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권에서 가장 민주화된 나라, 석유와 천연가스에 이어 <알자지라> 방송이 최대의 수출품인 나라, 무혈쿠데타로 아버지 제끼고 집권한 젊은 왕이 절차적 민주주의의 확립을 외치며 개혁을 추구하고 있는 나라. 서방의 예찬을 받았던 <아랍의 민주주의 실험장> 그 지표는 결국, 미국의 이라크전 전초기지가 되는 것이었구나. 예상은 했지만, 참.
미군 중부사령부가 지난해 가을에 카타르로 옮겨갔다. 미군의 각 사령부들은 중부 남부 동부 식으로 이름이 붙여져 있는데 <미국의 중부> <미국의 동부>를 얘기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전세계의 중부와 동부를 가리키는 용어다. 말 그대로 <지구방위대>. 그 중에서 중동 지역 작전을 담당하는 것이 중부사령부다. 토미 프랭크스 미군 중부사령관은 <2003년의 인물>이 될 것으로 꼽히고 있다. 언론들의 예측이 아니더라도, 프랭크스는 진작부터 힘없는 콜린 파월을 대신해 중동 외교를 아예 맡아 하고 있다.
나는 지금, 곧 다가올 전쟁을 생각하면서 떨고 있다. 일단 일이 무지무지하게 많아질 것이고 개전 카운트다운에 들어간 순간부터 촉각을 곤두세워야만 할 것이고, 날마다 지면을 메우기 위한 아이디어를 내놓느라 흰머리가 늘어갈 것이다.
나의 일은 나의 일인 것이고, 전쟁은 정말 무섭지 않은가. 정말 무섭다. 너무 무섭다(으스스). 이라크에서 만났던 사멜과 타리크, 그들이 미군의 폭격에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하다. 정말 무섭다.
반도의 작은 나라 카타르에서 BBC 방송 출신들이 알 자지라라는 민영방송사를 만든 뒤에 서방에서는 <카타르 민주주의의 전위투사>라며 예찬을 아끼지 않았다. 2001년 봄, 뉴욕타임스의 유태인 <자유주의자>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알 자지라가 아랍 민주주의의 상징이 되고 있다며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다. 그 칼럼을 번역할 일이 있어서 꼼꼼이 읽었는데, 거의 뭐 <트로이의 목마> 수준으로 알 자지라를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몇달 안가 9.11 테러가 일어나고, 알 자지라는 <아랍의 목소리>로 전세계에 이름을 떨쳤다. 사실 알 자지라는 이전부터 아랍의 목소리였고, 지금도 변함없이 아랍의 목소리다. 알자지라가 빈라덴의 모습과 육성을 내보내자 미국은 <알자지라가 테러범들의 선전수단이 되고 있다>면서 지랄발광을 했다. 아이러니다.
더한 아이러니는 결국 카타르다. 반도의 작은 나라는 사실 알자지라가 뜨기 전만 해도(알자지라가 만들어진 것은 카타르의 무혈 궁정쿠데타 덕이었다) 걸프의 소국 정도로만 인식됐었는데 알자지라가 뜨면서 아랍 민주주의의 상징이 돼버린 것이다. 물론 카타르의 과감한 국제화 노력(대규모 국제행사 유치 등등)도 국가인식 제고에 한몫 했다. 서방에서는 카타르가 아랍의 유일한 민주주의 국가라며 박수를 쳤다.
박수의 결과는- 미군 중부사령부가 카타르에 살림을 차리고, 미군이 카타르의 사막지대에서(물론 쿠웨이트의 사막지대에도 있지만) 대규모 실전 대비 훈련을 벌이고 있다는 것. 현재의 그 모습, 그것이 서방이 예찬했던 <아랍 민주주의>의 현실이다.
아랍권에도 민주주의는 필요하다. 그렇지만 민주주의란, 민주주의로 치장된 일들이란,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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