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863

가브리엘 포페스쿠 '국가 경계 질서'

고등학생이었던 나에게, 경계의 모습은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경계 경관 하면 일반적으로 떠오르는 어떤 물리적 분리의 표식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내 시야가 닿는 곳에는 그 어떤 국경 펜스나 감시탑 같은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결국 강을 건너지 못했다. 솔직히 말하면 소련도 공산주의 국가였기 때문에 그곳으로 넘어갈 이유가 없었다. 중요한 것은, 내가 강을 건너지 못했던 이유가 그것이 경계라는 것을 알고, 넘어가면 앞으로 삶이 원치 않는 방향으로 이어질 것임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하천 중간에는 어떤 장벽도 존재하지 않았지만 경계가 나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6-7쪽) 8월에 읽은 책인데 책상 위에 쌓아두고 있다가 이제서야 정리한다. 가브리엘 포페스쿠의 (이영민 외 옮김..

딸기네 책방 2018.09.28

캐런 메싱 '보이지 않는 고통'

우리가 구성했던 최초의 협력체는 인간공학자, 사회학자, 법학자, 그리고 여섯 곳의 노동조합 대표로 구성됐다. 우리는 그 협력체를 '보이지 않는 상처'라고 불렀다. 여성이 일터에서 겪게 되는 직업보건상의 위험성이 남성이 일터에서 겪는 것에 비해 덜 중요하게 여겨지거나, 더 모호하게 파악된다는 사실과 연관지어 붙인 별칭이었다. 나는 사업주와 과학자, 행정가들이 노동자를 존중하지 않고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는 상태로 여러 노동조건과 노동자의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지켜봤다. 나는 과학 기득권층의 제약에서 벗어나 노동자의 고통에 대한 회의적 태도가 노동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리고 직업보건 연구의 학문 영역을 어떤 식으로 형성하는지 지켜보았다.우리가 이렇게 양질의 협력관계를 발전시켜나갈 수 있었던 토..

딸기네 책방 2018.09.16

사스키아 사센, '세계경제와 도시'

세계경제와 도시 Cities in a World Economy사스키아 사센, 남기범 등 4명 옮김. 푸른길 내용이 좋은데 번역이 정말 나빠서 읽으면서 화가 많이 났던 책. 여러 사람이 번역했는데, 특정 챕터들이 특히 엉망이었다. 내용은 재미있다. 눈길을 끄는 건, 책에는 나오지 않지만 사스키아 사센이라는 사람. 오래 전부터 읽고 싶었고 두 권을 찾아 읽었다. 는 비교적 최근 것이고, '사스키아 사센의 세계경제와 도시'라며 저자 이름을 타이틀에까지 집어넣어 번역돼 나온 이 책은 2012년 것이다. 사센에게 명성을 안겨 준 도시 책(The Global City)은 못 읽고 이 책을 골랐는데 명성이 괜한 게 아니지 싶다. 재미난 것은 사센이라는 사람.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1947년 태어났는데, 부모가 이듬해 ..

딸기네 책방 2018.08.28

페리 앤더슨, '대전환의 세기, 유럽의 길을 묻다'

페리 앤더슨의 새 책이 나왔다고 해서 얼른 집어왔는데 2009년에 출간된 것이고, 저자가 1990년대 후반부터 쓴 글들을 모은 것이다. 2000년대 중반 이후에 쓴 글 몇 편도 간간이 보완하듯 실려 있기는 하지만 국내 출간된 2018년에서 길게는 20년 시차가 있는 셈이다. 원제는 The New Old World인데 (안효상 옮김. 길)라는 알맹이 없는 타이틀을 멋대로 달아놓으니 한국어판 제목이 영 입에 붙지를 않고 매번 기억에서 지워진다. 대학 시절 이후로 페리 앤더슨의 책을 본 적이...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고. 타리크 알리와 함께 유럽 68세대의 대표 격인 지식인이니, 읽을 가치는 충분히 있다. 대학 시절 받았던 느낌은 담담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 책은 아주 신랄해서 내 기억..

딸기네 책방 2018.08.22

존 리더, 아프리카 대륙의 일대기

근래 읽은 책들 중 최고이고, 아프리카에 대한 책들 중에서도 손꼽을만한 책이다. 아프리카에 대한 책들 자체가 손꼽을만한 숫자이긴 하지만. 존 리더의 (남경태 옮김. 휴머니스트). 읽은 지는 한 달 정도 됐는데 스크랩을 못 했다. 워낙 방대한 양이기에 그랬던 걸로 해두자. 실은 방금 전 크롬이 말썽을 부리는 바람에 2시간 동안 정리한 것도 날려먹었어 ㅠㅠ 앞부분 절반은 지구 대륙의 형성에서부터 시작해 인류의 탄생과 진화, 문명의 탄생까지 기나긴 역사를 다룬다. 인류가 아프리카에서부터 시작해 거기서 오랜 세월 살았으니, 이 대륙의 역사의 상당부분이 인류의 역사인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유럽인들이 오고 그들에 조응한 노예왕국들이 생겨나고 식민지 쟁탈전이 벌어지고 독립 이후 우리가 알고 있는 아프리카 ..

딸기네 책방 2018.08.21

티머시 미첼, '탄소민주주의'

탄소민주주의 CARBON DEMOCRACY티머시 미첼.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옮김. 생각비행 재미있었다. 며칠 만에 금방 읽었다. 지금 세계가 누리는 민주주의 체제가 석유라는 에너지원 덕에 굴러가고 있음을 지적한 것, 석탄과 석유 생산과정에서 노동자의 힘이 어떻게 조직화됐고 또한 어떻게 해체됐나... 다만 이러저러한 일이 일어났는데 그게 석유 지정학에서는 어떤 측면이 있었다, 이런 정도로 얘기해도 되는 걸 모두 '석유 때문이야'로 규정해버리니 앞부분 읽으면서 살짝 억지스럽다는 느낌도 들었다. 석유나 중동에 대해 처음 읽는 이들에게는 유익하고 흥미로울 것 같다. 석유정치와 석유경제를 초창기부터 큰 틀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점, 패권국가들이나 독재자들이나 거대기업들의 다툼 속에 가려졌던 중동 노동자들의 투쟁을 ..

딸기네 책방 2018.08.19

존 맨들, 지구적 정의란 무엇인가

지구적 정의란 무엇인가 GLOBAL JUSTICE존 맨들. 정승현 옮김. 까치 7/27 딱 봐도 까치에서 나온 책답다. 실은 그래서 이 출판사를 좀 더 좋아하는 면도 있다.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스튜어트 화이트의 를 읽다가 결국 못 버티고 -_-;; 존 롤스의 을 사서 읽었다. 둘 다 스크랩도 하지 못했지만. 실은 존 맨들의 이 책도 1월에 읽기 시작해서 7월에야 끝냈다. 그 사이에 이 책은 어디서 뭘 하고 있었으려나. 이제 만 사놓으면 될 것 같음. 이토록 일관된 디자인과 편집 컨셉트란 정말이지... 울집에 대체 이 출판사 책만 몇 권이 있는지 모르겠다. 몇년 새 나온 까치의 과학책들만 모아놨는데도 얼추 책꽂이 한 칸이 차던데 ㅎㅎㅎ 는 롤스가 정의론에서 뼈대를 세운 개념들에 기대어, 그것을 글로벌 확..

딸기네 책방 2018.08.14

헬레나 크로닌, '개미와 공작'

오래도록 읽지 않은 채 꽂아둔 책들을 꺼내어 읽어야지 하면서 두꺼운 책 목록을 만들었다. 그 중 첫 번째로 꺼내든 것이 헬레나 크로닌의 (홍승효 옮김. 사이언스북스)이다. 사이언스클래식이니 책의 질은 높을 것으로 보이고... 추천사를 읽는데 꽤나 재미가 있었고, 누가 썼나 봤더니 최재천 교수님이다. ^^ ‘협동과 성의 진화를 둘러싼 다윈주의 최대의 논쟁’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책의 제목이 주제를 그대로 보여준다. 개미는 협동, 공작(의 그 쓸모없어 보이는 화려한 꼬리깃털)은 성 선택을 상징한다. 다윈주의가 ‘해결하지 못한’ 것으로 여겨졌던, 다윈주의의 의붓자식 혹은 다윈주의에 반하는 증거 따위로 생각됐던 이타주의(협동)의 진화와 성 선택이라는 두 가지 테마를 잡아서 그것들이 다윈주의 역사 속에 어떻게..

에릭 리우, '시민권력'

잘 익은 붉은 색 토마토를 하나 떠올려보자. 그 토마토는 6억달러에 달하는 토마토 사업의 중심지 플로리다에서 수확한 것일 가능성이 꽤 높다. 만약 그렇다면 그 토마토는 20여년 전까지만 해도 노예 취급을 받았던 사람들이 땄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플로리다의 이모칼리는 대다수 미국인들이 가보지 못한 곳이다. 토마토를 따는 일은 기계화할 수 없는 것이어서 수확은 언제나 수작업으로 이루어진다. 불행히도 그 일을 하는 이들은 육체적, 정신적, 성적으로 학대받고, 막대한 빚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또 따가운 햇살 아래 이뤄지는 고된 노동의 시간이 아니라 수확한 토마토의 양에 따라 보수를 받는다. 그렇게 어렵사리 번 돈을 수시로 감독관들에게 빼앗긴다. 조금이라도 불만을 제기했다가는 권총 개머리판으로 얻어맞고 자..

딸기네 책방 2018.07.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