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863

초파리의 기억- <핀치의 부리>에 이은 또 하나의 감동

초파리의 기억 Time, Love, Memory : A Great Biologist His Quest for the Origins of Behavior 조너던 와이너. 조경희 옮김. 최재천 감수. 이끌리오 를 쓴 조너던 와이너의 책이라고 해서 무조건 샀다. 좀 허풍 섞어 말하자면 지금껏 태어나 읽은 책들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다. 그러니까 조너던 와이너의 이름은 나에겐 ‘교주’의 이름과 같은 것이니, 신도는 교주를 따를 수밖에. 이 책 역시 훌륭하다. 분량이나 밀도 면에서 보다는 좀 모자란다 싶지만, 별 다섯 개 짜리인 것은 분명하다. 책장을 넘길수록 마음 한편이 따뜻해지면서 묵직해지는 느낌. 조너던 와이너 특유의 글쓰기 비법은 대체 뭐길래, 과학책이 이렇게 문학적이고 철학적이고 ..

레이 커즈와일, '특이점이 온다' THE SINGULARITY IS NEAR

특이점이 온다 THE SINGULARITY IS NEAR 레이 커즈와일. 김명남·장시형 옮김. 진대제 감수. 김영사 레이 커즈와일은 참 재밌는 사람인 것 같다. 발명가이고, 부자이고, 불로장생에 관심이 많은 사람인데, 아이디어맨인데다가 생각이 앞서나가도 한참 앞서나간다. 저자는 “내가 너무 앞서나가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변화는 이미 진행 중!”이라고 누차 주장하는데, 나는 저자의 말에 어쩐지 혹한다. 허풍선이처럼 표현을 해서 그렇지, 아서 클라크의 같은 소설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예견(?) 혹은 상상돼 왔던 것들 아닌가. 저자는 유전학, 나노기술, 로봇공학이 이번 세기 전반을 지배할 세 가지 변화를 이끌어낼 것이며, 이는 정보혁명의 서로 다른 세가지 얼굴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선사시대와 역사시대를 넘어 인..

부의 기원 -엘러건트하고 아카데믹한 경제학

부의 기원 The Origin of Wealth에릭 바인하커. 안현실, 정성철 옮김. 랜덤하우스코리아 경제학은 과학인가. 과학이라면, 어째서 실물 경제를 설명하는데 그렇게 무용한가. 원래 경제학은 생물학과 발걸음을 같이 했다. 맬서스 인구론을 생각해보라. ‘적자생존’을 경제에서의 흥망에 적용하면서 근대 경제학이 시작됐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이후 경제학의 패러다임은 물리학을 닮은 쪽으로 바뀌었다. 경제를 수요-공급의 함수곡선과 ‘균형’ 개념으로 설명하기 시작한 것이다. 저자의 주장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물리학적 균형에 경도된 경제학에 진화라는 패러다임을 적용, 다시 되돌리자는 것. 저자가 제안하는 ‘생물학적 경제학’의 패러다임은 물론 적자생존 생물학과는 다른 ‘복잡계 경제학’이다. 복잡계는 이 책의 저..

딸기네 책방 2007.11.02

신도 버린 사람들

신도 버린 사람들 Untouchables (2002)나렌드라 자다브 (지은이) | 강수정 (옮긴이) | 김영사 | 2007-06-08 워낙 책을 오래 걸려 읽는 편인지라, 처음 책을 펼칠 때에 표지 안쪽에 읽기 시작한 날짜를 적어놓는다. 그런데 지금 보니 유독 이 책 앞쪽에는 내가 날짜 적어놓는 것을 잊었는지 표시가 안 되어있다. 날짜를 세어보진 않았지만, 다 읽기까지 몇 달은 걸린 것 같다. 실은 앞에 지지부진 진도를 못 나가다가 요 며칠 새 후닥닥 읽었다. 갑자기 재미가 들렸는지, 소박하고 힘 있는 스토리에 확 빠져들었다. 제목 그대로, 책은 불가촉천민 Untouchables 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저자 나렌드라 자다브는, 이 책의 소개에 따르면 장래 인도 대통령이 될지도 모를 저명한 경제학자이자 ..

딸기네 책방 2007.10.31

편집보다 내용이 알찬 <보스니아 역사>

보스니아 역사 김철민 (지은이) |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 2005-04-10 보스니아 역사에 대해 충실히, 교과서적으로 중세부터 최근(2005년)까지를 설명하고 있어서 크게 도움이 됐다. 발칸을 비롯한 동유럽 역사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는 상태에서 사실 옛 유고연방의 내전은 참 ‘이해하기 힘든’ 사안이었다. 그 지역 상황이 비상식적이어서가 아니라, 내게 기본적인 지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째서 그 지역에서는 사람들이 하나로 뭉치지 못하고 그렇게 민족적, 종교적으로 복잡하게 얽혀있었나, 어째서 그들은 티토 치하 수십년간의 한 나라 경험에도 불구하고 냉전 끝나자마자 갈라졌나, 어째서 그들은 한때 한 나라 국민이었는데 그렇게 격렬하고 잔혹한 내전과 인종청소를 자행하게 되었나. 의문은 많았지만 그들의 역사에..

딸기네 책방 2007.10.06

부의 제국 -<주식회사 미국>의 역사

부의 제국 Empire of Wealth (2004) 존 스틸 고든 (지은이) | 안진환 | 왕수민 (옮긴이) | 황금가지 그냥 쓱쓱 읽었다. 540쪽 분량인데, 제발 우리나라 책들, 하드커버 하지 말고 폰트 좀 줄이고 위아래좌우 여백 줄이고 줄 간격 좀 줄여줬으면 싶다. 이 책은 250~300쪽 분량이면 딱 적당할 것 같다. ‘미국은 어떻게 세계 최강대국이 되었나’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답은 뭘까? 첫째, 미국은 땅이 넓었고 자원이 많았다. 둘째, 미국인들은 혁신을 잘 했다. 셋째, 미국은 20세기 양대 전쟁의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 않았을 뿐 아니라 최대 수혜자였다. 넷째, 잘못된 정치인들과 어리석은 판단도 없지 않았지만 그래도 미국은 비교적 정치를 잘 했다. 기타등등. 다 맞는 얘기인 것 같다. 그 ..

딸기네 책방 2007.10.05

십자군, 무미건조해서 더 재미있는 책

십자군, 기사와 영웅들의 장대한 로망스 The New Concise History of the Crusades 토머스 F. 매든. 권영주 옮김. 루비박스 십자군에 대해 별반 관심 없는데, 어찌어찌 집에 이 책이 있는 것을 보고 심심풀이 삼아 읽게 됐다. 읽다보니 재미가 있고 저자가 말하려는 바가 분명해서 쑥쑥 넘겼다. 책 원제는 THE NEW CONCISE HISTORY OF THE CRUSADES 인데 한글판에 부제를 ‘기사와 영웅들의 장대한 로망스’로 달아놨다. 제목 장난질이야 흔하다 해도, 이 경우는 좀 심했다. 요즘 ‘이슬람 바로보기’ 같은 흐름이 분명히 있는데 2005년 출판된 책에서 겨우 이따위 19세기 풍의 부제를 달아놓다니. 이 책은 ‘기사와 영웅들의 장대한 로망스’하고는 완전히 거리가 멀..

딸기네 책방 2007.10.03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작으면서 크고 넓은 책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經濟成長がなければ私たちは豊かになれないのだろうかC. 더글러스 러미스 (지은이) | 최성현 | 김종철 (옮긴이) | 녹색평론사 | 2011-04-05 책은 재생지로 된 작고 두껍지 않은 책인데 내용은 크고 넓다. 제목이 너무나 직설적이어서 상상의 여지를 주지 않는다. 책은 미국 출신 사회운동가 겸 저술가 더글러스 러미스가 일본에 살면서 일본 사람들에게 이러저러하게 살아보자, 하고 지적하고 제안하는 형식으로 돼 있다. 일본어 문체로 돼 있어서 거기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겐 다소 생소한 말투로 들릴 수도 있을 것 같다. 지적하는 내용과 제안도 일본적이지만, 우리 또한 새겨들어야만 하는 내용임에는 틀림없다. 아니, 사실은 “개같이 벌으렸다, 돈만 벌어라” 하는 식의 사..

딸기네 책방 2007.10.01

파리드 자카리아, <자유의 미래>

The Future of Freedom: Illiberal Democracy at Home and Abroad Fareed Zakaria. W. W. Norton & Company. 한 해 동안 읽은 책들 중에서, 다시 생각해봐도 아마도 이 책이 가장 수작이 아니었나 싶다. 파리드 자카리아는 포린어페어스 편집장을 거쳐 뉴스위크 편집장을 하고 있는, 인도 무슬림 이민자 가정 출신의 학자 겸 저널리스트다.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면 미국 최초의 ‘무슬림 국무장관’이 될지도 모른다는 얘기가 나올 만큼 미국에선 알아주는 똑똑한 사람인데 이상하게 국내에선 ‘벌써 다 유명해진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더더욱 유명해지지 못하고 있는 느낌. 자카리아의 이 책이 한번 나왔다가 절판이 되는 바람에 어쩔수 없이 영어본으로 읽었..

딸기네 책방 2007.09.08

얼굴 없는 공포, 광우병

얼굴 없는 공포, 광우병 그리고 숨겨진 치매. Brain Trust. 폴 켈러허. 김상윤·안성수 옮김. 고려원북스. 5/7 틈 날 때마다 요즘 주변 사람들에게 이 책을 꼭 읽어보라고 권한다. 책의 원제는 brain trust 인데 한국어판 책 표지에는 대문짝만하게 ‘광우병’이라고 쓰여 있는 것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부제까지 합치면 ‘얼굴 없는 공포, 광우병 그리고 숨겨진 치매’. 책 표지 왼쪽 윗부분엔 ‘광우병에 관한 최신 연구보고서! 켈러허 박사가 최근 8년간 추적, 새롭게 밝혀지는 광우병의 진실 그리고 또다른 의혹들!’ 느낌표를 두 개 씩이나 받아가며 ('브레인 트러스트'라는 애매모호한 제목으로는 도저히 안 팔릴 것임을 예감했는지) 설명을 붙여놨다. 소설보다 더 흥미진진한! 이라고 하면 상투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