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현대사를 연구한 학자 중에 꽤나 많이 인용되는 폴 긴스버그의 <이탈리아 현대사>(안준범 옮김. 후마니타스)를 읽었다. 600쪽이 좀 넘고, 뒷부분에 지도와 참고자료가 잔뜩 붙어 있으니 결코 가볍지 않은 책이다.
이탈리아에 대해 내가 갖고 있는 기본적인 의문은 '도대체 이 나라에선 100년 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였다. 마르코가 엄마를 찾아 나서게 만든 이민의 행렬, '백인'으로도 분류되지 못했던 미국의 이탈리아인들, 낙후된 농촌 사람들과 마피아, 스페인 내전 때 기차를 타고 우르르 공화국을 지키겠다고 찾아갔던 의용병들, 무솔리니와 파시즘, 돈 까밀로와 빼뽀네, 패션산업과 백색가전, 베를루스코니와 붕가붕가. 그밖에 내게 이탈리아의 이미지를 그려준 것들이 있다면 어릴 적 동화집에 나왔던 '롬바르디아의 소년 척후병', 이그나치오 실로네의 '빵과 포도주' 같은 것들이다. 좌우의 극한 대립, 왕정과 공화정, 남부와 북부, 바티칸과 공산당, 이런 것들이 몽땅 뒤죽박죽 섞인 것처럼 보이는 나라.
책은 1943년부터 1988년까지 이탈리아에서 벌어진 일들을 정치사 중심으로 소개한다. 굳이 '정치사'라고 한 건 공산당 사회당 등 좌파와 기독교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우파 세력의 대립과 타협을 가장 큰 축으로 삼아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정치세력들이 어떤 생각을 가졌으며 그것이 정책으로서 어떻게 나타났는가가 책의 큰 줄거리다. 그 사이사이, 그들을 특정한 행위로 나아가게 한 노동계급과 농민들의 움직임이 들어가 있다.
파시즘과 공산주의가 뒤섞인 복잡한 정치적 환경 속에서 좌우의 정치진영이 만들어졌고, 노동자들의 투쟁이 사회의 저변에서 무시 못할 힘을 형성했다. 하지만 소상공인들 중심의 구조에 토리노의 피아트가 대자본으로서 너무나 막강한 권한을 갖는 상황에서, 그리고 소련 사회주의의 외피 혹은 압박 속에서, 좌파는 언제나 한계에 부딪쳤고 결과는 늘 '타협'이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농촌 지역은 낙후된 채로 오랜 시간 소외를 당했고, 전후 고도성장 기간에 이농과 사회변형이 일어났고, 위기와 행동과 타협의 순환이 이어졌다. 경제는 발전했으나 사회는 혼란스럽고 정치는 불안정한 이탈리아. 책은 1980년대 말까지만을 다루고 있지만, 현재를 들여다보는 데에도 아주 기본적이고 충실한 길잡이가 된다.
어떤 나라 혹은 지역을 이해하는 건 참 어렵다. 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조차 해석하기 힘들고 온갖 분석이 난무하는 판에. 한번 가보지도 않은 외부자가 머나먼 곳에서 벌어진 일들을 알기는 더더욱 어렵다. 층층이 쌓인 사회구조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책이 효과적일 때도 있지만, 기본지식을 쌓으려고 할 때엔 이렇게 '교과서적인' 책이 참 많이 도움이 된다.
번역은 훌륭하고, 책 만듦새야 뭐 말할 나위가 없다. 후마니타스의 윤상훈 편집자를 만나 "책 너무 잘 만들었다"고 했더니 살짝 웃었다(이분은 원래 살짝 웃는다).
레지스탕스
통일된 국가의 역사 전체에서 가장 어두웠던 순간에, 남과 북에서 침략을 받던 반도에, 비록 아주 제한적이기는 했지만 소수의 이탈리아인들 사이에서 새로운 정신이 태어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언은 많다. 그리스의 케팔로니아 섬에 주둔하던 이탈리아 수비대원 1만여 명은 전체 투표를 통해 독일에 투항하기를 거부했다. 그들 가운데 9600명이 목숨을 잃었다. 주요 도시들에서 조직적인 대독항쟁은 없었지만, 이 기회를 이용해 장차 다가올 길고 고단한 전투를 준비하려는 개인들이 고립된 채로나마 존재했다. (26쪽)
1943년 9월 중순에 이탈리아는 둘로 쪼개졌다. 나폴리 남부에는 연합군과 이탈리아 국왕이 있었고, 이들은 마침내 10월 30일 독일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독일은 감옥에 있던 무솔리니를 구출해 독일로 데려갔다. 그는 곧 북부 괴뢰 공화국의 수장으로 되돌아왔다. 이 공화국은 가르다호 서쪽 기슭에 있는 작은 휴양지 살로에 수도를 정했다. 나이 들고 기가 꺾인 무솔리니는 이제 독일의 얼굴마담에 불과했다. 독일이 명령을 내렸고, 첫 명령은 이탈리아의 유대인들을 닥치는 대로 체포해 절멸 수용소로 추방하라는 것이었다.
... 귀도 콰차는 이탈리아의 반파시즘을 세 부류로 나눴다. 우선 전통적인 조직적 반파시즘 세력이 있다. 두번째 부류는 파시즘 치하에서 자라났지만 무솔리니가 축출된 7월 25일 이후에 새로운 삶이, 아니 삶 그 자체가 시작됐다고 느꼈던 많은 청년들의 자생적인 반응으로 나왔다. 세 번째 부류는 파시스트들 사이의 반파시즘으로, 이들은 항상 정권을 지지했지만 이제는 가라앉는 배를 버리는 게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첫 번째 부류인 조직화된 정치적 반파시즘 세력을 지배한 것은 공산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의 지도자 여럿, 그람시, 움베르토 테라치니, 잔 카를로 파제타 등은 파시스트 특별 법정에서 장기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일부는 그람시처럼 이런 시련에서 살아남지 못했다. 하지만 당은 조직의 외형을 이어갔으며 가장 중요한 공장들에서 세포를 유지했고, 스페인 내전에서 공화국을 위해 싸웠던 3천 명 이상의 이탈리아인들 중 절대다수가 이 당에서 배출되었다. (27쪽)
1943년 말에는 약 9천 명의 빨치산이 있었다. 사상자 비율이 매우 높았는데 왜냐하면 대개 퇴역 장교들이 지도한 많은 부대들이 재앙으로 끝나 버린 회전을 펼치는 오류를 범했기 때문이다. 빨치산과 동조자들은 나치에 의해, 그리고 살로 공화국의 파시스트 무장단체인 블랙셔츠 부대에 의해 지독히도 잔혹한 공격을 받았다. 1943년 9월 독일은 민간인을 상대로 처음으로 학살을 자행했는데, 피에몬테의 보베스 마을을 잿더미로 만들고 주민들을 산 채로 태워죽였다. 이런 보복에도 불구하고 빨치산 운동은 1944년 봄에 2만~3만 명 규모로 성장했다. (30쪽)
1945년 5월 1일이 됐을 때 북부 이탈리아 전체가 자유였다. 해방이 봉기를 통해 민중적으로 이뤄졌다는 특성은 그 과정에 참여한 이들에게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겼고, 대부분의 집단이 그 해방을 환영했다. 물론 끔찍한 보복이 이어져 해방 직후에는 무려 1만2000~1만5000명이나 총탄에 목숨을 잃었다. (104쪽)
[연합군에게] 이탈리아인들의 독립적인 활동은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공산당은 이 단계에서 연합국과 대치한다는 위험 부담을 감당할 준비가 전혀 돼 있지 않았다. ...
레지스탕스는 결코 연합군 앞에서 굴종하지 않았으나 기본적으로 종속적이었다. 연합군의 연락관들은 빨치산 부대들의 무장을 최대한 신속하게 해제했다.
연합군은 민족해방위원회를 대안적 권력자원으로 건설하려는 그 어떤 시도에도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동시에 경제적 조건이 열악해 북부 노동계급이 거리로 나가 저항하는 일이 없도록 하려고 노력했다. 연합군은 모든 해고에 즉각적으로 거부권을 행사하는 데 동의했다. (105-107쪽)
이탈리아 레지스탕스 수는 적극적 활동가 10만여 명과 동조자 수천 명에 달했다. 그 중 3만5천명이 죽고 2만1천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9천명이 독일로 추방당하는 등 정규전에서보다 사상자 수는 더 많았다.
무솔리니 정권을 받아들이고 지지했다는 이유로 많은 이들이 이탈리아인들을 경멸하고 신뢰하지 않던 시기에, 빨치산들은 이탈리아의 손상된 이미지를 구원하고 이탈리아인들에게 새로운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더욱이 그들은 오래 지속된 반파시즘 전통을 창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렇지만 빨치산의 투쟁목표는 상당 부분 실현되지 않은 채로 남았다. (107-108쪽)
1940년대 초 이탈리아 사회
파업은 공업 삼각지대를 넘어 베네토주의 직물공장들과, 중부 도시들인 볼로냐와 피렌체에까지 확산됐다. 여성들과 저임금 노동자들이 투쟁의 선두에 있었다.
추축국이 패배를 앞두고 있다는 것이 점점 더 분명해지자 주요 자본가들은 전후 상황에 대비할 계획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그중에서 피아트 회장 조반니 아녤리와 경영자 비토리오 발레타의 행위가 가장 간교했다. 1944년 4월에 피아트의 부회장은 이탈리아의 지리적 입지와 낮은 노동비용이 미국에 "흥미로운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을 앨런 덜레스에게 전하라는 위험한 사명을 띠고 알프스를 넘었다. 피아트는 독일의 생산의뢰서를 연합군에게 넘겼고, 어느 수준의 생산을 허용할지를 연합군과 비밀리에 합의했다.
1956년, 비토리오 발레티(맨 오른쪽)와 잔니(조반니) 아녤리. www.lastampa.it
동시에 발레타는 독일과 파시스트들을 자극하지 않으려 주의를 기울였고, 자기 공장들에 있는 반파시즘 활동가들을 구하려 들지도 않았다. 1945년 4월에 빨치산들이 부역행위 혐의로 발레타를 체포하러 갔을 때, 저택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영국군 장교였다. 그는 발레타를 대신해 안전통행증을 보여주었다. (39-40쪽)
마피아라는 용어는 1865년 공문서에 처음 나왔다. 마피아는 불신이 만연할 때 보증을 제공하거나, 좀 더 일반적으로는 보호를 제공하는 행동대이다. 시칠리아에서 마피아는 결코 단일 조직이 아니었다. 서로 불안정한 균형을 이루며 살아가는 경쟁적인 집단들, 즉 '패밀리들'이었다. 그들이 제공한 서비스는 이런저런 독점들을 폭력으로 유지시켜주는 것이었다.
마피아와,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마피아에 상응하는 칼라브리아의 은드라게타는 중간계급이 활력을 보이는 농촌 지역에서 융성하는 경향을 보였다. 농촌의 이 체티메디에게, 마피오소[마피아 단원]가 된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길이기는 하지만 지위와 권세와 부를 얻는 길이었다. 더욱이 마피아와 은다라게타가 제공하는 서비스는 외부의 개입에 직면해 현지의 충성심을 창출하는 경향이 있었다. 마피아는 강도에, 농촌 절도에, 경쟁 마을의 주민에, 무엇보다도 자기들 자신에 대처하는 보호를 제공했다. (56쪽)
공산주의자들
1944년 3월 이탈리아공산당 지도자 팔미로 톨리아티가 모스크바에서 돌아왔다. 1921년 이탈리아공산당을 창립한 주역인 톨리아티는 파시즘이 발흥한 뒤 러시아로 망명했고 코민테른 부비서가 됐다. 영민하고 신중하며 교양을 갖추고 있으면서 오만한 톨리아티는 남다른 생존능력을 타고난 인물이었다. 스탈린의 충실한 지지자이면서도 톨리아티는 교조와 신앙주의 fidelism로 유명한 국제 공산주의 운동 안에서 창의적이고 전략적인 사고를 하는데 탁월했다. (68쪽)
Togliatti with a copy of L'Unità newspaper, in 1950s. _ WIKIPEDIA
그람시는 '진지전'이 궁극적인 혁명적 권력 장악을 불필요한 일로 만든다고는 하지 않았다. 그가 역설했던 것은 헤게모니를 창출하는 장구한 과정 중에서 '집단적 지식인'인 중앙집중화된 혁명정당이야말로 사회 내부의 반자본주의 세력들을 조직하고 조정하며 지도하는 견인차라는 점이었다.
이런 틀에 대한 톨리아티의 해석은 전적으로 고유한 것이었다. 동맹을 창출함에 있어서 톨리아티가 강조했던 것은 아래로부터 위를 향해 건설되는 동맹인 사회적 동맹뿐만 아니라 위로부터 아래로 가는 정치적 동맹이었는데, 특히 기민당과의 동맹은 그중에서도 가장 논쟁적이고 지난한 동맹이 될 것이었다.
한편에 있는 '독점' 자본주의와 다른 한편에 있는 잠재적으로 '진보적인' 소기업 경영자들을 구별한 것도 전적으로 톨리아티의 시도였다. 또한 그는 시민사회에서뿐만 아니라 국가장치 안에서도 선거주의를 동반한 장정이 필요하다 여기며, 지방정부와 중앙정부에서 권력의 진지들을 점유하는 데 주력했다. 마지막으로 톨리아티는 '진지전'과 '기동전' 사이의 가능한 연계를 모조리 지연시켰고 결국에는 후자가 소실되고 말았다.
톨리아티는 무엇보다 공산당을 소규모 전위 집단에서 시민사회 안의 대중정당으로 변혁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톨리아티가 새로운 당을 위해 선택한 위계적이고 비민주적인 구조를 과연 그람시라면 동의했을지. 하지만 톨리아티가 명확함과 역동성을 가지고 이탈리아 사회 안에서 대중적인 공산당 정치문화를 건설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탈리아공산당은 모든 극단주의적 유혹을 피했고, 노동계급을 불가능한 혁명으로 이끌지 않았다. (72-73쪽)
데가스페리와 기민당
1945-47년에 중앙행정부를 개혁하려는 시도는 전혀 없었다. 이 시기 내내 톨리아티가 법무장관이었음에도 사법부의 구조와 구성, 충원방식을 변경하려는 조치는 없었다. 숙정위원회의 초반 활동은 최악을 섞어버렸으니, 다수의 주도적인 파시스트들은 건드리지 않은 채로 파시즘 평당원들만 죄인 취급하는 경향을 보였다. 숙정을 면한 사법부는 되도록 많은 소송을 기각시켰다. 주도적인 파시스트들이 터무니없는 근거로 무죄 선고를 받았다. 1946년 6월 톨리아티는 숙정이 끝났음을 알리는 사면 작업을 기초했다. 심지어 고문을 자행한 파시스트들도 재판을 면했다.
이 시절 막바지에 기민당 장관들이 민족봉기 직후 행정부에 들어온 빨치산과 반파시스트를 상대로 벌인 숙정만이 실효성을 지녔다. 기민당 지도자 알치데 데가스페리는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북부이탈리아민족해방위원회가 임명한 지사들을 자신이 선택한 경력직 공무원들로 교체했다. 그리고 1947-48년 기민당 내무장관 마리오 셸바는 1945년 4월에 들어온 상당수의 빨치산을 경찰에서 숙정했다. (137-138쪽)
1947년 2월에 서명된 평화조약의 세부내용은 데가스페리의 명성에 심각한 타격을 줬다. 이탈리아는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획득한 식민지를 비롯해 모든 식민지를 잃게 됐다. 총 배상금 3억6천만 리라를 러시아, 그리스, 유고슬라비아, 알바니아, 에티오피아에 지불하게 됐다. 특히 이스트리아 반도 대부분이 유고에 돌아갔음에도, 트리에스테마저 이탈리아 영토로 남는 것이 아니라 국제 감시하의 자유영토가 돼버린 끔찍한 상황이었다. (163쪽)
데가스페리는 교회 상층부가 정부 안에 좌파가 들어와 있는 것을 목도하면서 기민당을 버리기 시작했다고 의심했다.
라테란 협정은 3월 24일에 이미 승인됐다. 이제 단절의 때가 왔다. 그를 고무한 것은 국제적 차원에서 발생한 두 사건이었다. 하나는 5월 9일에 전후 최초로 프랑스가 공산당을 정부에서 성공적으로 축출한 것이다. 또 하나는 미국 대외정책의 급속한 진화였다. 이제 미국은 이탈리아 상황에 관해 반공주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이탈리아 군대에 염가로 무기를 판매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5월 1일에 미 국무장관 조지 마셜은 로마 주재 미국 대사 제임스 던에게 서한을 보내, 10월 총선의 위험을 예상하면서 데가스페리가 공산당을 빼고 통치할 것을 요구했다. (164쪽)
De Gasperi addressed the crowd in Bologna, 1951 _ WIKIPEDIA
5월 1일 팔레르모현의 농민들이 노동절을 기념하며 포르텔라 델레 지네스트레에 모였다. 제화공 자코모 스키로가 연설을 시작했다. 갑자기 주변 언덕 위에서 경기관총이 군중을 향해 발사됐다. 마피아의 공격으로 11명이 죽고 65명이 부상당했다. 이 일 뒤 5월 13일 데가스페리가 사임했다. 그러나 새 정부 구성 임무는 결국 데가스페리에게 돌아갔고, 그는 의회에서 모든 우파 정당의 지지를 받아 중도 정부를 구성하겠노라고 발표했다. 결정적인 신임투표가 1947년 5월 31일에 있었다. 274표 대 231표로 제헌의회는 반파시즘 연정의 종언을 확인했다. (165쪽)
1948년 총선과 미국의 개입
미국의 개입은 규모와 기발함, 그리고 다른 나라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면에서 경악스러웠다. 미국 정부는 1948년의 첫 3개월 이내에 이탈리아에 1억7600만 달러의 '잠정원조'를 결정했다. 그 이후 마셜플랜이 전면화됐다.
제임스 던 대사는 식량과 약품 등을 실은 1백번째 배가 도착할 때마다 특별한 축하행사를 열었다. 도착 항구는 매번 달랐고 던의 연설은 매번 노골적으로 정치적이었다. 다리나 학교나 병원이 미국의 원조로 새로 지어질 때마다 대사는 지치지도 않고 반도를 종횡하며 미국과 자유세계의 이름으로, 그 이름 안에 기민당을 암시하며 연설했다. 종종 항구에 풀지 않은 재화를 '우정의 기차'에 실어 해당 역마다 정해진 행사를 하고 나눠줬다. 1948년 3월 20일에 조지 마셜은 공산당이 승리하는 일이 생긴다면 이탈리아 원조는 모두 즉각 중단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물질적 원조에 수반된 것은 트리에스테의 미래라는 결정적 질문에 관한 적시 개입이었다. 총선 한 달 전에 미국과 영국과 프랑스는 그 도시가 다시 이탈리아의 통치를 받게 되리라고 약속했다.
미국 내의 압도적으로 보수적인 대규모 이탈리아계 미국인 사회가 기민당에 유리한 각종 선전을 고안해냈다. 할리우드 스타들은 지지 메시지를 녹음했고, 집회가 열렸고, 선거운동을 하는 동안 100만 통이 넘는 편지들이 이탈리아로 발송됐다.
다른 개입이 다 실패하는 경우에 남는 것은 군사적 개입이었다. 미국 정부는 인민전선이 승리하는 경우에 대비해 다양한 행동계획을 검토했다. 트루먼은 좌파의 통일이 깨지도록 사회당 측을 회유하고자 했다. 이것이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비밀 조직들의 자금과 무기를 원조해 반공 봉기를 권장하고 시칠리아와 사르데냐는 군사적으로 직접 점령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미국은 지중해 함대를 증강했고, 총선 전 몇 주 동안은 미군 군함이 이탈리아 주요 항구에 정박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가 줄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프라하의 공산당 쿠데타는 이탈리아 총선에서 좌파가 승리할 수 있는 기회를 아주 망쳐놨다. 기민당은 국내에서 로마 가톨릭교회의 맹렬한 전방위적 개입 덕도 톡톡히 보았다. (170-172쪽)
기민당과 국가
이탈리아 관료제의 역사는 법률과 법규와 회람과 내부 지령의 공표를 통해 행정부 활동을 세세하게 규제한 역사이다. 그런 체계의 의도는 관료제의 자의적 권력에 맞서 시민을 보호하려는 것이었으나 실제 귀결은 10만 여개의 법률과 지령이 행정부 활동을 규제하면서 빚어진 혼란과 상명하복의 공무원 조직이었다.
...세번째 특징은 공무원 조직이 곧 후견주의의 온상이 되었다는 점이다. 20세기로 접어들 무렵까지도 공무원 조직은 북부, 특히 피에몬테 출신들에 장악돼 있었다. (213-214쪽)
마지막 특징은 '병렬 관청' 현상이다. 20세기 벽두부터 각료 휘하의 전통적인 관료 부서가 아닌 특수 공공기관(엔티 푸블리치)을 세우는 관행이 자리잡았다. 통합적인 구조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련의 독립적인 기관들이 커졌고, 이런 기관들은 국가 안에 자신들만의 권력 지대를 별도로 만들겠다는 욕망이 컸다. 파시즘 시기에 이런 특수기관들이 두드러지게 성장했다. 1922년부터 1940년 사이에 260개 기관이 창립되었다. (215-216쪽)
[이런 기관들 중 일부는] 엔티 이누틸리(무용한 기관)라고 알려졌다. 이들의 활동은 왕왕 중복됐고 사소한 목적에 국고를 탕진했으며, 그러고도 1943-48년 시기에 멀쩡하게 살아남았다. 유대계 몰수자산 관리기구인 EGELI(자산관리청산청)는 1950년에도 운영되고 있었다. 변경지대 아동을 지원하는 ONAIRC(국립변경지역유아지원사업단)도 운영됐다. 1919년 창립된 이 단체가 파시즘 치하에서 맡았던 임무는 북동부 변경에 사는 독일어 사용 아동과 슬로베니아어 사용 아동의 국적을 박탈하는 것이었다. 의회는 1976년에야 이 단체의 폐지를 가결했는데, 그때까지 이 단체는 국가에서 연간 50억 리라 이상을 수령했다. ONOG(국립전쟁고아지원사업단)는 700명의 고아를 돌보는 데 120명의 직원을 고용했고 1975년에는 10억 리라의 수입을 거뒀다. 이 기금 중 단 20%만이 고아들에게 돌아갔다. (223쪽)
ENI와 기민당 치하의 경제
자본가계급과의 관계에서 데가스페리의 초기 해법은 콘핀두스트리아 의장인 안젤로 코스타와 아주 긴밀하게 협력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데가스페리는 물론, 그를 승계했던 이들도 경제계의 파워 엘리트에게 단순히 복무하는 데 만족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당 자체가 경제적 힘의 주요 보관소가 되게끔 만들려 했다. 카사페르 일 메초조르노와 ENI(국립탄화수소청) 같은 새로운 기관들을 만들고 은행 체계에 대한 국가의 장악력을 높이고, 공영기업의 성장을 장려하는 것 등에 의해서 말이다. 정부가 경제에 개입하는 첫 물결은 1956년 국가자산부 장관직을 새로 만들면서, 그리고 이듬해 IRI(산업재건공사) 산하의 모든 회사들을 콘핀두스트리아에서 빼버리면서 절정에 달했다.
거대 전기기업들은 ENI가 성장함에 따라 위협받았고, 1955년 이들의 입맛에 맞는 알리기에로 데 미켈리가 코스타의 후임으로 콘핀두스트리아 의장이 되었다. 그러나 1950년대 말이면 경제 엘리트와 지배 정당 사이의 힘의 균형이 후자에게 유리한 쪽으로 상당히 옮겨 갔음이 뚜렷했다. (229쪽)
1948년과 1952년 사이에 유럽부흥계획 기금에서 14억 달러 이상이 이탈리아로 갔는데 이는 유럽에 지원된 총 기금의 약 11%였다.
프로그램 첫해에 곡물과 석탄 수입이 아주 두드러졌고 석유산업 역시 특혜를 받았으며 1950년까지 대충기금은 주로 이탈리아중앙은행의 지급준비금을 늘리고 통화 안정성을 유지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 뒤에는 두 가지 상이한 방향이 압도적이었다. 하나는 국영 산업과 민간 산업을 위한 기계류 구매에 사용하는 기금이 늘어난 것이었다. 주요 수혜자들 중에는 피아트, 핀시데르(IRI의 철강회사), 에디손 열전기 회사들이 있었다.
다른 하나는 남부를 대상으로 기금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카사 페르 일 메초조르노와 농업개혁청이 주요 수령자가 되었다. 마셜원조 지출 유형은 부분적으로만 미국의 지시에 부응했고, 무엇보다도 이탈리아 정재계 엘리트 내부의 상이한 이해관계와 여론의 조합에 상응하는 것이었다.
미국은 모든 서유럽 정부들에게 경제적, 군사적 협력을 지향하라는 압력을 가했지만 데가스페리는 이에 순응하려는 욕망 이상으로 유럽의 정치적 통일을 위해 헌신했다. 로베르 쉬망과 콘라트 아데나워처럼 그는 여러 민족들이 경쟁적으로 영토를 넓히려는 야심이 충돌한 탓에 늘 고통을 겪었던 유럽의 변경지역(트렌티노) 출신이었다. 게다가 초보 정치인으로서 그의 형성에 강한 표식을 남긴 것이 가톨릭 국제주의였다. (223쪽)
Enrico Mattei during a speech. _ WIKIPEDIA
특수기관들의 영역에서 나타난 대혁신은 ENI의 창립이었다. ENI는 엔리코 마테이가 낳고 키운 기관이었다. 그는 15세에 학교를 그만둔 뒤 심부른꾼 일로 시작해 무두 공장 일을 했고 그 뒤 밀라노에서 산업장비 영업 일을 했다. 전쟁이 터지자 화학회사를 차렸고 1943년 이후에는 기민당 빨치산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전후에 마테이는 국영 석유회사 AGIP를 책임지게 됐는데, 이 회사는 파시즘 치하에서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1946년과 1949년에 포 계곡에서 대량의 메탄이 발견되면서 마테이는 회사를 회생시켰다. 마테이는 포 계곡의 천연자원 독점 개발권을 따내려고 민간 기업과 싸웠다. 그가 이겨서 1953년 2월 10일에 ENI가 생겼다.
그 다음 9년 동안 마테이는 국영 부문 내에서 독보적인 산업 제국을 세웠다. ENI는 다섯 개의 주요 사업회사를 통해 당황스러워질만큼 많은 활동들에 손을 뻗쳐 갔으니 석유화학, 아우토스트라다와 모텔, 합성고무, 강철배관, 도급 토건, 섬유, 핵 발전과 연구 등을 망라할 정도였다. 마테이가 고용하고 훈련시킨 기술직들은 얼마나 유능했던지 국제적인 명성이 자자했다. ENI의 활동 덕택에 이탈리아의 얼굴은 변했다. 마테이는 ENI를 사저인 영지처럼 운영했고 후견주의적 관행이 조직 전반에 만연해 있었다. (238-239쪽)
기민당은 무계획적이기는 했어도 여하튼 혁신가들이었다. 그들은 국가의 경제력 및 국가가 시민사회에 개입하는 능력을 키우려고 의식적이고 성공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들은 주로 정부 특수기관들-카사 페르 일 메초조르노, 마테이의 ENI-의 확대된 권한과, 공업 부문에서 인정된 국가자산을 활용했다. 특히 남부에서 후견주의는 이제 지역 명망가가 아니라 국가공무원과 당 고위층의 특권이 되었다.
대부분의 기업가들은 기민당이 노동계급 운동을 박살낸 것을 크게 고마워했다. 남부 토지엘리트들에게도 위안거리가 있었다. 몰수 토지에 대한 정부의 후한 보상 덕분에 남부 도시들의 건축 투기에 성공적으로 투자할 수 있었던 것이다. (267쪽)
남부에서는 공공사업 프로그램과 건설 붐 덕분에 도시 실업자 수만 명에게 일자리가 생겼다. 남부 농촌으로부터의 첫 이주 물결이 이 시기에 일어났으며, 구릉지의 농민들은 지방 중심도시들로 내려와 건설 노동자가 됐다. 이런 새로운 현장에서 노조운동은 허약했고, 친족 관계와 후견주의적 관계가 지배적이었다. 1950년대 내내 기민당은 이런저런 연정을 통해 모든 주요 도시 평의회를 실질적으로 장악했다. (269쪽)
공산당
당원 수가 1954년에는 214만5317명에 달했지만 이 숫자는 사회에서 당이 고립된 현실은 은폐했다. 정치연합은 이미 1947년에 기각됐고 계급동맹은 냉전이 고조되면서 어느 때보다도 벅찬 과제가 되었다. 하지만 공산당은 풍부한 조직 및 활동 네트워크를 발전시켜 당원들을 단결시켰다.
가장 중요한 제도들 당 밖의 제도들 중 하나는 공산당과 사회당이 함께 활동했던 카세 델 포폴로(인민의 집)였다. 이는 특히 중부와 소도시들과 농촌에서 마을공동체 생활의 초점이 되었다. 카세가 입주한 건물들 중 다수는 전쟁 막바지에 파시즘 정당으로부터 몰수했거나 되찾은 자산이었다. 1952년에 재무장관은 이 모든 건물이 정부 자산이라고 결정했고 1953년과 1955년 사이에 다수의 카세 델 포폴로가 폐쇄됐다. (284쪽)
1953년 3월에 스탈린의 사망소식이 전해지자 공산당은 상복을 입었다. 스탈린을 초인적인 아버지 같은 존재로 격상했을뿐더러 당은 소련을 민주주의와 사회정의의 문제들이 해결된 사회처럼 묘사했다. 그렇지만 가장 유해한 요소는 이런 평가가 아니라, 당의 활동과 생활에 퍼져 있던 태도였다. 지도자를 무비판적으로 찬양하는 전통이 이탈리아에서도 손쉽게 받아들여졌다. 당의 역사적 지도자들인 그람시와 톨리아티의 저술들이 마치 성서 구절이나 되는 것처럼 인용됐다.
공산당이 러시아에서 가져온 마지막 요소는 위계적 조직과 내부 민주주의의 결여였다. 권력은 당 사무국 수중에 집중됐다. (288-289쪽)
에밀리아로마냐의 여성 공산당원들을 전국적으로 주목받은 일부 계획들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 에밀리아의 최대 도시인 볼로냐가 공산당 지방정부의 시범이 되었다. 시의회는 1946-56년 아홉 개의 학교, 896동의 아파트, 31개의 유아원을 짓는 데 성공했다. 8000명의 아이들이 보조금이 지원되는 학교 급식을 먹었으며 배수시설과 가로등, 시립 빨래방이 세워졌고 대중교통과 보건서비스가 크게 향상됐다.
이탈리아의 다른 많은 부분들에서 혼돈과 부패가 만연한 것과 대조적으로 볼로냐 시의회는 이 시절 단 한번도 적자를 초래하지 않았으며 능률적이고 설명했다.
자신감을 얻은 공산당 지도부는 사회주의 이행을 실현해가는 구체적인 사례이자 모델이 볼로냐라고 소개했다. 그러나 오힐려 에밀리아의 경험이야말로 자본주의에 따른 효율적이고 인간적인 관리였다. (295-296쪽)
1956년 이후로 좌파에게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 2월 러시아 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흐루쇼프가 했던 보고는 두 부분으로 이뤄졌다. 공개된 부분에는 상이한 나라들이 상이한 수단으로 사회주의에 도달할 가능성에 대한 새롭고 유의미한 준거가 있었다. 하지만 진짜 폭탄은 보고서에서 드러나지 않은 부분이었다.
두번째 부분은 이내 서방언론에 유출됐고, 이탈리아 우파에게 이는 노다지나 다름없었다. '누오비 아르고멘티' 1956년 5~6월호 인터뷰에서 톨리아티는 자신이 얼마나 유능한 사상가이자 전략가인지를 보여줬다. 그는 소비에트 지도자들이 폭로를 했다고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폭로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톨리아티가 원했던 것은 '개인숭배'의 세부사항이 아니라, 스탈린이 저질렀던 일이 어떻게 그리고 왜 사회주의 사회에서 가능했는지를 설득력 있게 설명하는 것이었다. 이는 분명 급진적인 접근이었고, 서구의 다른 공산당 지도자들의 반응을 훌쩍 뛰어넘는 것이었다.
톨리아티는 이 인터뷰에서 그의 유명한 다중심주의 개념을 처음 제시했다. 그는 국제 사회주의 운동이 더는 소련이라는 유일한 중심에 입각하지 않고 다중심적으로 됐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그 인터뷰는 스탈린주의가 스탈린이 저지른 범죄의 합을 훨씬 웃돌며 늙은 표범의 반점이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점 또한 드러냈다. 톨리아티는 소비에트 지도자들이 '우리를' 스탈린에 대한 무비판적 찬양에 '익숙해지도록 했다'고 비난했지만 이는 자신의 책임을 시인하지 않으려는 것이었고 자행된 범죄들을 모른 체하려던 것이었다. 톨리아티는 1930년대에 코민테른의 부비서였고, 적어도 '개인숭배'와 스탈린 독재의 목격자였음이 분명했다.
톨리아티의 인터뷰는 혁신과 도그마를 명민하게 결합시켜 당의 혼란을 진정시키는 데 분명 도움이 됐지만, 평범한 당원들의 불안과 사기 저하를 감추지는 못했다. (297-298쪽)
6월 하순에는 폴란드의 포즈난에서 노동자 봉기가 일어났고 가을에는 러시아가 헝가리 봉기를 무장 진압한 여파로 서유럽 당들에서 수만 명의 투사들이 공산당을 떠났다. 이탈리아공산당 지도자들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러시아의 침략을 지지했다. 평당원들, 특히 당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헝가리에서 일어난 비극을 놓고 격렬한 논쟁이 번져갔다. 12월 이탈리아공산당 제8차 대회 뒤 졸리티, 푸리오 디아츠, 파브리치오 오노프리, 에우제니오 레알레가 출당되거나 은퇴하기로 했다. 대대적인 탈당이 있었으니, 아멘돌라는 1955-57년에 40만 명을 잃었다고 추산했다. 상당수의 지식인들이 당을 떠났는데 이 중에는 저명한 작가인 이탈로 칼비노와 역사가 델리오 칸티모리도 있었다. (300-301쪽)
경제 기적
확실히 전통적 보호주의가 종언을 고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1945년 시점에 경제구조가 유사했던 프랑코의 스페인이 유럽 무역 주류에서 고립돼 있던 데 비해, 이탈리아는 유럽 경제통합의 전면에 있었다. 이탈리아 공업의 기술공학적 수준 및 생산물 다양성은 공동시장의 창출에 긍정적으로 대처하기에 충분했다. 어디에서든 도전에 응할 준비가 된 기업가, 기술자, 디자이너, 숙련 장인이 있었다.
1953년 비토리오 발레타는 피아트 최신 모델을 만들 대규모 생산라인에 집중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2년 뒤 피아트의 신형 자동차 세이첸토가 토리노 시내를 다채로운 색상으로 채우며 누빔으로써 누구나 자동차를 모는 시대가 왔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같은 시기에 ENI와 에디손과 몬테카티니가 벌인 치열한 경쟁은 이탈리아의 석유화학 산업과 합성고무 및 비료 생산에서 대약진이 일어나는 것으로 귀결됐다.
보호주의의 종언은 생산체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고 근대화를 압박했으며 이미 그렇게 움직이던 부문들에는 보상을 주었다. ENI가 발파다나에서 메탄과 탄화수소를 발견한 것과, 마테이가 저렴한 액체 연료[석유]를 수입한 것이 석탄 수입을 대체한 대안을 제공했고 그 덕분에 기업가들은 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다. IRI의 후원 아래 오스카르 시니갈리아가 현대적인 철강업을 역설한 것도 같은 효과를 발휘했다. 시니갈리아의 지도 아래 핀시데르는 승승장구했고, 1950년대 내내 이탈리아 기업가들에게 철강을 매우 저렴하게 제공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경제 기적'은 당시 만연한 값싼 노동 없이는 일어날 수 없었다. 전후에 노조의 힘은 파괴되었고 생산성과 착취를 증진시킬 길이 열렸다. 대외적으로 유럽경제공동체가 내세운 자유무역이라는 신조는 대내적으로 노동현장에서 고용주의 자유와 짝을 이뤘다. (308-309쪽)
가톨릭
1958년 비오12세의 죽음과 안젤로 론칼리가 요한23세로 선출된 일은 의미가 컸다. 1939년 이래 비오12세의 보수적인 치세기 동안 가톨릭교회는 이탈리아 정치와 사회에 부단히 개입했다. 어마어마하게 중앙집권적인 인물이었던 비오12세는 1944년 루이지 말리오네 추기경의 죽음 이후에는 어떤 대신도 가까이 두지 않았다.
반면에 요한23세의 짧은 재임기간(1958-63년)은 선명하게 대조적이었다. 1909년에 젊은 사제였던 론칼리는 주교인 라디니 테데스키를 본받아 베르가모 직물공들의 파업을 지지했다. 출중한 외교관이었던 그는 한결같이 단순하며 겸손했다. '일 파파 부오노'(멋진 교황)라 불렸던 요한23세는 여러 면에서 확고부동한 전통주의자였고 교황에 선출됐을 당시 이미 77세였다. 그에게 텔레비전은 저주의 대상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요한23세는 세상이 얼마나 빠르게 변하고 있는지를, 교회가 이런 변화를 이해하고 적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예리하게 느끼고 있었다. 제2차 공의회에서 그는 "전통이란 무엇인가요?"라고 묻고는 이렇게 답했다. "그것은 어제 이뤄진 진보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룰 진보 역시 내일의 전통을 구성할 겁니다."
이탈리아 정치의 장에서 교회는 중도-좌파 동맹에 지속적으로 반대해왔다. 하지만 1961년 여름에 교회의 역할에 대한 요한23세의 근원적인 재평가가 시작됐다. 그는 자신이 '좌파를 향한 개방'에 동조적일 뿐만 아니라 교회가 개입주의적인 정치적 역할을 포기하기를 원한다는 것도 점차 분명히 했다. 생애 마지막 2년 동안 그는 가톨릭교회를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시키고자 노력했다. 1961년 5월 회칙 '어머니와 교사'는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에 집중했다. 회칙은 시장의 힘이 자유롭게 작동하는 것을 거부했으며 더 큰 사회정의의 필요를 강조했고, 아무것도 갖지 못한 자가 사회.정치 질서에 통합되기를 호소했다. 1962년 10월에 요한23세는 제2차 공의회를 열었다.
교황 요한23세. www.catholicvote.org
1963년 7월 요한23세는 자신의 가장 유명한 최후의 회칙 '지상의 평화'를 공표했다. 이것은 국제적 화해에 대한 감동적인 호소, 교회는 중립을 지키며 냉전 장벽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방침에 근거하고 있었다. 회칙은 가톨릭교도들만이 아니라 "선의를 가진 모든 이들에게" 건네는 대화였으며, 노동계급의 사회경제적 발전 증대의 필요, 여성의 공적 생활 진입, 제3세계 반식민 투쟁들의 정의로움을 강조했다.
가톨릭 세계와 마르크스주의 세계 사이에 대화의 가능성이 열렸다. 지역 차원에서, 돈 카밀로와 페포네가 영원히 서로의 몰락을 획책하던 시대는 끝나가고 있었다. 전국 차원에서는 기민당과 사회당이 드디어 대면하게 된다. (374-377쪽)
볼로냐
1960년대에 공산당의 정책을 검토하기 위해서는 볼로냐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 한편으로는 지역 기업과 체티메디에게 전반적인 지원금과 편의시설을 제공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복지와 저렴하고 효율적인 대중교통을 공급하는 사업을 지속하는 것이었다.
1970년대 초까지 볼로냐의 사회복지 분야는 효율성과 포괄성 면에서 명성을 누렸다. 대중교통은 저렴하고 양적으로도 부족함이 없었다. 주택공급과 관련해 시 당국은 제한된 가능성들을 운용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했다. 1963-68년 로마의 방 가운데에 '피아니 디 에딜리치카 에코노미카 에 포폴라레(경제적인 서민주택)'으로 조성된 방은 7.4%였고 밀라노에서는 15%였던 데 비해 볼로냐에서는 34.7%였다.
중도-좌파의 목표는 전국적 차원에서 실현된 것이 아니라, 공산당 소속 반대파에 의해 지역적으로 실현됐다고 볼 수 있다. 계급 간 동맹과 양호한 노동관계, 그리고 사회복지 지출에 기반을 두는, 라 말파의 인도적이고 온건한 개혁주의의 본거지가 된 곳은 공산당의 볼로냐였던 것이다. (426-427쪽)
1968년과 '극우 반동'
베트남전쟁은 이탈리아인들의 한 세대 전체가 미국에 대해 생각했던 방식을 바꿔 놓았다. 이탈리아의 68에서도 가장 많이 되풀이된 슬로건 중 하나가 '하나, 둘, 셋, 더 많은 베트남을 창조하라'였다. 이 시기의 이탈리아 청년들에게 '진짜 '미국은 다른 모습이었다. 대학가의 반전 시위, 캘리포니아의 코뮌들과 대항문화, 블랙파워 운동이 바로 그런 미국이었다.
동시에 사회주의를 성취하려는 새로운 모델이 1966-67년 시기에 중국의 문화혁명 경험에서 출현한 듯 보였다. 러시아의 위계적이고 중앙집권적인 사회주의 버전과는 반대로 문화혁명은 이탈리아에서 자생적이고 반권위적인 대중적 저항운동으로 널리 해석됐다.
마지막으로, 남미에서 벌어진 사건들이 학생운동의 제3세계적 영감을 완결했다. 1967년 가을 볼리비아에서 체 게바라가 죽자, 프랑스와 독일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탈리아 학생들에게도 게바라는 가장 위대한 영웅이 되었다. 가톨릭 교리와 마르크스주의의 조화를 추구했던 급진적인 남미 사제들의 가르침이 이탈리아에서는 매우 특별한 반향을 얻었다. 이탈리아 대학가에서 벌어진 최초의 반역들이 강고하게 가톨릭적인 제도들 안에서 일어나게 된 것은 우연히 아니었다. (434-435쪽)
'코리에레 델라 세라'는 학생 운동가들을 보통 '치네시'라고 불렀는데, 이 단어는 로버트 럼리가 언급하듯이 "빨갱이의 위협과 황인종의 위험을 한 단어로 상기시켰다." 이탈리아 체티메디는 자기들 한복판에서 분출한 반역에 기겁했다. 아들과 딸이 부모의 권위와 생활방식을 거부함에 따라 가정 안에서 맹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학생들은 분명히 반자본주의적이었지만 또한 아주 격렬하게 반공산당이기도 했다. 1968년 6월 [공산당의] 조르조 아멘돌라가 운동이 비합리적이며 유아적이라고 공격했을 때 그는 당내에 널리 퍼져 있던 감정을 터뜨렸던 것이다. (442쪽)
긴장 전략
1969년 12월 12일 밀라노의 피아차 폰타나에 있는 반카 나치오날레 델라그리콜투라에서 폭탄이 터져 16명이 죽고 88명이 다쳤다. 이날 로마에서도 같은 유형의 폭탄 두 개가 터져 18명이 다쳤다. 경찰과 내무부는 즉각 무정부주의자들 소행이라고 발표하고 혐의가 있는 무정부주의자들을 찾아 체포하기 시작했다.
밀라노의 철도원인 무정부주의자 주세페 피넬리는 폭탄 공격이 있던 날 밤에 체포됐고 12월 15일 밀라노 경찰총수의 집무실에서 추락사했다. 공식 해명에 따르면 피넬리의 사인은 자살이었다.
폭발이 무정부주의자의 소행이라는 경찰 해명은 서서히 그러나 확실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경찰이 무시해버린 증거가 가리키는 것은 무정부주의자들이 아니라 베네토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프란코 프레다와 조반니 벤투라가 이끈 네오파시스트 그룹이었다. 벤투라가 긴밀하게 접촉한 귀도 잔네티니는 SID(이탈리아비밀정보국) 소속 대령이었다. 비밀정보국 요원들과 극우 그룹들 사이의 광범위한 접촉이라는 가장 불길한 그림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일련의 폭발 사고와 잔학행위는 공포와 불확실함을 심어 결국에는 권위주의 정권이 자리잡게 할 전제조건을 조성하려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것이 바로 긴장 전략이었다. 대령들은 그 전략을 그리스에서 성공적으로 전개했으며, 이제는 네오파시스트들과 비밀정보국이 이를 이탈리아에서 재연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480-481쪽)
1970년대, 위기와 타협
1973년 가을 이래 선진 자본주의 나라들이 경험한 경제 위기는 1929년 이후 가장 심각한 것이었다. 이탈리아의 경우 위기가 대책의 폭을 얼마나 제한했으며, 모든 사회.정치적 세력의 행동 조건을 얼마나 한정했는지를 이해해야만 한다.
다양한 구조적 문제들이 복합되다 보니 이탈리아는 영국과 더불어 서구 경제에서 가장 취약한 곳이 되었다. 이탈리아의 에너지 자원 빈곤은 석유에 대한 과잉 의존으로 이어졌다. 1973년이 되면 석유가 에너지 수요의 75%를 충당하게 됐는데, 1955년만 해도 33.6%였다. 자본가 계급은 대부분 투자 파업과 자본도피로 산업 불안에 대처했다. 정부는 취약하기로 악명 높았고 노동운동은 여전히 유럽에서 가장 강했으니 실질임금을 줄여서 비용 증대에 대처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1972년과 1973년의 '미니호황', 1974년 후반과 1975년의 심각한 경기후퇴, 1976년의 회복, 1977년의 쇠퇴, 1978년의 미약한 회복이라는 연례적인 등락 밑에는 이탈리의 특유의 네 가지 추세가 놓여 있었으니, 아주 높게 지속된 물가상승률, 지하경제의 성장, 생산의 제한적 쇠퇴, 공공부문의 나선형 적자 등이다. (505-507쪽)
1981년 피델 카스트로와 만나는 베를링구에르. granma.cu
역사적 타협
1972년 3월 엔리코 베를링구에르가 공산당 서기로 선출되었다. 당시 50세에 불과했던 그는 당 서기로서 거의 톨리아티만큼의 권한을 행사했지만 당내 위상은 개인숭배에 대한 그의 혐오 때문에 완화되었다.
그는 1973년 10월 '리나시타'에 게재된 유명한 논설에서 공산당, 기민당, 사회당 사이의 '역사적 타협'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당시 칠레에서는 살바도르 아옌데 정부가 군부 쿠데타로 전복됐다. 베를링구에르의 주장은 이탈리아에도 "국민을 둘로 쪼갤 위험 압력"이 있으며 "칠레의 비극적 경험이 재차 입증했듯이 민중 세력이 권력의 기본 지렛대를 장악하기 시작할 때 반동은 더 폭력적이고 격렬해지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베를링구에르는 이런 경향들에 맞서고자 1943-47년 반파시즘 세력이 창출했던 것을 닮은 새로운 대연합을 제안했다. 사회적 층위에서 가장 중요한 동맹은 노동계급이 체티메디들과 맺는 동맹이었다. 정치적인 층위에서는 기민당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베를링구에르의 제안은 공산당을 이탈리아 정치의 중앙무대로 복귀시켰다. 또한 이탈리아 민주주의를 지키고 기민당과 체티메디를 권위주의적 유혹으로부터 격리하는 방어적 의도를 실현시켰다. 190년대 이탈리아 위기의 폭발성을 감안한다면 이 성취는 결코 미미하지 않았다. (511-513쪽)
1980년대
이탈리아의 놀라운 경제 회복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측면 가운데 하나는 공기업 부문의 반전이었다. 1980년대 초반만 해도 IRI는 유럽 전역에서 가장 심한 위기에 빠진 그룹 가운데 하나였다. 1980년대 중반의 유리한 경제 조건과 볼로냐 대학 교수 출신인 로마노 프로디의 역동적 경영이 이런 상황을 타개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1982년 10월에 임명된 프로디는 논란이 많았던 민영화와 더불어 급진적인 구조조정 및 대규모 투자를 감행했다.
몇 안 되는 인사들로 한정됐던 이탈리아 자본주의의 명망가 집단에 새로운 인물들이 충원됐고 이들의 영향력 역시 강화되었다. 유럽에서 가장 큰 화학비료 그룹들 중 하나의 대표인 라울 가르디니, 올리베티에서 권력 기반을 쌓기 시작한 카를로 데 베네데티, 거대 미디어 제국을 거느린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의류업의 명망가 루차노 베네통이 그런 인물들이었다. 모두 자신들의 자산을 국제적으로 확대하는 데 매우 헌시적이었고, 유럽 금융계에서 이탈리아 '콘도티에리(용병 대장들)'의 새 시대 운운하는 말들이 나왔다. (590쪽)
정치적으로도 변주가 목도됐다. 저명한 반파시스트 사회당원 산드로 페르티니가 1978년에 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된 것은 절묘한 선택임이 입증됐다. 이 왜소하고 허약한 노인이 대통령직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었다. 그가 민주주의적 가치들을 거침없이 옹호하고 자신의 반파시스트 청년기를 일관되게 거듭 상기시키며 매년 수천 명의 초등학생을 대통령 관저인 퀴리날레 궁으로 초청하던 모습은 여론에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겼다. 페르티니는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인기 있는 대통령이 되었다. 단명했던 파리 정부 이후 35년 만에 레지스탕스가 국가 최고위직에 복귀했던 것이다. 그 결과로 이탈리아 민주주의는 훨씬 강해졌다.
1983년의 총선은 기민당에 파국적인 결과를 안겨주었고 베티노 크락시가 최초의 사회당 출신 내각회의 의장이 되는 길이 열렸다. 크락시의 재임기간은 예상보다 길어져서, 1983년에서 1987년까지였다. 개성과 전술적인 노련함, 타고난 정치적 수완 덕분에 그에게 적은 별로 없었고 추종자가 많았다. (605쪽)
산드로 페르티니. thevision.com
그렇지만 기민당-사회당의 동맹은 상호 신뢰와 동등함에 근거한 정치동맹이 아니었다. 오히려 의구심과 경쟁심과 자리다툼으로 갈라져 있었다. 어떤 전략적 계획도 거의 수립할 수 없으며, 막대한 시간과 에너지가 낭비되고, 반드시 강한 정부보다 약한 정부로 귀결되고야 마는 그런 동맹이었다.
그 결과로 1980년대의 개혁주의는 일관성이 없었다. 크락시는 나라보다는 자기 당을 위한 전략가였고 1968-78년 존재했던 사회운동의 압력이 부재한 가운데 개혁 실적은 보잘것없었다. (606쪽)
공산당에 1980년대는 암울한 10년이었다. 1984년 베를링구에르의 급사는 공산당에게서 1980년대의 부진을 뚫고 자신들을 이끌 만한 정치적 유능함과 국제적 지위를 갖춘 인간을 앗아갔다. 그의 장례식 때 로마 거리에는 1백만 명도 넘는 이들이 나와 이례적인 시위를 벌였으니, 이것이 이탈리아공산당이 전국적 무대 중앙을 차지한 마지막 순간이었다. (6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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