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얘기 저런 얘기

도장을 위한 기도문.

딸기21 2002. 12. 10.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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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책상에는 유독 2단 책꽂이가 놓여 있다. 영 없는 것은 아니지만 문화부를 제외하면 우리 사무실에 거창하게 2단 책꽂이 '씩이나' 놓아둔 자리가 많지 않다. 책을 많이 읽어서는 결단코 아니다. 책을 많이 읽지도 않지만 책꽂이의 상당부분은 사전적 의미의 <책>이 아닌 다른 것들이 차지하고 있으니까. 포장지, 스크랩북, 스크랩 못하고 쌓아놓은 신문들, 씨디, 팡이제로, 쓰려고 놓아둔 크리스마스 카드까지. 잘 바르지도 않는 바셀린 로션, 여름 다 지나도록 멍청하게 서있는 선스크린 스프레이.

며칠전 상층부에서 개인별 책상을 없애고 <원탁 시스템>을 도입하자는 이야기가 나온 모양인데 다들 반대하지만 나 역시 반대한다.
솔직히 말하면 난 책상을 좀(이 아니고 많이) 지저분하게 쓴다. 책꽂이 윗부분에까지 물건 쌓아두는 건 기본이고, 주제에 정리한답시고 복사용지 박스를 잘라 만든 <분리식 2단 종이선반>에 얼마전 카드 만들고 남은 색종이 찌꺼기들, 스태플러와 커피 찌꺼기 말라붙은 종이컵들, 색연필, <바이오에너지>라는 황당무계한 약통, 빵빵이 보내준 에펠탑 그림의 근사한 엽서, 당직 날짜에 동그라미쳐진 세우는 달력(누구의 발명품인지 정말 훌륭), 각종 외신 뽑아놓은 것들까지.

내 옆자리가 비어있는데 그 책상 위가 나의 쓰레기통이다. 읽은 신문과 이면지로 썼던(즉 양면 모두 가득차 있는) A4 용지들 따위를 매일 던져놓다보니 드디어 더이상 던져올릴 수가 없는 지경이 되어버렸다. 대오각성하야 오늘 아침 일을 시작하기 전 청소를 했다. 내 자리를 치우는 것은 나의 자존심이 용납치 않는 까닭에 난지도 삼았던 옆자리를 치우고야 만 것이다. 그리고 생각난 김에 1년간 열어보지도 않았던 빈 책상의 서랍을 열어보니.

누군가가 버리고간 핸드폰 한 개. 범인을 알 수 없으니 탐사라도 해야지. 나는 기어코 도장 네 개를 찾아냈다.

그러니까 실은 내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도장에 대한 것이다. 빨간 인주 찍어 꾹꾹 누르는 그 도장. 어렸을 적의 어느 시절에 나는 도장파는 기술을 익히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도장가게 아저씨가 나무도장을 틀에 끼워놓고 쓱싹쓱싹 칼질로 새겨넣는 거 보면 예술스러운 분위기라기보다는 숙련된 직공 특유의 자신감 같은게 느껴졌었다.
어머니가 관련 분야에 종사하셨던 탓에(도장파는 일을 전문적으로 하셨던 것은 아님) 아주 어릴 때에는 도장 파시는 것을 여러번 보았다. 무른 돌에 조각도 같은 것으로 글자를 새기는데, 잘못 새겨지면 시멘트바닥처럼 거칠거칠한 곳에 도장을 문질러 싹 지워버리고 다시 시작하시는 것이다.
처음으로 내 도장이 생겼을 때의 기억도 있다. 국민학교 3학년 때였나, 새마을금고에 통장 만든다고 도장 가져오라 했다. 엄마한테 돈 받아서 도장가게 가서 내 이름 대고 파달라고 했는데 얼마나 신났는지. 그런데 아저씨가 성의없이 만든 탓인지, 그간 관찰해본 도장들보다 이름 획의 휘어짐이 적고 여백이 많아 실망했었다.

학생 시절에, 특히 고등학교 때 나는 수업시간 딴짓을 아주 많이 했다. 선천성 집중력 결핍증인가? 여튼 알미늄 필통 그림 벗기기, 책받침 코팅 벗기고 딴 얼굴 그려넣기, 책장 모서리에 그림 그려서 애니메이션 만들기(다른 애들은 다 흑백으로 하는데 난 칼라로 만들었다), 각종 교과서 삽화 색칠하기, 교과서 그림에 말풍선 집어넣기, 철자 바꾸기, 책 페이지 뜯어서 파마머리 만들기, 교과서 모서리 잘라내 무늬 만들기 등등.
그 중에 <도장파기>도 당연히 들어간다. 지우개라는 천혜의 도장재가 있지 않았는가. 그걸로 정말 도장 많이 만들었다. 혹시 이거 아는지. 손가락 끝 지문 있는 곳에 수성싸인펜(볼펜 매직 색연필 절대 안됨)으로 눈코입 그려넣고 친구의 얼굴을 콕! 찍어주면 얼굴 속의 얼굴이 만들어진다(물론 친구에게 욕 먹는다).
엄지손가락 가지런히 붙이고 주먹쥔 뒤 엄지검지 주변에 빨갛게 (역시 수성싸인펜으로) 칠해서 친구 얼굴에 찍으면 입술 모양 나오는데, 이거 잘못하면 친구한테 욕 뿐만 아니라 매까지 얻어맞는다. 천연 인체도장의 장점은 별다른 재료 없이 싸인펜 하나만 있으면 된다는 것이지만, 많아야 두 차례 밖에 쓸 수 없다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

다시 책상 속 도장 이야기. 나는 도장에 얽힌 추억을 곱씹으며 도장 네 개에 새겨진 이름을 들여다보았다. 나는 이런 작업을 가리켜 <고고학의 생활화>라고 부른다.
면면을 살펴보니 그중 2명은 가히 느리고 충직하며 일견 얼빵하다 할만한 인물들이었다. 또 한명은 게으르고 한량스럽기 한량없으나 자기 물건 챙기기에는 유별난 인물이었고, 마지막 한명은 꼼꼼 세심 피곤한 부류에 속하는 것으로 평가받는 사람이었으니.
말하자면 이 도장들은 언젠가 부서에서 단체로 도장찍을 일이 생겨 취합해놓은 것들이렸다. 둘은 급조한 냄새가 나는 막도장이지만 하나는 근사한 번쩍번쩍 돌도장이고 또 하나는 뚜껑 달린 중간급의 레벨인 것으로 보아 <일괄제작> 한 것 같지는 않고, 본인들에게서 거둬들인 걸로 사료된다.
남의 도장 거둬놓고 돌려주지도 않은 인물(아마 네 사람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이나, 도장 맡겨놓고 찾아가지도 않은 인물들이나, 쓸모가 적어진 물건이라면 제 것이라도 남의 것처럼 쉽게 잊어버리는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훌륭한 정신이고 미덕이다.

한때는 <목숨처럼> 여겨지기도 했던 도장이라는 존재가 이제는 저렇게 굴러다니는 신세로 전락한 것을 보니 우습다. 난 그런 현상을 보면, 어쩐지 즐거워진다. 한때 아껴지던 것들(인간들 말고 물건들, 제도들)이 시대의 변화에 밀려 천덕꾸러기로 변하는 것을 보면 애틋하고 안쓰러운 감정보다는 "그래 너도 이제 갈 때가 됐구만. 잘 가라!" 하는 상쾌하고 시원한 공기가 머리 속에 먼저 들어오는 것이다.
그러고보니 나도 도장 쓴지 오래됐다. 내 도장들도 어딘가에서 굴러다니고 있을 것이다. 어머니가 중국여행에서 사다주신 돼지머리 도장 만큼은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은데 아마 안방 서랍장 속에 있을 것이고, 고등학교 졸업기념으로 학교에서 파줬던 도장은(그 때만 해도 도장이 사회 진출 혹은 성인이 됨을 상징하는 물건이었으니까) 또 어딘가에서 숨 못 쉬고 있을 것이다.

도장의 형식이 플라스틱 카드로, 컴퓨터 칩으로, 혹은 또다른 형태로 바뀌고 있다고 하면 그것도 맞는 말이겠지만 어쨌든 도장의 존재 자체가 달라지는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니 곧 있어 책상 구석에서조차 사라져버릴(정확히 말하면 버려질) 도장아 널 위해 기도해주마. <네가 쓰레기통에 버려질지언정 돌로된 몸처럼 썩지 말고, 붉은 화장만큼 아름답게 기억되고, <낙인>과 <봉인>의 강렬한 어감처럼 너의 이름만이라도 굳세게 상징으로 남아 전달되기를 비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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