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다른' 사람들을 거기에 참여시키고자 하는 욕구가 우리를 사로잡았다. 그것은 우리가 자유의 몸이 되기 전부터, 그리고 그후까지도 우리들 사이에서 다른 기본적인 욕구들과 경합을 벌일 정도로 즉각적이고 강렬한 충동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이 책은 이러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씌어졌다. 그러니까 무엇보다 먼저 내적 해방을 위해서 씌어진 것이다. (머리말)
대체 어떤 책이길래, '우리'는 누구이길래,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줘야만 했을까. 어떤 이야기이길래 그 이야기를 들려주고픈 욕구가 다른 기본적인 욕구들과 경쟁할 정도로 강렬했던 것일까.
읽어야지, 언젠가는 읽어야지 하면서 계속 미루게 되는 책이 있다. 내 경우, 그런 책은 필시 '무거운 책'이다. 마음이 무거워지게 만드는 책. 한번 읽고 덮어버리면 그만인 게 아니라 읽은 뒤에까지 너무 많은 사유를 요구하는 책. 혹은 거창하게 '사유'에까지 이르지는 않더라도 감정적인 동요가 꽤 오랜 시간 이어지게 만드는 책. 이 책이 그렇다. 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이현경 옮김. 돌베개).
이 책을 책꽂이에 둔 지 몇년이 지나도록 펼쳐보지 않았다.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이라는 글이 표지에 쓰여 있다. 그러니 쉽게 책장을 들출 수가 있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이 얇은 책 한 권에 천근만근 쌓여 있을 것이 불 보듯 뻔한 마당에. 그래서 이런 책을 읽을 때에는 독서에너지를 모으고 또 모아야 한다. 얼마 전 후마니타스의 윤상훈 편집자에게 이 얘기를 했더니 "그럼 어떻게 해서 이번에는 책을 읽을 마음을 먹었느냐"고 내게 물었다. 딱히 이 책을 '지금' 펼칠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그저 거부하지 않을 정도로 에너지를 모았다고 얼버무리는 수밖에 없었다.
오가는 전철에서 매일 조금씩, 오랜 시간을 두고 읽었다. 책은 뜻밖에도 너무나 흥미로워서 다음날의 출근 시간이 기다려질 정도였다.
스스로를 비춰볼 거울은 없었지만 우리의 모습은 우리 앞에 서 있는 100여 개의 창백한 얼굴들 속에, 초라하고 지저분한 100여명의 꼭두각시들 속에 반사되어 있다. 이제 우리는 어젯밤에 얼핏 본 그 유령들로 변해 있었다. 우리는 처음으로 우리의 언어로는 이런 모욕, 이와 같은 인간의 몰락을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순식간에, 거의 예언적인 직관과 함께 현실이 우리 앞에 고스란히 정체를 드러냈다. 우리는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밑으로는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었다. 이보다 더 비참한 인간의 조건은 존재하지도 않았고 상상할 수도 없었다. 우리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은 옷, 신발, 심지어 머리카락까지 빼앗아갔다. 그들은 우리의 이름마저 빼앗아갈 거시다. 우리가 만일 그 이름을 그대로 간직하고 싶다면 우리는 우리 내부에서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을 찾아내야만 할 터였다. 그 이름 뒤에 우리의 무엇인가가, 우리였던 존재의 무엇인가가 남아 있게 할 수 있는 힘을 찾아내야만 했다. (34쪽)
감옥에 갇힌 이들이 쓴 책이 간혹 있다. 많이 읽어보지는 않았다. 내가 읽은 것들 중에서 언뜻 떠오르는 것은...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 신영복 선생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안토니오 그람시의 <감옥에서 보낸 편지> 정도다. 신체의 자유를 잃은, 동물로서의 본능을 억제당한 이들이 적어내려간 글은 아무래도 무겁기 마련이다. 물리적 장벽이 명확한 만큼 사유는 담장을 넘어 이리저리 오간다. 하지만 그 사유는 담장을 넘었나 싶은 순간에 다시 감방 안으로 돌아와 그이가 처한 상황의 통제 속에 머문다. 프리모 레비의 글은 감옥에 갇힌 사람의 글과 일견 유사하지만 더 극단적이고 더 본질적이다. 절멸될 것이 뻔한, 아예 인간임을 부정당한 사람이 인류 역사상 최악의 극한에서 쓴 기록. 이보다 더 무거운 책을 찾을 수 있을까? 이 책은 감히 단언컨대,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책'이다.
나이, 사회적 지위, 출신, 언어, 문화와 습관이 전혀 다른 수천 명의 개인이 철조망 안에 갇힌다. 그곳에서 그들은 규칙적으로 되풀이되고 통제당하는, 만인에게 동등한 삶, 그 어떤 욕구도 충족되지 않는 삶에 종속된다. 이 삶은 생존을 위한 투쟁 상태에 놓인 인간이라는 동물의 행동에서 본질적인 것이 무엇인지, 후천적으로 습득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입증하기 위해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정확한 실험장이다.
우리는 명백하고 손쉬운 추론을 믿지 않는다. 모든 문명적 상부구조가 제거되면 인간의 행동은 기본적으로 잔인하고 이기적이고 우둔하다는 추론 말이다. 우리 생각에 도출될 수 있는 유일한 결론은, 궁핌과 지속적인 육체적 고통 앞에서 수많은 사회적 습관과 본능이 침묵에 빠진다는 것뿐이다. (132쪽)
인간임을 부정당한 사람들에게 생물학적 감각은, 죽음과 삶의 경계는 얼마나 사소하며 또한 얼마나 유동적인지. 책은 레비가 아우슈비츠에서 강제노동을 하면서 용케 살아남기까지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적은 에세이다.
극한에 놓인 인간을 다루는데, 극적인 사건은 없다. 아이러니다. '바닥에 떨어진' 이들이 동물 취급을 받으며 날마다 모든 순간 생사의 기로에 놓인다. 가스실로 끌려가거나 병에 걸려 죽은 사람에게 죽음은 '종말'이고 극적인 사건이다. 그 '사건'에까지 이르지 않은 수감자들에게 그곳에서의 삶은 날마다 되풀이되는 지옥, 그러나 어떤 소설적인 사건도 없이 생존을 위해 분투하는 시간의 연속일 뿐이다. 오늘의 더위 혹은 추위, 맑은 날 또는 흐린 날, 배고픔과 목마름, 너덜너덜한 옷과 고통스런 나무 신발, 어깨를 짓누르는 침목.
누구나 인생을 얼마쯤 살다 보면 완벽한 행복이란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그것과 정반대되는 측면을 깊이 생각해보는 사람은 드물다. 즉 완벽한 불행도 있을 수 없다는 사실 말이다. 이 양 극단의 실현에 걸림돌이 되는 인생의 순간들은 서로 똑같은 본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들은 모든 영원불멸의 것들과 대립하는 우리의 인간적 조건에 기인한다. 미래에 대한 우리의 늘 모자란 인식도 그 중 하나다. 그것은 어떤 때에는 희망이라 불리고 어떤 때에는 불확실한 내일이라 불린다. 모든 기쁨과 고통에 한계를 지우는 죽음의 필연성도 그중 하나다. 어쩔 수 없는 물질적 근심들도. 이것들이 지속적인 모든 행복을 오염시키듯, 이것들은 또 우리를 압도하는 불행으로부터 끊임없이 우리의 관심을 돌려놓음으로써 우리의 의식을 파편화하고, 그만큼 삶을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어준다. (18쪽)
삶의 의미에 대한 믿음은 인간의 모든 힘줄 속에 뿌리박혀 있다. 이것이 인간 본질이 지닌 속성이다. 자유로운 인간들은 이러한 목적에 많은 이름을 부여하며 그 성질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토론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이 문제는 훨씬 더 단순하다. 오늘 그리고 여기서 우리의 목표는 봄에 도달하는 것이다. 지금은 다른 것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이제 이런 목표 뒤에 다른 목표는 아무것도 없다. (106쪽)
인간의 본성에 따르면 슬픔과 아픔은 여러 가지를 동시에 겪더라도 우리의 의식 속에서 전부 더해지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원근법에 따라 앞의 것이 크고 뒤의 것이 작다. 이것은 신의 섭리이며, 그래서 우리가 수용소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자유로운 삶에서, 인간이 만족할 줄 모르는 존재라는 말을 그토록 자주 듣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사실 이것은 인간이 애초에 완전한 행복의 상태를 누릴 수 없어서라기보다 불행의 상태가 지니는 복잡한 성질을 늘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없이, 차례대로 늘어선 그 불행의 이유들이 단 하나의 이름을, 가장 큰 이유의 이름을 갖게 된다. 그 이유가 힘을 잃어버릴 때까지 말이다. 그런데 그때 우리는 그 뒤로 또 다른 이유가 등장하는 것을 본다. 비탄에 잠길 정도로 충격을 받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뒤로 또 다른 이유들이 줄을 서 있다. 그리하여 겨우내 우리의 유일한 적이었던 추위가 가시자 우리는 배가 고프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111쪽)
수용소의 사람들은 끊임 없이 인간임을 부정당하고 동물 취급을 받는다. 동물적 감각에 의지해 버텨야 하는 동시에,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 존재들.
얼음같이 딱딱하고 찬 독일어 문장들을 이탈리아어로 통역하는 일을 영 내켜하지 않으면서도 마지못해 맡은 이 남자, 어차피 아무 소용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의 질문을 독일어로 옮기기를 거부한 이 플레슈라는 남자는 50대의 독일 유대인이다. 그는 폐쇄적이고 말이 없는 사람이다. 나는 그에게 본능적인 존경심을 느낀다. 그가 우리들보다 먼저 고통스러워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30쪽)
그런 곳에서 그는 여러 종류의 '인간'을 보고, 인간의 본질은 어떻게 부정당하는지를 기록하고, 인간의 본질을 묻는다.
개별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많은 사람들이 다소 의식적으로 '이방인은 모두 적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확신은 대개 잠복성 전염병처럼 영혼의 밑바닥에 자리 잡고 있다. 그것은 우연적이고 단편적인 행동으로만 나타날 뿐이며 사고체계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러한 일이 발생하면, 그 암묵적인 도그마가 삼단논법의 대전제가 되면, 그 논리적 결말로 수용소가 도출된다. 수용소는 엄밀한 사유를 거쳐 논리적 결론에 도달하게 된, 이 세상에 대한 인식의 산물이다. 이 인식이 존재하는 한 그 결과들은 우리를 위협한다. (머리말)
그가 뭔가를 다 쓰고 나자 눈을 들어 나를 보았다.
그날 이후로 나는 여러 번, 여러 각도로 독토어 판비츠에 대해 생각했다. 무엇보다 내가 다시 자유인이 되었을 때 그를 다시 한 번 만나고 싶었다. 보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정신에 대한 내 호기심 때문이었다.
그 시선은 두 명의 인간 사이에 흐르는 시선이 아니었다. 전혀 다른 세계에 사는 두 존재 사이에 놓인, 수족관의 유리를 통해서 바라보는 것 같은 그 시선의 성질을 속속들이 설명할 수 있다면, 나는 제3제국의 그 거대한 광기의 본질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162쪽)
나는 지금 내가 이렇게 살아 있게 된 것이 로렌초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물질적인 도움 때문이라기보다는 그의 존재 자체가 나에게 끝없이 상기시켜준 어떤 가능성 때문이다. 선행을 행하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평범한 그의 태도를 보면서 나는 수용소 밖에 아직도 올바른 세상이, 부패하지 않고 야만적이지 않은, 증오와 두려움과는 무관한 세상이 존재할지 모른다고 믿을 수 있었다. 정확히 규정하기 어려운 어떤 것, 善의 희미한 가능성, 하지만 이것은 충분히 생존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로렌초는 인간이었다. 그의 인간성은 순수하고 오염되지 않았다. 로렌초 덕에 나는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을 수 있었다. (187쪽)
그는 누군가의 인간다움을 보며 스스로의 인간다움을 잃지 않으려 애쓰고, 자신이 인간임을 상기시키며 생존의 의지를 다진다. 자신이 '선발'(가스실로 보낼 사람들을 뽑는 절차)'되지 않은 것만을 신께 감사하는 또 다른 누군가를 보면서 역겨움과 굴욕감을 느끼고 '내가 신이라면 그의 기도를 땅에 내동댕이쳤을 것'이라며 분노한다.
아침에 내가 사나운 바람을 피해 실험실의 문지방을 넘어서는 순간 바로 내 옆에 한 친구가 등장한다. 내가 휴식을 취하는 순간마다, 카베에서나 쉬는 일요일마다 나타나던 친구다. 바로 기억이라는 고통이다. 의식이 어둠을 뚫고 나오는 순간 사나운 개처럼 내게 달려드는, 내가 인간임을 느끼게 하는 잔인하고 오래된 고통이다. 그러면 나는 연필과 노트를 들고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것을 쓴다. (216쪽)
화학을 전공한 덕에 실험실에서 일하게 되면서 그에게는 기록할 시간과 힘이 생겼고, 그는 온전히 그곳에서의 삶과 느낌을 적는 데에 매달린다. 레비는 왜 아우슈비츠를 기록하려고 했을까. 그는 기록하는 이유를 설명할 때에는 유독 '우리는'이라는 말을 쓴다. 그곳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 아니 모든 인류를 가리키는 말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가 기록한 이유는, 세상의 우리 모두가 과거를 기록하고자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수용소는 우리를 동물로 격하시키는 거대한 장치이기 때문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동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곳에서도 살아남는 것은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나중에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똑똑히 목격하기 위해 살아나겠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는 최소한 문명의 골격, 골조, 틀만이라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우리가 노예일지라도, 아무런 권리도 없을지라도, 갖은 수모를 겪고 죽을 것이 확실할지라도, 우리에게 한 가지 능력만은 남아 있다. 마지막 남은 것이기 때문에 온 힘을 다해 지켜야 한다. 그 능력이란 바로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58쪽)
당시 많은 사람들이 비참하게, 바닥에 짓눌린 상태로 살았지만 그 기간은 상대적으로 짧았다. 그런 까닭에, 이러한 특수한 인간 상황에 대한 기억들을 과연 간직할 필요가 있는지, 그렇게 하는 게 잘하는 일인지 자문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사실 인간의 모든 경험이 의미가 있고 분석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확신한다. 우리는 또한 수용소가 뚜렷하고도 거대한, 생물학적 사회학적 실험이었다는 점을 여러분이 생각해보기를 바란다. (131쪽)
그는 살아남았다. 그는 독일인들에게 사적으로 앙갚음을 해본 적도 없고, 그런 생각도 가져본 적 없다고 말한다. '용서했다'는 뜻이 아니다. 수용소에서 벌어진 죄악은 "그 어떤 위로의 기도로도, 그 어떤 용서로도, 죄인들의 그 어떤 속죄로도, 간단히 말해 인간의 능력 안에 있는 그 무엇으로도 절대 씻을 수 없는 혐오스러운 일"(199쪽)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책에 '증오도 원한도 복수심도' 드러나 있지 않은 것에 대한 레비의 답변이 말미에 실려 있다.
내가 보기에 증오는 개인적인 것이고 한 사람에게, 어떤 이름에게, 어떤 얼굴에게 향해지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당시 우리를 박해했던 사람들은 이름도 얼굴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멀리 있었고, 눈으로 볼 수 없었으며, 접근할 수도 없었다. 나치스 체제는 용의주도하게도 노예와 주인이 최소한의 접촉만 하도록 마련되어 있었다. (269쪽)
독일인들은 수용소에 대해, 거기서 벌어진 일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당시 독일의 보통 사람들은 실상을 잘 몰랐던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런 끔찍한 일이 그 정도 규모로 일어나는데 어떻게 잘 모를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은 남는다. 독일인들은 알기를 원하지 않았다고 레비는 말한다. 수용소가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곳이 단순한 요양원이라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알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알지 못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 모른 척하고 싶었기 때문에 알지 못했다. 나는 바로 이런 고의적인 태만함 때문에 그들이 유죄라고 생각한다. (276쪽)
수용소에서 나와 20여년의 시간이 흐른 뒤 레비는 파시즘의 유령을 다시 목도한다.
비인간적인 명령을 부지런히 수행한 사람들을 포함한 이런 추종자들은 타고난 고문 기술자들이나 괴물들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들이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괴물들은 존재하지만 그 수는 너무 적어서 우리에게 별 위협이 되지 못한다. 일반적인 사람들, 아무런 의문 없이 믿고 복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 기술자들이 훨씬 더 위험하다. 아이히만이나, 아우슈비츠 수용소 소장이었던 회스, 트레블링카 수용소 소장이었던 슈탕글, 20년 뒤 알제리에서 학살을 자행한 프랑스 병사들, 30년 뒤 베트남에서 학살을 자행한 미군 병사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이성과 다른 도구로, 혹은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력을 앞세워 우리를 설득하려고 애쓰는 사람을 신뢰해서는 안 된다. 진짜 선각자와 가짜 선각자를 구별하기란 어렵기 때문에 모든 선각자를 의심의 눈으로 보는 것이 좋다. 그들의 주장을 일단 거부하는 것이 좋다. (304쪽)
1982년 이스라엘이 레바논에서 사브라-샤틸라 학살을 저질렀을 때 레비는 라레푸블리카에 이런 글을 썼다.
우리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두 가지, 즉 도덕적인 것과 정치적인 면에서 베긴에 반대할 수 있다. 먼저 도덕적인 것은 다음과 같다. 아무리 전쟁 중이라 해도 베긴과 그의 동룓ㄹ이 보여주었던 잔인한 오만함을 정당화할 수 없다. 정치적인 주장도 이와 마찬가지로 분명하다. 이스라엘은 지금 완전한 고립의 상태 속으로 추락하고 있다. ... 우리는 보다 냉철한 이성으로 현재 이스라엘 지도부의 실수에 판결을 내리기 위해 이스라엘과의 감정적인 연대감을 억눌러야만 한다. (319쪽)
극한에서도 살아남은 레비는 1987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30년 가까이 지난 뒤, 나는 그를 애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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