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튼 로드- 목화의 도시에서 발견한 세계화의 비밀.
에릭 오르세나. 양영란 옮김. 황금가지
어찌나 멋을 냈는지 기름이 줄줄 흐른다. 프랑스 사람이 쓴 책이라서 그런가, 베르나르 앙리 레비의 <아메리칸 버티고>만큼이나 감상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좋게 보면 별 다섯 개, 지겹다 오버한다 느끼면 별 2개.
말리에서 미국, 브라질, 이집트, 우즈베키스탄을 오가며 ‘목화의 길’을 따라 세계화를 짚어 가는데, 목화라는 작물을 통해서 본 세계화와 그 속에 얽혀 있는 사람들을 다룬다는 발상은 매우 좋았다. 다만 뜬금없는 상념들이 섞여 재미가 반감됐다. 그나마 현장성이 가미된 부분에서도 자기 자랑(난 이렇게 민감하며 지적이고 세상을 보는 통찰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느낌이 많이 났다. 세계화와 민영화 기타 등등 여러 주제를 다루면서 여러 가지 화두를 던지려고는 하는데 일관된 줄기가 없다. 세계화를 냉소하는 노마드인 척 하다가 맨 마지막에 ‘맺는 말’ 하면서 공정무역을 은근슬쩍 깔아뭉개는 것은 또 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촌철살인의 통찰력은 분명 있다. 이 사람은 그냥 멋들어진 여행기에 전념하거나 문명비판 에세이 같은 걸 쓰는 편이 좋은 사람인 듯하다. 풍경의 한 단면을 폼 잔뜩 잡고 묘사하는 부분들은 재미있었다. 저자에겐 미안한 소리이지만 세계화 뒷조사하기는 잠시 뒷전으로 미뤄놓고 저자를 따라 세계의 낯선 풍경을 엿본다 생각하면 재미난 여행기가 될 것 같다.
▶ 소피텔이라는 간판 앞에서 꿈을 꾸는 사람이 있을까? 아니 그보다 사정은 훨씬 심각한데, 왜냐하면 ‘소피텔’이라는 상표는 다양성에 증오를 품고 있는 상표라고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표들은 여행의 기분을 마구 뭉개 놓으려 든다. ‘그 밥에 그 나물’ 식 여행이 평안한 여행의 정점이라고 말하려는 듯이 말이다. 하지만 실상 이것은 죽음의 전초전일 뿐이다. 죽음, 곧 無. 너무 많은 ‘아무것도 없음.’ 당신이 지구의 반쯤은 돌아다녀 보았다고? 그건 환상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당신은 지난번에 묵었던 방과 하나도 다를 것 없는 방에서 자게 될 테니까. 아무리 애를 써 보아도 소용이 없다. 돛을 올려도 보고, 비행기에서 기차로 바꿔 타 보아도 모두 헛일이다. 우리는 결국 우리에게서 미리 우리의 밤을 빼앗아간 힐튼이니 하야트, 쉐라톤이니 소피텔이니 하는 지루하고 단조로운 새 도시를 떠날 수 없을 것이다. (193쪽)
▶ “아, 저기 검정색 모자 쓴 사람은 카라칼파크 사람. 아마도 송아지를 끌고 버스에 탈 수 있을 거라고 믿는 모양입니다. 지금 보는 것처럼 이 사람들은 가축이라면 환장을 하는 사람들이지요. 저쪽은 고려인들이고. 거 참 희한한 일이군요. 저 사람들은 보통 비행기를 타거든요. 돈이 많으니까! 망명 생활 덕분에 득을 좀 보았다고도 말할 수 있겠지요. 그러니 저 사람들은 스탈린한테 감사라도 해야 할 판이에요!”
나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스탈린이라니! 스탈린이 이 세상 끝 같아 보이는 곳에서 무슨 몹쓸 짓을 했단 말인가? 고려인들은 오래전부터 시베리아의 동쪽 끝에 거주해왔다. 이들의 숫자는 대략 20만 명 쯤 되었다.
... 스탈린은 누군가를 옮겨야 할 때, 가령 1941년 우크라이나에 살던 독일인들이나 터키인들의 경우에도 항상 우즈베키스탄을 생각했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희한하지 않은가? (211쪽)
▶ 묘판의 어마어마한 규모는 공장과 도시가 성장하는 리듬에 따라 앞으로도 한층 확대될 것이며, 이는 자연스럽게 중국의 발전 방식을 다시 한 번 생각하도록 한다. 묘판의 존재는 이제까지 이어진 경제 성장의 회오리바람 속에서 아직도 살아남은 자연에 대한 절실한 수요를 의미한다.
묘판의 존재는 또한 성급하게 미래로 돌입하고자 하는 욕망을 반영하기도 한다. 미래란 무엇인가? 미래란 이미 나무들이 성장할 대로 성장해버린 나라를 가리키는 말이 아닐까. 고속도로변의 묘판은 인간들로 하여금 시간을 앞당기도록 만든다. 갓 생겨난 신도시에 서른 살 먹은 나무를 심는 것은 이 도시에 어느 정도 나이를 부여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아니, 나이를 먹었다는 환상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2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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