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나 좋아서 퍼옴.
이런 친구가 있다니 행복!!!
친구 구정은의 책을 읽는다.
그의 글을 한두 해 봐온 것도 아니고, 그 사람을 모르는 것도 아닌데 읽는 내내 가슴을 저민다. 사실, 책을 받아 놓고 한동안 읽을 시간이 없었던 탓도 있었지만, 읽지 않아도 이미 읽어버린 기분이 들 만큼 나는 구정은의 글을 잘 안다. 그는 국제뉴스 담당자로 오랫동안 분쟁지역을 지켜봐왔고, 때로 직접 현장을 취재해 왔다. 국제적인 어떤 사안이 있고 내가 미처 판단을 내리기 어려울 때, 믿고 자문 받게 되는 친구가 구정은 기자다. 오랫동안 한 분야를 담당해온 내공도 내공이려니와 그보다 앞서 ‘구정은’이라는 사람을 알기에 ... 그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 때조차 새겨듣는다.
구정은과 개인적으로 알고 지낸 것도 어느덧 십여 년을 족히 넘겨 버렸다. 때로는 너무 냉철하고 현실적이어서 - 국제정세라는 것이 당연히 그러하므로 - 얄미울 때조차 있는 데, 어느 순간에는 날 당황시킬 만큼 순진, 아니 고지식한 사람이기도 하다. 이 책의 문장에는 냉철하고 현실적인 구정은이 있지만, 전체적인 맥락으로 보노라면 너무나 고지식하여, 마치 정말 왜 그러는지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이 눈을 똑바로 뜨고 “사람이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라고 되묻는,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지”라는 표정으로 자신에게 대신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해달라는 듯이 물끄러미 쳐다보는 ‘구정은’이 있다. 사실은 바로 그 모습이 내가 좋아하는 ‘구정은’이다.
개인적으로 조지 오웰은 애증이 겹치는 작가이지만, 그의 『카탈루냐 찬가』를 사랑한다. 『사라진, 버려진, 남겨진』에서 구정은은 이 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솔직하고 담백하고 명료하면서, 어찌보면 일부러 순진무구하게, 또 어떤 부분에는 분노를 가득 담은 글이다. 그가 그린 스페인 내전은 생각만큼 극적이지 않으며 그래서 더 생생하다.”
『사라진, 버려진, 남겨진』에 담긴 구정은의 글에 대해 이보다 적확한 표현은 없다. 『사라진, 버려진, 남겨진』은 모두 네 개의 장으로 되어 있다. 그 중 셋은 책 제목에도 보이는 것처럼 「남겨진」, 「버려진」, 「사라진」 그리고 책 제목에는 드러나 있지 않지만, 「보이지 않는」이 그것이다. 첫 번째 장인 「남겨진」은 주로 국제분쟁 현장에서 파괴된 유적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남겨진’의 의미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한다.
“유적. 남겨진 것들. 여행지에서 조각상과 건축물을 보며 머릿속에는 천둥번개가 지나가는 것 같고 가슴이 묵지근해 발걸음을 떼가 힘들 때가 있다. 이런 압도적인 감정을 주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뭐니 뭐니 해도 유적의 크기이다. 하지만 서울 여의도의 63빌딩이나 강남의 주상복합 아파트 앞에서 그런 느낌을 받지는 않는다. 그 감정의 또 다른 축은 거기 쌓아올려진 시간의 무게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역사. 너무나 크고 오래된 그 경이로움.”
책에서 볼 때와 눈앞에서 그것을 직접 마주할 때의 느낌은 다를 수밖에 없다. 장구한 세월이 흘러 내 앞에 서 있는 그 역사를 마주하는 순간을 ‘경이로움’이란 말 이외의 다른 말로 표현할 길이 없을 때, 우리는 압도당한다. 그러나 사람들을 인솔하고 역사의 현장을 많이 다녀봤지만, 같은 장소에서 동일한 대상을 바라보면 모든 사람들이 그런 느낌을 받는 건 아니다.
내가 만났던 많은 사람들이 고작 이런 걸 보자고 이런 곳까지 와야 했냐며 짜증을 내기도 했다. 그것이 아니라면 서양 미술 현장에서나 교과서적인 감탄과 잘난 체가 묻어나는 현학적인 설명을 늘어놓기도 한다. 요즘 아이들 말로 하여 검색하면 다 나오는 이야기, 그보다 조금 더 들어가면 책에 다 나오는 이야기를 반복한다.
바미안 석불이 탈레반에 의해 파괴되었을 때, 팔미라 유적을 지키던 유적지킴이 칼리드 알아사드가 IS에 의해 공개처형 당했을 때, 정은의 반응을 나는 생생하게 기억한다. 이 글의 전반부에는 그 내용이 매우 담담한 어조로 쓰여 있다. 담담한 어조라고 말하지만, 문장 뒤에 뚝뚝 묻어나고, 흘러내리는 것은 슬픔이다.
“팔미라에서 나고 자란 그는 40년간 팔미라 유적 총책임자로 일하며 중요한 유적 발굴에 기여했다. ‘미스터 팔미라’, ‘팔미라의 수호자’라고 불린 아사드는 2015년 8월 18일 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 처형을 당했다. IS는 그에게 시리아 독재 정권에 충성했고, 정부 고위 당국자 및 보안 당국과 연락하며 ‘우상’을 돌봤다는 죄를 씌웠다.
1963년 팔미라 박물관장 겸 문화재국장으로 임명돼 40년간 자리를 지키다 2003년에 은퇴한 아사드는 딸에게 팔미라의 전설적인 고대 여왕 제노비아(Zenobia)의 이름을 붙여 줄 만큼 고향의 역사와 유적에 대한 애착이 깊었다.”
구정은은 “모래사막에 서있는 거대한 석불. 그때부터 내게 ‘바미얀’은 지명을 넘어 ‘꿈’과 같았다.”라고 말할 만큼 바미얀 석불에 대해 애정이 깊었다. 인류의 역사에서는 물론 개인적으로도 소중하게 여겼던 바미얀 석불을 파괴한 이들이 탈레반이었지만, “탈레반은 출범 당시만 해도 많은 아프간 사람들의 희망”이었다고 말한다. 어찌되었든 그것은 또한 사실(fact)이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종교적 극단주의에 의한 문화유적의 파괴로부터 전쟁과 내전으로 인한 집단학살과 같은 역사적인 사건들뿐만 아니라 「버려진」에서는 음식물 쓰레기, 플라스틱 섬, 온갖 첨단기술이 담긴 물건이지만 손쉽게 쓰레기가 되어버리는 물건에 이르는 지점을 콕콕 찾아 문제를 지적한다. 앞서 나는 조지 오웰을 애증이 겹치는 작가라고 말했는데, 구정은의 글을 조지 오웰보다 좋아하는 까닭은 다음과 같은 생각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프랑스를 떠올리며 칸의 해변과 아를의 테라스와 노트르담은 이야기할지 모르지만, 상아해안의 뜨거운 모래밭에 작열하는 태양과 아름답지만 쓸쓸한 성당을 본 내게, 프랑스으 어떤 것이든 ‘식민지의 그 무엇’을 떠올리게 했다. 우리가 때로는 경멸하고 때로는 무지와 동정의 시선을 보내는 곳들, 이른바 ‘제3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나의 시각은 일그러지고 비틀린다. 살인을 저지른 자의 아름다운 기예를 눈 뜨고 봐줄 수 없다는 것과 같다. 남의 것을 무지막지하게 빼앗아 자기 것을 일궈 놓은 유럽이나 미국을 결코 곱게 봐줄 수 없는, 나만의 반감과 나만의 몽니. 내게 ‘프랑스’는 그랑라우의 그 성당이다.”
한국에서 국제부 기자로 일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 나는 얼마 전 칼럼에서(한겨레)에서 “보는 자의 시선, 그것을 타인에게 강요할 수 있는 힘은 ‘권력’이 되었다. 해석을 강제할 수 있는 힘이 곧 권력이며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한일 갈등의 핵심도 ‘해석할 수 있는 권력’의 문제”라고 말한 바 있는데, 한국 언론에서 국제부 기자로 일하면서 저들이 보여주는 해석, 그 이상의 시선을 갖는다는 것은 폭풍우가 치는 바다에서 미역 줄기 하나를 잡고 버티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떠밀리고, 휩쓸려도 그 줄기를 놓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기자가 있다면 감사한 일이다.
이 책이 돌고 돌아 결국 우리를 데려가는 곳은 ‘사라진, 버려진, 남겨진 그리고 보이지 않는’ 인간, 우리들 자신이다. ‘세상에서 가장 많이 쓰이고 또 버려지는 상품’의 이름은 바로 인간이다. 중국의 한 자녀 정책을 위반하고 더 낳은 아이들, 이른바 ‘후커우(戶口)’들이 존재하지만, 이들은 법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부존재의 존재자들이다.
그들은 “공공 도서관에 가거나, 합법적으로 결혼하거나, 하다못해 기차를 탈 수도 없다.” 태어났으나 국가에 의해 인정받지 못하는 부존재의 존재들이 있는가 하면 어느 나라에도 속하지 않는 ‘무국적자’, 국가에 의해 부모로부터 강제 이산 당한 ‘도둑질 당한 아이들’의 이야기에 이르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경이'와 '경외'는 다른 말이지만, 한편으로 서로 통한다. '경이(thauma, 驚異)'란 무엇인가에 놀라고 이상하게 여기는 것(thaumazo)인데, 인간은 이로부터 사물의 본질을 추구하는 행위, 철학하게 된다. 내 입장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도 많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철학의 시작과 끝은 결국 '경외(Awe, 敬畏)'가 아닐까 싶다. 경외는 무서움과 공포로서의 '경악'과는 다른 마음이다. 그것은 거룩한 두려움을 말한다. 상대를 공경하는 마음으로 삼가하고 조심하여 헤아리는 마음이 바로 경외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시작에 경이가 있었다면 끝에는 인간에 대한 경외가 있다.
구정은의 이 책을 작년에 받아 읽은 뒤 여태 묻어두었다. 책을 읽는 내내 한편에선 ‘코맥 매카시(Cormac McCarthy)’의 『로드』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암담했다. 하지만 이 책이 코맥 매카시 정도로 암담하지는 않았다. 나는 어려서 버려지는 경험을 해보았지만, 결코 익숙해지지 못했다. 버려지는 것들 틈바구니에서 버려진 존재로 살아가는 일, 그것은 서로 떠밀려 흘러가지 않도록 꼭 끌어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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