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얘기 저런 얘기

딸기, 서른 둘

딸기21 2002. 12. 12. 10:21
728x90
(뉘쉬님의 홈페이지에서 프로필을 재미있게 읽었다. 그래서 나도, 마치 내가 무슨 인물이나 된다는 듯, 조금은 색다른 프로필을 써보기로 했다. 난 좋아보이는 것이 있으면 금방금방 따라한다^^)

크리스토퍼 히친스에 따르면 내가 태어난 1971년은 "'대량 학살'이라는 단어가 너무 쉽게 받아들여진" 해였다. 지금은 방글라데시라는 이름으로 되어 있는, 동파키스탄이라는 곳에 주재했던 미국 영사관은 이른바 '피의 전문'으로 알려진 항의문에서 그 단어를 전면에 내세웠는데, 내가 서른 두살이 된 지금도 대량학살이라는 말은 뉴스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다. 당시 그 항의문을 만든 아처 블러드 다카 주재 미국 총영사는 미국 정부가 동파키스탄의 대량학살에 관여했다고 자기네 정부를 비판했는데, 각종 학살에 미국이 관여하고 있다는 비판은 아직도 유효하다.

나는 대량학살이 하나의 용어가 됐던 그 해, 선글라스를 낀 군인이 탱크를 앞세워 한국에서 '혁명'을 일으킨지 딱 10년되던 날에 세상에 나왔다. 그때 우리 집은 아주 돈이 없었다고 했다. 어머니는 두고두고 내게 먹일 분유값이 없어서 감자가루를 물에 타서 먹였다는 얘기를 하셨다. 왜 그랬을까. 왜 내가 태어났을 때는 그렇게 돈이 없었을까^^

아장아장 걸을 무렵에는 미국과 중국의 '역사적인' 정상회담이 있었고, 그 다음해에는 동독과 서독이 동시에 유엔에 가입했다. 동쪽과 서쪽으로 나뉘어진 독일 이야기는 한반도의 상황과 빗대어,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두고두고 교과서에서 밑줄쳐가며 외워야 했던 사안이었다.

1973년에는 이른바 제4차 중동전쟁이 일어났고 전세계가 석유파동을 겪었다. 석유 이야기 또한 얼마나 싫도록 들었는지. 지금 하고 있는 일 때문에 유가 움직임에 관심을 쏟을 수 밖에 없는데, 수억년전 동물들의 시체가 썩어 생긴 검은 물, 이것에 목매달고 사는 일은 내 생애의 언제쯤에나 청산될 것인지 궁금하다.

1978년은 내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해였다. 처음으로 사회생활 시작. 내가 다녔던 국민학교(초등학교)는 화장터 자리에 지어진 것이었는데 아주 큰 은행나무 부부가 있었다. 내가 국민학교 4학년 때에야 수세식 화장실이 자리를 잡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입학식 다음날, 다른 아이들은 엄마와 함께 손잡고 학교에 오는데 나는 혼자서 등교했다. 국민학교 1학년 때의 그 당혹감과 헤매던 기억.

국민학교 2학년 때에는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너무너무 가난한 나라' 정도로 인식됐던 아프간이 조금은 다른 (긍정적인) 이미지로 내 머리 속에 들어온 것은 중학교 무렵이었던 것 같다. <Modern 실크로드따라 2만리>라는 역사기행 류의 전집이 집에 있었다.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그 책 중 한권에 바미얀 석불과 난(nun) 빵을 구워먹는 아프간 사람들의 사진이 실려있었다. 몇해전 월러스틴의 책(제목이 생각 안 나네)과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에서 소련의 아프간 침공이 세계 체제에 미친(정확히 말하면 양키들에게 준) 충격에 대한 것을 읽었는데, 이 불쌍한 민중들은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출구를 찾기 힘든 미로에서 죽어가고 있다.

이란과 이라크는 '이란이라크전쟁'이라는 식으로, 언제나 함께 붙어다니는 말이었다. 1980년에 두 나라는 전쟁을 치르기 시작했고, 이듬해에는 이집트의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이 피살됐다. 국민학교 6학년 때였나, 사다트의 전기를 읽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중학교 2학년 때에는 발칙하게도 사다트의 뒤를 이은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에게 편지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1985년에는 머리에 지도가 그려진 사람(나와 내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던)이 소련의 집권자가 됐다. 이듬해에는 체르노빌에서 원전 사고가 일어났다(고등학교 시절의 지리선생님은 환경재앙이라는 몹시도 생소한 개념에 대해 강한 어조로 말을 했었다). 85년에 나는 <데미안>을 읽었고, 옆자리 아이에게서 재미난 소설 이야기를 많이 들었고, <B지구아파트>에 살던 소녀와 아주 친해졌다.

중학교 3학년 때 아시안 게임이 열렸다. 임춘애 서선앵 이런 선수들이 '가난을 이겨내고' 눈물겨운 승리를 일궈냈다는 휴먼스토리가 세상을 채웠다. 중학시절 내내 이선희의 노래가 인기를 끌었고 나를 제외한 대부분의 아이들은 조숙하게도(난 그렇게 생각한다) 김기덕과 김광한의 코멘트에 귀를 세우고 있었다. 그 사이에 건국대에서는 대학생들이 농성을 하다 잡혀갔고 TV는 연일 헬리콥터가 삐라를 뿌려대는 모습과 대학교 건물에 매달린 학생들의 모습을 비췄다.

중학교 3학년 때였던 것 같다. 그때의 모든 순진한 애들이 그랬듯이 나 역시 성(性)이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지식도, 관심도 없었다. 난 항상 읽을거리가 부족했고, 책이 고팠기 때문에 닥치는대로 무엇이든, 활자로 된 것은 정말 '무엇이든' 읽어댔다. 그 중의 하나가 '권인숙양 성고문 사건'에 대한 글이었는데 그 내용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리고 주황색 겉표지에 아마도 까만 별 하나가 그려져 있었을(<실천문학>이 그렇게 생겼었다) 문학잡지에서 손가락 잘린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경악했다.

고등학교 1학년, 학교 밖 세상은 극악스럽고 폭발하는 것 같았던 그 해에 난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무슨 일이 있어도 공부를 열심히 하겠다고 마음먹은 아이처럼.

1학년 때에는 좀 어리버리했었지만, 2학년 때 나는 공부를 아주 잘 했다. 집에는 여러모로 복잡한 사정들이 있었는데, 모의고사 성적표가 나온 날이면 밖에 나가계신 엄마에게 전화를 해서 "엄마, 나 1등했어!"라고 승전보를 전하는 것이 생활의 기쁨이었다. 난 참고서도 많이 사지 않았고, 팬시용품 같은 것에 돈을 쓰지도 않았다. 과외는 금지돼 있었다. 얼굴이 잘 생기고 노래 잘 하고 몹시 감상적이었던 남자친구와 서울시내 곳곳을 놀러다녔다. 모든 것이 재미있었다. 담임선생님이 공부 잘하고 착한 나를 1년 내내 야단쳤던 것만 빼면.

그 때 친구들과 동인지를 만들었는데 우린 그냥 친구끼리 백일장 하듯 혹은 놀이를 하듯 자작시를 써보고 연작소설을 만들었을 뿐이었다. 친구들 중 생각 깊었던 아이가 통일에 대해서도 글을 써보자고 했는데 우리의 수준은 아주 낮았다. "통일 되면 좋겠다" "그렇지만 걱정되는 것도 많다" 수준으로 공책 두어장 분량의 글들을 써서 묶었는데, 그걸 아셨던 국어선생님은 복도에서 나를 불렀다. 강남에 있는 S고등학교에서 그런 문집을 만들었던 아이들이 모두 정학처분을 받았다는 것이다. 선생님은 그러면서도, 호암아트홀에서 내게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타임즈>를 보여주었고 나와 내 친구들을 노찾사 공연에 데리고 가주었다. 

베이징의 천안문 광장에서 숱한 젊은이들이 탱크와 군화발에 짓밟혔던 그 해에 나는 인생 처음으로 수험생이 됐다. 대단한 해였다.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많은 사람들이 벽 위에서, 혹은 벽에 손을 대고 환호성을 지르는 장면이 브라운관에 비춰졌다. 어머니는 "세상에 베를린 장벽이 결국은 무너지는구나"라고 말을 하셨다.

대학 1학년 때에는 보통의, 많이 헤매고 발랄한 새내기였다. 이듬해 걸프전 발발. 4월26일에는 김세진 이재호열사 추모집회가 있었고, 집회 말미에 사회자가 "강경대라는 학생이 죽었다"고 했었다. 그해 5월은 끔찍했다. 여러 사람이 죽었고 난 친구들과 하루 걸러 한번씩 가두집회에 나갔다. 대학 3학년 때, 드디어 소비에트 연방은 완전히 해체되고 잠시 보수파의 '3일 쿠데타'가 있었다. 소개팅으로 만났던 아주 귀엽게 생긴 남자아이와 소련 사태에 대해 얕지만 진지하게 이야기했던 기억이 난다. 

우루과이라운드에 반대하는 대규모 집회가 종로에서 열렸다. 그리고 연말에는 대통령 선거. 당시의 남자친구는 이른바 '맹' 계열(무슨 말인지는 아는 사람만 알 것이다)이었다. 만나기만 하면 정치 얘기를 했고, 주로 '싸웠다'. 결국 내가 손꼽을 수 있는 '단 한번의 연애'였던 그 남자친구와의 만남은 아주 처참하게 끝나버렸다^^

자유주의자로 알려진 빌 클린턴이 미국 대통령에 당선됐지만 우리나라의 대통령 자리는 발음 불분명하고 맹꽁이같은 인물에게 돌아갔다. 이듬해에는 세계무역기구가 출범했다. 대학교 4학년. 앞날이 불투명한 그 시기. 난 기숙사-하숙-자취를 전전하며 백수 비슷한 생활을 했다. 친구와 함께 쓰던 방은 늘 여인숙같았고 여러 선후배들이 들락거렸다.

1994년, 코스모스 졸업을 하고 몇곳에 입사원서를 냈다. 지금의 회사에 '당첨'돼 이듬해 1월초부터 직장생활 시작. 신생언론사였던 회사는 1년 내내 시끄러웠다. 가을부터 겨울까지 파업이 있었다. 이듬해에 클린턴이 미국 대통령에 재선됐다. 가을에 나는 결혼을 했다.

1997년 홍콩이 중국의 품으로 돌아갔다. 불꽃놀이 사진들이 신문 국제면을 장식했다. 다이애나비가 죽었고 마더 테레사가 숨을 거뒀다. 그 다음해는, IMF라는 단어로 기록됐다. 아주 불안했고 나라가 망할 것만 같았다. 우리 회사는 일종의 종업원지주회사로 바뀌었고 난 휴지조각같은 주식 몇만 주를 갖게 됐다.

남편과 허구헌날 싸우던 지겨운 시기가 지나고 지난해 봄 우리 꼼꼼이가 생겨났다. 꼼꼼이가 엄마 뱃속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아마도 '테러'와 '전쟁'이었을 것이다. 올초 꼼꼼이가 세상에 나왔다. 내 인생도 새로 시작됐다. 이상 간략한 '나의 인생'. 내 인생 후반부의 일들은 32년 뒤에 다시한번 정리해볼 생각이다.


728x90

'이런 얘기 저런 얘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는 고양이다  (0) 2002.12.18
a letter to ssinzi  (0) 2002.12.15
도장을 위한 기도문.  (1) 2002.12.10
빚받기 운동을 펼쳐 나라를 살리자?  (1) 2002.11.26
우렁이를 잡으러 오라던 어떤 선배.  (1) 2002.09.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