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크루그먼 미래를 말하다 The Conscience of a Liberal
폴 크루그먼 | 예상한 등 | 현대경제연구원books
10년은 된 것 같다. 뉴욕타임스에서 크루그먼의 컬럼들을 읽으면서 ‘깔끔하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지금도 잘은 모르지만) 경제 혹은 경제학에 대해 아는 바도 전혀 없고 별로 생각 같은 것을 해본 일이 없어서 그리 큰 관심은 없었다. 그저 유명한 학자, 유명한 컬럼니스트라고 하니 <경제학의 향연>이라는 책(뒤에 다른 출판사에서 재출간한 것으로 알고 있다)을 하나 사서 읽어봤는데 지금은 아무 내용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요즘 미국발 금융위기라는 것 때문에 경제 문제에 억지로라도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이 책 저 책 뒤적이다가 큰 맘 먹고 <폴 크루그먼의 미래를 말하다>라는 제목의 이 책을 주문했다. 왜 ‘큰 맘’까지 먹어야 했냐면-- 당장 일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에세이류의 책이 아닐까 싶었기 때문이다. 폴 크루그먼의 이름이 책 제목에 당당히 붙을 만큼 이제 그는 한국에서도 유명한 학자가 되었는지 모르지만, 내겐 그리 큰 임팩트가 없는 저술가 중 하나였을 뿐이었다.
그런데, 책을 사놓고 책상 위에 굴리고만 있던 그 며칠 동안에, 이 사람이 노벨경제학상을 탔다!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신문 기사들, 크루그먼을 소개한 글들을 읽어봤다. 이 사람 이름을 들은지는 꽤 오래됐지만 정작 잘 모르고 있었구나, 쉬이 볼 사람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랴부랴 책을 펼쳤다. 그리고 순식간에 읽어내려갔다. 책이 너무 잘 읽혔다. 노벨경제학상 때문에 잘 읽힌 것이 아니라, 책 자체가 주는 강력함이랄까, 그런 게 있었기 때문이다. 그 강력함, 그 설득력의 요체는 저자가 가진 ‘신념’이고 ‘가치관’이다. 옳은 생각을 힘 있게 말하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힘.
몇해 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아마티아 센의 유명한 책 제목을 빌자면, 이 책은 크루그먼이 말하는 ‘불평등의 재검토’가 되겠다. 크루그먼은 20세기 전반기를 가리켜 돈이 세상을 지배하고 불평등을 양산하던 ‘길었던 도금시대’라 부른다. 이어 대공황이 닥쳤고, 프랭클린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의 ‘뉴딜 정책’이 실시됐다.
뉴딜 이후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미국에서 중산층의 황금시대였다. 노동자들을 탄압해선 안 되고, 노동자들은 임금을 많이 받아 더 잘 살아야 하며, 너무 돈이 많아 금권정치를 펼치려는 사람들은 감히 그런 마음을 못 먹게 하고, 정해진 부(富)의 파이에서 혼자만 너무 큰 몫을 먹는 자들이 없게 하고, 빈부격차는 줄이고, 사회복지를 실현시켜서 어떻게든 많은 이들이 되도록 잘 살게 만드는 것이 정부의 당연한 목표이자 사회의 당연한 과제로 받아들여졌던 시대.
그러나 그 물밑에서 보수파(오늘날의 네오컨이나 기독교 우익 꼴통들)들은 조직적으로 시민사회가 얻어낸 결실들을 무위로 돌리고 ‘뉴딜 이전’, 아니 부자들이 모든 걸 장악했던 ‘20세기 이전’으로 돌아가게 만들려는 시도를 했다. 그들은 연구소를 만들고 부자들의 돈을 받아 ‘보수 연구자’들을 양성하고, 각 주에서 종교세력과 인종주의 세력들을 동원해 흑인과 이민자들의 투표를 가로막는 공작을 벌였다.
그들은 리처드 닉슨에게서 사람들의 공포심을 이용하고 흑색선전을 하는 법을 배웠고, 그 기술을 바탕으로 공화당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레이건이라는 ‘보수주의자(전통적 공화당원이 아닌 앞서 말한 의미)’를 내세워 권력을 잡게 된다. ‘부자들의 이데올로기’에 맞춰 가난한 사람들까지 공화당에 표를 던지게끔 만들었던 이들의 비결은, “공포를 부추기고 인종차별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이것이 크루그먼이 말하는 20세기 ‘미국의 역사’다. 그는 뉴딜이라는 사회적 계약이 어떻게 형성되고 어떻게 해체되었는가를 중심으로 미국의 최근사를 재해석했다. 여기서 핵심은 ‘빈부 격차’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양극화’가 키워드라 할 수 있겠다.
교묘하게, 때로는 노골적으로 여론을 조작하고(레이건은 그런 거짓말의 대가였다) 사람들을 현혹시켜 부자들에게 유리한 정치를 펼쳐 끝내 사회적 분열과 양극화를 가져온 보수파 정치는 이제 끝장낼 때가 되었다. 부자들 중에서도 초(超)부자, 이른바 ‘수퍼 리치(Super-rich)’가 세상의 부를 거머쥐고 나머지 사람들은 의료보험도 가입 못 한 채로 살아야하는 그런 시대는 끝낼 때가 되었다고 크루그먼은 말한다. “이제는 때가 되었다”고. 이 책에서 크루그먼이 빌려온 표현은 부자와 빈자들 간 격차를 팍팍 줄인다는 뜻의 ‘대압착’이다.
물론 크루그먼은 경제학자이지 사회운동가는 아니다. 책은 “실천에 나서야 할 필요성”과 “실천에 안 나설 경우 저들이 하는 짓”을 얘기할 뿐 개개인의 실천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는 않는다. 굳이 대압착을 위해 실천할 방법을 찾자면 가장 쉬운 것은 민주당이 가장 진보적이 되어있는 지금 상황에서 미국인들이 민주당 대선 후보를 찍는 것이 되겠다. 공화당 감세론자, 작은정부론자, 부자중심주의자들에게 철퇴를 날리고 ‘제2의 뉴딜 시대’를 여는 것.
이 책은 이번 금융위기가 이렇게 터져 나오기 전에 출간된 것이지만 지금 이 시점에 특히 각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금융위기 시대 소비자의 행동지침’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양극화의 시대 경제학자의 양심’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메가 정부는- 저따위 것들도 ‘정부’라고 부를 수 있다면- 아주 양극화를 내놓고 자랑하면서 그길로 나가겠다고 발광을 떨고 있다. 부자들은 더 부자로 만들어주겠다고 설치는데, 그 하는 짓거리가 거창한 것(금산분리 완화, 방송겸영 허용, 부자들 감세, 부동산세 줄이기, 의료보험 민영화 등)에서부터 유치찬란한 것(농민 직불금 가로채먹기)까지 다 들어있어 목불인견이다.
크루그먼이 ‘미국의 실패’로 지적한 내용을 이메가 정부는 그대로 베껴다 할 모양이다. 신자유주의, 시장맹신주의가 지구적 파국을 불러오려고 하는 이 시점에! 책장을 넘기면서 가슴을 치지 않을 수 없었다. ‘때가 되었다’는 크루그먼의 말처럼, 미국에서는 민주당의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될 것으로 보이고 새로운 뉴딜정책이 필요하다는 얘기들이 나오고 있다. 대압착이 될지 소압착에 그칠지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 세상이 이메가 일당이 생각하는 식으로 돌아가선 안 된다는 공감대가 커지고 있다. 그런데 한국의 이 천박한 부자들과 천박한 자본주의는 대체 어찌할 것인가!
“나는 상대적으로 평등한 사회가 존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를 위해서는 극심한 빈부격차를 제한하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민주주의와 시민의 자유, 그리고 법치를 믿는다. 그래서 나는 진보주의자이며 나는 그것이 자랑스럽다.” (336쪽)
책의 원제는 ‘자유주의자의 양심’이다. 그 양심의 소리는 현실에 굳건히 뿌리를 내리고 있어 감동적이었다.
★ 크루그먼이 권하는 책들
일전에 ‘빌 게이츠의 책장에는 무엇이 꽂혀있나’ 얘기한 적이 있었다. 그럼 크루그먼의 책장에는 무엇이 꽂혀 있을까.
크루그먼은 홈페이지에 “리버럴(진보인사)이라면 읽어야 할 필독서 7권”을 추천해 놓았다. 이 책들은 <미래를 말하다>에도 여러번 인용된 것들이다. 경제학자의 추천도서에 경제학 서적이 빠진 이유로 그는 “경제학자들이 대중을 위한 책을 쓰지 않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릭 펄스타인 <폭풍 전에:배리 골드워터와 미국의 양심 파괴하기(Rick Perlstein, Before the Storm: Barry Goldwater and the Unmaking of the American Consensus)>
-아서 슐레진저 <구질서의 위기:1919~1933, 루즈벨트의 시대(Arthur M. Schlesinger, Jr. The Crisis of the Old Order: 1919-1933, The Age of Roosevelt)>
-토머스 에드샐 <불평등의 신정치학(Thomas Edsall, The New Politics of Inequality)·1984>
-토머스 프랭크 <캔사스가 뭐가 문제인가? 보수주의자들이 어떻게 미국의 마음을 얻었나 (Thomas Frank, What’s the Matter With Kansas? How Conservatives Won the Heart of America)>
-토머스 쉘러 <과거의 남부를 불러오기:민주당은 어떻게 남부 없이 승리할 수 있나(Thomas F. Schaller, Whistling Past Dixie: How Democrats Can Win Without the South)>
-놀랜 맥카티·케이트 풀·하워드 로젠탈 <극과극으로 갈라진 미국:이데올로기와 불평등한 부의 댄스(Nolan McCarty, Keith Poole, and Howard Rosenthal, Polarized America: The Dance of Ideology and Unequal Riches)>
-래리 바텔 <불평등한 민주주의:신황금시대의 정치경제학(Larry Bartels, Unequal Democracy: The Political Economy of the New Gilded Age)·온라인서적>
(국내에 번역된 책은 없는 것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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