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스크랩] 체 게바라, 몇편의 시들

딸기21 2002. 12. 1.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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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저편>에 실려 있는 몇편의 시들이다. 이산하 시인이 묶은 것과는 조금 순서를 바꿨다. 시의 행들도 내 마음가는대로 읽기 위해 시인이 편집해놓은 것하고 다르게 붙이고 떼고 했다.)


나의 삶

내 나이 열다섯 살 때,
나는 무엇을 위해 죽어야 하는가를 놓고 깊이 고민했다
그리고 그 죽음조차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하나의 이상을 찾게 된다면
나는 비로소 기꺼이 목숨을 바칠 것을 결심했다

먼저 나는 가장 품위있게 죽을 수 있는 방법부터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내 모든 것을 잃어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문득, 잭 런던이 쓴 옛날이야기가 떠올랐다
죽음에 임박한 주인공이 마음 속으로
차가운 알래스카의 황야같은 곳에서 혼자 나무에 기댄 채
외로이 죽어가기로 결심한다는 이야기였다
그것이 내가 생각한 유일한 죽음의 모습이었다


라틴 여행기를 쓰며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동전은 허공에서 돌고 돈다
때로는 앞면이 나왔고 때로는 뒷면이 나왔다

인간은 모든 것들의 기준이다
나는 내 입으로 말하고 내 눈으로 보았던 것을
내 자신의 언어로 구체적으로 말한다
가능한 열 번의 앞면 중에서 나는 
오직 한번의 뒷면만 볼지도 모른다
혹은 그 반대일 수도 있지만 변명은 필요 없다

내 입은 내 눈이 본대로 말한다
우리의 견해가 너무 한쪽으로 치우쳐져
편향되거나 성급하지는 않은가?
우리의 결론이 너무 완고하지는 않은가?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이 글을 쓴 사람은 죽어서 아르헨티나의 흙으로 돌아가리라
하지만 그것을 재구성한 사람으로서의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니다!
적어도 나는 과거의 내가 아닌 것이다!


베일 속의 사내

그 사내의 얼굴은 어둠 속에 가려져 있었다
나는 그의 눈에서 뿜어져나오는 강렬한 광채와 
네 개의 하얀 앞니만 볼 수 있었을 뿐이었다
"미래는 민중들의 것입니다
서서히, 혹은 갑자기 전세계의 모든 민중들이 권력을 잡을 겁니다
당신은 이 사회에 나처럼 아주 필요한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당신은 당신을 파괴시키는 이 사회에
당신 스스로 얼마나 기여하고 있는지를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날 밤 그 사내의 말들이 밤새도록 내 가슴 깊이 울렸다
나는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만일 어떤 지도자가 이 세계를 두 개로 나눈다면
난 기꺼이 민중들 편에 설 것임을
그리하여 귀신에 홀린 듯 울부짖으며 온몸으로
적진의 바리케이드와 참호를 공격할 것이고
내 손에 잡힌 그 어떤 적이라도 단숨에 깨부술 것이다
그러고나서 한껏 내 코를 팽창시켜, 유유히
매운 화약냄새와 낭자한 적들의 피 냄새를 음미하리라

그런 다음 또다시 내 몸을 바짝 긴장시킨 채
다음 전투를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하리라
열광하는 민중들의 환호성이
또다른 새로운 곳에서 힘차게 울려퍼질 수 있도록


편지 - 아버지에게

카리브해의 푸른 바다가 저를 부릅니다
레닌의 말들이 절절이 울려오는 쿠바의 그 풍광으로
제 가슴을 가득 채우고 싶습니다

아버님, 저는 지금 아바나로 떠납니다


희망

게릴라로 싸우던 동안에는 물론 심지어 지금까지도
카스트로의 이야기는 내 뇌리에 선명히 남아있다

당신들은 아직 당신들이 저지른 과오에 대해서 
그 대가를 지불하지 않았다
무기를 방기한 게릴라로서 지불해야 할 대가는
바로 목숨이기 때문이다
적과 직접 부딪쳐 싸울 경우 살기 위해 의지해야 할
유일한 희망은 바로 무기뿐이다
그런데 그 무기를 버리다니! 
그것은 처벌받아 마땅할 범죄이다

단 하나의 무기, 단 하나의 비밀, 단 하나의 진지도
적들에게 넘어가게 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선택

적의 급습을 받은 동지 하나가 상황이 위급하다며
지고 가던 상자 두 개를 버리고 사탕수수밭 속으로 도망가버렸다
하나는 탄약상자였고 또 하나는 구급상자였다
그런데 총탄에 중상을 입은 지금의 나는
그 두 개의 상자 가운데 하나밖에 옮길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과연 의사로서의 의무와 혁명가로서의 의무중에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 것인가?
나는 내 생애 처음으로 깊은 갈등에 빠졌다
너는 진정 누구인가. 의사인가 아니면 혁명가인가
지금 내 발 앞에 있는 두 개의 상자가 그것을 묻고 있다
나는 결국 구급상자 대신 탄약상자를 등에 짊어졌다


내가 살아가는 이유

그것은, 
때때로 당신이
살아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일곱 개의 목숨

가슴과 허벅지에 총알이 뚫고 갔다
'고양이의 목숨은 일곱 개'라는 스페인 속담이 있다
나는 이제 두 개의 목숨을 썼지만
아직 다섯 개나 남아 있다


어린 딸에게

지금도 이 세상의 어느 누구인가가 당하고 있을
그 모든 불의에 맞설 수 있는 능력을 키웠으면 좋겠다
그리고 혁명이 왜 필요한지,
너희들 스스로 깊이 생각해보기 바란다
그것이 혁명가가 가져야 할 가장 아름다운 자세란다


딸의 생일

오늘은 일디타의 열한번째 생일이다
나의 딸 일디타가 처음 이 세상에 태어난 날
꿈속에서 일디타는 
가슴에 꽃을 한아름 안고
나에게로 걸어왔었다


내 안의 파쇼

동지들이여, 나 역시 내 안에 파쇼가
전혀 없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아니, 어쩌면 그 누구보다도 더 많을지 모른다
내가 나를 어찌 다 알겠는가
내가 나를 어찌 다 통제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럴 때마다 나는 내가 들고 있는 이 총구를 본다
그 좁고 컴컴한 구멍이 마치 내 가슴속처럼 보인다
총알이 하나씩 빠져나갈 때마다
내 안의 파쇼도 하나씩 빠져나가리라


쿠바를 떠나며

기쁨과 슬픔을 안은 채
만감이 교차하는 마음으로
이 쿠바를 떠납니다

내가 이루고 싶었던 
그 많은 희망들 중에서
가장 순수한 희망만을 남겨놓고
나는 떠납니다

행복한 혁명가

쿠바를 떠날 때 누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씨를 뿌리고도 열매를 따먹을 줄 모르는
바보같은 혁명가라고
내가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그 열매는 이미 내 곳도 아닐뿐더러
난 아직 씨를 더 뿌려야 할 곳이 많다고,
그래서 나는 행복한 혁명가라고


먼 저편 -미래의 착취자가 될지도 모를 동지들에게

지금까지 나는 나의 동지들 때문에 눈물을 흘렸지 
결코 적들 때문에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오늘 다시 이 총대를 적시며 흐르는 눈물은 
어쩌면 내가 동지들을 위해 흘리는 
마지막 눈물이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멀고 험한 길을 함께 걸어왔고 
또 앞으로도 함께 걸어갈 것을 맹세했었다
하지만 그 맹세가 하나둘씩 무너져갈 때마다 나는 
치밀어 오르는 배신감보다도 차라리 가슴 저미는 슬픔을 느꼈다
누군들 힘겹고 고단하지 않았겠는가
누군들 별빛같은 그리움이 없었겠는가
그것을 우리 어찌 세월 탓으로만 돌릴 수 있겠는가
비록 그대들이 떠나 어느 자리에 있든 이 하나만은 꼭 약속해다오
그대들이 한때 신처럼 경배했던 민중들에게
한줌도 안 되는 독재와 제국주의의 착취자들처럼
거꾸로 칼끝을 겨누는 일만은 없게 해다오
그대들 스스로를 비참하게는 하지 말아다오
나는 어떠한 고통도 참고 견딜 수 있지만
그 슬픔만큼은 참을 수가 없구나

동지들이 떠나버린 이 빈 산은 너무 넓구나
밤하늘의 별들은 여전히 저렇게 반짝이고
나무들도 여전히 저렇게 제 자리에 있는데
동지들이 떠나버린 이 산은 너무 적막하구나

먼 저편에서 별빛이 나를 부른다


유언

억압하는 모든 것들에게 저항하라!
지금 나의 이 실패는 혁명의 종말이 아니다!

그리고 이 말을 꼭 카스트로에게 전해달라
내가 패배할지라도 승리가 불가능한 것은 아님을,
에베레스트산은 수많은 사람들이 도전하다 실패했지만
결국은 정복되고 말았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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