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대런 애쓰모글루, 제임스 로빈슨

딸기21 2016. 3. 3. 21:10
728x90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대런 애쓰모글루, 제임스 로빈슨. 최완규 옮김, 시공사. 


처음에 제목만 보고서, ‘시장 대 국가(정부)’라고 할 때의 그 국가를 말하는 줄 알았다. 실제 내용은 시장지상주의를 외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그 반대다. 시장의 중요성을 잊지 않지만, 그런 경제학적 틀에서 벗어나 ‘왜 어떤 나라는 실패했고 어떤 나라는 성공했는가’를 촘촘히 분석해 들어간다. 분석 틀 자체가 촘촘하다기보다는, 큰 틀에서 개별 사례들을 꼼꼼히 살피는 식이어서 읽는 재미도 적지 않았다. 애쓰모글루는 미 MIT 경제학교수이고 로빈슨은 하버드대 정치학교수다. 책은 두 저자의 면모에서 보이듯 ‘정치가 경제를 만났을 때’를 담고 있다고 보면 될 것 같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왜 어떤 정치는 어떤 역사를 거쳐 이런 경제를 낳았나’ 하는 것이 되겠다. 전반적인 톤은 개발경제학에 가깝다.




극도로 단순하게 요약하면 이렇다. 경제제도에는 다 같이 좀 잘 살아보자 하는 게 있는가 하면, 쟤네들 것 다 빼앗아서라도 우리가 잘 살면 되지 하는 게 있다. 그 둘을 저자들은 ‘포용적 경제제도’와 ‘착취적 경제제도’라 부른다. 다 같이 잘 살아보자는 제도를 택한 나라들은 발전했고, 그렇지 못한 나라들은 엉망진창이 됐다.


나라마다 경제적 성패가 갈리는 이유는 제도와 경제 운용에 영향을 주는 규칙,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인센티브가 다르기 때문이다. 한국과 미국은 더 많은 일반 대중이 경제활동에 참여해 자신의 재능과 역량을 충분히 발휘하며 개개인이 원하는 바를 선택할 수 있는 포용적 경제제도 inclusive economic institutions를 시행하고 있다. 경제제도가 포용적이라는 것은 사유재산이 확고히 보장되고, 법체제가 공평무사하게 시행되며, 누구나 교환 및 계약이 가능한 공평한 경쟁 환경을 보장하는 공공서비스를 제공한다는 뜻이다. 포용적 경제제도는 또한 새로운 기업의 참여를 허용하고 개인에게 직업 선택의 자유를 보장한다. 

포용적 경제제도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속성을 가진 그런 제도를 우리는 착취적 경제제도extractive economic institutions라고 부른다. 착취적이라고 하는 이유는 말 그대로 한 계층의 소득과 부를 착취해 다른 계층의 배를 불리기 위해 고안된 제도이기 때문이다. 

(121쪽)


‘빼앗기 경제’는 실패하기 마련이다. 당장은 유지가 될지 몰라도, 빼앗을 것이 천년만년 남아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빼앗기 경제로는 성장을 계속할 수가 없다. 빼앗는다는 본질도 문제이거니와, 그런 제도 아래에서는 창의성이 안 나온다. 슘페터 식으로 말하자면 ‘창조적 파괴’가 불가능하다. 다 빼앗기는데, 누가 아이디어를 내냐고. 그리하야 착취적 경제제도는 한계를 띤다. 물론 그렇다고 착취적인 경제제도를 가진 나라들이 모두 순식간에 망하는 것은 아니니, 그 속에는 또 어느 정도 기간 유지될만한 토대가 있기 때문이다. 착취적 정치제도 하에서 성장이 가능하려면 중앙집권화가 필수적(143쪽)이라는 점을 저자들은 강조한다. 


경제제도가 착취적이라 해도 엘리트층의 통제가 가능하고 생산성이 높은 활동에 지원을 분배하면 성장이 가능하다. 16세기에서 18세기 사이, 대다수 인구를 잔혹하게 수탈하는 착취적 경제제도에도 불구하고 카리브 해 섬들은 세계에서 으뜸가는 부를 누렸다. 설탕을 세계 시장에 내다 팔수 있었기 때문이다. 제1차 경제 5개년 계획에 착수한 1928년부터 1970년대까지 고속 경제성장과 산업화를 누렸던 소련 역시 비슷한 사례다. (140쪽)


여기서 재미난 것이 박정희 시절 한국에 대한 분석이다. 


박정희는 1961년 군사 쿠데타로 집권했지만, 당시 한국 사회는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었고 경제 또한 본질적으로 포용적이었다. 박정희 정권이 권위주의적이라고는 해도 경제성장을 추진할 만큼 권력 기반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박정희 정권은 대단히 적극적으로 경제성장을 추구했다. 한국은 1980년대 들어 정치제도 역시 포용적으로 변모한다. 경제 엘리트층 입장에서 자신들이나 군부가 정치를 장악해 얻을 게 별로 없어진 것이다. 한국사회가 비교적 고르게 소득 균형을 이루면서 다원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엘리트의 두려움도 줄어들었다. 북한의 위협 때문에라도 미국의 입김이 셀 수밖에 없는 상황이어서 군부독재에 저항하는 강력한 민주화 의지를 더는 억누르기 어려웠던 게 사실이다. (142쪽)


이제, 본질적인 질문을 해야 한다. 왜! 어떤 나라는 포용적인 경제제도를 갖게 된 반면 어떤 나라는 착취적인 경제제도를 갖 된 것일까? 사실 우리는 이 질문에 선험적인 대답을 갖고 있다. 저자가 책머리에서 예시한 것은 바로 남한과 북한의 비교다. 왜 이렇게 다르게 됐냐고? 정치와 역사가 그렇게 흘러간 탓이다. ‘애초부터의 차이’가 없었음에도 남북한의 분단은 이렇게 큰 차이를 만들어냈다. 책은 이런 차이를 진화론의 유전적 부동에 빗대어 '제도적 부동'이라 부른다. 

차이들이 처음에는 아주 사소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런 차이가 쌓이다 보면 제도적 부동浮動, institutional drift 과정이 시작된다. 두 격리된 생명체의 개체군이 유전적 부동genetic drift 과정을 통해 임의적인 유전적 사건으로 서서히 멀어지듯이, 다른 모든 면이 유사한 사회라 하더라도 제도적인 면에서 서서히 멀어져 가는 현상을 가리킨다. 결정적 분기점과 제도적 부동의 상호작용에 따라 전 세계의 경제 발전은 대단히 다른 패턴을 보이게 된다. 
(165쪽)


콩고 강의 가장 큰 지류 중 하나는 카사이 Kasai다. 서안을 따라 만나는 것은 렐레 LeLe 부족이고, 동안에는 부숑 Bushong 부족이 살고 있다. 

인류학자 메리 더글러스 Mary Douglas와 사학자 얀 반시나 Jan Vansina는 1950년대 이들 부족을 연구하면서 놀라운 차이점들을 발견한 바 있다. 렐레 부족은 가난하지만 부숑 부족은 부유하다. 렐레 부족은 생계를 위해 생산하는 데 반해 부숑 부족은 시장에서 교환하려고 생산을 한다. 또 더글러스와 반시나는 렐레 부족이 한층 낮은 수준의 기술을 사용한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가령 이들은 사냥할 때 엄청나게 생산성을 높여줄 수 있는데도 그물을 사용하지 않는다. 부숑 부족은 2년을 주기로 돌아가며 연속해서 다섯 가지의 작물을 재배하는 정교한 형태의 다모작을 시행했다. 참마, 고구마, 카사바, 콩 등을 기르고 옥수수도 1년에 두 차례, 어떨 때는 세 차례 수확했다. 렐레 부족은 그런 체계가 없었고 옥수수도 1년에 한 번 거두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Why Nations Fail’ and the fate of Lele and Bushong


1620년 샤이암 Shyaam이라는 인물이 정치혁명을 이끌어 부숑 부족을 중심으로 쿠바왕국을 세우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이 시기 전까지만 해도 부숑과 렐레 부족사이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샤이암이 카사이 강 동쪽사회를 재구성한 방식의 결과 차이가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샤이암은 정부를 만들고 정치제도 피라미드를 구축했다. 이전보다 훨씬 더 중앙집권화 되었을 뿐 아니라 고도로 정교한 구조였다.
샤이암과 그의 후계자들은 관료제를 창설해 세금을 거두고 법 제도를 마련했으며 경찰력을 동원해 법을 집행했다. 지도자들은 의사결정을 내리기 전에 조언을 구해야 하는 자문기구의 견제를 받았다. 심지어 배심원 재판까지 있었다. 농경 방식이 정비되고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신기술이 채택되었다. 이전에 먹던 주식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들어 온 생산량이 많은 새로운 곡식으로 대체되었다(특히 옥수수, 카사바, 고추  등). 강도 높은 다모작 농법이 도입된 것도 이 시기였고 1인당 식량생산량은 두 배로 껑충 뛰었다. 
(201쪽)



결국 중요한 것은 정치 제도다! 저자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 점이다. '대체로' 포용적인 정치제도와 포용적인 경제제도는 함께 간다. 사회가 다원화돼 있고, 민주적이고, 정부가 정통성이 있을 때에 포용적인 경제제도가 만들어진다. 그것이 무너지면? 반대로 간다. 둘 다 착취적이 되고, 결국 망한다. 어떤 권위주의자들 혹은 독재자들 혹은 왕들은 혁신을 일부러 거부한다. 착취적인 제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다. 그러다가 오래 못가고 모두 망한다.


베네치아 경제가 확대될 수 있었던 토대 중 하나는 경제제도를 한충 포용적인 방향으로 이끌었던 잇따른 계약 혁신이었다. 가장 유명한 것은 코멘다 commenda라는 초기 형태의 합자회사로 단 한 번의 무역거래를 위해 수립되는 위탁계약이었다.

코멘다는 두 명의 파트너가 참여하는데 그 중 하나는 베네치아에 ‘머물러’ 있고 다른 하나는 무역을 하러 여행을 떠나야 했다. 머물러 있는 파트너는 자본을 대고 여행을 떠나는 파트너는 물품을 옮겨 거래했다. 돈이 없는 젊은 사업가라면 상품을 위탁받아 여행을 떠남으로써 무역업에 뛰어들 수 있었다. 이는 신분 상승을 도모할 주요 수단 중 하나였다. 

이런 경제적 포용성과 무역을 통한 신흥가문의 등장으로 정치체제 역시 한층 개방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첫 번째 중요한 혁신은 대평의회의 창설이었다. 이때부터 베네치아의 정치권력은 궁극적으로 대평의회에서 나왔다 할 수 있다. 

신흥 부자들은 기존 엘리트층의 정치권력에도 도전했다. 따라서 대평의회에 참여하는 기성 엘리트층은 늘 말썽만 생기지 않는다면 새로운 인물이 이 체제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버리고 싶은 유혹을 느꼈다. 1298년 9월 11일 이후에는 현직 의원과 그 가족은 더 이상 승인 절차가 필요 없게 되었다. 대평의회는 이제 사실상 외부인에게 문을 닫아걸었고 초기 의원은 세습귀족으로 변모했다. 이 체제는1315년 확정되었다. 베네치아 귀족의 공식 명부인 ‘황금의 책Libro d’Oro’이 만들어진 것이다. 

착취적 정치제도로 선회하더니 곧이어 경제제도 역시 착취적으로 방향을 튼 것이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코멘다 계약을 금지했다는 사실이다. 다음 행보는 1314년 베네치아 정부가 무역을 국유화하면서 시작되었다. 정부 소유 선박이 무역에 투입되었고 1324년부터는 개인이 무역하려면 높은 세금을 물어야 했다. 장거리 무역은 귀족의 전유물이 되었다. (231쪽)


1485년 오스만제국의 술탄 바예지드 2세는 아랍어 인쇄를 금지하는 칙령을 반포했다. 1515년 셀림 1세는 이 칙령을 한충 더 강화했다. 1727년이 돼서야 처음으로 오스만제국 땅에 인쇄기가 들어올 수 있었다. 아흐메드 3세는 이브라힘 뮈테페리카 Ibrahim Muteferrika의 인쇄소 설립을 허용했다. 뮈테페리카는 인쇄소 설립을 승인받았지만 인쇄하는 책마다 ‘카디’라고 부르는 종교 율법학자 세 명의 검열을 거쳐야 했다. 뮈테페리카가 인쇄한 책이 몇 권 안 된다는 사실은 놀랄 일도 아니다. 인쇄를 시작한 1729년에서 일을 그만둔 1743년까지 고작 17권을 찍었을 뿐이다.



인쇄를 하는 이브라힘 뮈테페리카를 그린 그림. http://www.weloveist.com/


이집트에 인쇄기가 도입된 것은 1798년으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집트를 복속시키려다 실패했을 때 프랑스 군대가 들여온 것이었다. 19세기 후엽까지도 오스만제국의 책 생산은 주로 원본을 베껴 쓰는 필경사에 의존하고 있었다.
18세기 초 이스탄불에서 활동했던 필경사는 무려 8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인쇄술에 대한 저항은 문맹률, 교육, 경제적 성공에 분명한 영향을 미쳤다. 1800년도에 글을 읽고 쓸 줄 알았던 오스만제국 시민은 고작 2-3 퍼센트에 불과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잉글랜드에서는 성인 남성 60퍼센트, 성인 여성 40퍼센트가 읽고 쓸 줄 알았다. 네덜란드와 독일의 문자해독률은 이보다 한참 높았다. 
(313쪽)


1792년에서 1806년까지 신성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였고 그 후에는 1835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황제를 지낸 프란츠 1세의 기본 전략은 어떤 변화에도 반대하는 것이었다. 첫째, 프란츠 1세는 산업 발달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산업이 발달하면 공장이 늘어나고, 공장이 늘면 가난한 노동자가 도시로 몰려들기 마련이었다. 특히 수도 빈에 노동자가 몰려드는 것을 우려했다. 그런 노동자는 절대주의 체제를 반대하는 자들을 추종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프란츠 1세는 그러려면 애초에 공장이 들어서는 것을 막는 게 상책이라고 믿었다. 가령 1802년 빈에 새로운 공장 건설을 금지했다. 

둘째, 프란츠 1세는 철도 건설도 반대했다. 북부 철도 건설 계획에 이렇게 대꾸했을 정도다. “아니, 절대 안 돼. 혁명이 짐의 땅에까지 번지면 어쩌려고.” 1860년대까지도 마차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전체 철 생산량의 90퍼센트를 석탄으로 뽑아내던 1883년까지도 합스부르크 영토에서는 철 생산의 절반 이상을 효율성이 한참 떨어지는 목탄에 의존했다. 신성로마제국이 몰락한 제1차 세계대전까지도 직물 직조가 완전히 기계화되지 못해 여전히 수작업이 필요했다. (329쪽)


자, 이렇게 해서 역사의 승자와 패자들이 갈라진다. 특히나 어떤 '작은 선택'이 어마어마한 차이를 만드는 것은 시대 흐름이 '결정적인 분기점'으로 가고 있을 때다. 

1368년 집권한 명 왕조의 태조 홍무제는 정부가 주도하는 해외무역만 허용했으며 그마저도 조공과 관련이 없는 순수상업 활동이라면 금지해버렸다. 1402년 즉위한 영락제는 정부가 후원하는 해외무역을 대대적으로 재개했다. 정화에게 동남아시아, 남아시아, 아라비아, 아프리카 등지로 여섯 차례 해외원정을 지시한 것이다.
하지만 영락제는 1422년 6차 원정 이후 한때 해외 원정을 중단했다. 뒤를 이어 1424년에서 1425년까지 제국을 통치한 홍희제는 이를 영구히 중단했다. 그가 요절한 후 즉위한 선덕제는 1433년 정화의 마지막 해외 원정을 허용했지만 그 이후에는 모든 해외무역이 다시 금지되었다. 1436년까지는 심지어 바다에 띄울 선박 건조 자체가 불법이었다. 해외무역 금지 조치는 1567년에 가서야 해제되었다. 국제무역과 아메리카 대륙 발견이 잉글랜드의 제도를 본질적으로 뒤바뀌어놓던 시절, 중국은 이런 결정적 분기점에서 자발적으로 떨어져 나와 국내로만 눈길을 돌렸다. 

1661년  강희제는 베트남에서 저장성에 이르는 해안지대의 모든 주민을 27킬로미터 내륙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1693년까지 이 해안을 통한 운항이 전면 금지되었다. 일부 해외무역이 고개를 들기는 했지만, 투자는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언제든 황제가 무역을 금지하고, 선박, 장비, 교역 관계에 쏟아 부은 투자를 무용지물로 만들거나 더 끔찍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337쪽)


에티오피아는 문자가 있었다. 소말리아도 문자가 있었으나 실제로 사용하지는 않았다. 소말리아 북서쪽, 남부 수단의 누바 Nuba 구릉지대에 있었던 타칼리 Taqali 왕국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타칼리 왕실과 백성 모두 아라비아 문자를 접할 수 있었지만 사용하지는 않았다. 언뜻 굉장히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비칠 수 있다.

역사가 재닛 에왈드는 1970년대 타칼리 왕국의 역사를 추적하면서 이런 의문점들을 파헤쳤다. 백성이 문자 사용을 거부한 한 가지 이유는 정부가 소유권을 주장하며 값진 토지 등 소중한 자원을 통제하는 데 악용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백성은 또 더 각박하게 세금을 거둘까 봐 걱정했다. 이보다 더 미묘한 요인이 있었다. 중앙집권 하에 반대하는 다양한 엘리트층이 백성과 문자보다는 구두 소통을 선호했다. 따라서 타칼리의 지배층이나 피지배층 모두 문자 도입은 득이 될 게 없다고 믿었다. 타칼리 왕국과 비교하면 한층 더 허술한 엘리트층으로 구성돼 있는 소말리아에서도 같은 이유로 문자 사용이나 다른 기본적인 기술의 채택을 꺼렸을 것이다. (349쪽)


그런데 과연 지금 '못 사는 나라'는 단지 자신들이 과거에 저지른 판단 착오 때문에 빈곤으로 빠져든 것일까? 아니, 오히려 지금 제3세계 국가들 대부분은 남이 저지른 짓 때문에 '결정적 분기점'에서 착취를 당하는 처지가 돼버렸다. 식민주의자들이 만든 착취제도는 독립 뒤에도 고스란히 남았을뿐 아니라 심지어 상당수 지역에서는 더욱 악화됐다!


17세기 초 북부 몰루카제도에는 티도레 Tidore, 트르나테 Terenate, 바칸 Bakan 이라는 독립왕국이 있었다. 중앙 제도에는 암본 Ambon 왕국이 있었다. 남부의 반다 Banda 제도는 아직 정치적으로 통일되지 않은 작은 다도해였다. 몰루카제도는 정향, 메이스, 육두구 등 값진 향신료의 유일한 산지로 당시만 해도 세계무역에서 빼놓을 수 없는 지역이었다. 그중에서도 메이스와 육두구는 반다제도에서만 자랐다. 반다제도 주민은 이런 귀한 향신료를 생산하고 수출하는 대신 자바 섬, 말레이시아반도의 믈라카 Melaka 시장, 인도, 중국, 아라비아 등지에서 유입되는 식량과 공산품을 얻었다. 

이곳 주민이 유럽인과 처음 접촉한 것은 16세기다. 포르투갈은 곧바로 향신료 무역을 독점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1511년에는 믈라카 시장을 장악했다. 믈라카는 전략적 요충지인 말레이시아 반도 서부에 자리 잡고 있던 시장으로 동남아 전역에서 온 상인이 향신료를 팔았고, 인도, 중국, 아랍 등지의 상인은 사들인 향신료를 서방으로 실어 날랐다. 

유럽의 절대주의처럼 동남아시아 역시 이런 체제하에서 그런대로 경제 성장을 이루기는 했지만, 번영을 위한 이상적인 경제제도 구도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만큼 진입 장벽도 높았고 무엇보다 사유재산권이 불안했다. 하지만 포르투갈이 인도양 패권을 틀어쥐려 애쓰던 중에도 상업은 날로 번성하고 있었다. 

(중략) 네덜란드총독이었던 얀 피터르스존 쿤은 1618년 자바섬에 네덜란드동인도회사의 새로운 거점으로 바타비아를 세웠다. 1621년에는 반다제도로 함대를 몰고 가 1만 5,000명에 달하는 거의 모든 주민을 학살했다. 이런 대학살을 마무리한 쿤은 자신의 계획에 필요한 정치·경제 구조를 만들기 시작했다. 다름아닌 대농장사회였다. 반다제도를 68개 구역으로 나누어 대부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전·현직 직원인 68명의 네덜란드인에게 맡겼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위협을 피하고자 여러 나라가 수출용 작물 재배를 포기하고 상업 활동을 중단했다. 1620년, 자바 섬에 있는 반텐은 네덜란드의 침범이 두려워 후추나무를 죄다 잘라버렸다. 1635년 미얀마는 해안지대이던 페구에서 이라와디 강을 따라 내륙 깊숙이 들어와 있는 아바Ava로 수도를 옮겼다. 네덜란드 식민정책은 이들의 정치·경제적 발달 방향을 근원적으로 바꾸어놓았다. 동남아시아인들은 교역을 중단하고 내부로 움츠러들었으며 한층 더 절대주의적으로 변모했다. (361쪽)


노예무역은 두 가지 부정적인 정치 과정을 촉발했다. 첫째, 초반에는 한층 더 절대주의적으로 변모하는 정권이 많았다. 오로지 남들을 노예로 전락시켜 유럽인에 팔아넘기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둘째, 첫 번째 과정의 결과이면서도 역설적으로 그 정반대의 상황이 전개 되었다. 전쟁과 노예무역은 궁극적으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지역에서 그나마 유지되던 질서와 정통성 있는 정부당국을 파괴해버렸다.

한 명이라도 더 많은 노예를 붙잡아 팔기 위해 온갖 법과 관습이 왜곡되고 변질되면서 중앙집권화에도 대단히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콩고왕국 자체가 내전으로 몰락하기 전까지 아마도 최초로 백성을 노예로 팔아넘긴 아프리카 정권이었을 것이다. 나이지리아의 오요Oyo, 베냉의 다호메이Dahomey에 이어 훗날 가나의 아샨티Asante에 이르기까지 특히 서아프리카에 이런 노예정권이 많이 들어섰다. 1700년에서 1750년까지 골드코스트에서 수출한 37만 5,000명에 달하는 엄청난 수의 노예가 바로 이런 전쟁을 통해 확보한 포로들이었다. (367쪽)


1955년 아서 루이스는 많은 후진국 또는 저개발 국가의 경제가 근대 부문과 전통부문으로 나뉜 이중 구조로 되어 있다고 말한다. 루이스의 이런 통찰에 기반을 두고 몇 세대에 걸쳐 이론을 발전시켜온 개발경제학자에게 ‘개발의 문제’는 농업 및 농촌으로 대변되는 전통부문에서 노동력과 자원을 끌어다가 산업과 도시로 대변되는 근대 부문에 투입하는 것을 의미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콰줄루-나탈에서 트란스케이 주의 경계를 넘어보면 가장 극적인 방법으로 이중경제를 경험할 수 있다. 강 동쪽 나탈에는 사유재산권은 물론 법률체계, 시장, 판매용 농산물 생산, 산업 등이 모두 탈 없이 돌아간다. 반면 서쪽 트란스케이는 토지를 공동으로 소유하고, 최근까지도 전통적인 추장이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다. 루이스의 이중 경제 이론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트란스케이와 나탈의 차이는 아프리카 개발의 문제점을 드러내준다. 경제 개발은 단순히 트란스케이를 나탈로 변모시켜야 한다는 의미가 된다. 

이런 관점은 충분히 일리가 있지만 이중 경제가 왜 존재하게 되었으며 근대 경제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간과 하고 있다. 트란스케이의 낙후성은 역사적인 아프리카 낙후성의 잔재라고만 할 수는 없다. 트란스케이와 나탈 간 이중경제는 사실 꽤 최근에 벌어진 일이고 결코 자연 발생적인 것도 아니다. 백인 엘리트층이 값싼 노동력을 확보하고 흑인의 경쟁을 저지하기 위해 고의로 만들어낸 것이다. 이중 경제는 오랜 세월 자연 발생적으로 축적된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저개발 사례라는 뜻이다. (375쪽)


좀 더 파고들자. 왜 저자들은 백인 엘리트층이 됐고 왜 어떤 자들은 식민지의 희생양이 됐을까. 너무 많이 갔다면, 그냥 이렇게 생각해보자. 잘 사는 나라들은 민주국가들이다. 민주주의는 번영과 어떤 상관이 있을까. 저자들은 명예혁명이 일어난 영국을 사례로 든다. 


명예혁명은 한 엘리트 집단이 다른 엘리트 집단을 전복시킨 것이 아니라 젠트리와 상인, 수공업자는 물론 휘그파와 토리당 파벌까지 가세한 광범위한 연합세력이 절대왕정에 반기를 들고 일으킨 혁명이었다. 그 결과로 태동한 것이 바로 다원주의 정치제도였다. 법치주의 역시 이 과정의 부산물로 등장했다. 판 자체를 뒤집으면 체제가 불안정해지고 광범위한 연합세력 중 일부가 절대권력을 틀어쥐거나 아예 스튜어트 왕정이 복고될 위험이 있었다. 일단 뿌리를 내리자 법치주의 개념은 절대주의를 억제하는 것은 물론 일종의 선순환을 만들어냈다. 법이 만인에게 평등하게 적용된다면 어떤 개인이나 단체도 법 위에 군림할 수 없으며, 사유재산을 침범했다는 혐의로 고발당한 평민도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지닌다는 것이다. (441쪽)


반대로, 식민지에서 독립했음에도 다원주의 법치주의는커녕 정치권력을 특정 세력이 독점하고 착취적 경제제도가 더 가혹해진 사례들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1896년 영국 정부는 시에라리온 식민지를 보호령으로 선포했다. 그러고는 가옥세를 거둬들였다. 멘데족Mende이 주로 사는 멘델란드Mendeland의 반발은 거셌다. 

1961년 시에라리온이 독립했을 때 영국은 밀턴 마르가이Milton Margai가 이끄는 시에라리온인민당 Sierra Leone People’s Party, SLPP에 정권을 넘겨주었는데, 동부와 남부, 특히 멘델란드에 지지 기반을 두고 있었다. 밀턴의 뒤를 이어 1964년 동생인 앨버트 마르가이가 총리에 올랐다. 1967년 인민당은 치열한 선거전을 벌인 끝에 시아카 스티븐스 Siaka Stevens 가 이끄는 전인민의회당 All People’S Congress Party, APC에 분패하고 말았다. 

남부로 이어지는 철도는 본래 영국이 시에라리온을 통치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지만 1967년에 이르자 커피, 코코아, 다이아몬드 둥 대부분의 수출품을 실어날랐다. 커피와 코코아를재배한 농민은 멘데족이었고 철도는 세계로 이어지는 멘델란드의 창구였다. 스티븐스의 논리는 간단했다. 멘데족에게 좋으면 자신에게는 나쁘다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멘델란드로 이어지는 철로를 들어내버렸고, 복구는 꿈도 꿀 수 없도록 선로와 철도 차량을 팔아치웠다. 독립 이후 아프리카의 지도자들이 대부분 그러했듯이 권력 강화와 경제성장 촉진이라는 두 가지 선택안이 주어지자 스티븐스는 자신의 권력 강화를 선택했다. (482쪽)


1930년 동부 코노에서 다이아몬드가 발견되었다. 다이아몬드는 광산 깊숙한 곳이 아닌 충적토에서 캐낼 수 있었다. 일부 사회학자는 이를 두고 ‘민주적 다이아몬드 democratic diamonds’라 부르는데, 많은 이들이 채굴에 침여해 포용적 기회를 만들어낼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국 정부는 전체 보호령을 독점한 다음 ‘시에라리온 실렉션 트러스트’라는 이름을 붙여 드비어스에 넘겨주었다. 1936년 드비어스는 ‘다이아몬드 보호군Diamond Protection Force’이라는 사병조직을 창설했는데 나중에는 시에라리온 식민정부 군대보다 규모가 커졌다. 

독립 이후 상황은 오히려 더 악화되었다. 1970년 시아카 스티븐스는 시에라리온 실렉션 트러스트를 사실상 국유화해 ‘국립 다이아몬드 광산 유한회사 NDMC’를 설립했다. 정부가 51퍼센트 지분을 가졌다지만 정부란 사실상 스티븐스 자신을 의미했다. (486쪽)


에스파냐 제국의 다른 지역처럼 과테말라 원주민 역시 엔코미엔다의 하사품으로 배분되었다. 엔코미엔다는 강제노동체제였고, 곧이어 다른 유사한 강압적 제도가 이어졌다. 특히 레파르티미엔토가 극심했는데 과테말라에서는 만다미엔토 Mandamiento (명령)라 불렸다. ‘분배하다’라는 뜻의 에스파냐어 동사 레파르티르repartir에서 유래한 레파르티미엔토 데 메르칸시아스 repartimiento de mercancias는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재화분배’를 뜻했지만,인디오는 에스파냐인이 정한 가격에 강제로 물품을 사들여야 했다.

일부 원주민의 피가 섞인 경복자의 후예로 구성된 엘리트층은 다양한 강제노동체제를 통해 수혜를 입었을뿐 아니라 콘술라도 데 코메르시우 Consulado de Comercio  불린 상인 길드를 통해 교역을 장악하고 독점했다. 번듯한 항구는 죄다 카리브 해안에 모여 있었고 이를 콘술라도가 장악했다. (495쪽)


1890년 세실 로즈의 ‘영국 남아프리카회사 British South Africa Company’는 당시 마타벨렐란드 Matabeleland의 은데벨레 Ndebele 왕국에 접한 마쇼날란드 Mashonaland로 원정군을 파견했다. 이들은 우월한 무기로 저항을 단숨에 제압하고 1901년 로즈의 이름을 따 남로디지아 Southern Rhodesia 식민지를 세웠다. 많은 백인이 비옥한 농토를 찾아 이곳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1965년 이언 스미스가 이끄는, 인구의 약 5퍼센트 밖에 안 되는 로디지아 백인 엘리트층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흑인은 이웃 모잠비크와 잠비아에 본거지를 두고 게릴라전에 돌입했다. 무가베의 자누 ZANU(짐바브웨 아프리카민족동맹)와 조슈아 은코모 Joshua Nkomo가 이끌던 자푸 ZAPU (짐바브웨아프리카인민동맹)가 일으킨 반란에 국제 사회의 압력까지 겹쳐 1980년 마침내 짐바브웨가 탄생했다. 

독립 후 무가베는 정적을 가차 없이 숙청하거나 제 편으로 끌어들였다. 가장 극악무도한 만행이 자행된 곳은 자푸의 지지 기반이었던 마타벨렐란드로, 1980년대 초 2만명이나 목숨을 잃었다. 1987년 자푸는 자누와 하나가 되어 자누-PF당이 탄생했지만, 조슈아 은코모는 정계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독립하자마자 무가베는 백인 정권이 수립한 착취적 경제제도를 수중에 넣었다. 무가베는 자신의 정치적 장악력이 약해지자 백인 지주에 대해 전면 공격에 나섰다. 2000년부터 대대적인 토지 점거와 몰수를 장려하고 지원하기도 했다. 몰수된 토지 대부분은 자누-PF 엘리트에게 돌아갔다. (527쪽)


식민통치를 그나마 좀 덜 가혹하게 겪은 나라들은 독립 뒤에도 상대적으로 안정을 찾는데, 극도로 가혹하게 겪은 곳들은 독립 이후 오히려 더 큰 혼란에 빠져 내전이나 학살이 일어나는 경우들이 종종 있다. 나는 그 원인이 궁금했다. 이건 너무나 가혹하잖아. 그 의문의 일단을 풀어주는 것이 보츠와나의 사례다. 보츠와나는,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나라이지만, 개발경제학자들이 놀라운 성공사례로 꼽는 나라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호랑이들'과는 사뭇 다른 양상으로, 개발원조의 실패사례들이 즐비한 아프리카에서 유독 정치적으로 안정을 유지하며 경제도 발전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1895년 9월 6일, 원양 정기선 탠털론캐슬 Tantallon Castle 호가 잉글랜드 남부 해안 플리머스 항구에 정박했다. 은과토 Ngwato 족의 카마 Khama, 은과케츠 Ngwaketse족의 바토엔 Bathoen, 크웨나 Kwena족의 세벨레 Sebele 등 세 명의 추장이 배에서 내려 런던 패딩턴 역으로 향하는 급행열차에 올랐다. 세 추장은 긴박한 사명을 띠고 영국을 찾았다. 세실 로즈로부터 자신들의 부족과 다른 다섯 개 부족을 구해내야 했다. 은과토, 은과케츠, 크웨나 등 하위 부족 여덟 개의 츠와나Tswana 부족은 당시 베추아날란드로 알려진 지역에 지리 잡고 있었으며, 1966년 독립 이후 보츠와나가 되었다. 


1895년 영국을 방문한 세벨레, 바토엔, 카마와 영국 관료 윌리엄 찰스 윌러그비. gettyimages.com


1895년 무렵, 로즈는 로디지아 남서부 베추아날란드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추장들은 자신들의 땅이 로즈의 손아귀에 떨어지면 재앙과 수탈의 연속일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남아프리카에서는 체임벌린의 강경 반대에도 세실 로즈가 보어 공화국인 트란스발을 겨냥해 훗날 ‘제임슨 습격Jameson Raid’으로 알려진 군사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런 사태들로 체엄벌린은 추장들의 고충에 한충 더 공감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추장들은 런던에서 체임벌린을 만났고, 식민청의 에드워드 페어필드가 체임벌린 장관의 해결책을 자세히 설명했다. “카마, 세벨레, 바토엔, 세 추장은 영국 여왕의 보호 아래 제각기 지금처럼 살 수 있는 나라를 갖게 된다. 여왕은 이들과 함께 살 관리를 임명해 파견한다.추장들은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게 백성을 다스릴 수 있을 것이다.” 허를 찔린 로즈의 반응은 짐작할 만하다. “여우같은 세 원주민에게 당하다니 참을 수 없군.” 

사실 추장들은 소중한 무언가를 간직하고 있었다. 로즈는 물론, 훗날 영국의 간접 통치 기간에도 빼앗기지 않은 것이었다. 19세기 무렵, 츠와나 부족은 핵심적인 정치제도를 마련해두고 있었다. 사하라 이남 기준으로는 이례적일 정도의 중앙집권화는 물론 언뜻 갓 탄생한 원시적인 형태의 다원주의로 비칠 만한 집단 의사결정 절차도 갖추고 있었다. 크고틀라kgotla(부족 협의회) 같은 츠와나의 정치제도 역시 정치 참여를 장려하고 추장의 권한을 제한했다. 부족의 정책과 관련된 모든 문제는 최종적으로 추장의 협의 장소인 크고틀라의 성인 남성 총회에서 다루어졌다. 크고틀라뿐만이 아니었다. 츠와나의 추장 자리는 엄격한 세습제가 아니라 상당한 재능과 능력을 증명하는 누구라도 차지할 수 있었다.

츠와나 추장들은 런던에 다녀온 이후에도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유지하고 토착제도를 보전하려 꾸준히 애를 썼다. 베추아날란드에 철도 건설은 양보했지만 다른 정치·경제적 삶은 영국의 간섭을 제한했다. 영국의 다른 정책들이나 마찬가지로 철도 역시 식민 정부의 통제 속에 있는 한 베추아날란드의 발전에 공헌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식민지화 과정의 초기 단계는 대부분 사회에 결정적 분기점이 된다. 츠와나는 간접통치가강화되는 것도 피할 수 있었고 로즈의 합병 전략에 희생됐더라면 빠져들었을지도 모를 한층 더 끔찍한 운명도 모면할 수 있었다. 이 역시 츠와나 부족민의 제도적 부동 과정과 기존의 제도, 식민 지배가 가져온 결정적 분기점의 상호작용에서 비롯된 결과다. 세 츠와나 추장은 앞장서 런던으로 가 돌파구를 마련하며 운명을 스스로 개척했다. 추장들이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중앙집권화 덕분에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다른 부족 지도자들과 비교해 이례적이라 할 정도의 권한을 지니고 있었고, 부족의 전통적 제도에 깃든 얼마간의 다원주의적 요소 덕분에 남다른 수준의 정통성을 가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보츠와나의 가보로네에 있는 세 딕고시(Dikgosi 부족장)의 동상. 사진 WIKIPEDIA


포용적인 제도를 발전시켜 보츠와나의 성공에 한층 더 중요한 역할을 했던 또 다른 결정적 분기점은 식민 지배 말기에 도래한다. 1966년 독립 당시 보츠와나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축에 들었다. 포장도로는 모두 합쳐봐야 12킬로미터에 불과했고, 대학 졸업장이 있는 시민은 22명, 중둥교육을 받은시민이라고 해봐야 고작 100명이 전부였다. 

하지만 이후 45년 동안 보츠와나는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나라 중 하나로 발전했다. 오늘날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1인당 국민소득이 가장 높은 나라가 바로 보츠와나다. 보츠와나는 민주주의를 고수했고 주기적으로 경쟁 선거를 치렀으며 내전이나 군사 정변을 경험한 적도 없다. 

정부는 사유재산권을 집행하고 거시경제적 안정을 다지며 포용적 시장경제 발전을 장려하는 경제제도를 수립했다. 보츠와나에는 확고한 절차적 권리를 선호하는 츠와나 추장과 경제의 핵심 자산인 가축을 소유한 엘리트층으로 구성된 연합세력이 있었다. 츠와나 부족은 토지는 공동으로 소유했지만 가축은 사유재산이었고, 엘리트층 역시 엄격한 사유재산권 집행을 선호했다. 독립 당시 츠와나는 이미 추장의 권한을 제한하고 그런대로 부족원에 대한 추장의 책임성을 강조하는 제도를 뿌리내리고 있었다. 

독립도 비교적 질서정연하게 진행되었다. 독립을 주도한 것은 1960년 퀘트 마시르와 세레체 카마가 창당한 보츠와나민주당Botswana Democratic Party, BOP이었다. 카마는 카마 3세의 손자였고 그의 성인 세레체는 ‘함께 뭉쳐주는 찰흙’이라는 뜻이었다. BDP는 1967년 발 빠르게 보츠와나 육류위원회라는 시장기구를 설립했다. 육류위원회는 가축 경제를 발전시키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구제역을 막기 위해 담장을 둘렀고 수출을 장려했다. 

보츠와나는 천연지원을 관리하는 방식에서도 다른 아프리카 나라와 현저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식민통치 시절, 츠와나 추장들은 베추아날란드의 광물 탐사를 막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최초로 대규모 다이아몬드 매장지가 발견된 곳은 세레체 카마의 고향인 은과토 부족의 땅이었다. 다이아몬드 발견 사실을 발표하기 전에 카마는 모든 지하 광물에 대한 권리가 부족이 아닌 국가에 귀속되도록 법을 바꾸었다. 보츠와나에서 다이아몬드 때문에 엄청난 부의 불평등이 초래되지 않도록 하려는 조치였다. 

보츠와나가 기존의 틀을 깰 수 있었던 것은 식민지 해방이라는 결정적 분기점을 놓치지 않고 포용적 제도를 수립한 덕분이었다. BDP와 카마를 비롯한 엘리트층은 독재정권을 수립하거나 착취적 제도를 이용해 온 사회를 희생시키면서 자신들의 배만 채우려 하지 않았다. (583쪽)


애당초 식민통치의 가혹함을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릴 수 있었던 지도자 혹은 엘리트층의 능력 자체가, 그 사회가 원래 가지고 있던 다원적이고 포용적인 정치 시스템에서 나왔다는 뜻이다. 더불어, 독립 이후의 '건국기'를 알차게 보내고 발전을 꾀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 다원적이고 포용적인 정치 시스템 덕이다. 여기에 '위대한 지도자' 혹은 지정학적인 행운 같은 변수들이 더해진 것이라는 얘기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