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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그림자 중의 하나는

내 그림자 중의 하나는 모든 그림자가 그렇듯이 늘 나를 따라다니는데, 그림자 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고 정답게 생각하는 놈이다. 내가 간간이 사색을 할 때마다 내 뒤에서 나를 흘낏흘낏 바라보는 이 그림자는 가끔씩 건방지게도, 내 등뒤에서 고개를 내밀고 내 손이 하는 일들을 지켜보기도 한다. 내가 지뢰찾기에 열중해 있을 때, 내가 컴퓨터 고스톱을 치고 있을 때, 내가 홈페이지에다 시덥잖은 소리를 쳐넣고 있을 때 무슨 재미난 구경거리나 생긴 것처럼 들여다본다. 어린 아이들은 손가락을 자기 코 앞에 갖다대고 그걸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눈알을 가운데로 모으는 놀이를 한다. 난 어른이 된 지금도 가끔 그 놀이를 하는데, 손가락을 동원하지 않고 맨 얼굴로도 코 주위에 눈알들이 모이게 할 수가 있다. 그림자는 생선처..

[스크랩] 에필로그 - 칼 세이건이 인류에게 남긴 마지막 메시지

에필로그 - 칼 세이건이 인류에게 남긴 마지막 메시지 (Billions and Billions) 칼 세이건 (지은이), 김한영 (옮긴이) | 사이언스북스 칼 세이건. 의 작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대중적인 우주과학자. TV에 많이 등장했고 각종 사안의 코멘터로도 애용됐던. 그 외에, 내가 이 사람에 대해 갖고 있는 지식은 없었다. 는 말 그대로 에필로그다. 과학저술가로서 명성을 떨쳤던 세이건이 골수암으로 죽어가면서 '인류에게 남긴 마지막 메시지'다. '마지막'에 방점을 찍는다면, 그가 남긴 에필로그가 환경파괴에 대한 경고문이라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저 광활한 우주를 바라보고 살았던 스타 과학자가 하고 싶은 얘기가 바로 환경 얘기였다. 물론 책 뒷부분에는 낙태에 대한 입장 등 기고문과 연설문들이 몇개 실..

기억창고에서 끄집어낸 해적판 이야기

긴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최근 읽은 만화 한 편을 소개하면. '하늘은 붉은 강가'는 바로 '나같은 사람', 나이도 잊은 채 어렸을 때 만화방에서 죽때리던 기억에 사로잡혀 헛된 망상에서 아직도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을 위한 만화다. 여기서 잠시 딸기의 전사(前史)를 알아볼 필요가 있음. 국민학교 때부터 각종 만화방을 섭렵했었다. 그 때 가장 감명깊게 읽었던 만화 중의 하나가 바로 '나일강의 소녀' 시리즈였으니. 작가 이름은 당시 해적판에는 '유혜정'이라고 돼 있었음. 1부인 '나일강의 소녀'에 이어 '나일강의 여신', '나일강의 사랑', '나일강이여 영원히', 그리고 연속성이 상당히 떨어지는 '나일강의 수수께끼'와 같은 후속편들이 줄줄이 따라붙는 대작이었다. 이 만화를 보고 고고학자가 될 결심을 했다니,..

H2

나한테도 열일곱살이 있었을텐데, 대체 어디로 갔을까. 바다 건너온 만화책이 이렇게 마음을 흔들어놓다니. 내 마음은 지금 마구 흔들려서, 공중을 떠돌고 있다. 머릿속마저, 야구공처럼 어딘가를 한정없이 날아다니고 있다. 열일곱살. 그 나이를 떠올리면서 칙칙한 교실과 여고괴담 분위기의 유관순 초상화, 무거운 도시락통 같은 걸 떠올려야 된다는 건 비극이다. 그래서 난 좀 다른 걸 떠올려보기로 했다. 내가 열일곱살 때, 서울올림픽이 있었다. 그날, 친구와 올림픽공원에 갔었다. 9월17일, 날짜도 잊어버리지 않는다. 올림픽 개막식 날이었으니까. 올림픽 공원에 갔다는 것 외에는 딱히 내세울만한 추억거리가 그날 벌어졌던 것도 아닌데, 내 머리 속에는 열일곱살에 대한 그런 단편적인 기억들만 떠오른다. 조각조각 흩어진 기..

리드뱅

Lie-De-Vin (리드뱅) Berlion (글) | Corbeyran(그림) | 비앤비(B&B) 여러 만화제에서의 수상경력이 가장 먼저 눈에 띄임. 첨엔 무슨 엽기물처럼 보이다가, 그 다음에는 이웃집 미스테리 여인을 둘러싼 탐정소설로 보이지만 결국에 가서 보면 한 소년의 '성장'을 둘러싼 이야기. 아주 재미있음. 엄마 없는 소년. 성격이 판이한 '고모들'과 함께 사는 고아. 얼굴엔 포도주색의 반점이 있음. '룰루'라는 개를 키웠음. 왜 하필 주인공은 개 이야기를 이렇게 많이 하는 걸까? 룰루가 어떤 끔찍한 경위로 인해 죽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대체 무슨 엽기적인 이야기가 나올까 의심해가며, 대체 이 만화의 장르는 무엇일까를 생각했음. 이 때까지 나의 결론- 이건 탐정물이다! 이웃집 여인의 살인극 ..

딸기네 책방 2001.02.20

토요일밤에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다

오늘은 -벌써 어제가 됐나- 낮에 회사에서 대학 친구들과 이른바 '채팅'을 했다. 마이크로소프트에서 만든 MSN 메신저를 다운받으면 하루 종일 채팅을 할 수가 있다. 실은 '하루 종일'이라는 건 좀 맞지 않고, 내가 친구로 지정해놓은 사람들이 어딘가에서 인터넷에 접속해 있을 때면 아무 때고 대화를 나눌 수가 있다.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듣고 프로그램을 다운받았다. 회사 컴퓨터는 늘 켜져 있고 랜으로 연결돼 있으니 그런 짓을 할 수가 있다. 그런데 '대화방'이라는 말과 '채팅룸'이라는 말은 참 다른 것 같다. 우리 말과 영어라서 다르다는 게 아니고, '채팅'은 잡동사니 수다를 떠는 것이지 '대화'라는 말로 번역되기엔 좀 그렇다는 의미다. 실제 내가 채팅한 내용은 어디까지나 '채팅'이었을 뿐이지 '대화'라고 ..

부유해진 세계, 가난해진 사람들

부유해진 세계, 가난해진 사람들 Richesse du Monde, Pauvrete's des Nations 다니엘 코엔 (지은이) | 주명철 (옮긴이) | 시유시 파리 제1대학 경제학교수인 다니엘 코엔의 저서입니다. 아시아 경제위기 이전에 쓰여졌다는 점과, 프랑스의 학자가 쓴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읽었습니다. 유럽인들은 가난한 나라들의 세계 무역시장 진출을 마치 무슨 야만인들의 침략이나 되는 양 경계하고 무서워하고 있는데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말고 내부적으로 잘 해라, 내부의 불평등을 없앨 궁리를 하는게 세계화에 대한 가장 올바른 대처방식이다, 그런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세계화-> 불평등 확산'의 직접적인 등식을 거부하고 있네요. 여기저기 쓴 글을 모아놓은 것 같아서 크게 재미있지는 않았는데 하..

딸기네 책방 2001.02.02

헬로 키티

모처럼 재미있게 주말을 보냈다. 뭐 특별히 '재미난' 일을 했던 건 아니지만, 나와 남편이 같이 주말에 집 밖으로 나갔다는 것만 해도 우리 부부에겐 대단한 일이었다. 더우기 토요일과 일요일 이틀 모두 외출을 했으니, 역사에 길이 남을 일이다. 이 역사에 남을 외출의 첫 걸음은 토요일 오후 2시30분에 이뤄졌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이 정도로 일찍 일어난 것은 딸기의 허즈번드에게는 거의 있기 힘든, 매우 드문 일이다. 외출 장소는 일산 킴스클럽. 그동안 장 보는 것을 게을리한 탓에 집에 모자라는 것들이 많았다. 내 바지와 남편의 트레이닝복(일명 땀복이라 부르는 것), 라면, 귤, 김, 햄, 싱크볼, 뒤집개를 샀다. 그리고 남편의 숙원사업이던 키티 인형을 샀다. 이걸 사줬더니 남편은 간만에 주말 내내 ..

렉서스와 올리브나무

렉서스와 올리브나무 The Lexus And the Olive Tree 토머스 L. 프리드먼 (지은이) | 장경덕 (옮긴이) | 21세기북스 뉴욕타임즈의 국제문제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토머스 프리드먼이 세계화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잔소리를 늘어놨다. 세계화의 껍데기만 뒤집어쓰면 뭐든 되는 줄 믿고 있는 이른바 '글로벌리스트'들을 향한 잔소리가 아니고, '아직도 세계화될 준비가 안 된 팔불출들'에게 쏟아놓는 잔소리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혼다자동차의 인기 브랜드네임을 빗댄 '렉서스'는 세계화, 기술, 인터넷 등등을 뜻하는 것이고, '올리브나무'는 국가, 민족, 문화, 정서 따위를 지칭하는 말이다. 저자 자신이 유태인이다보니 올리브나무를 '옛스런 감정'의 대유물로 삼았나보다. 하필이면 이 책을 보고 있..

딸기네 책방 2001.01.16

Being Digital?

오늘 일요당직을 섰다. 어제도 일토였는데 일요일까지 회사에 가서 사무실을 지켰다. 귓속에서 아직도 히터 돌아가는 소리가 웅웅거린다.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하루 종일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소음에 시달리다 돌아오니 이번엔 환청이 나를 괴롭힌다. 집에 혼자 앉아있는 순간에도 '조용히 있을' 수는 없다. 집에 들어와 눈치를 살펴보니 남편이 빨래를 해놓고 나갔다. 국을 데워 저녁을 먹을까 하고 있는 참에, 관리실에서 스피커로 내 머리를 때린다. 베란다로 이어져내려가는 하수구가 얼어붙으니까 세탁기 돌리지들 말라는 경고의 메시지였다. 아뿔싸, 아랫층 베란다 하수구 다 얼었겠네... 방송 담당을 그만두고 나니 집에 와 앉아있는 것이 이렇게 홀가분할 수가 없다. 내 귓전에서 웅웅거리는 가장 큰 소음 중의 하나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