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승리
에드워드 글레이저. 이진원 옮김. 해냄
읽은 지 몇 달이 됐는데 이제야 정리.
새로운 스타디움이나 경전철 시스템, 컨벤션 센터, 주택사업 같은 대규모 건설 사업을 추진하면 도시가 예전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다는 그릇된 상상을 하는 관리들이 너무나 많다. 러스트벨트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의 욕구를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공공정책은 가난한 '장소'가 아닌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
쇠퇴하는 도시의 대표적 특징은 경제 규모에 비해서 주택과 인프라가 과도하게 많다는 점이다. 주택과 인프라 공급은 많은데 수요는 거의 없는 상황에서 더 많은 건물을 짓기 위해 공적 자금을 투입하는 것은 비합리적이다. 건물 중심으로 도시를 개편하려는 어리석은 행동은 도시는 구조물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교훈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준다.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휩쓸고 지나간 후 건설업계 관계자들은 뉴올리언스 재건에 수천 억 달러를 투입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곳에 살던 사람들에게 총 2000억달러를 줬다면 1인당 이사나 교육, 혹은 다른 곳에서 더 나은 주거지를 얻는 데 쓸 수 있는 돈 40만 달러씩을 받게 됐을 것이다.
뉴올리언스의 위대함은 항상 건물이 아닌 그곳의 사람들로부터 나왔다. 카트리나의 희생자들이 다른 곳에 이주하더라도 그들의 삶의 질 개선을 위해서 연방정부 예산을 어떻게 쓰면 좋을지 따져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지 않았을까?
(26-27쪽)
도시에 관해 공부를 하면서 근래 읽은 책들 중 가장 마음에 와닿는다. 쏙쏙 이해가 되는 쉬운 문체, 그리고 무엇보다 내용이.
맨해튼과 런던과 상하이 시내는 교외 주택지가 아니지만 진정한 환경의 친구다. 나무와 풀에 둘러싸여 살면서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도시에서 살면서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들에 비해 훨씬 더 많이 에너지를 소비한다. 전통적인 도시에서는 운전을 많이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탄소 배출량이 더 적다. 뉴요커들 중 3분의 1 미만이 자동차를 이용해서 출퇴근하는 반면, 미국 전체적으로 봤을 때 출퇴근하는 사람들의 86%가 자동차를 이용한다. 미국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해 출퇴근하는 사람들의 86%가 뉴욕의 5개 자치구에 거주한다. 뉴욕은 아주 현격한 차이로 미국 메트로폴리탄 지역 가운데 1인당 가솔린 소비량이 가장 적은 도시이다.
캘리포니아 해안지대에서 활동하는 환경보호 운동가들은 그들이 사는 지역은 더 쾌적하게 만들었을지 몰라도 온화한 기후와 대중교통 접근성이 좋은 버클리 교외 지역으로부터 자동차와 에어컨들로 가득 찬 라스베이거스 교외 지역으로 신축 건물을 몰아냄으로써 환경을 파괴하고 있다. 도시 패턴들이 훨씬 덜 정형화되고 환경보호 운동가들 숫자가 훨씬 더 많은 개발도상국가들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
인도와 중국이 점점 더 부유해지면서 그곳 사람들은 전 세계 사람들의 삶에 극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선택에 직면할 것이다. 그들이 미국을 따라서 자동차 위주의 준교외 지역으로 움직일까, 아니면 훨씬 더 친환경적인 복잡한 도시 속에 계속 머물러 살까?
(26-37쪽)
좋은 환경보호 운동은 생태학적으로 가장 적은 해를 입힐 공간에 건물을 짓는 것을 의미한다. 도시에서 높은 건물들을 짓기 위해 낮은 건물들을 철거하는 것을 용납하되, 탄소배출을 줄이는 도시 성장에 반대하는 환경보호 운동가들을 더욱더 용납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다.
환경보호 운동이 나무들 주위에서 살자는 것이고 도시인들은 항상 도시의 물리적 과거를 보존하기 위해 싸워야 한다는 관점을 배격해야 한다. 고층 아파트보다 교외 규격형 주택을 선호하는 주택소유이 우상화 활동과 함께 시골 마을을 낭만적으로 묘사하는 짓을 중단해야 한다.
(38쪽)
숲속 생활이 자연 사랑을 보여주는 좋은 방법이 될지도 모르지만 콘크리트 정글 속에 사는 것이 사실은 훨씬 더 친환경적이다. 1970년대에 제인 제이콥스는 우리가 고층 건물에 함께 모여살면서 도보로 출퇴근하면 환경에 가하는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데이비드 오언은 이 주장에 대해 저서 <그린 메트로폴리스>를 통해 설득력 있게 옹호했다. 녹지에 둘러싸여 살자고 주장하면 환경에 주는 피해를 극대화하게 된다. 저밀도 지역은 결국 더 많은 이동을 요구하고, 교외 주택들은 훨씬 더 많은 에너지를 소비한다.
콘크리트에 대한 반감을 버려야한다. 오늘날 친환경적인 가정에서는 냉엄한 도시가 아름다운 숲을 망가뜨리고 환경을 오염시키는 모습을 그린 동화 <로랙스>를 읽어주며 아이들을 키운다. 진정한 환경보호주의자들은 이 책을 재활용 쓰레기통에 버려야 한다. 윌리엄 르 바론 제니와 A.E.레트코프 같은 고층건물의 선구자들이 헨리 데이비드 소로보다 더 푸른 미래로 인도하는 좋은 안내원들이다.
(356-357쪽)
켄 리빙스턴의 혼잡통행료는 사람들이 운전을 하지 못하게 만들 때 동원된 돈의 힘을 보여주었다. 다른 도시들에서도 이런 정책을 시행할 수 있다. 탄소배출로 환경에 피해를 입힌 사람들에게 비용을 청구하는 국제 탄소배출세를 도입할 수도 있다.
큰 정부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이런 종류의 정책을 두고 정부의 세수만 늘려주는 것 아니냐고 걱정하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그런 걱정은 알래스카주처럼 에너지 배당금 형식으로 시민들에게 환급하겠다는 대중적 약속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
(389쪽)
방갈로르를 기술도시로 만든 마이소르 마하라자들 얘기는 재미있었다.
마이소르는 오래 전부터 신기술을 포용하는 전통을 갖고 있었다. 18세기에 마이소르의 술탄은 수입 선원들이 조종하는 수입 대포들을 이용해 영국에 무시무시한 패배를 안겨준 적 있다. 영국의 인도 통치 기간 내내 마이소르는 내재적 역량을 통해서 웅장한 주들 중에 두각을 나타냈다. 특히 그곳 지도자들 중에서도 가장 똑똑했던 사람은 20세기 초에 마이소르 총리를 지냈으며 'MV경'이라는 약칭으로 불리기도 했던 모크샤군담 비스베스바라야 경이었다.
엄청나게 부유하고 놀라울 정도로 진보적인 마하라자와 함께 MV경은 댐, 수력전기, 제강공장, 그리고 무엇보다도 학교를 포함한 전반적인 근대화 프로그램을 추진했다. 그는 마이소르 대학과 방갈로르 공과대학을 세웠는데, 현재 후자에는 그의 이름이 달려 있다.
20세기 중엽이 되자 마이소르는 완전히 산업화됐다. 그곳의 친기업 성향 정부는 방갈로르에 힌두스탄 항공우주사, 힌두스탄 머신툴스(기계장비 제조회사), 바랏 헤비 일렉트리컬스(전기회사), 인디언 텔레폰 인더스트리즈 등을 끌고 왔다. 정부는 또 나중에 인포시스를 데리고 오게 되는 독일 점화플러그 제조업체를 끌고 왔다. 나아가 1976년부터 방갈로르는 도로, 전기와 함께 세계적 IT 기업들을 유치하기 위한 공공시설 개선을 목표로 광범위한 프로그램을 출범하면서 IT 분야의 우위를 점하기 위한 토대를 닦았다.
(62-63쪽)
늘 각광받는 빌바오. 이 부분은 정말 궁금하다.
도시 재건을 위한 값비싼 노력들은 종종 쇠퇴하는 지역에 살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보다는 잘 연결돼 있는 기업들에 더 많은 혜택을 준다. 낙후된 이웃에 도서관을 지으면 부동산 가치가 올라가고 예술 애호가들의 방문이 줄을 잇겠지만, 예술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아파트 월세를 더 내야 하는 세입자들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빌바오의 구겐하임 미술관이 성공하자 문화시설들이 성공적인 도시부활 전략이 될 수 있다는 시각이 더욱 힘을 얻었다. 프랭크 게리가 설계한 이 건물을 보기 위해 관광객들이 몰렸다. 1994년 빌바오를 찾은 관광객 수는 140만 명에 불과했지만 2005년에는 380만 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회의적인 시선을 던지는 사람들도 있다. 한 연구결과는 미술관 때문에 생긴 신규 일자리 수는 900개 정도에 불과하며 미술관 프로젝트로 바스크 재정은 2억4000만 달러 감소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빌바오로부터 교훈을 이끌어낼 때 이보다 더 큰 문제는 그곳의 경험이 표준과는 거리가 멀다는 데 있다. (130쪽)
그 다음, 내가 가봤던 쇠락한 두 도시.
미국 유럽 별로 가보지도 못했는데 하필 가본 곳이 도시 쇠퇴의 대명사 격인 곳들이라니.
라이프치히는 그곳이 추진했던 문화적 전략보다는 도시의 쇠퇴를 받아들이고 빈 주택 재고를 줄이는 단호한 정책 때문에 모방의 가치가 있다. 2000년에 라이프치히의 전체 주택 중 20%에 해당하는 6만2500채는 주인을 찾지 못했다. 시 정부는 마침내 빈집들이 결코 주인을 찾지 못할 것이며, 빈집들을 철거한 후 생긴 공간을 녹지 공간으로 대체하는 것이 더 합리적임을 인정했다. 빈집들을 철거하면 도시 서비스비용이 감소하고 안전 위험이 사라지며, 흉물스럽게 썩어가는 공간을 유용한 공간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 라이프치히는 빈집 2만 채를 철거하기로 목표를 세웠다.
1970년과 비교해서 인구가 절반 이상 감소한 오하이오주 영스타운 역시 이처럼 '위대한 파괴'라는 비전을 받아들였다. 2005년 선출된 영스타운 시장은 즉시 버려진 주택 철거 예산을 배정했다. 공원, 개방공간, 그리고 대형 주차장들이 과거 인구밀집 지역들을 대체할 것이다. 이런 전략을 쓰더라도 영스타운의 인구가 다시 늘어나지는 않겠지만 도시를 더 매력적이고, 덜 위험하고, 더 저렴하게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들 것이다. (131쪽)
마침내 디트로이트는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으며 빈집들을 보다 합리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시장을 찾아냈다. 그의 이름은 데이비드 빙이다. 빙 시장은 건물 수가 줄어들더라도 사람들을 잘 보살피면 디트로이트는 위대한 도시로 도약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기획자들은 현실적이 되어 엄청난 성공보다는 적당한 성공을 기대해야 한다. 현실적으로는 엄청난 돈이 드는 도박에 도시의 미래를 걸기보다는 소규모의 합리적 프로젝트들을 추진하는 것이 맞다. 생활편의시설에 대한 이런 투자의 실질적인 성과는 관광객 숫자가 얼마나 늘었느냐가 아니라, 세계경제와 연결됐을 경우에 진정 도시를 부활시킬 수 있는 숙련된 거주민들을 데려올 수 있느냐로 가늠된다.
쇠퇴하는 산업도시들은 거대한 공장과 중공업이 가져왔던 저주 받은 전설에서 벗어나야 한다. 소규모 창업과 상거래 장소로 출발했던 때로 되돌아가야 한다. 교육에 투자하고 적절한 세금과 규정을 통해 핵심 공공서비스를 유지하는 것 외에 이런 과정을 빨리 추진하기 위해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132쪽)
라이프치히는 많이 들어본 유럽의 유명한 도시였는데 생각보다 너무 쇠락해서 깜짝 놀랐을 정도였다. 영스타운은 정말이지... 쇠락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던 곳. 교외 쪽에 지나가다가 2층 집이 거의 버려지다시피 한 걸 보고 얼마냐고 물었더니 2000만원 정도? 하지만 아무리 집을 싸게 산들, 할 일이 없는데 거기서 어떻게 사냐고.
위 사진에서 서서 이야기하는 사람이 이 책의 저자가 칭찬한 영스타운 시장 제이 윌리엄스(2005-2011 재임). 2008년 영스타운 갔을 때 찍은 사진. 스마트하다는 느낌을 받았었는데, 지금 찾아보니 당시의 경험을 바탕으로 쇠락지역 살리기 임무의 전문성을 인정받아 경제개발청(EDA) 부청장을 지냈네.
도시에 존재하는 가난은 도시의 약점이 아니라 강점을 드러내준다. 메가시티의 성장을 제한할 경우 얻는 것보다 더 심각할 정도로 많은 고초를 떠안게 될 것이다. 또한 도시의 성장은 시골의 가난을 줄이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사회 전체 차원에서 봤을 때 평등해 보이는 교외 지역은 그곳의 즐거움을 누릴 능력이 안 되는 사람들에게는 많은 면에서 불평등한 도시 세계보다 더 문제이다.
사람들을 가난하게 만들어서가 아니라, 인생이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를 가진 가난한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때문에 도시는 가난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도시 슬럼화의 가장 큰 문제는 도시에 사는 사람들 수가 너무 많다는 것이 아니라 도시 거주민들이 메트로폴리스의 경제 중심으로부터 단절되는 경우가 너무 잦다는 것이다. 도시가 수백만 명의 가난한 시골 사람들을 추가로 수용할 수 있는 세계를 꿈꾸는 것이, 그런 잠재적 이주자들이 농촌에서 고립된 상태로 살다가 최후를 맞기를 바라는 것보다 훨씬 낫다.
(138-139쪽)
우리는 가난이 눈에 잘 안 띄는 장소들을 더 걱정해야 한다. 무슨 이유로 그런 곳들은 불행한 상황의 사람들을 끌어들이지 못하는 것일까?
런던은 돈을 운용하기에 좋은 장소이기 때문에 많은 은행원들이 그곳에서 활동한다. 리우데자네이루 같은 도시들은 가난하게 살기에 비교적 좋은 장소이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로 북적댄다. 돈 한 푼 없더라도 이파네마 해변을 즐기면서 살 수는 있다. 어떤 지역에 가난한 사람들이 없다는 것은 그곳에 적정한 가격의 주택이나 대중교통이나 비숙련공들을 위한 일자리 같은 뭔가 중요한 것이 결핍돼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신호다.
(140쪽)
가난한 사람들이 모이지 못하는 곳을 걱정해야 한다는 구절을 읽으며 떠오른 곳은 세종시.
도시는 상처를 줄지도 모르지만, 지구의 다른 곳들과 연결돼 있음으로써 생길 수 있는 더 부유하고 건강하고 밝은 인생을 살 기회도 준다. 특히 도시는 국가들이 글로벌 경제에 참가하는 데 필요한 지식을 전달해줄 수 있다.
새로운 이주자들의 유입으로 도로와 물의 질이 떨어지긴 하지만, 새로 온 사람들은 사실상 아무런 인프라가 없던 곳에서 살다가 이제는 훌륭한 교통과 공공시설을 이용할 수 있게 됨으로써 많은 이점을 누리게 된다. 사람들이 그런 인프라를 누리지 못하게 막음으로써 도시 인프라의 질을 높게 유지하겠다는 생각은 옳지 않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수혜가 돌아갈 수 있도록 도시 인프라에 대한 투자를 늘려나가는 것이 더 윤리적이며, 경제적 차원에서 봤을 때도 국가 전체에 더 많은 혜택을 준다.
(147쪽)
저자는 도시가 주는 기회를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공평하게 누리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도시 자체만이 아닌 개발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마음에 든다. 도시를 '가난을 막는 최대의 시스템'이라고 보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의 삶이 나아지도록 돕는 것이야말로 도시의 최대 기능이며, 그걸 못하는 것이 도시의 실패라고.
"할렘 르네상스가 시작되자 랭스턴 휴즈, 조라 닐 허스톤 같은 작가들과 엘라 피츠제럴드와 빌리 홀리데이 같은 가수들이 어지러울 정도로 많이 뉴욕으로 몰려왔다. 도시의 높은 인구밀도는 이런 유명인사들을 비롯해 수백만 명에 달하는 무명의 흑인들의 경제적 지위 상승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이러한 역사는 장소가 그곳의 가난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의 신분 상승을 도와준 과거 이력에 따라 판단돼야 한다는 걸 암시한다. 어떤 도시가 불행한 사람들을 지속적으로 받아들여 그들의 성공을 돕고, 그들이 떠나는 것을 감시하고, 사회적 혜택을 받지 못한 불행한 이민자들을 끌어들인다면 그 도시는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기능 중 하나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157쪽)
그런 면에서 봤을 때 한국과 세계의 도시들 혹은 도시 내 일부 구역들이 가난한 이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만들고 있는 장치들은 도시의 존재 이유를 없애버리는 짓.
낡은 단층 건물을 40층짜리 건물로 대체하지 않고 그대로 지킨다고 해서 구매력이 보존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신축 건물에 반대하는 것은 인기 지역 건물을 구매할 수 없게 만드는 확실한 방법이다. 주택 공급이 늘어날 경우 가격이 낮아지는 반면에 부동산 공급을 제한할 경우 가격은 상승한다.
고도 제한과 고정된 건물 재고량이 아니라 성장이 도시 공간의 구매력을 유지한다. 또한 성장은 더 가난한 사람들과 더 수익을 못 내는 기업들이 머물 수 있게 만들어 도시들이 계속 번성하고 다양성을 유지하게 도와준다. 고도 제한은 일조권을 늘려주고 보존은 역사를 보호해주지만 이런 혜택들이 마치 대가 없이 주어지는 척해서는 안 된다.
(270쪽)
도시들의 성공이 지역위원회와 건물보존위원회 등이 내리는 난해한 결정들에 좌우되는 경향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 복잡한 지금의 건축제한 규제들은 세 가지 간단한 규칙으로 대체하고 싶다.
첫째, 오랜 시간이 걸리는 불확실한 허가 과정을 단순한 요금제로 대체해야 한다. 고층 건물이 일조권이나 조망권을 침해한다면 사회 비용의 합리적인 추정근거를 마련해 건설업자에게 적절히 징수하면 된다. 이 돈 중에서 일부는 도시 재정으로 귀속시키고 나머지는 신축 건물이 지어지는 블록 내에 사는 사람들에게 주면 된다. 추가 건물 건립을 허용하는 것이 건설업자들에게 뜻밖의 횡재가 돼서는 안 된다.
둘째,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건물의 보존은 제한되고 잘 정의돼야 한다. 끝으로 개별 지역들이 그들만의 특성을 지키기 위해 갖는 힘은 명확하게 설명될 수 있어야 한다.
위대한 도시들은 정적이지 않다. 부단히 변화하며 세계를 변화의 길로 인도한다. 낡았건 새롭건 간에 세계 다수의 도시들은 인구밀도가 더 높은 건물 건축을 제한하는 규정을 만들어왔다. 어떤 경우 이런 규정들은 무개념의 님비주의 내지는 도시의 성장을 방해하려는 잘못된 시도에 불과할 수도 있다.
(292-293쪽)
'딸기네 책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랍 청년에게 혁명이란...살림 하다드의 '구아파' (0) | 2019.09.22 |
---|---|
조지프 스티글리츠, '거대한 불평등' (0) | 2019.08.29 |
장 지글러, '유엔을 말하다' (0) | 2019.06.14 |
폴 긴스버그, '이탈리아 현대사' (0) | 2019.04.24 |
모리스 마이스너,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0) | 2019.03.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