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를 잃은 걸 기념합니다>.
극적인 제목이다. 독일의 저널리스트 겸 저술가 니콜라우스 뉘첼이 지은 이 책(유영미 옮김. 서해문집)은 한 아버지가 자식에게 들려주는 1차 세계대전 이야기다. 당시의 역사를 쉬운 말로 설명하지만 담겨 있는 지식이나 메시지는 가볍지 않다. 전쟁에서 한쪽 다리를 잃은 외할아버지의 이야기로 시작해 전쟁의 끔찍함을 생생하게 그려보인다.
전쟁은 사람들의 얼굴을 지워버린다. '전사자들' 혹은 '전쟁영웅'이라는 말 속에 가려진 사람들의 나이와 이름을 한 사람 한 사람 호명하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그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기독교도였지만 전쟁에, 나치즘에 환호했다. 그는 그 부끄러운 역사를 끄집어내고 의미를 되짚는다. 흔히들 독일은 일본과 달리 과거의 잘못을 치열하게 반성하고 사죄했다고 말한다. 그런 '과거와의 맞대면'이 평범한 한 집안, 한 사람에게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책은 아주 인상적이었다.
나는 프란츠 쿠링거라는 전사자의 묘지를 지나쳤어. 묘비를 보니 열여덟 살 생일을 한 달 앞두고 사망한 걸로 되어 있더라고. 열일곱이면 너무 어린 나이 아니야? 그런 청소년에게 서로를 죽이라고 총대를 쥐어 준 거야. 오늘날에도 열일곱 살이면 군에 입대할 수 있어.
(21쪽)
우리 아들이 6학년 학기 말에 가져온 가정통신문에 독일 연방군의 광고 전단지가 끼워져 있었어. "더 많은 혜택을 누리는 직업을 원하나요? 연방 군대는 5학년에서 12학년까지의 아이들에게 그렇게 묻고 있었어. 광고에는 "흥미로운 활동"이라는 말과 함께 잘생긴 청년들의 사진이 실려 있었어. 총탄이나 포탄 파편 때문에 젊은이들이 나머지 인생을 장애를 안고 살 수도 있다는 말 같은 것은 전혀 적혀 있지 않았지. 경우에 따라서는 아프가니스탄 파병 군인들처럼 사람을 죽이기도 해야 한다는 말도 나와 있지 않았어.
우리 할아버지가 1차대전에서 겪은 일이 오늘날의 연방군이랑 무슨 관련이 있을까? 또 나의 삶과의 관련성은 무엇일까? 나는 관련이 있다고 생각해. 언뜻 보면 상관이 없을 듯싶지만, 좀더 자세히 보면 그렇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어. 자세히 보는 일은 종종 수수께끼를 푸는 일과 비슷하지만 말이야.
(23쪽)
우리 할아버지는 1차대전 후 나치당원이 되었어. 1933년부터 강제수용소를 지은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지지했던 것이지. 나치에 협력해야 한다는 것이 할아버지의 정치적 확신이었어. 예수님 말씀을 설교하던 개신교 목사였는데 말이지. 제3제국 시대에는 이런 사람들이 드물지 않았어. 우리 할아버지와 같은 사람들은 자신을 '독일 그로스도인'이라 부르며 기독교의 십자가와 나치의 하켄크로이츠를 연결시키고자 했지.
(32쪽)
물론 우리 할머니 마르타 뮐러와 할아버지 아우구스트 뮐러가 개인적으로 유대인들을 괴롭혔던 것은 아니야. 강제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을 학대하지도 않았어. 할아버지는 목사이지, 강제수용소 경비원이 아니었으니까. 우리 할아버지는 제3제국 시대에 아무도 죽인 일이 없었어. 하지만 할아버지는 나치가 독일에서 정권을 잡는 것을 도왔어. 그리고 나치가 정권을 잡자 계속 나치를 지지했지. 할머니도 마찬가지였고. 1차대전이 끝나고 15년 후, 많은 사람들이 다시금 독일이 강한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우리 할머니와 할아버지도 그런 사람들 축에 들었어.
(35쪽)
우리 할머니는 퓌르트에서 몇 년 간 학교를 다녔는데, 그 지역에는 꽤 커다란 유대인 공동체가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 친구들이 많았거든. 그런 할머니가 어떻게 나중에 자기 친구들의 가정이 권리를 다 빼앗기고 어려움을 겪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할 수 있었는지 정말 이해가 안 가. 유대인들이 재산을 다 빼앗기고, 직업도 빼앗기고, 살던 지역에서 추방당하는 건 분명히 보았을 텐데. 할머니, 할아버지는 그것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 틀림없어. 아니 그 반대였지. 할머니, 할아버지의 젊은 시절, 이 세상은 과연 어떤 세상이었을까? 할아버지는 전쟁에 참여해서 과연 어떤 경험을 한 것일까? 어떤 사람이 되어 전쟁에서 돌아왔을까? 우리 할아버지 아우구스트 뮐러가 대량살상에 뛰어들었을 때, 독일과 유럽은
(37쪽)
그러니까 우리 할아버지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자란 거야. "독일은 크고 자랑스런 나라다. 하지만 위대함을 계속 지니기 위해서는 싸워야 한다. 프랑스와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다른 나라들도 크고 힘 있는 나라가 되려고 하기 때문이다."
(61쪽)
여행사 카탈로그를 뒤적이다가 나미비아에서 독일 문화의 흔적을 따라가는 여행이 소개된 걸 보았어. 여행자들은 예전의 '독일령 남서아프리카'로 여행을 떠나게 되는 것이지. 왜 만은 독일 교회가 아프리카의 탄자니아에 자매교회를 두고 있나 했더니, 정답은 바로 그것이었어. 독일 사람들은 아프리카의 다른 나라들보다는 아무래도 예전에 독일령 동아프리카에 속했던 지역에 더 친근감을 느끼기 때문이었던 거지. 물론 오늘날 대부분의 독일 사람들은 지금의 탄자니아가 예전에 독일의 지배를 받았던 지역이라는 걸 전혀 알지 못하지만 말이야.
(59쪽)
우리 할머니의 노트에서 1차 대전이 직접적으로 언급된 시는 딱 하나야. 그 제목은 바로 '토고'였지. 서아프리카에 있는 작은 나라 토고는 1884년 독일 식민지가 되었는데 프랑스 식민지와 영국의 식민지에 둘러싸여 있었지. 그리고 유럽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아프리카 같은 식민 지역에서도 전쟁이 시작되었는데, 토고의 경우 승패가 갈리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어. 1914년 8월 27일 독일 식민통치자들은 토고를 프랑스와 영국에 넘겨주었지.
(81쪽)
유럽의 전투에서 사망한 사람들 중엔 5대륙 출신이 모두 있었어. 동프랑스의 베르됭에 가면 십자가가 세워진 무덤을 아주 많이 볼 수 있어. 이슬람교 신앙을 가진 전사자의 아랍 분위기가 나는 묘석들도 볼 수 있지. 칼파 제르빕이라는 이름도 있었는데, 그는 1916년 8월 5일 스물여섯의 나이로 전사했어. 인터넷 자료를 보니 그의 고향은 알제리의 콘스탄틴이더라고. 비석에는 "프랑스를 위해 죽다."라고 되어 있었지. 젊은 아프리카인들이 정말로 프랑스를 위해 죽고 싶었을까?
(83쪽)
이탈리아 정부의 요구는 아주 명확했어. 1914년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속해 있던 알프스와 지중해 지역을 이탈리아 영토로 만드는 것이었지. 이탈리아는 그들이 '마레 노스트로' 즉 '우리 바다'라고 부르는 지중해 지역에 가능하면 많은 땅을 확보하고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어 했던 거야.
(99쪽)
내가 처음으로 진짜 해골을 본 건 열 살 때였어. 언젠가 젊은 청년의 얼굴을 이루고 있었던 뼈였지. 그 옆에 다리뼈들과 팔뼈들이 있었어. 이런 모습은 두고두고 잊히지 않았어. 그 뼈들을 본 장소는 프랑스 동부 베르됭 근처의 두오몽 납골당이었어. 이 납골당에는 13만 명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어. 신원 파악이 되지 않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시신들이었어.
(113쪽)
베르됭, 이 도시의 이름은 1차대전 중 가장 참혹했던 전투를 상징하는 이름이야. 인류사를 통틀어 가장 참혹한 전투였을지도 몰라. 전투가 가장 격렬했던 지역에서는 1평방미터당 수류탄이 여섯 개 떨어졌다고 하더라고.
베르됭의 옛 격전지를 요즘 걷다 보면 정말로 당황스러워. 농사를 짓지 않는 땅에는 아직도 뚜렷이 전쟁의 흔적이 남아 있거든. 전투가 있은 지 100년이 지났는데도 숲에는 아직 포탄이 터질 때 생겨난 구덩이들이 남아 있어. 프랑스 정부는 두오몽 묘지 주변 몇몇 장소에 풀과 나무가 자라지 않도록 해놓았어. 구덩이를 잘 알아볼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지. 전쟁을 기억하라고 말이야.
(115쪽)
프랑스 정부는 완전히 파괴된 마을 땅에 표시를 해놓았어. 한때 두오몽 거주지가 있었던 곳에서 표지석들을 볼 수 있지. 표지석들은 이곳은 사람들이 샘에서 물을 긷던 곳이며, 저쪽으로 아이들이 학교에 다녔다는 걸, 그리고 같은 건물에 시청이 있었다는 걸 보여줘.
지금은 그곳에 아무것도 없어. 모든 것이 무지무지하게 평화로운 인상을 주지. 바람이 나무 사이로, 잔디 위로 살랑살랑 불고 아주 고요해. 하지만 우리 할아버지가 젊었을 적에 이곳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끔찍했어.
(117쪽)
베르됭 같은 곳에 앉아 있노라면 나와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몇 번이나 유럽을 전쟁과 파괴로 얼룩지게 했다는 생각을 억누를 수가 없어. 나의 할아버지 세대는 베르됭에서 인류사상 둘째가라면 서러울 아주 끔찍한 전투를 벌였어. 그래서 나는 베르됭에 가서는 마드리드나 리스본에서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다닐 수가 없어.
(230쪽)
오늘날 나는 슈트라스부르크나 단치히가 독일 땅이었던 시절 우리 할아버지가 갔던 것보다 훨씬 더 쉽게 그곳 땅을 밟을 수 있어. 슈트라스부르크나 단치히가 독일 영토인 것이 뭐 그리 대수겠어? 그곳에서 살거나 일하고자 한다면, 지금도 아무 문제 없이 할 수 있을 것을. 그 때문에 나는 계속해서 독일에 대한 어리석은 꿈을 꾸는 네오나치들의 데모를 보면 가슴이 서늘해져.
하지만 한편으로는 네오나치들을 보잘것없는 소수로 여기며 안심해도 될까 하는 의구심이 들어. 나치 시대가 독일 전체의 역사로 따지면 몇 년 되지 않는 극히 짧은 기간에 불과하지 않았느냐고 말하는 것은 영 잘못된 생각이잖아. 나치가 정권을 잡고 무지막지한 일을 행한 것은 불과 12년이라고, 그게 뭐 그리 대수냐고 쉽게 생각할 수 있어. "1933년에 거대한 우주선이 갈색 제복을 입은 수백만의 외계인들을 싣고 와서 뱉어내었다. 그리고 1945년 UFO는 이런 외계인 나치들을 다시금 모아서 싣고 날아가버렸다. 소동은 지나갔다" 하는 식이야.
(222쪽)
우리 할아버지와 같은 상황이라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하느님이 영국을 벌주시기를"이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을까? 나는 프랑스 젊은이들, 코르시카와 알제리의 젊은이들과 싸우기 위해 기차에 올랐을까? 아니면 당시에도 이미 있었던 평화주의자 편에 속했을까? 1931년 1차대전에 대해 "군인들은 살인자인가?" 하고 물었던 쿠르트 투콜스키처럼 전쟁을 비판하는 글을 썼을까?
1차대전의 역사, 우리 할아버지의 인생을 돌아보면서 나는 이렇게 묻게 돼. 인간이란 무엇일까? 인간은 어떻게 이토록 끔찍한 일을 저지를 수 있었던 것일까? 나는 대체 누구일까? 이렇게 묻는 건 또 무슨 의미가 있을까?
(2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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