 불만, 반정부 시위 진압에 대해 보인 거부감, 푸시라이엇 재판과 볼로트냐야 광장 시위 진압에 쏟아진 비난 등으로 인해 서방에 대한 푸틴의 시각은 더 강경해졌다. 

(602쪽)


푸틴은 세 번째 취임선서를 하며 권좌에 복귀했다. 앞으로 6년 동안 조국을 위해 봉사하고 조국을 지키겠다는 맹세를 했다. 하지만 그동안 그 자신도 바뀌고 조국도 변화했다. 그는 사회를 분열시키고, 외부의 적에 대한 공포감을 확산시키고, 그동안 자신이 이룬 업적들을 무력화시키면서 다시 크렘린에 복귀했다. 그는 이제 러시아 국민의 대통령이 아니라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만의 대통령이 되었다. 

(588쪽)


“그는 괴롭힘을 당하면 더 강해지는 사람입니다.” 푸틴의 오랜 친구인 세르게이 롤두긴은 이렇게 말했다. 학교 운동장에서 집단괴롭힘을 당한 아이처럼 우크라이나 사태는 푸틴의 개인적인 성향에 깊은 영향을 미친 것 같다. 푸틴은 개인적인 성향을 정책으로 나타내는 사람이다. 앞선 두 번의 임기 때 취한 실용주의적인 정책은 막을 내린 지 오래였다. 이제 우크라이나 사태를 겪으면서 그가 걸어온 정책 노선과의 근본적인 결별을 예고하고 있었다. 14년 동안 권좌에 있으면서 그는 러시아를 세계 강대국의 반열에 다시 올려놓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러시아를 글로벌 경제에 편입시키고, 은행, 주식시장 도입 등 자유시장경제의 금융시스템을 활용했다. 그 과정에서 푸틴의 측근들이 부를 축적했지만 국민 전체가 평균적으로 혜택을 누린 것도 사실이었다.

이제 그는 서방이 인정하든 하지 않든 러시아의 힘을 보여주기로 했다. 서방의 ‘보편적’ 가치, 민주주의, 법치는 러시아와 무관한 것으로 간주해 외면하기로 했다. “러시아가 심리적으로 불안한 상태에 놓인 지도자의 포로가 되었다.” 소설가 블라디미르 소로킨은 크림반도가 합병되자 이렇게 썼다. “그가 느끼는 불안감, 열정, 허약함, 열등감이 그대로 국가정책이 되었다. 그가 피해망상에 빠지면 국가 전체가 적을 두려워하고 스파이를 겁내야 한다. 그가 불면증에 시달리면 모든 각료가 함께 밤을 새워야 한다. 그가 술을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으면 모두가 금주를 해야 하고, 그가 술에 취하면 모두 함께 취해야 한다.”

(673-674쪽)


2012년 권좌에 복귀한 이후, 권력을 행사하는 것 외에는 어떤 국가 목표도 제시하지 않았던 푸틴이 이제 국가를 하나로 통합시킬 수 있는 강력한 요소를 찾아냈다. 21세기 들어 지금까지 다른 어떤 지도자도 이룩하지 못한 강력한 국가를 만들 목표. 그가 이룩한 러시아는 소련 제국이나 차르의 왕국이 아니라, 그 두 체제의 특성을 합친 새로운 러시아였다. ‘푸틴이 없으면 러시아도 없다.’

(678-67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