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863

0, 無에 관한 책 2권- 카플란의 '존재하는 무 0의 세계'와 존 배로의 '無0진공'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 존재하지만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것. 0, 무(無)의 역사와 의미를 다룬 책 두권이 나왔다. 로버트 카플란의 '존재하는 무 0의 세계'와 존 배로의 '無0진공'이다. 배로의 책은 원제가 아예 '무에 관한 책(The Book of Nothing)'이다. 0이라는 개념이 언제 인간의 머릿속에 떠올랐는지, 그리고 그것이 동그라미로 기호화된 것은 언제인지, 숫자 0의 과거를 들여다보는 데에서 두 책 모두 출발한다. 카플란의 책은 0과 무의 개념을 '박물관 순례' 스타일로 설명하고 있다. 바빌로니아에서 탄생한 0은 고대 그리스에서 아리스토텔레스라는 강적을 만나면서 세계관의 외곽(지평선 너머)으로 사라졌다가 인도에서 화려하게 부활한다. 중세와 근대를 거쳐 '디지털의 지배자'로 군림하게..

[스크랩] 엘리너 파전의 '작은 책 창고' 서문

내가 어릴 때 살았던 우리집에는 아주 작은 방이 하나 있었다. 우리는 그 방을 '작은 책 창고'라고 불렀다. 사실 그런 식으로 말하자면 우리집의 방은 모두 서재라고 부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2층에 있는 우리들 어린이 방도 책으로 가득 차 있었고, 아래층 아버지의 서재도 책으로 꽉 차 있었다. 책은 그리고 식당의 벽을 메우고 어머니의 방과 계단을 올라가 여기저기 침실까지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당시 우리들에게는 책 없이 생활하는 것보다 옷을 입지 않고 사는 것이 더 자연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책을 읽지 않는 것은 마치 음식을 먹지 않는 것처럼 이상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책이 가득 찬 온 집안의 어느 방보다도 책이 내 눈에 들어와 박힌 곳은 바로 '작은 책 창고'였다. 그것은 마치 꽃과 잡..

딸기네 책방 2003.02.22

조 사코, '팔레스타인'

팔레스타인 Palestine 조 사코 (지은이) | 함규진 (옮긴이) | 글논그림밭 | 2002-09-16 조 사코의 . 말 하려고 시작하면 할 말이 많겠지만 너무 귀찮아서, 읽고난 뒤에 얌전히 책꽂이에 꽂아놨다. 라고 해봤자 지금의 정신상태를 반영하듯 책꽂이 주변은 어수선하기 짝이 없지만. 책 자체에 대해서는 별다른 설명이 필요 없다. 미국인 프리랜서 저널리스트 청년이 팔레스타인 땅을 돌면서 보고 느낀 것들을 그린 만화책이다. 우선 그림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만화다운 코믹함과 극도의 리얼리티가 양립가능하다는 걸 보여주는, 대단히 잘 그린 그림들이다. 내용은? 군데군데 유머가 엿보이면서도 슬픔을 슬픔답게, 괴로움을 괴로움답게 잘 잡아냈다. 그러면서도 과장하지 않는다. "그냥 보란 말이야, 팔레스타인 사람..

딸기네 책방 2003.02.20

존재하는 무, 0의 세계

존재하는 무, 0의 세계 The Nothing That Is a Natural History of Zero로버트 카플란 (지은이) | 심재관 (옮긴이) | 이끌리오 | 2003-02-10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 존재하지만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것. 존재와 없음의 문제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주는 것은 숫자 ‘영(0)’이다. 로버트 카플란의 ‘존재하는 무 0의 세계’는 0이라는 숫자를 통해 존재의 역설을 증명하고, 인간의 사고방식이 어떻게 진화해왔는지를 살핀다. 저자는 0이라는 숫자를 이해하기 위한 방법으로 역사적 접근방식을 택했다. 고대유적을 모아놓은 박물관을 돌며 0이 남긴 자취와 그것이 취해온 다양한 형태들을 파악하는 것이다(‘숫자 따라 세계여행’ 식의 나열로 읽지 말고 저자의 안내를 따라 상세..

동화책과 트라우마

"장화 홍련 이야기가 나한테는 트라우마같은 거였어." 얼마전 함께 산책하던 여자선배가 그런 얘기를 했다. 동화책 읽다가 정신적 외상을 입었던 기억, 다들 한두가지씩은 갖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의 트라우마' 얘기로 옮아갔는데, 나한테 내상을 입힌 책이 있다면 두말할 나위 없이 로빈훗과 콩쥐팥쥐다. 먼저 콩쥐팥쥐 얘기부터 하자면 뒷부분 콩쥐가 신발 덕에 원님 각시가 되고 난 이후의 줄거리인데, 팥쥐가 콩쥐를 죽여서(아마도 여기서부터 이 단순한 이야기는 동화의 레벨을 훌쩍 넘어서게 되는 것이 아닐까) 연못 속에 던진다. 그리고 연꽃으로 다시 태어난 콩쥐는 아무도 안 볼 때에 팥쥐의 머리를 잡아당기고 팔뚝을 때린다. 난 이 부분을 읽을 때, 착하디 착한 것으로 설정돼 있는 콩쥐가 왜 갑자기 변했는지 이해하..

딸기네 책방 2003.02.18

[스크랩] 기형도, '입속의 검은잎'

계속 기형도 이야기를 하다 보니, 저 시집을 다시 읽고 싶어졌다. 오늘 아침 회사 가면서도 그 생각을 했는데. 그 시집이 어디 있더라, 하고. 어딘가 시골집에 흘러흘러가 썩고 있거나, 혹은 잃어버렸거나 뭐 그랬는 줄 알았다. 방금 전 오랜 친구가 집에 왔었다. 나 데려다주는 길에 화장실 들렀다가 간다고. "잎속의 검은 잎 읽고싶어" 했더니 내 책꽂이 구경하던 친구가 "여기 있네"하는 거였다. 어, 거기 있었구나. 아마도, 내가 결혼해서 옮기고 난 뒤 닐리리가 책꽂이에 보관해놓고 있던 것을, 다시 내가 친정집에서 챙겨다 놓았나보다. 시집을 펼쳤다. 비닐 표지, 누렇게 변한 종이들. 그리고 속표지에는 친구의 글. "항상 믿음직한 친구 정은에게. 20세 생일을 축하하며. 앞으로도 더욱 내면적 성숙과 외면적인 ..

딸기네 책방 2003.02.15

요새 읽고싶어하는 중인 책들

이 책 저 책 읽다보면 자꾸 걸리는 것들이 있다. 재밌게 읽고 있는데, 저자가 자기가 읽은 무슨 책 이야기를 하고, 또 간만에 잡지 뒤적였는데 하필 영화소개란에 실린 영화의 원작소설이 그 책이고, 모처럼 소설책 하나 읽는데 주인공들이 그 책 얘기하고, 늘 만나던 친구가 갑자기 그날따라 흔치도 않은 그 책의 이야기를 하는 식으로... 여기저기서 만나는 이란 것은, 이 정도 상황이 되면 꼭 읽어줘야만 하는 것으로 바뀌게 된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것이 책읽기의 특징이지만 저렇게 꼬리가 한군데로 말리는데 그냥 넘어가면 두고두고 뇌에 때낀 것처럼 답답하다. 그렇게 나를 걸고넘어지는 책, . 누구든 혹시 이 책 갖고 계시다면 연락주시길. 또 하나 읽고싶은 것은 하워드 진의 에 나왔던--이라고 하기엔 사실 너무 유..

딸기네 책방 2003.02.05

[스크랩] 하워드 진,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You Can't be Neutral on a Moving Train 하워드 진 (지은이) | 유강은 (옮긴이) | 이후 | 2002-09-13 ◆나는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은 객관성을 가장하지 않았다. 학생들에게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고 말하곤 했다. 학생들은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바로 알아챘다. 이미 사태가 치명적인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고, 여기서 중립적이라 함은 그 방향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역사적 관점을 바꿔야만 우리의 어둠을 밝힐 수 있다. 금세기에 우리가 얼마나 자주 놀랐는지 유념해 보라. 민중운동이 갑자기 등장하고, 폭정이 뜻밖에 몰락하고, 꺼져버렸다고 생각했던 불씨가 돌연 되살아나기도 하지 않았는가. 우리가 놀라는 까닭..

딸기네 책방 2003.02.04

[스크랩] 필 마셜, '인티파다'

인티파다 Intifada 필 마셜 (지은이) | 이정구 (옮긴이) | 책갈피 | 2001-11-10 1장 인티파다 '점령세대'의 등장: 1987년- 점령지에서 태어나 자란 '샤바브'(녀석들, 젊은이들)이 가자 주민의 다수를 차지. 억압에 단련되고 잃을 것도 없는 젊은이들. "지금 싸우고 있는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집트와 요르단의 지배 아래 20년 동안 겪었던 피난 생활에 겁먹지도 않고 1967년 아랍 연합군이 이스라엘에게 패배한 것에서 굴욕감을 느끼지도 않는다. 그들은 점령 치하에서 성장한 세대다."(예루살렘 포스트) 자유를 위한 투쟁: 산업노동자계급은 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 경제에 충격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PLO를 무력화시켰다고 믿었던 이스라엘은 민족주의 운동의 대규모 부활을 목도. 점령은 막대..

딸기네 책방 2003.01.20

골드바흐의 추측

골드바흐의 추측 Uncle Petros and Goldbach's Conjecture 아포스톨로스 독시아디스 | 정회성 (옮긴이) | 강석진 | 생각의나무 | 2000-05-03 '골드바흐의 추측(Goldbach‘s conjecture)'이라는 수학문제가 있다. 문제 자체는 단순하다. "2보다 큰 모든 짝수는 두 소수의 합으로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라." 문제는, 이 명제를 증명하기 위해 말 그대로 '일생'을 바친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나'의 삼촌 페트로스 파파크리스토스. 첫사랑 이졸데에게 자신이 대단한 인물이었음을 보여주기 위해 그는 골드바흐의 추측에 도전하기로 결심했다! 수학에 대해 알기 쉽게 풀어쓴 소설이라는 식으로 여기저기 소개가 나와 있어서 조금 부담스러운 마음으로 책을 펼쳤는데, 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