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6181

스무살과 서른살

며칠전, 오랜만에 대학 동창들을 만났다. 같이 인문대 학생회 일을 하던 친구들인데, 한 친구가 곧 결혼을 한다고 했다. 친구의 결혼을 핑계삼아 오랜만에 신림동 '그날이 오면' 앞에 모였다. 약속시간보다 일찍 도착해서 일단 '그날'에 들러 책 구경을 했다. 사실 얼마전까지만 해도 나는 '이왕이면' 그날에 가서 책을 사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었다. 교보같은 대형서점에서 책을 사는 건 '그날'에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그러나 물론 요즘은 알라딘에서 책을 산다. 이유는 단 하나, 싸기 때문에. 덕택에 책 구경하는 재미는 많이 줄었다. 책 구경을 하고 나서 혼자 커피숍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신림동 녹두거리 맨 앞에 있는 커피숍인데 스파게티와 케이크를 같이 파는, '세련된' 가게였다. 예전에 '회빈루'라는 중국..

연락하는 방법

주말 내내 인터넷을 열어보지를 못했다. 월요일인 오늘 아침, 출근하자마자 데스크탑에서 메일함을 열었다. 뜻밖의 편지가 와 있었다. 과거에 나의 취재원이었다가 지금은 친해져서 친구처럼 된 어떤 사람에게서 온 쪽지인데 보낸 형식이 특이했다. 요즘 유행하는 '모교사랑'이라는 사이트에서 보낸 쪽지였다. 이상했다. 이 사람과 나는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그 어느 쪽을 뒤져봐도 동문이 아닌데. 미국에 있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얼마전, 미국에 갈 생각이니 가기 전에 얼굴한번 보자고 전화가 왔었는데 내가 게으른 탓에 생각만 하고 연락을 못 했었다. 지난달에 출국해서 계속 미국에 있는데, 전자수첩이 망가지는 바람에 연락처가 없어서 이렇게나마 소식을 전한다고 했다. 쪽지의 내용은 간단했다. '내가 아는 ..

독수리의 눈

독수리의 눈 론 버니 (지은이) | 심우진(그림) | 지혜연 (옮긴이) | 우리교육 | 2000-09-25 호주 동화를 보는 건 처음이다. 호주라는 나라, 어릴 적에는 백호주의라는 이상한 사상을 가진 나라 또는 캥거루나 코알라같은 동물들이 사는 낯선 나라 정도로만 알았었다. 물론 지금도 내게 호주는 낯선 나라다. 호주에 대한 이미지가 바뀐 계기를 굳이 찾으라면 한 장의 그림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백인 정복자들이 원주민을 사냥하는 그림을 책에서 본 일이 있다. 말을 탄 백인들이 총과 창을 들고, 도망치는 원주민들을 사냥하는 그림. '독수리의 눈'은, 내가 그림에서 보았던 바로 그 장면을 글로 써놓은 동화다. 동화라고는 하지만, 말 그대로의 페어리 테일은 절대 아니다. 사촌지간인 소년과 소녀는, 가족들이 ..

딸기네 책방 2000.10.17

문명의 공존

문명의 공존 Das Zusammenleben der Kulturen 하랄트 뮐러 (지은이), 이영희 (옮긴이) | 푸른숲 갑자기, 서구 학자들이 여러가지 '학술용어'들을 놓고 껌씹기같은 놀이를 하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근대화, 문명, 서구, 아시아적 가치, 민주주의같은 개념들이 너무 홍수처럼 쏟아지고, 또 그 홍수가 너무 오랫동안 계속되다보니 받아들이는 나의 작은 뇌가 지쳐서 그런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단물 빼먹듯이 개념들을 널려놓고 자작자작 씹어대는 것을 보니 식상하긴 하지만, 의 저자인 하랄트 뮐러 때문에 내가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아니다. 뮐러가 비판하는 새뮤얼 헌팅턴에 대해 다시 기억을 더듬어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원제 Das Zusammenleben der Kul..

딸기네 책방 2000.10.11

[2000 가을, 홍콩] 그 밖의 것들

☆ 홍콩의 공동묘지 이 사람들이 한국의 공동묘지를 본다면 무지하게 호사스럽다고 할 겁니다. 지나가면서 홍콩의 묘지를 구경했는데, 봉분 없는 대리석 묘석에 묘비만 있는 형태였습니다. 무덤과 무덤 사이의 간격이 아마 15-20cm 밖에 안 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발 디딜 틈도 없이 빽빽하게 붙어있어서 꼭 무슨 새집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그것도 산을 깎아 만든 계단식 밭같은 모양으로요. 홍콩사람들에게는 성묘(?)같은 건 애당초 불가능한 일일 것 같습니다. ☆ 역시나 쇼핑천국 무슨 거리에 그렇게 에스컬레이터가 많은지... 도시 전체가 거대한 쇼핑몰임을 실감케 하는 것이 바로 그 에스컬레이터들입니다. 하다못해 육교같은 노천에까지(물론 지붕은 있지만) 에스컬레이터가 놓여있습니다. 어쨌든 다니기는 편한데, 이 사람..

[2000 가을, 홍콩] 친절한 홍콩사람들

☆ 차비를 대신 내준 여행사 직원, 잔돈을 치러준 출근길 아가씨 다른 곳을 여행해보지는 못했지만, 이것만은 확신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홍콩 사람들이 세상에서 가장 친절한 사람들일 겁니다. 홍콩섬에 처음 도착했을 때 전철역에서 호텔까지 어떻게 찾아가야 할지를 몰라 한참 헤맸습니다. 전철역 안 지도앞에서 지나가는 아가씨를 붙잡고 무작정 호텔 이름을 대면서 물어봤는데 이 아가씨가 마침 어느 여행사의 직원이었습니다. 버스 정류장까지 안내해준 것만 해도 고마운데, 버스 기사에게 저의 목적지를 얘기해주더니 차비까지 대신 내주는 겁니다. 더 놀라운 일은 버스에서 내려서 일어났습니다. 운전기사의 지시(?)에 따라 버스에서 내리는데 어떤 멀쩡한 총각이 호텔까지 저를 데려다주는 겁니다. 좀전의 그 아가씨가 하는 말을 듣..

[2000 가을, 홍콩] Rice + Noodle = ?

☆ Rice + Noodle = ? 사람들이 딤섬 얘기를 할 때부터 짐작은 했지만, 역시 저는 '여행체질'이 아닌 모양입니다. 홍콩에 도착한 첫날, 열심히 애드미럴티 지역을 헤매고 다니다가 퍼시픽 플레이스(Pacific Place)라는 큰 쇼핑몰의 식당가에 도착했습니다. 중국식, 일본식, 태국식 등등 여러나라의 음식을 뒤섞어서 잡탕으로 파는 코너들이 있는데 쭉 돌아보고 나서 가장 덜 느끼할 것 같은 Singapore Fried Rice Noodle을 주문했습니다. 저는 'rice + noodle = 밥과 국수'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왠걸, 볶은 쌀국수가 나오더군요. 새우와 청경채(인지 아닌지 잘 모르지만) 볶은 것 따위를 섞어서 국수랑 같이 볶은 음식인데, 28달러를 주고 사서 5달러어치밖에 못 먹었..

[2000 가을, 홍콩] 트램, 더블데커, 봉고차들

☆ Tram 저더러 홍콩에서 가장 맘에 드는 것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망설임 없이 '야경'과 '트램'이라고 하겠습니다. 트램은 홍콩 섬 북쪽을 오가는 2층 열차입니다. 요금은 홍콩달러로 2달러, 현재 환율로 치면 우리 돈으로 300원 정도 합니다. 저는 아침에 이걸 타고 센트럴에 나가서 밥을 먹고, 또 놀다가 호텔에 돌아올 때에도 이걸 애용했습니다. 일단 뭐가 좋냐면, 2층이라는 겁니다. 또 하나 트램의 특징은, 에어컨이 없다는 점이라고나 할까요. 다시 말해 열린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도시 풍경을 마음껏 감상할 수가 있습니다. 특히 이 트램 2층에서 보면 땅바닥에 붙어서 다니는 빨간 택시들이 꼭 게처럼 귀엽게 보입니다. 거리의 건어물 가게나 행인들이 다 보이죠. 트램은 아침 6시30분부터 밤..

[2000 가을, 홍콩] 홍콩의 밤은 낮보다 아름답다

☆ 홍콩의 밤은 낮보다 아름답다 홍콩에 도착한 순간까지, 사실 별로 즐겁지는 않았습니다. 혼자 하는 여행에 대한 불안감도 있었고, 또 심심함에 대한 우려가 무엇보다 컸기 때문이죠. 그런데 역시나 홍콩의 야경은 죽여주더군요(이런 속물적인 표현을...). 이런 노래가 절로 떠올랐습니다. 별들이 소곤대는 홍콩의 밤거리... 별들이 소곤대는 대신에 네온불빛이 반짝이는 것이긴 했지만, 정말 멋진 풍경이었습니다. 첫날밤, 홍콩섬의 북쪽에서 건너편 구룡반도를 바라보면서 감탄을 했던 것은 제가 너무 촌스러웠기 때문이었습니다! 둘째날 구룡반도의 남쪽 끝에서 홍콩섬을 바라봤습니다. 구룡반도 남쪽에 리젠트 호텔과 르네상스 호텔이 있는데, 그 두 호텔 앞에 해안을 마주하고 산책길이 쭉 뚫려 있습니다. 일종의 다리인데 따로 이..

[2000 가을, 홍콩] 홍콩에서의 첫날밤

9월23일 토요일, 오전 8시50분 서울발 홍콩행 대한항공 603편에 몸을 실었습니다. 비행기에는 빈 자리가 더 많더군요. 9월에, 토요일 아침에 홍콩에 가는 사람은 많지 않은 모양입니다. 앞자리에서는 동남아인 부부가 어린 아들 둘을 데리고 탔는데 아이 둘이 3시간의 비행 동안 줄곧 떠들고 소리지르거나 아버지한테 야단맞아 울었습니다. 무지하게 시끄러웠다고 봐야죠. 이번 여행의 목적은 '관광'과 '휴식'이었습니다. 홍콩엔 보통 쇼핑하러들 간다지만, 저야 뭐 쇼핑할 돈이 없으니까요. 관광 계획을 잡아놓긴 했지만 불안한 것은 여전했습니다. 특히, 예약한 호텔의 바우쳐를 받지 못한 채로 출발한 거였거든요. 드디어 홍콩에 도착한 것은 오전 11시40분. 친절한 홍콩 사람들의 안내로 호텔에까지 오기는 왔는데, 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