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데이비드 바인, '기지 국가'

딸기21 2019. 11. 5.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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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해외기지라는 렌즈를 통해 미국이라는 나라와 이 나라가 세계에서 차지하는 위치, 그리고 미국인들이 지구의 나머지 지역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를 솔직하고 단호하게 살펴볼 수 있다. 해외 기지들을 검토하면 미국이 어떻게 영구 전시 체제에 놓여 있었는지, 미국 경제와 정부가 어떻게 지속적인 전투 준비에 의해 지배돼왔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결국 미국의 해외기지 이야기는 2차 대전 이후의 미국 연대기이다. 어떤 면에서 우리는 모두 담장 안에서, 군대에서 하는 말로 '철조망 안에서' 살게 되었다. 우리는 이 기지들 덕분에 더 안전해졌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해외기지 때문에 우리는 영구적인 군사사회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38쪽)

 

워싱턴 아메리칸대학교 인류학과 교수인 데이비드 바인의 <기지국가>(유강은 옮김. 갈마바람)를 읽었다. 옮긴이 이름만 보고 샀다. 유강은 님이 번역한 책은 닥치고 읽어야. ㅎㅎ

 

 

위에 인용해놓은 것은 저자 서론의 한 부분이고, 저기서 말하는 '우리'는 미국인이다. 하지만 미국이 아니라 한국인들, 스스로를 미국의 패권전략 속에 놓고 미국과 동일시하기 좋아하는 우리(!)라 생각하고 읽어도 큰 무리는 없을 것 같다. 한국은 이 책의 글과 지도에 누차 언급되는 것처럼, 미국의 중요한 '해외 기지'가 많이 있는 중요한 나라이니까.

 

로버트 카플란의 <제국의 최전선>, 문승숙과 마리아 혼의 <오버데어>, 개번 매코맥과 노리마쯔 사또꼬의 <저항하는 섬, 오끼나와>와 함께 내 나름 뽑은 '미군기지 4부작'이다. 그 중에 <오끼나와>는 읽었는데 정리를 못하고 있고, <오버데어>는 올해가 가기 전에 읽으리라 마음만 먹고 있다 -_-;;

 

워낙 미군이나 기지에 대한 기사를 많이 읽고 써온 탓에, 내 경우 <기지국가>의 내용 자체는 대충이라도 알고 있던 것들이 많았다. 그럼에도 일목요연 명쾌하게 정리돼 있고 또 자세히는 몰랐던 세계 여러 곳 얘기가 있어서 재미있었다. 모든 지인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

 

우리가 아는 모습의 기지 국가는 1940년 9월 2일 탄생했다. 미국이 전쟁에 뛰어들기 1녀 여 전인 바로 그 날 루스벨트는 영국과의 협정을 승인하겠다고 의회에 통보했다. 미국이 영국 식민지에 있는 공군, 해군기지에 대한 통제권을 받는 대가로 파산 일보 직전인 동맹국에 1차 대전 시절의 구축함 50척을 제공한다는 협정이었다.

훗날 '구축함-기지 교환' 협정이라고 불리게 된 이 결정에 따라 미국은 바하마, 자메이카, 세인트루시아섬, 세인트토머스섬, 앤티가섬, 아루바-퀴라소, 트리니다드, 영국령 가이아나 등에 있는 기지들에 90년 간의 임대권과 주권에 맞먹는 권한을 갖게 되었고, 버뮤다와 뉴펀들랜드의 기지에 대한 임시 사용권도 얻었다.

루스벨트의 이토록 놀라운 결정의 뿌리는 루이지애나 매입 즈음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은 독립 직후부터 1800년대까지 내내 영토 외부에 작지만 중요한 기지망을 구축해왔다. (41-42쪽)

 

미국이 기지 국가로 태어나는 과정을 설명하면서 저자는 현재의 미국 땅에서 벌어진 영토확장 역사를 되짚는다. 밖에서 기지를 만들기 전에 먼저 안에서 같은 과정을 밟았고, 그렇게 외부를 내부로 만드는 과정이 이후 해외에서도 반복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대체로 학자들은 이상하게도 독립 직후에 만들어진 기지들은 간과하고 관타나모 만을 미국의 첫 번째 해외 군사기지라고 본다. 미국은 수백 개에 달하는 국경 요새 덕분에 서부로 팽창할 수 있었는데, 이 요새들은 당시에 명백히 해외인 땅에 세워진 것이었다. (44쪽)

 

이 기지들 덕분에 미국 정착민들은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들을 몰아낼 수 있었고, "1802년 경에는 5대호부터 뉴올리언스까지 미국의 요새망이 만들어졌다"(54쪽)고 저자는 말한다. 이 과정에서 루스벨트 시절부터 이미 '미래의 항공산업'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전후에 국제 항공여행이 대규모로 성장할 것이라고 내다본 루스벨트와 관리들은 미국의 상업항공사들을 지원하려고 했고, 상업 계획과 군사 계획은 종종 병행되었다. 가령 팬암은 군을 위해 전쟁 전에 라틴아메리카 전역에서 비밀리에 기지 설치권을 확보했다.

전후 입안 과정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관리들은 군 비행장과 민간 비행장을 하나의 거대한 네트워크로 통합해 미국의 물리적, 경제적 안보를 확보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 사우디아라비아 다란에 부분적으로 완공된 기지를 보면, 향후 수십 년 동안 계속될 중동 개입의 전조가 되는 기지와 경제적인 이익 사이의 연결고리가 여실히 드러난다. (55~56쪽)

 

(다란 기지와 경제적 이익 사이의 연결고리에 대해선 책에 자세한 설명이 없다. 나중에 자료를 좀 찾아봐야겠다.)

 

해외 기지를 확대한 것은 2차 대전 때이지만, 전쟁이 끝난 뒤에도 미국은 그것들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군 지도부는 그 구실로 대개 두 가지 군사원칙을 들었다. 첫번째는 보완재를 갖춰놓는 건 언제든지 유용하다는 '잉여의 원칙', 두 번째는 혹시라도 적이 활용하는 일이 없도록 기지와 영토를 고수하는 게 현명하다는 '전략적 부정'의 원칙이었다.

광대한 군사기지망을 유지해야 한다는 이런 방침은 당시 많은 이들이 품고 있던 전략적 믿음, 즉 국가의 안보와 미래의 전쟁 방지는 앨프리드 머핸 해군 제독이 구상했던 것처럼 해군력과 섬 기지들의 결합을 통해 태평양을 지배하는 데 달려 있다는 믿음에 근거하고 있었다.

기지 전문가 할 프리드먼은 이렇게 말한다. "태평양 해역을 '미국의 호수'로 바꾸자는 데 관료적인 합의가 이뤄진 가운데, 전후 태평양의 전략적 안보에 관한 미국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이러한 제국주의적 방식이 등장했다." (57쪽)

 

참 스케일이 크기도 하지. 태평양을 호수로 바꾸자니. 미국의 태평양 전략은 이런 바탕 위에서 세워졌다. 태평양을 확보한다는 건 '역외 섬 방어선' 구축을 의미했고, 서태평양을 따라 북에서 남으로 한 줄로 뻗은 섬 기지들이 방어선이 됐다저자는 지적한다. 책에는 맥아더의 발언이 인용돼 있다. "우리의 방어선은 아시아의 해안을 따라 촘촘히 자리한 섬들을 통해 이어진다. 이 섬은 필리핀에서 시작해 류큐열도를 거치며 주요 방어 거점인 오키나와가 포함된다. 그리고 일본과 알류샨 열도로 휘어 알래스카까지 이어진다."(58쪽) '냉전의 설계자' 조지 케넌도 이를 지지했다고 한다.

 

하지만 막대한 비용 때문에 이 선을 따라 기지를 구축하는 계획은 좌초됐고, 오키나와와 일본 본토, 괌, 하와이, 미크로네시아 등의 주요 기지에 의존하는 쪽으로 갔다고. 전후 미국은 해외 기지 가운데 절반 정도를 되돌려줬지만, 평화시에도 기지들을 '상설적인 제도(institution)'로 운영했다. 미군이 보유하게 된 이런 '가라앉지 않는 항공모함' 중에는 영국령 섬들이 있었다. 또 1946년 필리핀이 미국으로부터 독립했지만 미군은 23개 기지와 군사시설을 99년간 무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임차권을 얻어냈다(59쪽). 로버트 카플란이 '세계의 기지촌'이라고 부른 필리핀. 

 

식민지를 유지하는 게 더이상 선택지가 되지 않는 상황에서 루스벨트 등은 세계의 최대한 많은 지역을 자기네들의 규칙 안에 묶어둬야 했다. 지리학자 닐 스미스가 설명하듯 "식민지를 두지 않고 전 세계에 대한 경제적인 접근성을 확보하는 것"이 전후의 거시전략이었는데, "세계의 경제적 이익을 보호하는 동시에 장래의 모든 군사적 호전성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지구 곳곳에 기지를 둘 필요"가 있었다.(61쪽)

 

한국전쟁 중에 미군 기지 숫자는 40%가 늘었고, 이후 약간 줄었다가 베트남전쟁 중에 다시 20%가 늘었다고 한다. 두 차례 큰 전쟁이 지나가고 난 뒤, 기지국가 미국을 다시 키운 데에는 역시나 이란 혁명의 영향이 컸다. 저자의 말마따나 "1970년대 내내 중동은 비교적 냉전 경쟁이 눈에 띄지 않고 미국의 기지가 많지 않은 지역 가운데 하나였다." 물론 지금도 중동이 미군 기지가 많은 지역은 아니다. 아시아(한국 일본)와 유럽(독일)에 워낙 많으니. 저자의 말처럼 미국이 이 기간 이스라엘이나 사우디, 이란을 밀어주면서 역내 패권을 유지해온 것은 널리 알려진 일. 그러나 1979년 이란 혁명과 소련의 아프간 침공으로 "미국의 접근법은 완전히 바뀌었다."(70쪽) 그래서 나온 게 '카터 독트린'이다.

 

카터는 역사상 최대 규모가 된 기지 건설에 착수했다. 중동의 군사력 증강은 이내 냉전 시기 유럽의 요새화나 한국과 베트남에서 전쟁을 벌이기 위해 구축한 기지망의 규모와 범위에 버금가는 수준에 이르렀다. 신속배치군을 수용하기 위해 이집트, 오만, 사우디 등 곳곳에 미군기지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이후 신속배치군은 중부사령부로 확대됐다. 1991년 걸프전 뒤 수천 명의 병력과 확대된 기지 기반시설이 사우디와 쿠웨이트, 바레인, 카타르, 아랍에미리트, 오만 등에 그대로 남았다.

아프간과 이라크 침공은 이 지역에서 미군 기지가 또다시 급격히 확대되는 결과를 낳았다. 페르시아만에서 이미군은 이란을 제외한 모든 나라에 대규모 기지를 건설했다. 카타르의 알우데이드 공군기지는 중부사령부의 항공 작전본부가 되었다. 바레인은 해군 제5함대의 본부이자 이 함대의 중동 작전본부이다. 쿠웨이트는 미 지상군의 중요한 중간 대기구역이자 병참본부가 되었다. (71쪽)

 

[구정은의 '수상한 GPS']카타르 기지의 미군 폭격기, 이란으로 날아갈까

(바레인에 대해서는 이 글을 참고)

 

저자는 미군 기지들을 규모에 따라 구분했다. 해외 주둔병력과 군인 가족 대부분은 미국 도시처럼 꾸며진 '리틀 아메리카'라 불리는 대규모 주둔지에 산다. 독일 람슈타인, 오키나와의 카데나 공군기지, 평택의 캠프 험프리스 등이 이런 곳들. 온두라스의 소토카노 공군기지는 중간급 규모다. 가장 작은 규모는 공식적으로 '안보협력 대상지역'이라고 하는데 흔히 릴리패드라 부른다고. lily pad, 개구리가 뛰어다니는 연잎을 가리킨다. 미군은 도시만한 거대 기지와 중간급 기지와 비밀스럽지만 언제라도 이용할 수 있는 릴리패드를 엮었다. "미국이 멀리 떨어진 곳에서 몇 년씩 전쟁을 벌일 수 있는 이면에는 미국이 이처럼 광대한 기지국가라는 사실이 존재한다."(76쪽)

 

그 중 람슈타인 기지에 대한 설명을 보면

 

카이저슬라우테른 군사지구에는 람슈타인 공군기지뿐 아니라 란트슈툴 지역병원, 라인 병참기지와 그 밖의 수많은 기지가 포함되며 약 4만5000명의 미군과 민간인 직원 및 그 가족, 5000명의 전역군인과 그 가족, 미군을 위해 일하는 독일 민간인 6700명 정도가 거주한다. 시의 인구는 10만명 정도로 미군 기지 인구의 2배 정도에 불과하다.

람슈타인 비행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공군이 해외에 보유한 것 가운데 가장 큰 화물공항에 새로 지어진 여객터미널과 화물터미널이 있다. 아프간과 이라크 전쟁에 사용된 병력, 무기, 물자의 약 80%가 독일을 거쳤는데 그 대부분이 람슈타인을 통과했다. 카이저슬라우테른 군사지구 센터는 군이 해외에 지은 단일시설로는 최대 규모를 자랑했고 소요된 비용만 2억 달러가 넘었다. 이 쇼핑몰의 핵심 매장(anchor tenant)은 세계 최대의 기지매점이다. (76~77쪽)

 

조지 W 부시는 이라크전이 한창이던 2003년 말 갑자기 미군 해외기지 '재배치' 계획을 발표했다. 유럽과 한국과 일본 등의 기지 3분의 1을 없애겠다고 했다. 이유는? 유럽(대체로 독일)과 중동에서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로 병력을 이동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래도 해외에 남는 미군은 여전히 수십만 명이었는데 이 병력은 람슈타인, 한국의 오산 공군기지, 일본의 이와쿠니 미 해병대 항공기지처럼 불규칙하게 뻗은 소수 주요 기지망에 집중시킬 예정이었다. 1996년부터 사우디 코바르타워, 동아프리카 미국 대사관, USS콜호 등을 겨냥한 잇따른 공격이 벌어진 것도 이런 조치를 취하게 된 요인의 하나였다. 유지되는 리틀아메리카들도 담장을 높이고 보안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마크 길럼이 <아메리카 타운>에서 설명한 것처럼, 군인들이 위험한 "기지 밖으로 나갈 필요를 최소화하기 위해 기지들에 생활편의 시설을 완비하게 되었다." 이 기지들은 이제 이상화된 교외를 넘어 "말썽꾼의 접근을 차단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경비원과 담장까지 갖춘 빗장 동네"가 되었다. (86~87쪽)

 

빗장 동네(게이티드 커뮤니티)가 되어버린 미군 기지. 부시와 도널드 럼스펠드의 대대적인 민영화와 아웃소싱 덕에, 민간군사회사(PMC)들이 그 담장과 게이트를 지키면서 미국인들 세금을 가져가게 된 것은 그저 '부수적인' 일.

 

리틀아메리카보다 작은 중간 규모의 '전진 작전 거점(FOS)의 한 예로 저자는 온두라스의 소토카노 공군기지를 들고 있다. 처음 듣는 내용이어서 눈길이 갔다. 온두라스에 대한 기사는 많이 읽어보지도 못했고 쓴 적도 별로 없었는데, 거기서 요망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줄은 잘 몰랐다.

 

1982년 소토카노 기지 건설이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도 미국 관리들은 "온두라스에는 미군 기지가 하나도 없다"고 주장한다. 관리들의 주장에 따르면 그곳의 미군은 온두라스 공군사관학교의 초청을 받은 "손님들"이다. 소토카노의 미군 병력과 민간인 숫자가 1300명이 넘어 300명 정원의 사관학교를 압도하는 데도 말이다. 이 기지를 "임시"라고 말하는 것은 외국 군대가 상시주둔하는 것을 금지하는 온두라스 헌법을 회피하기 위한 말장난일 뿐이다. (88쪽)

 

릴리패드는 대체로 외딴 지역에 있으며 항의를 피하기 위해 기밀로 유지되거나 암묵적으로만 존재가 인정된다. 때로는 민간 군사 계약업체에 대부분 또는 전적으로 의존하는데, 필요한 경우 미국 정부가 한결 쉽게 관계를 부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펜타곤은 수용국의 기존 기지 내부나 민간 공항 가장자리에 릴리패드를 감추곤 한다. 

콜롬비아나 케냐, 태국 같이 다양한 곳에서 릴리패드가 발견된다. 이 새로운 전략의 주요한 목표는 현지 주민과 세간의 관심 그리고 잠재적 반대를 피하는 것이다. 지난 15년 동안(책이 쓰인 것은 2015년이다) 펜타곤은 아마 50개가 넘는 릴리패드와 기타 소규모 기지를 건설했다. (93쪽)

 

클라크 공군기지와 수빅만 해군기지는 한때 세계 최대의 미군기지였다. 1992년 필리핀 정부가 임대계약 갱신을 거부하고 외국 군사기지를 금지하는 새 헌법을 채택한 뒤 폐쇄됐다. 몇 년 뒤인 1999년 미군은 파나마운하 지대를 반환한 뒤 파나마의 기지들도 잃었다. 이런 손실에 대응해 클린턴 행정부의 펜타콘은 에콰도르, 아루바, 퀴라소, 엘살바도르 등지에 릴리패드를 비롯한 중소 규모 기지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펜타곤은 안보협력 대상지역(릴리패드)에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여러 방법을 동원한다. 가령 파키스탄에서 미군은 형식적으로는 아랍에미리트가 소유한 기지를 임차했기 때문에 파키스탄 정부는 자국 영토에 미군기지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태국에서는 민간 계약업체가 우타파오 해군 항공기지가 있는 태국 왕립해군 부지를 임차해 미군에 재임대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태국의 릴리패드는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터로 향하는 항공기와 해군 함정의 주요 병참 허브가 됐다. 

미군은 훨씬 더 많은 나라에서 "이용협약"을 체결해 공항, 항구, 기지 등의 정기 이용권을 확보했다. 공군은 럼스펠드 장관 시기에 아프리카에서만 여러 나라의 20건 이상의 중간급유(gas-and-go) 협약을 체결했다. "기지를 둔 게 아니라 이용할 뿐"이라는 말은 어떤 이들에게는 마법의 주문이 되었다. 2002년 초 필리핀 남부에서 600여명의 미군 특수부대가 가동되기 시작했다. (94쪽)

 

기지를 감추는 여러 방식들. 그런다고 흔적이 없을까? "군사시설은 규모가 작든 크든 대부분 지역사회에 피해를 입히며, 현지 주민들은 이러한 피해를 쉽게 잊지 못한다."(95쪽)

 

그 다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차고스 제도. 존 필저의 책을 비롯해 여러 곳에서 접했던, 디에고가르시아.

 

18세기 말에 처음 사람들이 정착한 이래 디에고가르시아와 차고스 제도의 다른 섬들은 프랑스 보호령이었따가 이후 영국 식민지 모리셔스의 보호령이 되었다. 미국 케네디 행정부는 영국을 설득해 차고스제도를 모리셔스에서 분리하고 식민지 세이셸에서 다른 섬들을 분리하는 식으로 새로운 식민지를 만들게 했다. 탈식민화가 진행되는 중에 식민지 분할을 금지하는 국제협정을 위반한 처사였다. 영국은 이곳을 '영국령 인도양지역'이라고 불렀는데 오로지 군사적 용도로만 사용할 생각이었다. 영국 정부는 섬들을 분리하는 대가로 세이셸에 공항을 건설하는데 동의했고 1965년에 모리셔스에 300만파운드를 지불했다. 그로부터 1년 뒤 미국과 영국 정부는 '교환공문'으로 합의내용을 확인했다. 미국은 '무상으로' 이 새로운 식민지의 사용권을 얻었다. 비밀 합의에 따라 미국은 극비리에 영국에 1400만 달러를 전달했다. (103-104쪽)

 

미국은 정말 싼 값에 식민지를 얻었고, 영국은 손쉬운 장사를 했다. 미국은 디에고가르시아에 주민이 수백명 뿐이고 "NEGL(negligible)" 즉 무시해도 좋을 정도라고 했지만 이 책에 따르면 1960년대에 이 한 섬에만 1000명 가량이 살고 있었고 다른 섬들까지 합하면 차고스제도의 인구는 1500~2000명이었다. 섬의 역사는 너무나 처절하다.

 

An aerial view of the island of Diego Garcia is pictured here in an undated photo. U.S. AIR FORCE

 

원래 무인도였는데 노예로 팔린 아프리카인들과 계약하인이 된 인도인들이 프랑스의 코코넛 플랜테이션 노동 때문에 이주해 있었다. 1835년 프랑스령이었던 이곳에서 노예제가 폐지된 뒤 이 다양한 집단은 독특한 문화와 차고스 크레올이라는 언어를 갖춘 독자적인 사회를 발전시켰다. 그들을 스스로를 일루아 즉 '섬사람들'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미군은 차고스 사람들이 사라지기를 원했다. 또는 한 문서에서 말한 것처럼 이 섬을 "싹 쓸고 소도하기를" 원했다. 기지 건설이 임박해지자 1967년부터는 병원 치료나 휴가를 위해 모리셔스에 가 있던 차고스 사람들조차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금지되었다. (105쪽)

 

디에고가르시아 건설작업은 1971년에 시작되었다. 미 해군 공병단의 지원 속에 영국 관리들은 섬사람들이 키우던 개를 잡아들이는 것으로 추방 과정을 개시했다. 차고스 사람들은 영국인들이 개들을 밀폐된 화물 창고에 넣고 가스로 불태우는 동안 겁에 질려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당국은 남아 있는 차고스인들에게 화물선에 승선하라고 지시했다. 추방은 1973년 5월까지 단계적으로 진행됐다. 대다수 차고스인들은 모리셔스와 세이셸에 도착하자마자 말 그대로 부두에 남겨졌다. 집도 일자리도 없었고 가진 돈도 거의 없었다. 2년 뒤인 1975년 서구언론으로는 처음으로 워싱턴포스트가 이 내용을 보도했다. 한 기자가 "절망적인 가난" 속에서 사는 사람들을 찾아냈다. 신문이 "대량 납치 행위"로 지칭한 조치의 희생자들이었다. (1-6-107쪽)

 

그렇게 디에고가르시아는 인도양의 '영국령 미군 기지'가 됐다. 아프간전때, 이라크전 때 여기서 미군기가 날아가 아프간과 이라크를 폭격했다. 타향에서 비참히 살아가던 섬 주민들은 자기네 고향이 남의 나라 사람들을 죽이는 기지로 이용되는 것을 보면서 어떤 느낌이 들었을까. 미 해군 함정들은 디에고가르시아 해군기지를 건설하면서 코코넛 나무를 뽑고 폭약으로 산호초를 폭파했다. "2001년말 아프간의 토라보라 동굴기지를 폭격하는 과정에서 무기를 탑재한 B-1 폭격기 한 대가 디에고가르시아를 이륙한 직후 추락했다. 승무원들은 탈출했고 조종사 없는 폭격기는 결국 인도양에 떨어졌는데, 탑재된 폭탄을 모두 합하면 8500파운드에 달했다."(203쪽) 

 

비키니섬도 사정은 비슷하다. 2차 대전 뒤 미 해군은 핵무기 실험장을 찾아 세계 곳곳을 뒤졌고, "심지어 갈라파고스섬까지 검토했다. 하지만 내무부는 다윈으로 유명한 이 섬을 후보지 목록에서 뺐다."(109쪽) 그렇게 해서 결정된 것이 비키니섬.

 

해군은 1946년 3월 7일 비키니 주민들을 같은 마셜제도의 롱게리크 환초로 이주시키는 작업을 완료했다. 1948년이 됐을 때 롱게리크의 비키니 사람들은 식량이 떨어져 영양실조에 시달렸다. 해군은 그들을 우젤랑 환초로 이주시킬 계획을 세운 뒤 주요 미군기지 근처에 있는 콰절린 섬의 임시수용소로 보냈다. 그리고 그해 섬사람들을 킬리 섬에 있던 새로운 영구 거주지로 이주시켰다. 1952년 다시 상황이 나빠지자 정부는 킬리섬에 비상식량을 투하할 수밖에 없었다. 4년 뒤 미국은 비키니섬 주민들에게 1달러 지폐로 2만5000달러를 지불하고, 300만 달러의 트러스트펀드를 조성해 매년 일정액을 지급하기로 했다. 지급액수는 1인당 15달러 정도였다. (110쪽)

 

결과는? 1946~1958년 68차례의 원폭과 수소폭탄 실험. 바다와 비키니섬은 오염됐고 마셜제도 6개 섬에서 주민들을 이주시켜야 했다. 방사능 노출에 따른 사망과 질병, 사회적 문화적 물리적 경제적 환경 악화, 높은 자살률, 빈민가 확산. 헨리 키신저는 마셜제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단다. "거기에는 90명 밖에 살지 않아요. 누가 신경을 쓰겠습니까." (119쪽)

 

책에 따르면 1800년대 이래 미국 본토 바깥에서 기지를 짓느라 강제이주시킨 사례가 최소 18건. 그 중에는 하와이의 작은 섬 카호올라웨, 파나마 운하 지대, 필리핀 원주민 아이타족 땅을 빼앗아 지은 클라크 공군기지 등도 들어 있다. 오키나와에서 최소 3218명을 볼리비아로 이주하게 했던 것(115쪽)은 새로 알게 된 사실이다. 푸에르토리코의 비에케스에서도 주민들을 좁은 땅에 몰아넣고 기지를 짓는 일이 벌어졌다. 마이크 데이비스가 <제국에 반대하고 야만인을 예찬하다>에서 소개했던 덴마크 툴레 기지 얘기도 나온다.

 

"기지는 보통 국가 영토의 정치적 가장자리에 세워진다. 이런 땅에는 종족적, 문화적 소수집단이나 기타 불우한 집단이 거주한다." 캐서린 맥캐프리라는 사람이 비에케스 연구에서 지적한 내용이라고 한다. 저자는 이 문장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군이 토지를 얼마나 쉽게 취득할 수 있는가는 그 땅에 사는 주민들이 상대적으로 얼마나 무력한지와 큰 연관성이 있으며 이 사실은 다시 민족, 피부색, 인구규모 같은 요소와 연결된다." (119쪽)

 

괌의 우울한 역사 등은 생략하고. 이탈리아 미군과 마피아의 연계는 흥미롭다.

 

뉴욕에서 악명 높았던 갱스터 루치아노는 결국 감옥에 갔지만 2차 대전 중에 뉴욕 항을 추축국 스파이와 파괴분자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고심하던 해군 장교들을 도운 덕에 조기에 석방됐다. 루치아노는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 준비를 돕기도 했다. 루치아노를 비롯한 마피아들은 최소한 섬에 관한 정보를 제공했으며 연합군이 지배권을 확보한 뒤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 현지인들의 연락처를 넘겨줬다. 

시칠리아에 상륙한 연합군 지도부는 현지 마피아 보스들의 지원에 의존했다. 무솔리니의 무자비한 단속의 표적이었던 마피아는 연합군에 기꺼이 협력했다. 연합군이 마피아 조직원을 시장으로 임명하는 경우도 있었다. 마피아 보스들은 연합국과 현지인 사이의 브로커 노릇을 하면서 통역을 제공하고 다른 중요한 역할도 수행했다. 연합국 군정청장 찰스 폴레티는 살인혐의를 받고 뉴욕에서 이탈리아 도망친 마피아 보스 비토 제노베세의 영향력을 이용해 캄파니아주 여러 도시에 카모라 파벌 시장을 임명했다. 이 도시들은 지금까지도 카모라의 지배를 받고 있다. (171-172쪽)

 

미군 기지의 환경파괴에 이어 미군기지 '사람들' 이야기로 넘어가면 세계의 역설이 그대로 되풀이된다. 기지 사람들 중 상당수는 '제3국', 주로 필리핀 사람들이며 기지 내에는 명확한 주거 '등급'이 있다는 것이다.

 

지트모(관타나모)의 필리핀인들은 보통 한 방에 2층 침대 4개가 있는 기숙사에서 생활한다. 자메이카인들은 미군 병사들이 쓰던 조금 더 나은 곳에 기거한다. 아프간과 이라크 기지에서는 계약직 대다수가 네팔과 방글라데시 그리고 멀리 피지에서 온 이들이었다. 언론인 세라 스틸먼은 이 계약직들을 "펜타곤의 보이지 않는 군대"라고 불렀다. "전 세계의 가난한 나라들에서 온 7만 명이 넘는 조리사, 미화원, 건설노동자, 패스트푸드 식당 직원, 전기기사, 미용사가 미군기지에서 일한다. 필리핀인들은 군복을 세탁하고, 케냐인들은 냉동스테이크와 공기주입식 텐트를 운송하고, 보스니아인들은 전력망을 고치고, 인도인들은 아이스 모카라테를 만든다." (215쪽)

 

미군 기지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곳, 관타나모

 

미군기지에 따라붙는 이른바 '기지촌', 성매매 집결지 얘기에서 대표적으로 소개한 것은 한국 사례다. 동두천과 이태원은 평택으로 이어졌고, 한국의 기지촌은 이제 필리핀과 러시아 여성들로 채워진다. 2002년 미국 국무부가 한국이 인신매매 피해 여성의 종착지라는 점을 확인했다는 것, 한국의 미군기지는 '아시아태평양 지역과 유라시아 출신 여성들을 한국과 미국에 공급하는 초국가적인 여성 인신매매의 중심축'이라는 점. 노예제에 대한 책들도 종종 지적하는 내용이다.

 

특히나 "군대의 제도화된 성매매는 여성의 비인간화와 그것을 영속화하는데 기여하는 군사화된 남성성의 중요한 원천"이다. 기지의 폭력은 기지 주변의 폭력으로 이어진다. "기지촌 성매매가 만연한 한국의 상황 때문에, 이 나라에 배치된 남성들이 남자의 정체성에 대해 갖는 생각이 종종 달라진다."(254쪽) 더군다나 그 군대가 '미군'이라면, 인종적 종족적 우월성까지 겹쳐진다. 이 책에서 언급한 문제는 아니지만, 필리핀 코피노 문제를 바라보면 한국의 미군기지 주변 '제도화된 성매매'를 쉬쉬하고 국가적 돈벌이로 삼았던 과거, 그걸 직시하지 않은 지금의 우리, 그리고 역시나 미군기지를 끼고 있고 성매매가 만연한 필리핀의 여성 현실이라는 연결고리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서 '미군기지 성매매'가 빠지면 결국 코피노 문제는 한국 남성 개개인의 도덕성 문제로 다뤄질 수밖에 없고, 이미 사라진 간통죄나 가부장적 책임론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라크와 아프간의 PMC 이야기는 익히 알려진 것이고. 미군기지가 실제로 현지의 경제에 도움이 되느냐에 대해서도 저자는 회의적으로 평가한다. 그밖에도 스크랩해야 할 내용이 수두룩....하지만 이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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