봐라 달이 뒤를 쫓는다
마루야마 겐지. 김춘미 옮김. 하늘연못
나는 기만에 찬 불신 행위를 잊게 하고, 양심의 발언을 압살하는, 기계. 나는 나에게 걸터앉은 자가 바라는 것보다 더 먼 곳으로 가고 싶어하는, 과격한 오토바이. 나는 어쩔 수 없는 심정에서 방랑길을 떠나는 자에게 어울리는, 파란 오토바이.
논리에만 매달려 미래를 통찰하려고 하는 자. 시냇물 소리에 마음을 빼앗기며 꽃이 피기를 기다리는 자. 읽다 만 책에 침을 흘리며 잠자는 자. 이부자리에서 빗소리를 듣는 데서 무한한 희열을 느끼는 자. 무슨 일이 있어도 단정한 태도를 흩뜨리지 않고, 예의를 잃지 않는 자. 분을 잔뜩 칠한 음란한 여자한테 혼나고 싶어 하는 자. 명석한 두뇌와 진드기 같은 어머니 때문에 꼼짝 못하는 자. 그들 쪽도 그렇겠지만, 그러나 내 쪽도 그런 인간들은 사절하겠다. (19쪽)
앞으로 밖에는 달릴 줄 모르는 자동차는, 그 어느 것도 내 호적수가 될 수 없다. 녀석들은 수많은 노동자와 함께 자본가와 그 앞잡이의 노예가 되어 있다. 녀석들과 함께 이동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인간들은 무산 계급의 우리에 틀어박혀서, 보기에도 시원해 보이는 숲 속을 힐끗 쳐다보고, 위에서 토혈할 날이랑, 뇌일혈이라든가 심부전 때문에 꽈당 쓰러질 날을 향해서, 씁쓰름한 얼굴로 달리고 있다. (101쪽)
밤은 어디까지나 밤이다.
여름은 어디까지나 여름이다.
우리는 달리고 있다.
우리는 흐르고 있다.
우리는 움직이고 있다.
봐라, 달이 뒤를 쫓는다. (31쪽)
너무나도 마루야마 겐지답다. “뒈져라, 형법 불소급의 원칙/뒈져라, 불교사상의 근기(根基)/뒈져라, 외국의 침략을 한번도 받은 적이 없는 국가.”(224쪽) 늙고 병들고 타락한 나라 일본을 향한, 이단아의 처절한 외침. 하지만 어찌 일본뿐일까.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겉으로는 냉소, 속으로는 절규를 내뿜는 오토바이의 방백을 들으면서 가슴 찔리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그저 흔해빠진 문명비판, 도시비판이라면 빌딩숲을 욕한 뒤 자연예찬 따위를 적당히 섞어서 도 닦는 사람인척 했으련만. 마루야마 겐지는 오토바이라는 강력하면서도 뿌리 뽑힌 것 같은 ‘문명의 이기’를 통해 문명을 비판한다. 두서없이 책장을 넘기던 나는 어느 틈엔가 긴장하고 있다.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은 지긋지긋하면서도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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