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모리스 마이스너,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딸기21 2019. 3. 11. 20:56

조너선 스펜스의 <천안문>을 트레바리에서 함께 읽었는데 워낙 오랜만에 다시 편 것이라 내용조차 가물가물했다. 스펜서의 책들에 빠져 지냈던 때 이후로 중국에 대한 책을 몇 권 읽기는 했는데 아주 실용적인 독서였던지라(예를 들면 시진핑에 대한 책이나 <대국굴기>같은) 공부를 한다는 느낌이 없었다.


책꽂이에 스펜스의 책들과 함께 꽂혀 있던 모리스 마이스너의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1, 2>(김수영 옮김. 이산)를 펴들었다. 




이 책은 내가 산 것이 아니라 오빠가 읽던 것이다. 아마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은 것 같지는 않다. 군데군데 은색 펜으로 줄 쳐놓은 것을 보니, 주황색 싸구려 색연필로 쫙쫙 긋는 나와는 스타일이 어쩜 이런 것에서도 이렇게 다를까 싶어 살짝 웃음이 나왔다. 밑줄 그은 부분들로 미뤄, 북리뷰를 써야 해서 훑어봤던 게 아니었나 싶다. 지식이 되기보다는 '평가'에 해당하는 분들에 주로 줄을 쳐놓은 걸 보니. 


읽기를 잘 했다. <천안문>을 놓고 토론하고 돌아와서 뭔가 아쉬웠던 부분들, 이 책의 제목처럼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에 대한 내용을 알차게 정리를 해놔서 도움이 많이 됐다. 


중국 공산주의 혁명의 주요 모순은, 혁명가들의 주관적 목표와 그들이 살았던 객관적 조건 사이에 있었다. 혁명가들이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나와 있는 사회주의 목적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던 반면, 바로 그 이론은 경제가 낙후된 상황에서는 그리고 근대 산업노동계급이 아직 유아 단계에 있는 땅에서는 사회주의가 불가능하다고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오주의 이론인 신민주주의론은 이런 한계를 부분적으로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민주주의' 단계는 1950년대 초에 성급하게 폐기됐으며 산업적 토대를 건설하는 동시에 중국사회를 사회주의적으로 개조하려는 노력이 시작되었다. 나의 결론을 말한다면, 그런 시도는 여러 면에서 실패했고 중국 공산주의 혁명이 가져온 사회적 산물은 본질적으로 자본주의 경제와 사회였다는 것이다. (10쪽)


이 사실은 일부 사람들에게 정통 마르크스주의 사상, 즉 사회주의는 경제적 후진성이라는 조건하에서는 불가능하다는 사상을 새삼 입증해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중국에서 사회주의 실험이 무산되었다는 것은 그대로 존재하는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공산주의 혁명은 결코 실패라고 할 수 없다. 나는 지난 반세기 동안 중국이 이룩한 많은 긍정적인 업적들이 사회적 혁명이 없었다면 가능했을 것 같지 않다. 그리고 이런 사회적 혁명은 바로 공산주의자들만이 실행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 업적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그토록 오랫동안 외국의 침략과 군벌주의의 혼란으로 황폐해진 땅에서 국가의 독립과 정치적 통일을 이루어냈다는 것이다. 독립과 통일은 사회적, 경제적 발전에 필수적인 전제조건이며 또한 1949년 이전 한 세기 동안 중국이 얻어낼 수 없었던 것들이다. 무엇보다 공산주의 국가의 주요 업적인 1950년대 초기의 토지혁명을 가능하게 한 요인이기도 했다. (11-12쪽)


중국혁명이 서양의 이데올로기에 기초해 있다는 사실은 중국근대사를 만들어 나가는 데 있어 서양 제국주의의 역할이 중심적이었음을 말해준다. 비록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제국주의는 혁명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제국주의는 사회경제적인 의미에서뿐 아니라 문화적, 지적인 의미에서도 혁명적이었다. 낡은 유교질서를 무너뜨림으로써 혁명을 가능하게 했고, 과거의 전통과 체제에 대항할 수 있도록 근대의 중국혁명에 새로운 사상과 이데올로기를 제공했다. 중국혁명가들이 서양의 도구와 사상을 이용한 것은 제국주의 외세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중국전통의 굴레를 벗어던지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근대 중국의 혁명사가 전통에 대한 전반적인 거부라는 방식으로 시작됐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특히 중국공산당의 설립자들과 초기 지도자들을 배출했던 5.4 시대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이는 전반적 반전통주의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24쪽)


혁명의 관심은 언제나 중국의 고난과 미래에 있었지만, 목적은 낡은 중국전통을 부활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매장할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사회의 핵심영역에서도 제국주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 역할은 혁명적 성격과 반혁명적 성격을 모두 가진 모순적인 것이었다. 동기가 얼마나 악하고 방법이 얼마나 잔인했든 간에, 제국주의는 자체의 힘만으로는 근대역사 속으로 진입할 수 없을 것 같은 정체되고 전통에 얽매인 사회를 깨부수는 데 꼭 필요한 역사적 힘이었다. (25쪽)


책은 마오 이전의 시기를 살짝 언급하고, 마오 시절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마오 이후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을 뒷부분에서 조망한다. 저자가 설명한 대로, 마오에 초점을 맞춰 마오의 생각과 정책과 그 시기 중국을 다루는 책이다. '마오 이후'의 경제개방 부분은 책을 내놓고 뒤에 개정하면서 덧붙인 것이라는데, 확실히 그런 티가 난다. 그 부분도 재미가 없지 않았지만 이 책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마오', 그리고 '마오의 중국'이다.


미약한 부르주아지와 이보다 더 미약한 프롤레타리아트가 말해주듯이... 근대중국의 역사적 상황은 모든 사회계급의 미약함을 특징으로 하고 있었다. 낡은 정치질서가 붕괴되면서 관료제를 통해 부를 획득할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들고 그런 착취를 전통적으로 억제해오던 유교도덕의 힘이 약해지자 신사-지주층의 착취방법은 더욱 기생적으로 되어갔다. 이 계층에서 경제적 발전을 촉진하거나 정치적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근대화된 엘리트'는 출현하지 않았다. (27쪽)


신사층의 부패는 낡은 제국의 질서를 내부에서 개혁하는 것을 방해했고 따라서 혁명적 상황의 도래를 앞당긴 주요 요인이었다. 생존가능한 부르주아지와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의 부재와 더불어 이것은 중국이, 배링턴 무어가 말한 바 있듯이 메이지 시대 일본과 유사한 '근대화로의 보수적인 길'을 걷지 못하게 한 하나의 요인이었다. 

중국사회에서 신사층의 지배적 위치를 정당화해주던 유가사상의 정치적 상징들과 이들이 오랫동안 의존해왔던 관료제 네트워크는 제국의 종말과 함께 사라졌다. 

신사층의 부패가 낳았던 또 다른 역사적 결과는, 근대중국에서 정치적 군사적 힘이 사회경제적 힘으로부터 일탈하려는 경향이었다. (28-29쪽)


지식인들이 없지는 않았다. 일부는 몰락한 기득권의 찌꺼기가 되기를 거부하고 혁명의 기초를 닦았다. 


"전통적인 통치 엘리트의 아들들이며 젊은 신사-학자층에 속했던 이들의 일부는 자신이 속한 사회계급을 떠나 중국사회 속에서 새로운 계층의 중심부를 형성해나갔다. 이들이 바로 근대혁명운동의 지도자를 산출했던 계층인 근대적 인텔리겐차였다. 신사층이라는 사회계급을 붕괴시킬 혁명운동에 이데올로기와 지도력을 제공했던 이들은 신사층의 아들들, 자기가 속한 계급을 배반한 사람들이었다." (34쪽)


반전통주의는 1915~1919년의 신문화운동에서 가장 완전한 형태로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정치적 방식으로 나타났다. 중국의 첫 문화혁명을 외친 사람은 열정적이고 젊은 친프랑스파 천두슈였다. 그는 일본에 자칭 망명객으로 있다가 잡지 '신청년'을 발간하기 위해 1915년 중국에 돌아왔다. 

'신청년'을 중심으로 뭉쳤던 지식인들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5.4 사건 이후 정치적으로 두각을 나타내면서 근대 중국혁명의 지도자가 되는 젊은 학생세대들의 신념이 바로 이들의 글에 의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그 열혈독자와 추종자 가운데 젊은 마오쩌둥이 있었다. 그는 '신청년'의 영향을 깊이 받았고, '체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그의 글이 1917년 처음으로 이 잡지에 실리기도 했다. '신청년'이 마오쩌둥과 그 시대 청년들에게 주었던 지속적인 영향의 하나는 사회개혁과 정치행동이 가능하려면 문화와 도덕의 완전한 개조가 전제돼야 한다는 인식이었다. (39쪽)


천두슈를 비롯해, <천안문>에 등장하는 지식인들이 그토록 역사에서 중요성을 갖게 만든 것은 "보통 이야기하는 것처럼 학자들이 중국에서 차지하는 전통적인 신망 때문이 아니라 근대중국의 역사적 상황 때문이었다"고 마이스너는 말한다. 지식인들이 중요하기는 했지만, 근대에서 현대로 이어지는 중국의 역사는 지식인들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는 지적도 빼놓지 않는다. "신사층의 자제들이 새롭고 독립적인 사회계층으로서 일어나는 1890년대에 중국혁명의 씨앗은 뿌려진" 것이지만, "근대의 중국혁명이 실제로 시작되는 것은 이보다 30년 뒤, 인텔리겐치아의 역사가 평민의 역사와 합쳐지게 되는 시점부터"라고. (34쪽)


또한 이들 인텔리겐치아의 등장이 "마르크스와 레닌의 이론이 낳은 계몽의 결과는 아니었으며, 오히려 중국공산당의 지도자가 된 사람들은 마르크스주의의 혁명적 메시지에서 중국사회의 위기를 극복할 해결책을 발견했기 때문에 그 메시지를 계몽적인 것으로 인식했던 것"이라고 지적한다. '주의'를 먼저 받아들인 게 아니라 '필요'에서 주의를 받아들였기에, 혁명가들이 "이미 이전부터 갖고 있던 지적 성향이 중국의 상황을 이해하는 방식과 마르크스주의를 적용하는 방법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35쪽)

(마찬가지로 내셔널리즘도 사회주의 혁명에 자리를 내준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를 해석하고 적용하는 방식에 계속해서 영향을 미친다. "이런 상황은 불가피한 것으로서 중국이 사회혁명뿐 아니라 국가의 독립 역시 필요한 땅이었기 때문이다. 이 두 임무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45쪽) 이었다.)


과거를 거부하는 반전통주의는 '청년에 대한 믿음'과 이어져 있었다. "젊은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덜 오염됐고, 이들 젊은이야말로 새롭고 젊은 중국사회의 출현을 가져올 행위자라고 인식되었다." 청년에 대한 믿음과 함께 '신청년'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사회적 현실을 변화시키는 데 있어 사상의 힘을 대단히 신뢰했다는 점, 즉 그들은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변화에 가치와 인식의 변화가 선행돼야 한다는 가정 위에 서 있었던 것"(40쪽)이라고 마이스너는 말한다. 먼 훗날의 이야기이지만, 마오의 문화대혁명은 어느날 갑자기 튀어나온 게 아니었다는 뜻이다. 


중국공산당이 성립된 1921년부터 장제스가 반혁명을 일으켜 공산주의자들을 거의 전멸시키는 1927년에 이르는 기간은 실패한 두 번의 혁명을 특징으로 한다. 하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또는 종종 '국민혁명'이라 불리는 혁명의 실패이고, 다른 하나는 막 태어난 중국의 도시 노동계급이 1925-1927년 혁명이 크게 고조되는 가운데 영웅적으로 싸웠지만 결국 중국사회를 사회주의적 구조로 바꾸는데 실패한 혁명을 말한다. 두 번에 걸친 혁명의 무산은 중대한 결과를 낳았다.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가 다 정치의 장에서 사라지고, 혁명이 도시에서 농촌으로 옮겨가게 된 것이다. 바로 이곳에서 마오주의가 자라났고 1949년 혁명의 승리를 위한 담금질이 시작되었다. (47쪽)


혁명운동이 급진적, 전투적 단계로 돌입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은 1925년의 5.30 운동이었다. 외국인과 중국인의 충돌 중 가장 악명 높은 사건은 6월 23일 광저우의 외국인 조계에서 일어났는데, 이때 영국과 프랑스 군대는 시위대에 가담한 중국인 50명을 죽이고 많은 부상자를 냈다. 그러자 홍콩의 노동자들은 총파업을 일으켰고 홍콩과 영국의 무역이 16개월간 마비됐으며 영국상품 불매운동이 전국적으로 번져 나갔다. 이 파업을 통해 정치적 투쟁성이 극적인 형태로 표출됐다. 

이 전투적 대중운동은 순수한 내셔널리즘 운동이 아니었으며 반제국주의적 목표에만 한정시킬 수도 없는 것이었다. 노동자들은 초기 자본주의적 산업주의가 가져온 끔찍한 노동조건과 생활환경을 견디다 못해 저항에 나선 것이었다. (52-53쪽)


5.30 운동의 결과 국민당의 눈부신 성장과 더불어 동맹자인 공산당의 역량과 영향력도 극적으로 증가했다. 대중혁명의 힘이 일단 작동하기 시작하자 대중혁명은 '국민혁명'의 협소한 범주 안에 가둘 수 없는 스스로의 생명력을 획득해 나갔던 것이다. 이와 같이 대중의 내셔널리즘 운동으로부터 사회혁명의 위협이 대두되고 있었다. 이는 국민당의 사회적 기반인 도시 부르주아지와, 지주-신사층 자녀들이 다수를 점하고 있던 장제스 군대의 장교집단에 대한 위협이기도 했다. (55쪽)


1927년 초 대중의 혁명운동은 최고조에 달했다. 반혁명은 4월 상하이에서 시작되었다. 3월 21~22일 공산주의자들이 이끄는 노동계급은 봉기를 통해 상하이의 일부를 장악하고 국민혁명군의 도착을 기다렸다. 3월 26일 장제스와 그의 군대는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도시에 진입해 해방군으로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이 해방군은 사형집행인으로 돌변했다. 4월 12일 새벽 악명 높은 청방과 지하비밀결사들의 무장부대가 국민당 정규군의 정예부대와 함께 공산주의자와 급진적 노조 지도부를 공격했다. 상하이를 시작으로 국민당 통제하에 있던 양쯔강 이남의 모든 지역에서 탄압이 자행됐다. 노조와 학생조직은 궤멸되다시피 했다. 특히 농촌에서 (혁명기에 우르르 만들어진) 농민협회를 억압할 때에는 무자비한 살육이 자행되었다. 1925-27년 혁명에서 사망한 사람은 수백 명에 불과했던 반면, 1927-1930년의 백색공포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은 수십만에 달했다. (57쪽)


중국공산당은 전멸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반혁명을 뒤집으려는 마지막 시도였던 광저우코뮌도 1927년 12월 유혈진압으로 막을 내렸다. 

공산주의자들은 참담한 패배를 통해 쓰라린 교훈을 얻었다. 계급투쟁의 결과를 결정짓는 것은 바로 군사력이라는 인식이었다. "정권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마오쩌둥의 격언은 바로 여기서 탄생했다. 공산주의자들은 이제 그들의 군대를 건설해야 한다는 사실과, 혁명은 반드시 폭력투쟁의 형태를 띨 수밖에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한 적어도 중국에 관한 한 모스크바가 혁명적 지혜의 유일한 보고가 아니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그들을 패배와 재난으로 이끈 것이 바로 모스크바에서 만들어낸 '통일전선' 전략이었기 때문이다. 

농민의 잠재력에 대한 새로운 각성이 일어났다. 이는 혁명의 우선순위가 바뀌게 됨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중국 공산주의자들은 농민의 혁명적 한계를 말하는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에 더 이상 얽매이지 않게 되었다. (57-58쪽)


마오는 패잔병을 이끌고 징강산으로 들어갔고, 1928년 뒤에 홍군 총사령관이 될 주더가 이끄는 병사들이 합류했고, 1931년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이 수립됐다. 비록 장시소비에트공화국은 1934년까지 짧은 기간만 존속했지만 혁명가들이 정치행정가로 성장할 수 있게 해줬다. 국민당 군대의 맹공격으로 다시 쫓기게 된 공산주의자들, 그리고 1년여의 대장정. 


중국 공산주의 역사상 그 어떤 사건도 대장정과 대장정의 전설만큼, 굳은 의지가 있는 사람은 극한의 절망적 상황도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과 자신감을 준 것은 없었다. 누구보다 많이 이 신념을 불러일으키고 발산시킨 사람은 마오쩌둥이었다. 

끝없는 투쟁, 영웅적 희생, 자기 부정, 근검, 용기, 이기심의 배제같이 잘 알려진 마오주의의 덕목은 마오 혼자만이 지지해온 가치가 아니라 대장정의 노련한 전사들에 의해 실천되고 전수돼온 가치였다. 이런 금욕적 가치들은 훗날 크게 선전되는 '옌안 정신'의 핵심을 이룬다.

대장정 기간에 생존자보다 사망자가 훨씬 많았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도 옌안 정신에 독특한 공헌을 했다. 살아남았다는 의식은 생존자의 혁명적 사명감에 신성함을 부여했으며 거의 종교에 가까운 헌신을 낳았다. 죽음 속에서 살아남았다는 것은 사명의 정당성뿐 아니라 지도자의 정책과 지혜를 증명해주는 것이었다. (68-69쪽)


마오와 그의 사상을 받아들인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옌안의 경험은 단순한 기념의 대상이 아니라 미래의 모델을 제시해주는 살아 있는 혁명전통이었다.

옌안의 유산은 제도의 유산과 신성한 혁명적 가치의 유산으로 구분될 수 있다. 그러나 둘은 쉽게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인민공화국의 정치 경제 교육 부문에 보이는 독특한 마오주의적 요소는 이미 옌안 시기의 제도와 관행에 나타나고 있었다. 

전쟁과 봉쇄로 인한 어려운 환경은 변구와 게릴라 지역에서 경제적 자급자족의 필요성을 낳았으며 다양한 실험과 개혁을 담은 경제정책을 만들어냈다. 공산주의자들은 전통적인 상호부조를 부분적으로 본뜬 마을 합작형식의 노동조직을 추진했다. 자급자족, 자력갱생, 지방주도는 옌안 경제정책의 슬로건이자 원칙이 되었다. (87쪽)


일본 침략에 대항하여 중국을 방어하려 하지 않았고 그럴 능력도 없었던 국민당은 내셔널리즘의 신임장을 잃어버렸으며, 이 신임장은 곧바로 공산주의자에게 넘어갔다. 전쟁 동안 옌안은 혁명의 중심이었을 뿐 아니라 일본 침략자에 항거하는 중국 내셔널리즘의 상징이었다. 도시에서 수천 명의 학생과 지식인이 옌안으로 몰려들었고 그들 중 상당수가 서북항일군정대학에서 훈련받고 사상적으로 '개조'된 뒤 급속히 팽창하던 공산당 근거지에 간부로 파견되었다. 

반일 내셔널리즘 강령에 기초했던 공산주의자들의 농민동원은 옌안 시기 군사적, 정치적 성공에 큰 기여를 했다. 중국 공산주의자들은 1937년 훨씬 이전부터 이미 열정적인 내셔널리스트였다. 이들은 일본 침략에 대항하는 농민들의 단순소박한 반외세감정을 근대적인 내셔널리즘 의식으로 전환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옌안 시기의 공식 토지정책은 장시소비에트 시절보다 상대적으로 온건했다. 일본 침략자에 대한 투쟁에서 빈농과 중농뿐 아니라 지주와 부농의 지원도 끌어들이기 위해서였다. (74-75쪽)


옌안 공산주의를 구성하던 많은 요소는 마오 사상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그는 1935년에 아무 생각 없이 산시에 들어온 것이 아니었다. 마오쩌둥은 1920년 공산주의 사상을 수용할 당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그 나름의 이해와 혁명관을 형성시켜주는 많은 지적 경향을 이미 갖고 있었다. 이런 경향은 1920년대와 1930년대 초 혁명을 겪어나가면서 더욱 강화돼갔다. 역사 속에서 가장 결정적인 요소는 인간의 의식, 즉 관념과 의지, 그리고 인간의 행동이라는 강한 주의주의적 신념은 마오쩌둥의 초기 지적 경향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다. (마오에게) 헌신적인 혁명가가 자신의 관념과 이상에 따라 사회현실을 만들어나간다는 신앙은 마르크스주의의 강력한 결정론적 교의의 영향하에서도 살아남았다. 

사회주의에 대한 마오쩌둥의 신앙은 역사발전의 객관적 힘을 믿는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적 확신에 기초하고 있지 않았다. 마오에게 역사의 방향을 결정하는 필수요소는 인간의 의식적인 행동이었고, 혁명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와 혁명활동에 참가하는 사람들의 의지였다. 마오주의에서 올바른 사상은 혁명활동의 핵심적인 전제였으며, 이 가정 위에서 옌안 시기에 발전하고 다듬어진 '사상개조'와 '의식개조'를 강조하는 마오주의가 탄생한 것이다. (78쪽)


마오쩌둥과 마오주의자들이 주관적 요소의 역할을 강조하는 경향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은 공산주의자들이 왜 인민전쟁 전략과 게릴라 전술을 택했는지, 그리고 이 전략과 전술을 어떻게 그토록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는지와 밀접히 연관돼 있다. 모든 중국인이 잠재적으로 혁명적이라는 인식은 마오로 하여금 중국 내셔널리즘의 잠재력을 예리하게 파악할 수 있게 했으며, 내셔널리즘 감정을 공산주의 목표를 위해 이용할 수 있게 했던 것이다. (80쪽)


직업 전문화에 대한 혐오, 지식인과 전문가에 대한 불신, 관료제에 대한 혐오, 도시에 대한 편견, 자기희생에 대한 낭만적 정서 등 마오의 정신구조가 갖고 있는 여타의 특징도 전형적으로 인민주의적이었다. 그러나 그가 단순히 공산주의의 외피를 걸친 내셔널리스트가 아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마르크스주의자의 가면을 쓴 인민주의자도 아니었다. 

마오의 인민주의적 사상과 경향은 그가 마르크스주의를 수용하고 적용시켜나가는 방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잠재적인 사회주의 의식을 농민에게 부여함으로써 마오쩌둥은 마르크스뿐 아니라 레닌으로부터도 점점 멀어졌다. (81쪽)


레닌과 마오, 러시아와 중국. 


볼셰비키는 10월혁명 이후에 내전을 치렀지만 중국공산당은 혁명 도중에 내전을 치렀고 승리를 거뒀다. 그래서 1949년 국가권력을 수립했을 때 반혁명 저항은 산발적으로 일어났을 뿐이다. 초기 소련과 달리 인민공화국은 반혁명적 외세의 개입으로 완전한 고립과 심각한 위협을 겪지 않았다. 모스크바와 베이징의 관계가 아무리 애매모호하다 할지라도 강력한 공산주의 국가와 국경을 마주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새로운 중국은 어느 정도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같은 상대적 이점은 중국의 심각한 후진성, 즉 100년 동안의 개혁과 혁명이 다 실패하면서 역사적 유산으로 물려받은 사회적 경제적 후진성에 가려졌다. 아마도 후자가 전자의 무게를 능가했을 것이다. 1949년 중국의 공산주의자들은 10월혁명 당시 러시아보다 훨씬 낙후되고 전쟁으로 피폐해진 경제를 물려받았다. 후진성과 빈곤을 어떤 식으로 해결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1949년 이후 중국의 사회발전 방향을 결정짓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98-99쪽)


중심 행정기관은 처음부터 저우언라이 총리의 관할 아래 있었다. 처음에는 정무원으로 불리다가 1954년 정식 헌법이 선포되고 국무원으로 바뀌었다. 이 기관 밑에 성, 현, 향으로 확대되는 중앙집권적 관료기구가 설립되었다. 혼란스런 첫 25년간 민간 행정조직이 누릴 수 있었던 지속성과 안정의 상당부분은 저우언라이의 공적이었다. (104쪽)


승리를 거둔 공산주의자들 앞에 놓여 있던 정치적 과제는 낡은 조각들을 다시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구조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20년에 걸친 무장투쟁은 조직과 당원의 습성에 군대 같은 규율을 심어놓았다. 간부들은 산전수전 다 겪은 혁명조직가였을 뿐 아니라 노련한 정치행정가이기도 했다. 그리고 강한 국가의식과 목적을 갖고 있었다. (105쪽)


국가권력은 중국공산당에, 더 정확히 말하면 당의 중앙위원회에, 더 구체적으로는 14명으로 구성된 중앙정치국에 있었다. 더 엄밀하게 말한다면 1949년에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를 구성했던 5명-마오쩌둥, 류사오치, 저우언라이, 주더, 천윈의 수중에 있었다. 인민공화국의 정치사는 상당부분 중국공산당과 그 지도기관 내부의 정치사라고 할 수 있다. (106쪽)


낡은 국가 관료기구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았으므로 중국 공산주의자들은 이를 혁파할 필요가 없었다. 비록 낡은 관료조직으로 인한 부담이 없었다 하더라도 그들은 얼마 안 가 자신들이 만든 새로운 관료조직의 무게에 짓눌리게 된다. (107쪽)


저자는 마오와 마오의 중국에 대해 냉정히 평가하지만 폄훼하지도 않는다. 중국 혁명이 제대로 된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 혁명이 아니었다면 그것은 마오의 잘못보다는 중국이라는 나라의 현실에서 원인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마오의 잘못을 조목조목 짚으면서도, 권력욕만이 아닌 혁명에 대한 열정이 마오를 움직인 힘이었음은 분명하다고 말한다. 


한 시대를 휩쓴 문화대혁명의 폭력과 비극을 전하면서도, '혁명' 혹은 거대한 사회운동들이 일으킨 대량살상과 차분히 비교해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표퓰리즘으로 움직인 마오의 중국에 민주주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비슷한 시기 소련이나 동유럽의 적색 공포정치와는 냉혹한 감시나 억압 면에서 강도가 달랐다고 말한다. 마오의 혁명이 사회주의/공산주의 사회라는 '이상'을 이뤄내기는커녕 결과적으로 부르주아 혁명을 뒤늦게 따라잡은 것에 불과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일이었다고 말한다. 마오 시기 중국의 기근과 낙후성을 인정하면서도, 그것들을 이겨내고 거대한 나라를 흔히 말하는 '발전'으로 이끌어갔다고 평가한다.


책은 마오와 중국 공산당 지도부, 지식인들의 의식과 투쟁을 설명하면서 마르크스와 레닌을 거듭 끌어온다. 사회주의를 거쳐 공산주의로 이행해간다는 마르크스의 생각, 일국사회주의에 대한 레닌의 생각, 소련의 중공업 위주 경제개발 정책 등등을 준거로 삼아 중국은 어떻게 비슷했고 어떻게 달랐는지를 짚는다. 


18세기 청조에 의해 합병된 티베트는 19세기 말 외국의 침략으로 청 제국이 해체되고 인도 식민지에서 영국이 침략해오자 중국의 통제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1911년 청조가 망했을 때 티베트는 정식으로 독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중국의 내셔널리스트, 공산주의자, 비공산주의자는 하나같이 티베트를 근대 중국 국민국가의 일부로 여겼다. 그러나 티베트에 대한 영국의 모호한 종주권이 이제 막 독립한 인도의 더욱 모호한 부분적인 이권으로 바뀌자 정치적인 문제는 한층 복잡해졌다. 인민공화국 지도부는 인도 및 티베트 지도자들과 협상을 벌인 결과, 1951년 중국의 통제를 인정하고 티베트의 자치를 대폭 허용한다는 협의를 체결했다. 같은 해 가을 중국군은 라싸를 점령했다. 그러나 1959년 티베트 봉기가 증명하듯 이것으로 문제가 종결된 것은 아니었다.
더욱 큰 관심거리는 패배한 국민당 정부의 타이완 점령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은 1950년 여름 타이완 침략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미국 트루먼 대통령의 6월 27일 명령- 타이완 해협의 '중립화'를 위해 미군제 7함대를 파견하라는 명령에 좌절됐다. 이 같은 군사개입의 구실이 된 것은 한국전쟁의 발발이었다. (109쪽)

(한국전쟁에서) 중국과 미국은 2년 반 동안 싸웠고 그 싸움은 피비린내 나는 소모전이었다. 물적, 인적 손실이 엄청났지만 전쟁은 생각지도 않은 정치적 이득을 안겨주었다. 외세가 또다시 중국에 침략해올지 모른다는 위기감은 정부에 대한 대중의 내셔널리즘적 지지를 더욱 굳건하게 만들었다. 
훨씬 중요한 것은 중국의 신속한 군사적 승리였다. 처음으로 중국군대가 서양군대를 무찔렀으며, 그것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나라와 싸워 전선의 교착상태에 이르렀던 것이다. 오랫동안 냉소와 멸시의 대상이었던 중국군대가 전쟁에서 자신을 증명해보였고 세계는 이를 놓치지 않았다. 중국의 군사적 업적은 서양의 군사지도자들을 놀라게 했으며 새로운 중국이 국제무대에서 고려돼야 할 국가임을 극적으로 선포하는 것이었다. (115쪽)


인민공화국은 공포정치의 희생자에 대한 종합적 통계를 밝힌 적이 없다. 정부기록에 따르면 1951년 전반기에 행해진 80만 건의 반혁명재판 가운데 공식 사형집행건수만 약 13만5천건이었다. 인민공화국의 첫 3년 동안 200만 명이 처형되었다는 다수의 연구자들의 추산은 아마도 빈약한 정보를 가지고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가장 사실에 근접한 추측일 것이다. 이 숫자에는 1950-52년의 토지개혁운동 기간에 폭발한 농촌의 반자발적 '처형'도 포함돼 있다. 이 기간 200만명 이상이 감옥 또는 강제노동수용소에 수감됐다.

프랑스혁명과 러시아혁명의 공포정치시대에 이보다 더 많은 비율의 인구가 살해됐다 해서, 1949년 이전에는 매년 수백만에 이르는 사람들이 기근과 영양부족으로 죽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고 해서, 1920년대 말과 1930년대 초 장제스의 백색테러 기간에 공식적으로 집행된 사형과 무분별한 살육으로 죽은 사람의 수가 더 많다 해서 (공산주의 혁명 이후의) 희생자 수가 감소하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소름끼치는 비교를 한 것은 혁명을 옹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문제에 대해 도덕적 자기만족이나 분노에 쉽게 빠지지 않도록 역사적 원근감을 유지하기 위해서이다. 대부분의 혁명적 상황에서는 테러를 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선택이 아니라 혁명적 테러를 할 것인가 반혁명적 테러를 할 것인가의 선택이 남아 있을 뿐이다. 중국은 수십년간 반혁명 테러로 너무나 큰 고통을 겪었으므로 너무 쉽게 혁명적 테러에 도덕적 비난을 가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또한 미래에 대한 약속만 가지고 혁명적 폭력을 정당화하기에는 혁명의 약속과 혁명가들의 실제 행위 사이의 간극이 너무 컸던 것도 사실이다.

혁명 이후 초기 몇 년 동안의 정치사에서 놀랄 만한 것이 있다면 공공연한 정치적 테러의 기간이 비교적 짧았다는 것과 새로운 국가질서가 급속히 확립됐다는 점이다. (119쪽)


18세기 말 이래 중국사회를 괴롭혀온 마약문제는 1839년 아편전쟁 이후 이미 유행병처럼 퍼져 있었다. 국민당 정권 당시 대부분의 아편무역은 범죄조직이 장악하고 있었다. 국민당의 반아편법과 캠페인은 정권의 비효율성과 정치경제적 모순으로 무산되었다. 갱단조직들은 국민당에게 정치적으로 유용한 존재였고 부패한 관료와 경찰 역시 마약거래를 눈감아줌으로써 금전적 보상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정부는 거의 두 세기에 걸쳐 불거져온 이 문제를 불과 2년 만에 해결했다. 공산주의자들은 아편문제가 19세기 제국주의로부터 시작됐음으로 강조함으로써 애국적 감정에 호소하는 한편, 거물급 마약공급자 및 마약상에게는 사형을 비롯한 준엄한 형벌을, 소규모 마약상에게는 사면을, 중독자에게는 재활과정을, 그리고 대대적이고 전국적인 캠페인과 금연집회 등의 방법을 적절하게 활용해나갔다. 1952년이 되면 아편중독은 이제 더 이상 큰 사회문제가 아니었으며 마약중독자는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130쪽)


인민공화국의 경제정책은 크게 '소련식 중공업 모델'(초창기 노선)과 경공업의 비중을 조금 더 높이고 농촌에 조금 더 관심을 돌리는 '마오식 모델' 사이에서 왔다갔다 했고, 이를 둘러싼 당 지도부 내부의 권력투쟁에서 마오에게 자신의 노선을 관철시키는 것은 '1인 권력체제'를 만드는 과정과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저자는 권력을 갖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오가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키기 위해 권력을 가지려 했다고 보는 쪽인 것 같다. 


그러기 위해 마오가 동원한 방식은 말 그대로 인민주의, 당 지도부를 제치고 '인민의 대변자'로 나서는 것이었다. 이 과정은 당 지도부, 관료들, 지식인, 소련 추종자들을 상대로 한 투쟁과 숙청의 과정이기도 했다. 혁명 시기와 마찬가지로 인민에 대한 믿음, 전문가와 지식인과 관료에 대한 불신, 인간 '의지'가 우선이라는 생각, 젊은이들에 대한 신뢰 같은 것들이 물 위로 부상했다. 


(부르주아지를 부활시키고 활용한) '국가자본주의' 시대는 1952-53년에 정점에 이른 뒤 곧바로 개인 공업기업과 회사들이 국유화 또는 당시 더 일반적인 형태였던 공사합영으로 재편되면서 급속히 쇠퇴한다. 1956년에 이르면 도시경제의 사적 부문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꽤 규모가 있는 모든 공업기업과 상업기업이 사실상 국유화됐다. 그러나 국가자본주의는 인민공화국의 역사에서 단명했다 하더라도 자기에게 부과된 경제적 역할을 충분히 수행했다. 1952년에 도시의 상업과 공업은 번영하고 있었다. (134쪽)


정치적 경제적 안정이 일단 확보되자 공산주의자들은 도시주민 가운데 정치적으로 믿을 수 없다고 생각되는 부류에 대한 의존을 재빨리 불식해나갔다. 1951년 말부터 나타난 세 가지 운동, 지식을 주요 대상으로 삼았던 사상개조운동, 관료의 부패와 비효율성에 대항하는 삼반운동, 부르주아지에 대한 공격이었던 오반운동이 그것이다. (135쪽)


1953년 1월 공업화를 위한 제1차 5개년계획이 선포될 때 혁명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단계가 지나가고 사회주의 단계가 시작되었다는 선언도 함께 공포된다. 인민공화국이 설립된 지 4주년이 되는 1953년 10월 1일, 정부는 '사회주의 과도기의 총노선'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사회주의로의 이행'이 갑자기 선포된 것에 대한 책임이 상당부분 마오쩌둥에게 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마오는 모든 형태의 자본주의에 대해 인민주의적 성향의 적대감을 품고 있었고 따라서 사회주의는 자본주의를 전제해야 한다는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수용을 완강하게 거부해왔기 때문이다. (164쪽)


그럼에도 사회주의는 공업화를 필요로 한다는 주장은 중국 마르크스주의 저작 안에서 누차 강조되고 있었으며, 누구보다 이것을 가장 강조한 사람은 다름 아닌 마오쩌둥이었다. 1953년 당시의 시대적 요구는 공업화였으며 제1차 5개년계획은 본질적으로 중공업 발전을 핵으로 하고 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중국인들이 왜 소련의 발전모델을 그렇게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는지 이상할 정도다. (165쪽)


대략적인 윤곽은 1952년 가을 당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결정되었다. 국가계획위원회가 설립됐고 이후 몇 해 동안 더욱 전문화된 중앙정부의 경제부서와 계획, 조정을 담당하는 기구가 다양하게 만들어졌다. 제1차 5개년계획 기간 공업에 투자한 국가자본 가운데 88.8%가 중공업에 투자된 반면 경공업 투자비율은 11.2%에 불과했다. (169쪽)


조직과 기능 면에서 스탈린의 고스플랜과 비슷한 국가계획위원회가 1952년 11월 설립됐다. 이 기관을 처음 담당한 사람은 만주의 차르라고 불리던 가오강이었다. 만주는 중국의 어느 지역보다도 소련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소련의 정치, 경제방식이 가장 깊숙이 침투한 곳이기도 했다. 

제1차 5개년계획이 낳은 또 다른 정치적 결과로서 1954년에 국가감찰부가 중앙집권화되고 확대됐다. 광범위하고 강력한 관료기구인 국가감찰부의 역할은 공업부문의 비효율성과 부패를 감시하고, 각 지방이 국가의 경제지도와 경제지표로부터 이탈하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 

이 기관은 비밀경찰요원과 긴밀히 연결돼 있었고 소련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비밀경찰의 권력은 국가감찰부의 권력과 비례해 커져갔다. 그러나 이제 뤄루이칭의 공안부 산하로 들어간 중국 비밀경찰의 권력은 스탈린 시대 소련 비밀경찰의 무시무시한 권력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1950년대 중반 중국의 일반적인 정치구조는 중앙집권적이고 수직적인 관료지배라고 할 수 있는 소련의 국가구조와 점점 닮아가고 있었다. (174쪽)


중국 지도자들은 소련 경제방식을 중국에 필요하고 또 바람직한 것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러시아인이 중국을 정치적으로 지배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았다. 인민공화국의 첫번째 대대적인 숙청에는 이런 정치적 두려움이 깔려 있었다. 이 숙청은 앞으로의 중소관계를 예언하는 것이었다. 1953-54년 숙청의 대표적인 희생자는 가오강이다. 숙청을 둘러싼 문제의 핵심은 당시에는 노출되지 않았지만 만주지방에 대한 소련의 정치적 영향이었다. 

가오강은 1935년 산시성에서 공산당 근거지를 건설했던 사람 중 한 명이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고 국민당과의 내전이 시작되면서 가오강은 린뱌오의 군대와 함께 만주지방에 파견됐고 이곳 동북지방에서 당정기관을 관장하게 된다.

가오강의 정치적 몰락과 추종자들의 축출은 1953년 12월 정치국 회의에서 결정되었으며 1954년 2월 당 중앙위에서 공식적으로 승인된다. 가오강은 만주에서 '독립왕국'을 세우고 국가권력을 장악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비난을 받았다. 가오강은 이런 비난에 자살로 응답한 것으로 전해진다. 

만주를 무력으로 점령하고 있는 동안 소련은 만주 공업시설의 상당부분을 전리품으로 약탈해갔다. 그리고 이제 만주의 중공업기지가 소련의 원조를 받아 복구되고 있었던 것이다. 러시아인은 1950년에 설립된 중소합작 주식회사를 지배하고 있었고 중국 동부철도에 대한 권리를 계속 유지했다. 스탈린이 죽고 가오강이 제거된 뒤인 1955년까지도 이런 권리는 중국에 반환되지 않았다. 

가오강 사건은 동아시아에서 러시아 팽창주의의 주요 표적이 돼왔던 지역에서 소련이 우위를 점하는 문제와 밀접하게 연결돼 있었다. 스탈린 사후 소련의 통제력이 약화됨에 따라 베이징은 만주의 가오강을 제거하고 소련의 영향력에 대항할 만큼 자신감에 차 있었다. (182-183쪽)


(중공업 위주 개발정책과 농촌의 착취, 점점 늘어가던 농촌 내 계급분화와 관련해) 1955년 7월이 가기 전에 마오쩌둥은 독단적이고 극적인 방법으로 중국공산당 지도부 내 합의를 무산시켜버렸다. 이 사건은 '농업합작화에 관한 문제'라는 그의 연설과 함께 시작됐으며, 중국이 '농업사회주의'라는 독특한 마오주의의 길로 가기 시작했음을 의미했다. 

논쟁은 유례 없는 방법으로 '잠재워'졌다. 마오는 자신이 소수파에 속했던 중앙위에서가 아니라 당시 전국인민대표대회 개최를 앞두고 베이징에 올라온 각 성 및 지방의 당위원회 서기회의에서 연설했던 것이다. 결국 마오는 중앙위를 무시하고 당 전체에 호소하고 있었던 것이다. 10월이 돼서야 중앙위는 새로운 마오주의 정책을 공식 승인했다.
당 지도부가 농촌의 합작사가 너무 성급하게 건설되고 있다고 느끼고 있을 때 마오는 이 운동이 너무 더디게 진행된다고 선언했다. 사회적 역사적 변화에 대한 주의주의적 접근, 농민대중이 그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인민주의적 신념, 즉 혁명기간 마오주의를 특징지었던 주의주의와 인민주의가 부활했다. 또한 이 연설은 1949년 이후 공산주의 정책을 이끌었던 많은 이데올로기적 전제를 부정하는 것이었으며, 중국이 소련 모델을 버릴 것을 암시하고 혁명 이후의 역사무대에 마오주의가 등장했음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202-203쪽)


공업화가 진행되면서 과학기술연구의 빠른 발전과 더 많고 더 훌륭한 훈련된 기술인재의 육성이 요구됐다. 여기에 발맞춰 과학발전을 위한 12년계획을 수립하라는 지시를 하달했다. 동시에 마오는 농업생산에서 대(大)기술혁명을 가져올 수 있는 12년계획을 제안했다. 1955년 12월 정치국에 새로운 농업계획을 제시할 때 마오는 지식인들이 나라의 경제적 정치적 삶에 더 깊숙이 참가하게 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마오의 이 발언을 기점으로 "백 가지 꽃이 만발하게 하라, 백 가지 학문이 경쟁하게 하라"는 슬로건 아래 백화제방운동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228쪽)


1956년 9월 제8차 당대회에서 승인한 제2차 5개년계획 문건에서는 경제발전에 대한 마오의 비정통적 의견들이 대부분 무시되었다. 1955년 마오가 집단화계획을 신속하게 실행하기 위해  당 중앙위를 무시하고 직접 농촌간부와 농민에게 호소한 사건은 당 지도부 내에서 계속 성토대상이 되었다. 1956년 2월에 일어났던 스탈린과 1인 통치의 오점에 대한 흐루시초프의 비난은 마오의 입지를 축소시켰다. 결국 7차 당대회 이후 무려 11년만에 개최된 8차 당대회는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이 주도했다. 회의에서 기조보고를 한 사람은 마오가 아니라 그 두 사람이었으며 "마오쩌둥 사상에 의해 지도받는다"는 문구는 새로운 당헌에서 삭제됐다. (244쪽)


1957년 2월 마오의 연설 '인민 내부의 모순을 올바르게 처리하는 문제에 대하여'는 이렇게 마오가 당에서 상대적으로 권력을 상실했다는 점과 보수적인 국가와 당 기구들이 급진적인 사회개조를 가로막고 있다는 마오의 확신이라는 시각에서 읽어야 한다. 마오에게 시급한 현안은 자신이 제안한 대안적인 사회경제 발전정책에 반대하는 관료들의 힘을 깨부수는 일이었다. 2월의 연설은 마오가 '인민'에게 직접 연설하는 최고지도자로 부상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정당성을 확립하는 것이었다. 1955년 집단화 연설 때 당 외부의 회의장을 이용했던 것처럼, 이제 다시 마오는 당의 정식경로 바깥에서 정책상의 창의성과 이론적 혁신성을 선포하게 되었다. (245쪽)


열거된 모순 가운데 마오가 강조한 것은 지도자와 피지도자 사이의 모순이었다. 인민과 모순된 지도자가 바로 고위 당 관료일 수 있다는 가능성,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고위 지도자가 틀리고 인민이 옳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마오는 배제하지 않았다.

레닌주의 정당에는 오점이 있을 수 없다는 정설에 의문을 던졌다는 것은 정치적 의미가 있었다. 일반대중이 자유롭게 당을 비판할 수 있다면 이제 마오를 제외한 누가 인민을 대신하여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마오는 당의 주석일 뿐 아니라 인민공화국의 수뇌였다. 게다가 인민혁명의 지도자로서 대중과도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만약 인민이 자유롭게 말할 수 있다면 마오야말로 누구보다도 뛰어난 대변자였다. "인민 내부의 모순"을 언급하면서 마오는 자신을 레닌주의 정당의 계율로부터 분리시켰으며, 나아가 인민의 대표라는 독특한 역할을 통해 당을 외부에서 비판할 수 있었다. (247쪽)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계급투쟁은 사회주의 아래에서도 계속되며 그것은 주로 사상투쟁의 형식을 띤다는 관점이었다.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 자체는 전투에 가담하지 않겠지만 ... 이제 계급투쟁이 각 사회계급 간의 투쟁이 아니라 계급이데올로기 간의 투쟁 문제가 됐기 때문에 올바르지 못한 사상을 표현하는 사람들을 '계급의 적'으로 비난할 수 있는 길이 열린 셈이었다. 

공산당과 당 고위 지도자들이 사상적으로 잘못을 범할 가능성이 있다면 그들 역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당내에 존재하는 사상, 정책상의 갈등은 계급갈등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당 자체가 계급투쟁이 일어나는 정치무대가 될 수 있다는 말이었다. (249쪽)


농업집산화, 백화제방, 대약진 운동 등에서 보이는 마오의 인민주의, 주의주의적 속성은 조급증으로 나타났고 결과적으로 성과가 적었거나, 이내 실패로 드러나 방향을 바꾸거나, 심지어 재앙이 되기도 했다.


마오는 경제적 후진성이 공산주의로 이행하는 데 장애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산이라고 여겼다. 1958년 마오는 '빈곤과 백지' 상태가 혁명에 유리하다는 이론을 발표했다. (300쪽)


1958-1960년에 일어난 다소 이상한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회변화와 경제변화의 관계에 대한 마오주의의 가정을 염두에 두는 것이 중요하다. 생산의 급속한 증가를 지칭하기 위해 몇 년 전부터 사용해온 '대약진'이라는 용어가, 마오와 마오주의자들에게는 이제 사회적 의미도 갖게 되었다. 경제발전의 약진을 기대할 뿐 아니라 사회관계의 질적인 전환도 기대하고 있음을 의미했다. 

경제적 결핍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지금 당장 공산주의적인 사회조직형태를 도입하고 공산주의 의식을 배양해야만 공산주의의 미래를 약속할 수 있었다. (301쪽)


1958년 12월 우한회의가 열리는 동안 중앙위는 마오가 스스로 국가주석직에서 물러나기로 했다고 선포했으며 주석직은 1959년 4월 이후 류사오치에게 넘어갔다. 마오는 더 중요한 당 주석직은 계속 유지했으나 이전처럼 당 기관을 완전히 장악하지는 못했다. (320쪽)


1959년 여름에 이르자 대부분의 (농촌) 인민공사는 유명무실한 행정조직이나 다름없었다. 봄과 여름에 연이어 발생한 홍수와 가뭄은 농업생산과 국가경제 전반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경제위기가 심각해지자 마오주의자와 당 관료 사이의 정치투쟁은 격렬해졌다. 

그해 루산회의에서 공산당 지도부 앞에 놓은 중요한 문제는 인민공사와 대약진의 미래, 마오의 정치적 장래, 인민해방군에 대한 통제였다. 이 세 가지 문제는 마오와 펑더화의 사이의 극적인 대립 속에서 한꺼번에 터져나왔다. 펑더화이는 1928년 징강산에서 마오와 합류한 이후 홍군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한국전쟁 때도 중국군을 지휘했던 노련한 혁명가였다.

1959년 봄 펑더화이가 국방부장 자격으로 군사대표단을 이끌고 소련과 동유럽을 방문했다. 6월 중순 돌아온 펑더화이는 대약진운동을 대대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의 비판은 한 달 뒤 마오에게 직접 의견서를 제출하면서 절정에 이른다. 펑더화이는 공사화와 국가경제의 붕괴, 대중의 이탈, 억압적인 경제적 정치적 환경을 비난하고 이 몯가 마오주의자들의 '프티부르주아적 광신'에서 기인한다고 주장했다. 

펑더화이가 돌아오자마자 흐루시초프는 일방적으로 1957년의 중소협정을 무효화했고 7월 18일 폴란드에서 행한 연설에서는 중국의 인민공사를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마오는 펑더화이가 "조국을 배반하고 외국과 내통했다"고 확신했다. (322-323쪽)


1959년 말 마오는 경제상황의 심각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대약진에 종지부를 찍을 수밖에 없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마오는 이후 몇 달 동안 당무와 정치생활에서 조용히 물러나 있었다. 사실상 마오는 이제 더 이상 당을 혁명적인 사회변혁의 도구로 여기지 않고 있었다. (326쪽)


1960년 태풍은 남부와 랴오닝 지방에 유례없는 홍수를 불러왔고 황허 하류 유역은 가뭄이 극심했다. 여름이 되자 경제위기는 더욱 악화되었다. 흐루시초프가 250여곳의 중국기업체에서 일하던 1400명의 소련 과학자와 공업전문가들을 갑자기 소환했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대약진운동과 중국의 '소련 모델' 포기에 분노했고, 중국은 1958년 진먼도-마쭈도 위기와 1959년 인도와의 국경분쟁 때 소련이 지원해주지 않은 것에 분개했다. 1959년 9월 말 흐루시초프의 베이징 방문은 오히려 적대감만 심화시켰고 공식 코뮈니케조차 발표되지 않았다. 

1960년 4월 중국은 국내정책과 국제관계에서 소련으로부터 독립했음을 사실상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그것은 마오 자신이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레닌주의 만세'라는 논문의 형태로 나타났다. 6월 부쿠레슈티에서 열린 루마니아 공산당대회에서 흐루시초프는 중국을 격렬하게 공격했고, 중국 대표 펑전 역시 같은 방식으로 응수했다. 몇 주 뒤 흐루시초프는 중국에 파견된 전문가들을 본국으로 소환했고, 설계도도 가져오라고 지시한 것이 분명했다. 

이 조치는 러시아 전문가들도 놀랄 만큼 충격적이었다. "9월 초 중국에는 외교관과 일부 무역관료를 빼고는 단 한 명의 소련 시민도 남아 있지 않았다. 갑작스런 철수로 많은 수의 새로운 기계설비와 공장건설이 중단됐고 기존 공장의 조업활동 역시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러시아 설계에 따라 건설된 설비의 예비부품을 더 이상 구할 수 없었으며 러시아의 도움으로 개발돤 광산과 발전소는 문을 닫았다. 러시아가 설계도와 장비 인도 계약을 일제히 취소해버렸기 때문에 새로운 사업계획도 전부 폐기되었다. (328-329쪽)


1960-1962년 '고난의 시기'에 곡물생산략은 급감했고 1인당 식량생산은 1970년대 초에 가서야 대약진 직전 수준을 회복할 수 있었다. 인구학자들은 기근 시기 아사자수가 1500만명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다른 요인들까지 합치면 사망자가 3천만 명 정도 됐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1949년 혁명의 가장 큰 업적의 하나가 만성적 기아로부터 중국을 완전히 해방시킨 것이라는 사실은 중국 안팎에서 일반적으로 인정하는 부분이다. 대약진의 역사적 사실은 이런 믿음을 깨뜨린다. 그러나 이로 인해, 유행하는 묘사들처럼 마오를 스탈린이나 히틀러 같은 대량학살자로 규정해서는 안된다. 아무리 결과가 참혹했다고 하더라도 의도하지 않았고 예측하지 못했던 정치적 행위의 결과와, 계획적이고 고의적인 대량학살 사이에는 엄청난 도덕적 차이가 있는 것이다. (330-331쪽)


대약진운동은 실패로 끝났고 공산당 내에서는 '테르미도르의 반동' 같은 흐름이 일어난다. 이 시기 마오가 당 지도부와 거리를 두게 된 과정을 놓고, 저자는 마오 특유의 '관료주의에 대한 혐오'를 한 요인으로 거론한다. 마오는 젊은 시기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이기 전에 무정부주의의 영향을 먼저 받았으며, 마르크스의 저작을 읽으면서도 파리코뮌 같은 이상화된 모델에 매력을 느꼈다는 것이다. 


저자가 보기에 인민공화국의 관료제 권력은 "적어도 소련관료제에 비하면 제한적"이었다. "이런 제약은 두 가지 요인에서 비롯되었다. 하나는 혁명유산의 영향, 즉 1930년대와 40년대의 영웅적인 투쟁기간에 형성된 평등주의적 가치관과 대중노선의 반 위계적 원칙에 따른 가치들의 영향이 계속 남아 있다는 점이었다. 더 중요할 지 모르는 두 번째 요인은 마오 개인의 엄청난 권위와 명성이었다. 마오는 관료제에 대한 깊은 적대감과 함께 인민과의 특별한 사적인 관계, 그리고 모든 공식 조직기구를 초월하는 지도력에 대한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341쪽)


"공산주의 조직기구에서 개인적인 지배권을 유지하는 일에 마오가 스탈린보다 관심이 덜했던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그의 방법은 스탈린과 많이 달랐다. 스탈린이 관료들끼리 서로 견제하게 하는 방법을 즐겨 사용했다면, 마오는 관료에 대항하여 대중운동을 일으키려는 경향이 있었다. 마오는 당 관료 수뇌부를 넘어서, 공식 관료기구를 대부분 그냥 건너뛰어 막바로 일을 진행해나갔던 것이다." (342쪽)


대약진 운동의 실패 뒤 생산이 급감하고 물자가 부족해지고 운송 분배체계가 와해되고 국가계획이 붕괴되고 기근까지 일어나자 "규율, 질서, 조직의 미덕을 강조하는 레닌주의가 부활"하면서 "관료화는 1960년대 초 중국의 경제, 사회, 정치 생활의 모든 면을 지배"(343쪽)하게 됐다. 이 반동의 기간 동안 공산당은 전통적인 레닌주의 전위당으로 돌아갔고 마오주의자들이 주장한 '대중의 자발성'은 비난의 대상이 됐다. 1962년 마오가 다시 당 중앙위 연설에서 '수정주의'를 비판하고 사상교육운동을 주창해 중앙위 승인을 얻었지만 사회주의 교육운동은 관료의 저항과 대중의 무관심 속에 수포로 돌아갔다. 


"20여 년의 혁명투쟁을 거치면서 자신이 세우고 이끌었던 당을 지배할 수 없다는 것은 그에게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더욱 참을 수 없었던 것은 당이 혁명기구에서 보수적인 관료기구로 변해버린 모습, 자신이 그토록 오랫동안 맞서 싸워온 모든 관료주의적 행위에 굴복해버린 당을 살아생전에 보고 있다는 사실과 이를 막을 힘이 자신에게 없다는 사실이었다." (354쪽)


"마오주의의 관심은 단순히 권력추구에만 있지 않았다. 마오가 정치적 패권을 장악하려 했다는 것, 자신의 길을 막고 있는 관료제라는 장애물을 제거하려 했다는 것은 분명 진실이다. 그러나 마오는 관료제를 악으로 간주했고 당 관료들이 추구하는 사회경제정책 역시 악으로 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권력상실을 참을 수 없었고, 중국사회가 가고 있는 방향에 대해서도 똑같이 참을 수 없었다." (356쪽)


1958년 대약진운동을 시작할 때 마오가 낙관적으로 묘사했던 '깨끗한 백지'는 1960년대 초 온갖 정치적 사상적 얼룩으로 더러워진 도화지로 변해버렸다. 1964년 마오는 오랜 친구인 앙드레 말로와의 대화에서 "1949년까지 존재했던 중국의 사상 문화 관습을 사라져야만 하고 아직 존재하지 않는 프롤레타리아 중국의 사상 관습 문화가 나타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계승이 아니라 파괴가 1966년 문화대혁명의 막이 올랐을 당시 마오주의의 훈령이었다. (438쪽)


마오쩌둥이나 그 밖의 공산당 지도자들의 개인적인 정치적 야망과 역학관게가 문화대혁명의 발발과 그 고통스러웠던 진행과정에 아주 만이 연루돼 있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이 극도로 기이한 정치적 동란이 혁명 이후 일련의 사회문제 즉 커져가는 불평등, 지도자와 대중 모두에게서 사회주의 비전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현실, 새로운 관료 엘리트의 공고화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벌어졌다는 점은 오늘날 쉽게 무시되고 있다. 마오주의자들이 알리려고 했던 사회 정치 문제는 실제 현실에서 나타난 문제들이었다. (439쪽)


(공산당의) 기만은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조잡하게 해석해 각 계급을 사유재산의 소유 여부로만 편협하게 정의함으로써... 생산수단의 사유가 소멸된 사회에서는 어떤 착취계급도 나타날 수 없다는 논리가 뒤따랐다. 이제 정치적으로 힘을 잃은 마오쩌둥은 사유재산이 소멸한 혁명 이후의 사회에서 계급관계를 분석하는 문제, 특히 새로운 사회에서 탄생한 새로운 계급이라는 문제에 직면했다. 그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욱 강력하게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계급투쟁이 계속되고 있음을 강조했다. 여기서 다가올 문화대혁명의 주된 슬로건의 하나인 "계급투쟁을 잊지 말라"가 탄생했다. (446쪽)


문화대혁명 직전 몇 년 동안, 마오는 지금까지 권력을 장악했던 어떤 마르크스주의자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던 결론에 도달했다. 이제 그는 사회주의 사회가 새로운 착취계급을 탄생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막는 주요 장애물은 과거의 부르주아적 잔재가 아니라 오히려 오늘의 관료들이었다. (447쪽)


새로운 관료지배계급에 대한 마오의 인식이 독특했던 점은 그 현상에 대한 분석이 아니라 이 사상이 바로 공산주의 국가의 지도자에게서 나왔다는 사실이다. 마오의 관념은 대단히 이단적이고 정치적 폭발성이 큰 것이었다. 공산당 정권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오가 보기에 중국의 관료들은 재산은 없지만 기능적으로는 부르주아지였으며 적어도 그렇게 되어가고 있었다. 

마오가 그토록 환멸하게 된 관료들은 한때는 그의 혁명동지였으며 간부들이었다. 이들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그가 이끌었던 혁명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마오는 이들 대부분이 원래 과거의 모습대로 개혁될 수 있고 사상적으로 개조될 수 있다고 믿고 싶었다. 문화대혁명은 혁명운동이라기보다는 비폭력적 개혁운동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엄청난 폭력을 초래했던 것은 마오의 마음상태가 아니라 당시 중국의 사회조건과 더 깊은 관련이 있었다. (448-449쪽)


류샤오치는 이제 막 일어나고 있던 이 운동을 당의 조직적 통제 아래 두기 위해 서둘러 공작조를 각 학교에 파견했다. 공작조는 당 관료 자녀들이 이끄는 '조반' 학생조직을 새로 만들었다. 이들은 문화대혁명의 공격방향을 마오주의자들의 목표인 '실권파'에서 '부르주아적인 권위'와 계급출신이 '안 좋은' 사람들로 바꾸려 했다. '부르주아적인 권위'는 말할 것도 없이 대부분 지식인들을 의미했는데, 이들은 정치적 공세 앞에서 자신을 지킬 힘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알려진 사실과는 정반대로,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지식인에게 자행된 끔찍한 박해는 급진적 마오주의자들이 아니라 마오주의자들의 공격으로부터 당 관료를 보호하기 위해 당이 조직한 조반파에 의해 시작되었다. (459쪽)


지식인 전반에 대한 공격 뒤에 감춰진 정치적 의도는 한결 같았다. 다름 아닌 기존의 당 기구를 보호하는 것이었다. 

혁명 이후 중국역사에 나타난 아이러니의 하나는 구정권 아래에서 억압받는 계급에 속했던 혁명가들이 이제 새로운 사회질서 속에서 사회적 정치적으로 보수적이 돼간다는 사실이었다. 대조적으로 해방 이후의 중국에서 사회적 정치적으로 급진적이었던 사람은 종종 1949년 이전의 중국에서 특권계급을 구성했던 가정의 자녀들이었다. 이들이 관료적 특권에 대한 급진적 마오주의자들의 비판과 더 큰 평등에 대한 호소에 그렇게 열정적으로 반응했던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반면 전자에 속한 사람들은 공산당을 방어하기 위해 모였고 그들의 이른바 혁명 역량을 옛 특권적 사회계급의 자녀들을 공격하는 데 집중시켰다. (460쪽)


8월 5일 마오쩌둥은 중앙위 회의실 문에 자기가 쓴 대자보를 붙여놓았다. 대자보에는 '부르주아 독재'를 시행하는 당 반대세력들의 "사령부를 폭파하라"고 학생 추종자들에게 호소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8월 18일 홍위병이 당과 국가의 권력기구에 대항하는 대중혁명의 선봉으로 임명되었다. 동시에 마오의 가장 절친한 동지로 알려진 린뱌오가 마오의 비공식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이때부터 마오주의자들은 당 조직 전체와 고위 지도자 대부분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류사오치와 당 총서기 덩샤오핑에게 공격이 집중되었다. 

1966년 11월 이후 류샤오치는 이미 더 이상 공식석상에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는 체포돼 베이징에서 허베이로 이송되는 도중인 1969년 폐렴으로 사망했다. 이 사실은 10년이 지난 뒤에야 밝혀진다. 1966년 후반 이후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국가원수의 의례적 직무는 인민공화국 부주석이었던 쑹칭링이 맡았다.

이 사건이 그토록 독특한 현상이었던 것은 기존 절치질서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라고 요구한 사람이 다름 아닌 그 질서를 세운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에 대한 더 중요한 의문은 마오가 왜 반란을 일으키라고 호소했는가가 아니라 도대체 왜 수천만 명에 이르는 보통의 중국시민들이 그의 호소에 반응했나 하는 것이다. (464-465쪽)


초기의 희생자 중 하나는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희곡작가인 라오서였다. 그는 홍위병들에 의해 끊임없이 학습대회와 투쟁대회에 참가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집은 약탈당했고 그의 책은 모두 불살라졌다. 1966년 8월 말, 67세의 노작가는 베이징 근처의 타이핑 호수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호수에 투신자살한 것으로 보도됐다.

그러나 이보다 더 처절한 싸움은 홍위병 내부에서 일어났다. 보수파와 (당이 꾸렸지만 이제는 대중혁명군으로 바뀐) 조반파 사이에 끝없는 폭력과 보복의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농촌에 노동하기 위해 파견됐던 젊은이들이 문화대혁명에 참가하기 위해 도시로 돌아오면서 홍위병의 수가 점점 불어났고 이 운동의 폭력성과 파벌투쟁이 격화됐다. 도시에서의 교육과 취업 기회를 잃은 사람들은 청년들 중에서도 가장 불만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467쪽)


문화대혁명은 굴절되고 또 굴절되는 과정을 거쳤고, 한때의 급진주의자들은 나중에는 다소 보수적으로 변한 마오에게 배반당한다. 초창기 지식인들에 맞섰던 것이 당에 의해 조직된 조반파였다는 역설처럼.


모든 파벌이 폭력을 사용하고 잔혹행위를 저질렀지만 그 중에서 가장 살벌한 잔혹행위와 가장 큰 인명희생은 인민해방군이 1968년 여름 급진적인 홍위병 조직과 노동자 조직을 전면적으로 억압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1980년 사인방에 대한 기소장은 이 비극을 극좌분자의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 사실상 사망자의 대다수가 지방 군부대에 학살된 급진적인 홍위병들이었다는 사실은 언급하지 않았다. 

문화대혁명 동안 지식인이 겪은 고난은 소름끼칠 정도로 (외국에서) 자세하게 묘사되고 있는 반면, 인민해방군에 의해 자행된 대량학살은 거의 언급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이 시대의 잔혹행위를, 대중 소설에서 잘 나타나듯이 급진적 마오주의자들 책임으로 모호하게 돌리고 있다. 그러나 급진적 마오주의자들은 지식인 못지않게 마오쩌둥이 일으킨 문화대혁명의 희생자들이었다. 그 수로 따지자면 전자가 후자보다 더 많은 희생을 치렀다. (508-509쪽)


문화대혁명 이후, 마오의 '말기' 시대는 마오에 대한 개인숭배와, 4인방 대 린뱌오의 싸움과, '비림비공(린뱌오를 비판하라, 공자를 비판하라)' 같은 역사논쟁과, 그 모든 폭풍우 속에서도 진시황의 충성스런 재상 이사(李斯) 같은 능력을 발휘한 저우언라이의 안정적인 지도력으로 채워졌다. 소련은 동유럽 침공 여파로 지도력과 신망을 잃었고 저우언라이의 중국은 미국과 손을 잡았다. 


문화계와 관영언론을 제외하면 사실 알려진 것만큼 중요하지는 않았던 4인방은 결국 몰락했다. "사인방의 정치적 지위와 정치생명은 병약해져가는 마오쩌둥의 비호와 지지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오는 사인방이 제창한 정책과 사상에 전반적으로 동의했지만 그들의 정치수단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렇더라도 사인방은 단순한 꼭두각시는 아니었다. 사인방이 대표했던 부류는 문화대혁명 이후에 등장한 관료의 일부, 특히 문화대혁명 덕분에 당에 들어오거나 승진한 수백만의 젊은 하급간부들이었다. 이들은 문화대혁명 기간의 진정한 급진파가 아니었다. 이들은 교묘하게 당내에서 승진가도를 달린 야심가나 기회주의자들이었다. 덩샤오핑이 원로 관료들의 대표하고 옛 간부들의 복귀를 상징했다면, 사인방은 새로운 간부들의 이익을 대표했다." (566-567쪽)


승리한 것은 원로 간부들이었다. 덩샤오핑의 시대가 시작됐다. 저자는 그 시대의 뿌리를 도리어 마오에게서 찾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이는 중국혁명에 대한, 마오에 대한 저자의 평가와 이어져 있는 부분이다.


종국적으로 마오는 사회주의의 건설자로서보다는 경제적 근대화를 이룩한 사람으로서 더 성공적이었다. 마오주의의 경제적 유산을 비판하는 글들은 대개 업적보다는 결점에 더 주목하고 있지만, 마오쩌둥 시대에 공업총생산은 38배, 중공업생산은 90배 늘었다. 그것도 아주 미약한 근대적 공업기반에서, 그 생산마저 외세의 침략과 내전의 피해로 절반이나 감소한 상태에서 시작해 그런 결과를 낳았다. 마오쩌둥 시대 전체를 보면 중국의 순생산에서 공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23%에서 50%로 증가했고 농업 비중은 58%에서 34%로 감소했다. (583쪽)


마오주의 경제의 기록은 각종 폐단에도 불구하고 근대공업발전의 기초적인 토대를 닦은 한 시대의 기록이었다. 이런 업적은 외부의 지원이나 원조를 거의 받지 않고 중국의 미약한 물질적 자원에만 의존해 중국인 자신의 힘으로 이룩한 것이라는 점에서 더욱 놀랍다. 1950년대에 극히 제한적으로 이뤄졌던 소련의 원조를 제외하면-이마저도 비용과 이자를 모두 상환했다- 마오쩌둥 시대의 공업화는 외국의 차관이나 투자 없이 진행됐다. 1970년대 말까지 사실상의 자급자족 상태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요인은 한때 신성시됐던 '자력갱생' 원칙과 적대적인 국제환경이었다. 마오주의 시대를 마감하면서 중국은 발전도상국 가운데 특이하게도 외채나 국내 인플레이션이라는 짐을 지고 있지 않았다. (587쪽)


마오의 산업혁명은 중국인민에게 고된 노동과 많은 희생을 요구했다. 그러나 E H 카는 이렇게 경고했다. "위험은 우리가 혁명이 낳은 거대한 오점, 인간의 고통스런 대가, 그것의 이름으로 자행된 범죄를 감추는 데 있지 않다. 위험은 우리가 모든 것을 망각해버리고 싶어할 뿐 아니라 그 엄청난 업적을 아무렇지 않게 무시해버리고 싶어 한다는 사실에 있다."
사회적 대격변은 이루지 못할 큰 기대를 불러일으킨다. 기대가 좌절됐을 때, 꽤 오랜 시간 동안 실제로 이뤄진 역사적 성취가 무시되고 잊혀지면서 환멸감과 냉소주의가 뒤따른다. 우리의 인식에 깊이 박힌 것은 대약진과 문화대혁명의 오점이다. 이런 역사적 모험이 처참한 실패로 끝나고 엄청난 인명의 희생을 초래했다는 것을 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미래의 역사가들은 이런 실패와 죄상을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인민공화국 역사에서 마오주의 시대를 세계역사상 위대한 근대화를 이룩한 시대의 하나로, 그리고 중국인에게 커다란 사회적 인간적 이득을 가져다준 시대로 틀림없이 기록할 것이다. (589쪽)


덩샤오핑 시대도 민주주의와 자유라는 점에서 보자면 마오의 시대 못잖게 선동과 이용과 배반이 연속된 시기였다. 


1978년 11기 3중전회 결정 가운데 이후에 가장 칭송받는 부분은 "당 공작의 중심을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로 옮긴 것"이었다. 그것은 이제부터 근대적 경제발전에 그 밖의 모든 이해관계를 종속시키는 것을 뜻했다. 11기 3중전회는 계급투쟁 또는 최소한 '광포하고' '대중적인' 성격의 투쟁을 종식시키고 (저우언라이의 유산인) 농업, 공업, 국방, 과학기술의 4개 현대화에 유리한 정치사회적 국면을 조성하길 바랐다. 또한 시장조절과 계획조절의 병행을 제시함으로써 덩샤오핑 시대를 지배할 자본주의 방식의 개혁을 정치적으로 처음 승인했다. (610쪽)


1978년 마지막 몇 달 간 덩샤오핑이 권좌에 오르는 것을 도와주었던 민주활동가들이 1979년 초에 이르자 수와 투쟁성 모두에서 크게 증대하고 있었다. 이에 대한 억압은 1979년 봄 정부가 비공식 잡지와 조직을 금지하고 민주운동 지도자를 구속하면서 시작됐다. 가장 먼저 체포된 사람은 웨이징성으로, 그는 '탐색'이라는 잡지의 편집장이었으며 덩샤오핑과 마오쩌둥 모두를 비판했다. 그는 인민해방군의 베트남 침공에 대한 군사기밀을 외국 신문기자에게 누설한 혐의로 고발됐다. 사실 웨이징성은 베트남 침공에 저항했던 극소수의 중국시민 중 하나였다. 1979년 10월, 하루에 걸친 재판에서 그는 15년형을 선고받았다. (612쪽)


1981년 봄이 되자 만발했던 민주화운동은 공공장소에서 모두 자취를 감췄다. 사실 민주화운동은 많은 대중의 지지를 받은 적이 결코 없었다. 부분적으로는 마오 이후의 정권이 사회생활의 전반적인 탈정치화를 조장해왔기 때문이다. 덩샤오핑 정부는 문혁 10년 동안 냉소적이 돼버린 대중의 사상적, 정치적 공허감을 채워줄 새로운 이상을 제시하지 못했다. 단지 더 나은 물질생활을 약속하고 백화점 진열장에 오른, 그리고 이전에 혁명 슬로건이 나열됐던 광고판에 나타나는 새로운 많은 소비제품을 구입할 것을 시민에게 권장할 뿐이었다.
민주화운동이 붕괴되는 동안 공공연한 저항은 고사하고 일반의 관심조차 거의 없었다. 말하자면 민주화운동은 국가의 억압과 대중의 정치적 무관심에 희생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중에서 가장 눈에 띄게 침묵을 지켰던 사람들은 바로 중국의 지식인들이었다. (613쪽)


후야오방은 레닌주의 당 내에서 민주적 가치와 절차를 중요하게 여긴 보기 드문 지도자였다. 마르크스주의 전통에 내재하는 자유주의적 요소에 끌렸던 그는 덩샤오핑 시대 초기에 마오 시대의 정치적 마녀사냥, 특히 반우파투쟁과 문화대혁명 과정에서 희생된 지식인과 관료의 명예회복을 실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덩샤오핑이 1983-84년 일으킨 반정신오염운동으로부터 지식인들을 보호하는 데 후야오방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했다. 또한 1980년대 초 짧은 시기에 걸쳐 후야오방은 민주개혁을 촉구하고 관료 부패를 폭로하던 인민일보의 말없는 후원자이기도 했다. 많은 지식인과 학생들은 그를 진정으로 존경했다. (670쪽)


후야오방만큼 폭넓은 존경을 받지는 못했지만 덩샤오핑의 또다른 제자로 자오쯔양이 있었다. 문화대혁명 기간 쫓겨나기도 했던 자오쯔양은 1972년에 광둥성 당 위원회 서기로 복귀했다. 거기서 그는 약자로 '리이저'라 알려진 젊은 민주활동가들을 조심스럽게 도왔다. 그러나 자오쯔양이 덩샤오핑의 눈에 들게 된 것은 1970년대 말 쓰촨성 지도자로서 추구했던 혁신적인 시장개혁정책 때문이었다. (671쪽)


덩샤오핑 시기에 공산당은 노동자 보호를 줄이고 국영기업들을 민영화하고 외국 투자를 유치해 '세계의 굴뚝'인 지금의 중국을 만들었고, 그 과정에서 가장 먼저 이득을 본 것은 공산당 관료와 그 가족들이었다. 마이스너는 중국이 자본주의화했지만 "그것은 특별한 종류의 자본주의였다"면서 관료자본주의를 가장 큰 특징으로 꼽았다. 


"여기에 속한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의 계급으로서 공통된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는 의식이 거의 없는 무형의 집단을 이루고 있었다. 이 새로운 부르주아지는 아직 그들만의 계급의식을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부르주아지가 보편적으로 갖고 있는 쾌락에 대한 욕망을 확실하게 갖고 있었다."


"인민공화국 관료자본주의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개별 관료와 관료집단이 정치적 영향력을 이용해 사적인 돈벌이 사업을 벌이거나 후원한다는 것뿐만 아니라 관료기구 전체가, 원하든 원치 않든 그들이 자본주의 기업으로서 기능할 수밖에 없는 시장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중앙정부가 관료기구의 예산을 대폭 삭감하자 초등학교에서 비밀경찰에 이르기까지 국가기관은 부족한 예산을 벌충하기 위해 각종 사업을 벌이고 있다." (666쪽)


"이들은 경제적으로 기능하기 위해 공산주의 국가에 의존하는 계급이다. 또한 노동계급과 자유노조로부터 정치적으로 보호받기 위해 국가에 의지하는 계급이다. 요컨대 중국의 부르주아지는 강력한 민주주의적 잠재력을 갖는 계급이 아니다. 따라서 공산당 독재에 대한 심각한 도전은 국가가 후원하는 자본주의의 수혜자가 아니라 오히려 그 희생자로부터 나올 것 같다." (668쪽)


빈부격차와 노동계급의 희생이 결국 1989년의 민주화운동을 불렀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것은 단순히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운동이 아니라, 사회주의 국가의 배신에 맞선 일하는 이들의 반격이었다는 것이다. 


저자의 통찰력이 빛을 발하는 부분은 이런 것들이다. 지금이야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릴 만한 것들이지만, 현대 중국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문혁은 그저 홍위병의 난동으로, 마오는 그저 대기근을 부른 독재자로, 덩샤오핑은 중국의 경제개혁을 이끌어온 개방적인 지도자로, 톈안먼 사태는 더이상 참지 못하게 된 중국인들이 민주주의를 요구하며 일으킨 시위로만 묘사하던 때에 저자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점을 계속 강조하고 제시해보였다.


1987년 후야오방이 당 지도부에서 축출된 후 따돌림 당했던 사람들이 1989년 민주화운동의 지적 기원을 제공했다. 1986-87년 겨울의 학생시위 이후 당에서 제명되고 대학에서 해임된 팡리즈를 비롯한 유명 지식인들이 1988년 여름과 가을에 베이징 대학 등에서 학생들이 주관하는 비공식 세미나에 참석해 강연을 했다. '민주살롱'이라 불린 이런 모임들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베이징대학 역사전공 학부생이며 미래의 민주화운동 지도자가 될 왕단이 조직한 모임이었다. (691쪽)


1989년 5월 13일 오후, 500여명의 학생들이 천안문 광장으로 행진해갔다. 중국 정부가 이틀 뒤 그곳에서 고르바초프를 환영하는 공식 행사를 거행할 예정이었다. 고르바초프는 중국에서 인기가 좋았다. 그의 글라스노스트 정책, 외향적 성격, 공산주의 체제를 민주화한다는 약속은 중국에서 종종 대중과 거리감을 두는 덩샤오핑의 성향 및 그의 정치적 보수성과 대비됐다. 게다가 고르바초프는 1959년 흐루시초프와 마오의 험악했던 만남 이후 중국을 방문한 첫 소련 지도자였다.

전세계의 기자들이 고르바초프와 덩샤오핑의 만남을 취재하기 위해 베이징에 몰려들었다. 때마침 들어와 있던 수많은 텔레비전 카메라는 뜻밖에도 중국 민주화운동의 흥망을 전세계에 방송하게 되었다. 덩샤오핑은 당혹스럽게도 고르바초프를 환영하는 공식행사를 5월 15일 비행장에서 급하게 치러야했다. 소련 지도자는 베이징에서 머무는 동안 실내행사에만 참석했으며 5월 18일 상하이로 떠날 때까지 대중의 시선으로부터 차단돼 있었다. 

이 사흘 동안 민주화운동에 대한 대중의 지지는 엄청나게 커져갔다. 동시에 군사력을 사용해야 한다는 덩샤오핑의 결심 역시 확고해져갔다. 총서기 자오쯔양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당 중앙정치국은 이 결정을 마지못해 승인했다. (699쪽)


5월 17일에는 100만명이 훨씬 넘는 시민이 천안문 앞을 채웠다. 40년 전 인민공화국 성립 이래 최대 규모의 대중집회였다. 더 놀라운 것은 계층별, 직종별 대표집단의 다양성, 그리고 자신의 소속기관과 노동단위를 높이 들어올린 깃발에 선명하게 드러내려는 열망이었다. 상당수 관료와 당 간부까지 그것을 지지했다는 심각성은 시위 참가자들의 규율 잡힌 행동과 흥겨운 모습에 가려졌다. '중국의 우드스톡'이라 불린 이 운동에서 중국 젊은이들은 1960년대 서양의 급진적 청년운동을 모방하고 있었다. 춤을 추고 가요를 불렀으며 통기타 가수와 록 스타들이 합류했다. 그들은 즉흥연설을 하고 열띤 정치토론을 벌였다. 일본과 한국의 급진적인 학생들을 모방해 색깔 있는 머리띠를 둘렀다. 그들은 광장에 세운 임시 자치도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업무 즉 음식물 공급, 기본적인 쓰레기 처리와 의료체계의 조직, 탈진한 단식투쟁자를 병원으로 후송하는 구급차 운영 같은 공공업무를 조직적으로 준비했다. (700-701쪽)


당내 경력이 끝나가고 있는 5월 19일 이른 아침 자오쯔양은 단식투쟁자들 사이를 하염없이 배회하고 있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내가 너무 늦게 왔다"고 말했다. 이 회한섞인 행동은 6월 말 공산당 총서기직에서 정식 해임되는 과정에서 쏟아진 비난의 빌미가 됐다. 덩샤오핑 시대의 나머지 시간 동안 자오쯔양은 베이징 중심가의 한 빌라에서 편안하지만 침묵하면서 조용히 살아야 하는 가택연금 상태에 있었다. (702쪽)


학생들 상당수가 노동자들이 규율을 지킬 줄 모르며 폭력성이 있다는 이유로 민주화운동에 노동자들이 참가하는 것을 반대했다. 첫 몇 주 동안 학생 시위대는 노동자와 다른 시민들을 배제하기 위해 서로 팔짱을 끼고 행진했다. 그러나 5월 중순에 이르러 거대해진 운동이 국가와의 투쟁에서 거의 정점에 이른 것이 명백해지자 학생들은 그들에게 지지를 보내고 그들을 보호해주는 이 노동자들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704쪽)


덩샤오핑 정권이 계엄령 선포를 실행에 옮기는 데에는 거의 2주일이나 걸렸다. 6월이 시작되면서 덩샤오핑은 엄청난 군사력을 집결시켰다. 20만의 군대가 베이징을 에워싸고 있었다. 중국의 수도를 외국군대가 포위한 것 같았다.

노동자와 시민들의 대응은 영웅적이었다. 그들은 도시를 지키고 천안문 광장에 남아 있던 학생들을 지키기 위해 놀라운 행동을 했다. 인민해방군 탱크와 병력수송차량이 도시 중심부에 진입하는 길목마다 바리케이드를 설치했다. 천안문 광장 주위 교차로에는 버스와 대형트럭을 뒤집어놓고 길을 막았다. 자전거 부대와 오토바이 부대가 군대의 동향을 보고하고 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조직됐다. 오토바이 부대는 동정적인 소규모 기업가들이 조직했다. 경찰과 시 당국이 사라진 자리에서 노동자와 학생들은 공중질서 유지와 교통정리의 책임을 다했다. 수도의 수많은 시민은 새로운 연대의식과 자립의식을 잠시나마 경험하게 되었다. (705쪽)


사상자 중에는 학생들도 많았지만 대다수는 노동자와 주민들이었다. 광장 안에서의 살육은 사실상 적었다. 더이상의 유혈사태를 막은 공의 상당부분은 그럴 것 같지 않은 몇 명의 영웅들에게 있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록스타 허우더젠과 문학비평가 류샤오보가 유명한데, 이들은 학생들과의 연대를 과시하기 위해 6월 2일 단식투쟁을 시작했으며 광장에 남아 있던 5천 명에게 길을 터주도록 인민해방군 장교들과 교섭을 벌였다. (706쪽)


6월 9일 덩샤오핑은 텔레비전에 나와 '반혁명 폭란'을 섬멸한 군대와 경찰을 치하했다. 민간인 희생자들에 대해서는 '사회의 쓰레기'라면서 어떤 유감도 표시하지 않았다. 정부는 민간인 사망자 수가 300명에 조금 못 미친다고 발표했다. 목격자들은 2000~7000명 정도로 추산했다. 그러나 살상만큼이나 소름끼치는 것은 거대한 군사력을 동원한다는 결정을 내릴 당시 덩샤오핑과 소수 원로지도자들이 보인 냉혹하고 계산적인 태도였다. (707쪽)


무력진압에 이어 체포의 물결이 전국을 뒤덮었다. 6월과 7월 비밀경찰에 체포된 사람이 4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그 중에서 수천 명은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며 수백 명은 사형당했다. 투옥된 사람 대부분과 사형당한 사람은 모두 노동자나 일반 시민이었다. 일반적으로 학생들은 운동의 주모자로 '긴급수배자' 명단에 들어가 널리 알려진 21명을 제외하고는 비교적 관대한 처벌을 받았다. 정부에 반대했던 대부분의 젊은이는 국외로 망명하거나 붙잡혀서 투옥됐다. 
정치적 억압에도 불구하고 사회경제생활은 너무나 빨리 '정상'으로 돌아왔다. 중국의 시장개혁가들은 1989년에 마치 어떤 특별한 일도 없었다는 듯이, 1990년대를 지나면서 더욱더 열정적으로 자본주의적 발전을 추진해나갔다. 민주화운동을 낳은 강력한 정치적, 도덕적 열정이 이토록 빨리 사그라지고 사라져버렸다는 것, 그리고 정부가 조장하는 소비주의와 내셔널리즘의 물결에 파묻혀버렸다는 것은 정말 이상한 일인 동시에 좌절감을 안겨주는 일이었다. (708쪽)


1989년 이후에 시작된 정치적 탄압은 도시의 노동계급에게 가장 심했다. 1980년대를 통해 중국의 정치지도자들은 '폴란드의 공포', 즉 공산당 정권을 위협하는 노동자와 지식인 사이에 '연대' 형식의 동맹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공포에 쫓기고 있었다. 

민주화운동에 참가했던 노동자들은 학생활동가들보다 훨씬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노조 결성-결국 무산됐지만-에 가담한 노동자에 대한 처벌은 특히 가혹했다. 1989년 6월 주동자들은 공개처형됐으며 평화로운 조합활동에 가담했던 사람들은 폭행죄로 구속돼 중형을 선고받았다. (749쪽)


지난해부터 읽고 있는(그리고 아마 올해 내내 읽을 것 같은) 나오미 클라인의 <쇼크 독트린>도 '톈안먼 사태 이후의 중국' 부분에서 마이스너의 이 책을 인용하고 있다. 혼란이나 대격변이나 재난을 핑계로 '폐허'가 된 사회에 신자유주의와 시장만능주의를 밀어붙여 이식하는 것을 쇼크독트린이라 부르면서, 클라인은 덩샤오핑 시대에 중국이 그런 길을 걸을 때에 톈안먼 학살이 '쇼크'의 무대가 돼주었다고 지적한다. 


개혁파로 서방의 환영을 받은 덩샤오핑은 톈안먼 학살로 잠시 비난을 받았지만, 1992년 남순강화 뒤 자본주의를 열정적으로 추진하자 "다시 서방언론의 주목을 받았고 또 한번 계몽주의적인 시장개혁가라는 찬사를 받았다." (716쪽) 덩샤오핑은 경제발전을 죽는 순간까지 강조했고, 중국 경제는 눈부시게 성장했다. 민영화, 인플레, 실업, 농촌으로부터의 인구이동이 뒤따랐다. 


이 나라를 여전히 사회주의 국가라고 불러야 할까? 1997년 15차 당대회 때 덩샤오핑의 후계자 장쩌민은 "커다란 망치와 낫이 노랗게 새겨진 거대한 붉은 깃발이 드리워진 단상에서 대부분의 국영기업을 개인 투자자들에게 매각하자는 제안을 골자로 한 주요보고를 행했다. 2천 명의 대표자 중 누군가가 이런 부조화를 느꼈을 법도 한데, 이에 대해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언제 깨질 지 알 수 없었고 어쩌면 처음부터 거짓이었을지 모를, 베이징 정부의 사회주의적 정체성은 대부분 생산수단의 공유가 중국사회에서 압도적 위치를 차지한다는 데 근거하고 있었다. 그러나 장쩌민이 제안한 국유자산의 민영화는 중국에 그나마 남아 있던 사회주의를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723쪽)


중국 공산주의자들이 5.4 이후 수십년 동안 대중혁명투쟁과 동일시해왔던 문화적 반전통주의가 이제 전통문화와 역사적 유산을 찬미하는 보수적 내셔널리즘에 자리를 내준 것은 논리적으로 당연한 결과였다. 공식적인 역사서술에서 계급투쟁과 농민전쟁에 대한 마오주의적 강조가 대부분 폐기되고 위대한 황제들과 근대화를 추진한 내셔널리즘 지도자들의 업적을 찬양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여기에는 19세기에 태평천국을 진압한 쩡궈판과 장제스까지 포함되었다. 전통문화의 영광을 찬양하는 이런 현상은 쇼비니즘에 가까우며, 이는 장쩌민이 공산당 총서기직에 있는 동안 절정에 달했다. 

이런 보수적인 내셔널리즘의 양상은 1994년 공자 탄생 2545주년을 기념하는 국제학술회의가 떠들썩하게 열리고, 공자의 가르침을 학교수업에 다시 도입하며, 베이징에 국제공자학회를 설립한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국제공자학회의 명예회장에는 그 직함에 너무도 잘 어울리는 싱가포르의 신유가적 독재자 리콴유가 선출됐다. 

아마도 이보다 더 기괴한 현상은 신화 속의 존재인 황제(黃帝)의 능 앞에서 고두를 하고 향을 사르는 숭배의식을 준공식적으로 행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725쪽)


스크랩할 부분이 많은 책, 빼곡하게 줄을 쳐야만 하는 책, 다시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책, 배운 것 생각할 것이 가득한 책을 읽고 나면 맨 뒷장을 덮은 뒤에도 가슴이 약간 두근거리는 기분이 든다. 이 책이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