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정치 실험 아이슬란드를 구하라
욘 그나르 지음. 김영옥 옮김. 새로운 발견
포퓰리스트라면 포퓰리스트이고, 좌파라면 좌파다. 본인 스스로는 '펑크에 빠졌던 무정부주의자 코미디언'이라 칭하는 그나르의 '정치 참여기'. 정말 유쾌하다. 거품을 쌓아올리다가 마침내 그것이 터져버리고 만 아이슬란드에서, 기성 정치권에 맞서 '최고당'이라는 정당을 만들어 레이캬비크 시장까지 지내고 다시 코미디언의 길로 돌아간 그나르는 '행복하고 웃기는 정치'에 대해 말한다. 그는 시종일관 유머러스하지만, 정치라는 낯선 길에서 고군분투하는 것이 어떻게 재미있기만 했을까.
세계 곳곳에서 기성 정치권이 그나르 같은 사람들, 혹은 정치적 스펙트럼에서 그와 정반대편에 서있을지언정 그나르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에게 얻어터지고 있다. 그들의 분노와 좌절을 이해하지 못하면, 아니 우리 스스로 그런 사람들이 되지 못하면 언제까지나 정치공학에 휘둘리다가 민주주의는 머나먼 어딘가로 날려보내는 수밖에 없다. '촛불 시민혁명'으로 대통령이 탄핵 심판을 기다리고 있는 한국에서 그나르의 외침은 신선하면서도 정답다. 낯익으면서도 통쾌하다.
뭐 그러니까 그냥 노력을 해보겠다는 말이니 큰 의미는 두지 마시길! 솔직히 내가 진짜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우리 당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정치와 거리가 멀었던 사람들이 힘을 합쳐 여러 일을 변화시키고 이런 엄청난 프로젝트를 계속 해 나간다는 사실이 자랑스럽다. 우리는 여전히 여기 있고, 아직도 시작을 함게 했던 사람들과 같이 일하고 있다.
(8쪽)
아이슬란드인들은 모두 수영을 한다. 아이슬란드의 수영장은 단순히 사우나 시설, 온수 욕조, 마사지와 일광욕 시설을 갖춘 완벽한 휴양 시설이다. 수영장은 지방의회에서 관리하며 우리는 이런 시설을 기본적인 사회복지 사업으로 여긴다. 지방의회는 시민들이 합리적인 가격으로 시설을 이용할 수 있도록 운영할 의무가 있다. 만약 진정한 사회주의가 이 나라 어딘가에서 꼭 맞는 자리를 찾았다면 그곳이 바로 수영장일 것이다.
아이슬란드를 알고 싶다면 수영장으로 가야 한다. 내가 보기에 수영장이야말로 우리를 한 나라의 국민으로 뭉치게 만드는 가장 확실한 장소이다. 밖에서라면 사람들의 차림새와 외양으로 경제력을 가늠할 수 있기 때문에 누가 어느 계층에 속하는지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아이슬랜드 온탕에서라면 그런 것은 잊어도 좋다.
(21-22쪽)
우리는 사실 스칸디나비아 본토 사람들에게 특별히 친밀감을 느끼지는 않는다. 오히려 핀란드 사람들에게 희한하게 끌려서 우리 아이슬란드 사람들은 핀란드인들이 얼마나 아이슬란드인 같은지 힘주어 말하기를 좋아한다. 핀란드인들도 우리에게 기꺼이 찬사를 보낸다. 그들은 우리가 느긋하고, 이상하며, 우울하다는 점에서 상당히 핀란드인과 닮았다고 한다. 이런 내밀한 유대감은 핀란드의 사우나 문화와도 관련이 있다.
(23쪽)
내가 아는 한 아이슬란드에서는 모든 일이 아주 단순하다. 엄밀히 말해 여기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인구 수가 32만 명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누가 자전거에서 떨어지기라도 하면 최소한 일간지 헤드라인 감은 된다. 우리나라에는 타블로이드 신문과 파파라치가 없다.
아이슬란드에서 유명 인사가 되는 일은 다른 나라와 의미가 다르다. 아이슬란드에서는 모든 것이 지루할 만큼 평범하다. 심지어 유명 인사들도 ㄱ렇다. 유명 인사들도 결국 수영장에 들어가기 전에 벌거벗고 샤워하는 사람일 뿐임을 알고 있다. (24쪽)
우리에게는 진짜 여름이 없을 뿐 아니라 진짜 겨울도 없다. 어느 날 눈이 오면, 다음 날은 꽁꽁 얼어붙고, 또 그 다음날은 비가 온다. 아침이면 호수들이 얼어붙고, 저녁에 다시 녹는다. 한 치 앞을 예상할 수가 없다. 그 때문에 아이슬란드인들은 다른 스칸디나비아인들과 달리 겨울 스포츠에 진출하지 못했다. 우리가 진짜 잘하는 유일한 스포츠는 체스이다. 어쨌든 체스판 앞에서라면 일 년 내내 실내에 쪼그리고 앉아 있을 수 있으니까.
우리나라는 하나에서 열까지 자연과 비바람으로 만들어졌다. 그래서 우리는 굉장한 적응력을 갖추고 있다. 아마 우리가 자연과 자연의 심기에 대해 어느 정도 겸손함을 지켜 왔기 때문이리라. 자연을 바꿀 수는 없지만 생각하는 방식은 바꿀 수 있다. 그냥 자연에 순응하면 된다. 우리를 여기서 살아남을 수 있게 해 주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그 순응성이다.
(27쪽)
나는 머지않아 유머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중요한 기술로 인식되리라 확신한다. 유머감각이 없는 사람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유머는 지극히 자연스럽게 발달되어야 할 능력이다. 그렇지만 감성지능과 여자의 직관이라는 말에 섞인 조롱처럼 유머는 아직도 회의적인 시선을 받을 때가 많다. 사회가 엉망으로 치달을수록 그런 편견은 더 커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앞으로는 달라질 것이다.
유머가 가장 중요한 성격상의 특성이라고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때가 오면 지구 상의 인류는 더욱 잘 지낼 수밖에 없으리라. 화내고 싸우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다는 사실을 다들 깨닫게 될 테니. 그리고 유머라는 단어 그 자체가 새로운 의미와 맥락으로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이를테면 유머러스한 정부, 유머러스한 방식, 유머러스한 재정, 섹스 중의 유머, 예술과 문화에서의 유머같이.
(47-48쪽)
우리는 정말 새로운 것을 놓치고 있었다. 진부하고 지독하게 따분한 정당정치와는 다른 무엇 말이다. 새로운 단어, 새로운 개념, 새로운 가치, 젊고 신선한 얼굴을 놓치고 있었다. 정치인들이 진부한 말은 잊고, 융통성 없고 낡아빠진 좌우의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할 때였다. 똑같이 나쁜 두 선택 사이에서 한 가지를 택해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세 번째 안을 만들면 된다.
두 가지 아이디어가 서로 섹스를 나누면 세 번째 아이디어가 탄생한다. 그렇지만 이 경우에는 아마도 그룹섹스라고 설명해야 할 것이다. 굉장히 많은 아이디어들이 한 데 뒤섞여 뒹굴다 보니 결국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일단 그 아이디어가 세상에 나온 이상 되돌릴 수는 없었다. 너무나 환상적이었으니까.
당시 IMF가 재정 감독권을 쥐고 있었고 업계 내부자들은 제일 먼저 문화사업 예산을 삭감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아는 감독 한 사람이 나를 촌극에 출연시키고 싶어 했다. 출연을 결정하고 우리는 그 새로운 프로젝트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게 바로 최고당에 대한 아이디어가 처음 생겨난 자리였다.
(56-57쪽)
솔직히 밝히자면, 우리 당에는 우리가 직접 만든 정책이 전혀 없다.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우리가 만들었다는 듯 활동한다.
(68쪽)
당신이 어떤 일을 시작하려면 그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속속들이 알아야만 하는가? 과학에 흥미를 가지려면 과학자가 되어야 하는가? 자연을 즐기려면 자연에 대해 전부 알아야 하는가? 아니다. 정치도 다를 바 없다. 정계에 참여할 권리를 얻기 위해 정치인이 될 필요는 없다. 특별한 훈련도 기술도 필요 없다. 심지어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려야 할 필요도 없다. 누구든 마음만 먹으면 정치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
(61쪽)
최신형 아이폰을 선물받으면 당신은 행복할 것이다. 하지만 한 달 수 그것은 더 이상 새롭지 않으며, 고장이라도 난다면 결국 행복은 사라지고 만다. 그렇지만 당신에게 아이폰을 선물한 사람의 행복은 몇 년 동안 계속될 것이다. 그 사람은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준 좋은 사람이 되었고 그 덕에 뿌듯하고 즐거울 수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일도 그와 마찬가지다. 우리가 성공에 집착해서가 아니라 재미있게 즐기기 때문이라면 지금이 정치에 관여해야 할 적기인 것이다.
(66쪽)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는 현실적 방안은 민주주의에 직접 참여하는 길이 유일하다. 직접참여. 만일 정치가 바보 같고 지루하며 정치인들도 다 그런 것 같다면 직접 정당과 공약을 만들면 된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사실 창당은 아주 간단한 일이다. 상상력 조금과 용기 적당히, 나머지는 저절로 따라온다. 하지만 시작하기 전에 몇 가지 사실은 분명히 해 둬야 한다. 당신이 못마땅해 하는 것이 무엇인가? 뭐가 잘못된 것 같은가? 어디서 발생한 문제인가? 환경보호에 전념하고 있는데 당신 나라에는 녹색당이 없는가? 그렇다면 창당하라. 녹색당이 있긴 하지만 효과적으로 일하는 것 같지 않은가? 그렇다면 당원이 되어 힘을 보태라. 대신 다른 활동을 줄이고 시간을 투자할 준비를 하라. 가족, 친구, 취미, 일을 하며 보냈을 시간을 희생할 각오를 하라.
(73쪽)
나라의 문제가 한낱 어리석은 우스개 따위로 해결되지 않으리라는 이야기가 반복적으로 퍼져 나왔다. 나는 더 바보 같고 익살스러운 행동으로 대응했다. 다른 당이 새로운 공약을 할 때마다 우리는 모여 앉아 그들을 능가할 수 있는 방법을 논의했다. 좌파녹색연합이 아이들과 청소년에게 무료로 수영장을 이용하게 해주겠노라 약속하면 우리는 모두가 무료로 이용하게 하겠다는 식으로 대응했다. 무료 수건까지 포함해서!
(80쪽)
최고당의 정당 강령
6)적극적인 민주주의
민주주의는 위대하다. 적극적인 민주주의는 더욱 위대하다. 그러므로 우리 당도 민주주의에 적극적으로 임하겠다.
8)시내버스: 대학생, 학생, 장애인 무료 탑승!
그 어느 당보다 더욱 파격적으로 비용을 면제하겠다는 공약을 약속한다. 어차피 실제 공약을 지키려는 노력 따위는 하지 않을 테니까! 그래서 여성들을 위한 무료 항공권이며 교외 거주자들을 위한 무료 자가용 제공까지 뭐든지 약속은 할 수 있다.
10) 모든 국민에게 수영장 무료 입장 및 수건 제공
아무도 이 제안을 거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가 아주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공약 중 하나이다.
12)완벽한 양성평등
완벽한 양성평등을 약속한다. 양성평등이 모두를 위한 최선이기 때문이다.
13)또한 우리는 여성과 노인들을 신중하게 대우합니다.
다들 여성과 노인은 크게 할 말이 없다고 여기는 것 같다. 우리가 그런 생각을 바꿔 놓겠다.
우리의 윤리강령
4)유익
유익함이야말로 실질적인 핵심이다. 우리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기꺼이 도움을 주는 사람이다. 이는 우리 당 이미지의 한 부분이다. 예를 들어 거동이 불편한 노인을 만나면 즉시 도와야 한다. 그리고 꼭 그 장면을 사진으로 남겨 나중에 언론이나 온라인으로 널리 알려야 한다.
6)비밀
우리는 당내에서 거론되는 모든 말과 행위에 대하여 엄격히 기밀로 하며 외부로 발설하지 않는다. 단, 참을 수 없을 만큼 재밌거나 특별히 당의 명성과 당 대표에게 이익이 되는 경우는 열외로 한다.
7)즐거움
우리는 항상 행복하고 유쾌하며 늘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다. 우리는 즐거움을 퍼뜨리고 우리의 내적 자아는 외부로 드러내지 않도록 노력한다. 우리가 최고라는 사실을 늘 염두하라! 그리고 웃음을 통해 우리가 전하고자 하는 바를 최대한 납득시키도록 노력한다.
8)존중
우리는 그 누구도 차별하지 않는다. 세상에서 제일 머저리 같은 인간이라도 차별해서는 안 된다. 험담은 당연히 그 대상이 옆에 없을 때에 한해 우리끼리 있을 시에만 허용된다.
(108-1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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