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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권에 담은 동남아시아 역사

딸기21 2002. 12. 12.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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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권에 담은 동남아시아 역사 Southeast Asia: an Introductory History 
밀턴 오스본 (지은이), 조흥국 (옮긴이) | 오름


내가 찾던 게 바로 이런 책이었다. 말레이사, 필리핀사를 모두 섭렵할 의욕은 없는데 업무상 개괄적인 역사를 알아야겠고...허니, '한 권에 담은' 류의 책들이 겉핥기 공부에는 가장 좋은게 바로 이런 것 아닌가.

헌데, 장난이 아니었다. 방대한 지역의 역사를 '한 권'으로 읽는다는 게 당연히 쉬운 일이 아니겠지. 특히 십여년간 학교에서 역사를 배우면서도 이 지역의 역사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침 한번 안 튀기고 지나갔으니. 유럽에 대해서는 '카롤링거 르네상스'니 '카놋싸의 굴욕'이니 하는 것까지 시시콜콜 배우고 연도를 외우면서, 정작 아시아라면 동남아는 물론, 인도와 일본에 대해서도 제대로 배운 바가 없다는 사실을 다시한번 깨달았다.

가장 먼저 부딪친 문제는 '동남아시아'란 과연 어디냐 하는 건데, 나는 쉽게 생각하기로 했다. 아시아에서 중국 아래쪽, 인도를 뺀 지역(^^)이라고. 
이 지역의 특징은, 이른바 제3세계 대부분이 그렇듯이 도시와 농촌, 가진 자와 못가진 자, 개발과 미개발의 차이가 대단히 크다는 것. 모두 식민통치의 결과다. 동남아시아의 과거를 핵심적으로 표현하면 바로 '식민통치'다.

그 전의 역사(저자인 오스본은 '고전적인 시대'라고 불렀다)에 관해서라면, 보로부두르와 앙코르와트의 유적들, 스리위자야 제국 정도밖에 모른다(실상 앙코르와트와 스리위자야는 이 지역의 내륙세력과 해상세력을 각각 대표한다).
18세기까지도 지배적인 '나라'들이 많이 형성되지 않았다는 것이 이 지역의 특성이라면 특성이고, 그것이 또한 외부의 연구자들이 이 지역을 '발전이 더딘 지역'으로 낮춰보게 만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만 베트남은 알려진 대로, 중국식의 관료체제를 갖춘 고도의 국가를 갖고 있었다고.

이렇게 '고전시대'의 이야기는 얼렁뚱땅 넘어간채, 시간은 식민시절로 흘러간다.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의 '진출'(작가의 시각)과 함께 경제적으로는 ▲플랜테이션(특히 자바) ▲벼농사지역의 확대(베트남 메콩강 델타 일대) ▲'수출상품'(고무, 주석, 쌀, 커피) 집중현상이라는 변화를 겪게 되고, 사회적으로는 19세기 후반부터 시작되는 인도·중국으로부터의 대규모 이주와 같은 변화들이 잇따르게 된다.

역사는 이러구러 지나가는데...내가 궁금해했던 것들은, 독립과정에서 벌어진 일들이다.

1) 동남아시아에서도 베트남과 인도네시아는 장기간의 전쟁 끝에 독립한 대표적인 나라들. 
그런데 어째서 베트남에서만 공산혁명이 성공했을까?


① 식민종주국들의 억압은 어느 곳에서나 마찬가지였겠지만 특히 베트남에서 프랑스의 억압은 너무나 가혹했고, 그 결과 반식민저항세력 중 공산당만이 살아남았다

② 당시 베트남은 레닌식 사회주의 혁명론에 딱 맞아떨어지는 경제상황이었고, 그 때문에 공산주의 혁명론이 쉽게 받아들여졌다(?)-자바와 베트남에서는 금세기초 인구압박이 매우 커졌고, 식민지배로 인한 사회적 불평등과 함께 불안요소들이 가중되고 있었으니까.

③ 유교의 영향 밑에 있던 베트남에서 이데올로기적 혼란이 발생하면서, 대안적 사상의 필요성이 대두했다(반면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의 경우는 이미 이슬람과 불교가 있어 민족주의적인 사고의 규합점이 있었기 때문에 공산주의가 소구력을 갖지 못했다는 분석도 가능) 쩝, 잘 모르겠다. 복합적인 여러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다만 '베트남'이라는 나라가 저에게 갖는 이미지는 '공산국가'(반공의식)→'사이공의 흰옷'(공산혁명의 당위성)→'장동건과 한류 열풍'(도이모이와 변화의 몸부림) 이라는 식의 도식 외에는 아직 없다는 것.

2) 동남아와 일본의 관계

초기에는 '아시아의 지배자'라며 일본을 환영하는 풍토가 있었다고. 민족주의자들 중에는 일본군과 연합하려 했던 이들도 있었고. 그러나 곧 환멸로 바뀌게 되었다고 하는데...
아이러니하지만, '동남아에서 일본의 만행'에 반발하는 이들 중에는 두 종류가 있다. 인도네시아에서 일본군 포로수용소에 수감됐다 풀려난 네덜란드인들과, 필리핀의 종군위안부 할머니들이다. 필리핀과 태국 등지에서는 '일제 협력자'의 불완전한 청산 문제가 아직도 논란거리로 남아있다고 하는데, 그 실태를 잘 모르겠다.

3) 동남아의 공산주의

70년대 이후 동남아는 아세안 지역과 공산국가들로 양분돼 있다. 말하자면 남북한의 확대판을 보게 되는데, 해방 직후 우리나라에 좌익-우익이 혼재해 있다가 (38선과 전쟁이라는) 일련의 과정을 거쳐 남북한으로 갈리게 된 것과 같은 상황을 이 지역도 거쳤다는 거다.

① 인도네시아에서는 민족주의자들과 함께 공산당과 이슬람세력이 독립투쟁에 참여했는데, 공산주의 세력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군부가 기여를 했고 이것이 오늘날까지 계속되는 군부의 '특권'을 형성하는 계기가 됐다. 반면 베트남에서는 베트민의 탁월한 능력(행정력, 전투능력)이 바탕이 되어 보응우엔 지압 장군의 디엔비엔푸 전투 대승을 계기로 공산주의로의 길이 진행됐다.

② 막사이사이가 이승만 대통령과 같은 인물이었다니! 필리핀에서는 루손 섬을 기지로 한 '후크운동'이라는 공산주의 운동이 전개되고 있었고, 이들 후크세력들은 해방정국의 인민위원회와 마찬가지로 토지개혁을 주장했다고 한다. 경제체제의 총체적인 변혁을 가져올 토지개혁에 대한 보수주의자들의 반발→후크반란→막사이사이의 후크세력 제압과 친미정권 수립으로 이어졌다는 것. 막사이사이가 후크 게릴라들을 진압하는 데에 미국이 개입했다는 의혹이 짙다.

③ 말라야에서도 중국인들 중심의 공산주의 저항세력이 밀림에서 게릴라운동을 펼쳤지만 '민족적' 한계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고, 필리핀에서와 마찬가지로 게릴라를 제압한 뚠꾸 압둘 라만이 초대 총리이자 '건국의 아버지'가 됐다.

④ 버마는 조금 양상이 다른데, 사상적 갈등보다는 소수민족의 처우(국가권력의 배분 문제)를 둘러싼 갈등이 지배적이었다. 소수민족을 포용하려 했던 아웅산 장군이 47년 암살되면서 갈등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4) 라오스와 캄보디아는 왜 공산화됐나?

베트남과 함께 프랑스의 식민지였지만 베트남과는 상황이 사뭇 달랐던 모양. 독립 열망과 저항투쟁의 수준에서 베트남이 한발 앞서나갔다는 점. 
라오스에는 멋진 왕자님이 있었다. 베트남의 영향을 받은 '빠텟라오'라는 공산주의 부대와 함께, 기꺼이 밀림에 들어가 투쟁을 펼친 이례적인 엘리트 수파누봉 왕자. 캄보디아에도 시아누크라는 왕이 있었다. 하지만 이들 두 나라는 프랑스가 베트남전에 지치고 지쳐 나가떨어진 뒤에 상대적으로 쉽게 독립했다는 혐의(?)가 있다. 독립 과정에서나, 이후의 공산화과정에서나 이들은 베트남의 종속변수로 설명된다. 

독립 이후에는 그야말로 '식민지적인' 문제들이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선 경제 패턴에서 빈부격차와 개발격차의 문제.
여기에 더해 이주민 문제가 떠오른다. 식민정부 시절에는 플랜테이션의 주요 노동력 공급원이자 경제적 지배블럭의 떡고물을 나눠먹었던 이주민집단(특히 화교)들이 독립 이후에는 거추장스런 이방인들로 부상한 것. 특히나 이들은 경제의 상당부분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갈등의 소지가 커졌고, 이들이 말라야와 자바 등지에서 이슬람 수용을 거부하면서 화해의 가능성은 더욱 줄어들었다.

경제문제 외에 가장 심각한 것은 국가통합의 문제. '독립 이후 어떤 국가를 세울 것인가'에서부터 시작된 국가정체성의 논란과 함께 소수민족 문제가 있다. 전통적으로 동남아 저지대의 다수민족은 소수인 고산족을 '야만인'과 동일시해왔고, 왕래를 제한했다. 버마의 고산족인 샨족, 카친족, 카렌족(사진), 친족 등이 대표적. 버마는 특히 소수민족이 전체 인구의 3분이1 정도를 차지하기 때문에 문제가 심각.

역사에서 언제나 제기되는 논란- 지속성과 변화 가운데 어느 쪽을 중시할 것인가
쉽게 결론내릴 수는 없는 문제다. 다만 정치적 리더십의 측면에서 보자면 동남아의 20세기는 '오래된 지배집단'들과 '새로운 엘리트들'이 혼재했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새로운 엘리트의 대표적인 사람이 싱가포르의 리콴유 전총리같은 사람이다. 분명 20세기는 이 지역에서 기술관료의 중요성과 영향력이 어느 때보다도 커진 시기였다.
그럼에도 어째서 이 지역에서는 '폭동의 역사'가 여전히 계속되는가-성공가능성이 매우 낮은데도 불구하고 농민폭동이 빈발하는 것은, 농민들의 불만이 그만큼 깊고 절망적이기 때문. 결국 빈부의 격차를 재생산하는 '구조'의 문제임을 알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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