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스크랩] 네루와 보르헤스, 어떤 사람들이 자신을 말하는 방식.

딸기21 2002. 12. 6.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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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와할랄 네루는 위대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를 직접 접했던 미국의 인도학자 스탠리 월포트의 평에 따르면 '네루는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잘 생기고, 달변이었다. 또한 이상적이고 낭만적이었으며, 역동적이었지만, 언제나 무척 사적인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수없이 많은 추종자와 숭배자들이 있었지만 친구는 거의 없었으며, 생애의 말년에 이르러서는 진실로 믿을만한 상대라곤 자신의 딸인 인디라밖에 없었다'.

어렸을 때, 세계사편력을 쉽게 번역해놓은 '아버지가 들려주는 세계사 이야기'라는 책을 읽었다. 세계사편력보다 우리나라에서는 더 먼저 번역출간된 책이다. 대학에 들어가서 다시 세계사편력을 펼쳤는데, 기억과는 달리 별로 재미가 없었다. 옥중의 아버지가 딸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로 본다면 어린 시절 읽었던 축약본이 더 다정하고 섬세하게 느껴졌던 것 같기도 하다.

그 네루에 대한 이야기.

1937년 인도 국민회의 의장으로 세번째 당선되기 전날, 국민회의 의원들에게 익명의 편지가 도착한다.

"네루와 같은 인간들은 민주주의 체제 속에서 안전하지 않다. 그는 자신을 민주주의자 그리고 사회주의자로 자처한다. 그러나 조금만 비틀어놓으면 그는 얼마든지 독재자로 변신할 여지가 있다. 그는 독재자가 갖추어야 할 모든 것들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엄청난 대중성, 강력한 의지, 정열, 자존심 등등. 그의 자부심은 가공할 만하다. 이것은 반드시 제지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 어떠한 카이사르도 원하지 않는다"

네루는 자기가 쓴 편지라는 사실을 금방 인정했고, 그래서 의원들은 네루가 그저 재치있는 농담을 한 것으로만 받아들이기로 했다고 한다. 
수백만명의 인도인들은 독립과 건국의 아버지인 네루를 chacha(아저씨)라고 부르며 따랐다는데, 자신의 말마따나 네루는 '엄청난 대중성'을 갖고 있었던 모양이다. 

네루의 편지가 보여주는 냉철함, 재치,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는 눈.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대부분 자신의 결점은 과소평가하고, 장점은 과대평가한다. 

나같은 경우는, 결점을 과소평가한다기보다는 그것을 무시하려고 애쓰는 쪽인 것 같다. 그래, 난 이러이러한 문제점이 있다, 그래서 어쩔래, 그 대신 난 너보다 이러이러한 점이 훨씬 낫단 말이다, 이런 식으로. 말하자면 '배째라' 쪽에 가까운데, 그건 내가 내 주변에 쳐두른 합리화의 외피이고, 나의 정신건강을 위한 제1의 보호막이다.

르네 마그리트의 <데칼코마니(Decalcomania)> 1966



오늘 보르헤스의 글을 또 한편 읽다보니 앞서 옮겨놓은 네루의 편지가 자연스럽게 생각났다. 물론 보르헤스의 글은 문학하는 사람들이 자아니 타자니 하면서 360도 전방위 해석을 붙일만큼 여러가지 의미를 가졌을 수도 있겠지만, 내 눈길을 끈 건 단순히 그의 재치일 뿐이다. 네루도, 보르헤스도, 아주 날카로운 눈을 가졌고, 그래서 멋지다.


보르헤스와 나 Borges y yo

Jorge Luis Borges / 박병규 옮김.

세상사를 경험하는 사람은 바로 다른 나(el otro), 보르헤스이다. 나는 부에노스아이레스 거리를 걸으면서 철문과 현관 아치를 눈여겨보려고 별 생각 없이 발길을 멈추기도 한다. 우편물을 통해 보르헤스의 소식을 듣고, 교수 명단이나 인명 사전에서 그의 이름을 본다. 또한 모래시계, 지도, 18세기의 활판 인쇄, 어원학, 커피 맛, 그리고 스티븐슨의 산문을 좋아한다. 다른 나도 역시 이런 것을 애호하지만, 허세를 부려 한 배우의 특성으로 만들어버린다. 우리들 관계가 적대적이라고 한다면 과장이리라. 왜냐하면 내가 살아야, 그냥 이렇게 살아가야 보르헤스는 문학을 만들 수 있고, 나아가서 그 문학은 나의 존재를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나는 보르헤스가 가치 있는 글을 몇 편 썼다는 사실은 별 어려움 없이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글이 나를 구원할 수는 없다. 좋은 글은 다른 나를 포함하여 어느 누구의 것이 아니라 언어나 전통에 속하기 때문이리라. 게다가 내 자신은 틀림없이 소멸될 운명이며, 단지 나의 삶의 어떤 순간만이 다른 나에게서 살아 남을 것이다. 나는 과장하고 거짓을 꾸미는 보르헤스의 못된 습관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에게 조금씩 모든 것을 양보하고 있다. 스피노자는 만물이 제 모습으로 존속하기를 바란다고 얘기했다. 돌은 영원히 돌이고자 하며, 호랑이는 영원히 호랑이이고자 한다. 나는 내가 아니라(나라는 것이 있다면 말이다) 보르헤스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보르헤스의 책에서보다는 다른 일에서, 예컨대 힘들게 연주하는 기타 소리에서 내 자신을 더 잘 인식한다. 몇 년 전, 나는 보르헤스로부터 벗어나려고 시도했다. 그래서 도시 변두리에서 떠도는 전설적인 얘기를 다루기도 했고 시간과 무한을 가지고 놀이하기도 했지만 이제 그러한 놀이는 보르헤스의 것이 되어버려 나는 다른 것을 만들어야만 한다. 이처럼 나의 인생은 덧없이 사라지고, 나는 모든 것을 잃고 있다. 그 모두는 망각 속으로 사라지거나 혹은 다른 나의 것이다.

나는 둘 중 누가 이 글을 쓰고 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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