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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정은의 세상] 난민이 싫으면 석유를 끊어라

예멘인들의 엑소더스가 시작된 건 2015년 초의 일이다. 사우디아라비아가 공습을 시작한 뒤 인구 2800만명 중 2200만명이 외부 도움에 끼니를 의존해야만 하는 상황이 됐고, 19만명이 나라를 떠나 밖으로 나갔다. 사실 그전까지 예멘은 난민을 내보내는 나라가 아니라 밖에서 온 난민을 끌어안고 사는 나라였다. 소말리아에서 도망쳐 예멘으로 간 사람이 28만명이니, 지금도 예멘에서 나온 난민보다 예멘이 받아들인 난민 숫자가 훨씬 더 많은 셈이다. ‘예멘 난민 사태’는 사우디가 일으킨 일이다. 2011년 ‘예멘판 아랍의 봄’으로 장기집권 독재자를 몰아낸 뒤 집권한 압두라부 하디라는 인물이 당초 정치세력들 간 권력을 나눠갖기로 한 약속을 어겼다가 자기 정당에서까지 축출되고 결국 쫓겨날 판이 됐는데, 사우디가 하..

[기협 칼럼]가난은 날씨가 되어 온다

태풍이 지나가고 비가 오니 무더위가 그래도 좀 수그러들었다. ‘기상 관측 이래 최고기온’을 경신하던 8월 초의 그날, 스포츠 중계하듯 기상청의 공식 측정치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었던 여름. 서울역 근처 쪽방촌을 취재하고 온 기자의 기사엔 찜통 더위 속에 방안에 누워 선풍기 한 대 틀어 놓고 하루를 보내는 어떤 이의 코멘트가 들어 있었다. “그래야 하루가 가니까 억지로 잠을 청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거죠.” 잠을 자야만 시간이 가니까 잔다는 그 말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그 더운날 오체투지를 하던 쌍용자동차 사람들, 그 옆에서 태극기를 들고 ‘박정희 대통령 말씀’을 외치던 사람들, 이 여름 한국의 풍경이었다. 태풍이 온다고 며칠 전부터 예보가 흘러나오고, 더위를 식혀줄까 가뭄을 해갈해줄까 은..

사스키아 사센, '세계경제와 도시'

세계경제와 도시 Cities in a World Economy사스키아 사센, 남기범 등 4명 옮김. 푸른길 내용이 좋은데 번역이 정말 나빠서 읽으면서 화가 많이 났던 책. 여러 사람이 번역했는데, 특정 챕터들이 특히 엉망이었다. 내용은 재미있다. 눈길을 끄는 건, 책에는 나오지 않지만 사스키아 사센이라는 사람. 오래 전부터 읽고 싶었고 두 권을 찾아 읽었다. 는 비교적 최근 것이고, '사스키아 사센의 세계경제와 도시'라며 저자 이름을 타이틀에까지 집어넣어 번역돼 나온 이 책은 2012년 것이다. 사센에게 명성을 안겨 준 도시 책(The Global City)은 못 읽고 이 책을 골랐는데 명성이 괜한 게 아니지 싶다. 재미난 것은 사센이라는 사람.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1947년 태어났는데, 부모가 이듬해 ..

딸기네 책방 2018.08.28

페리 앤더슨, '대전환의 세기, 유럽의 길을 묻다'

페리 앤더슨의 새 책이 나왔다고 해서 얼른 집어왔는데 2009년에 출간된 것이고, 저자가 1990년대 후반부터 쓴 글들을 모은 것이다. 2000년대 중반 이후에 쓴 글 몇 편도 간간이 보완하듯 실려 있기는 하지만 국내 출간된 2018년에서 길게는 20년 시차가 있는 셈이다. 원제는 The New Old World인데 (안효상 옮김. 길)라는 알맹이 없는 타이틀을 멋대로 달아놓으니 한국어판 제목이 영 입에 붙지를 않고 매번 기억에서 지워진다. 대학 시절 이후로 페리 앤더슨의 책을 본 적이...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고. 타리크 알리와 함께 유럽 68세대의 대표 격인 지식인이니, 읽을 가치는 충분히 있다. 대학 시절 받았던 느낌은 담담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 책은 아주 신랄해서 내 기억..

딸기네 책방 2018.08.22

존 리더, 아프리카 대륙의 일대기

근래 읽은 책들 중 최고이고, 아프리카에 대한 책들 중에서도 손꼽을만한 책이다. 아프리카에 대한 책들 자체가 손꼽을만한 숫자이긴 하지만. 존 리더의 (남경태 옮김. 휴머니스트). 읽은 지는 한 달 정도 됐는데 스크랩을 못 했다. 워낙 방대한 양이기에 그랬던 걸로 해두자. 실은 방금 전 크롬이 말썽을 부리는 바람에 2시간 동안 정리한 것도 날려먹었어 ㅠㅠ 앞부분 절반은 지구 대륙의 형성에서부터 시작해 인류의 탄생과 진화, 문명의 탄생까지 기나긴 역사를 다룬다. 인류가 아프리카에서부터 시작해 거기서 오랜 세월 살았으니, 이 대륙의 역사의 상당부분이 인류의 역사인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유럽인들이 오고 그들에 조응한 노예왕국들이 생겨나고 식민지 쟁탈전이 벌어지고 독립 이후 우리가 알고 있는 아프리카 ..

딸기네 책방 2018.08.21

티머시 미첼, '탄소민주주의'

탄소민주주의 CARBON DEMOCRACY티머시 미첼.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옮김. 생각비행 재미있었다. 며칠 만에 금방 읽었다. 지금 세계가 누리는 민주주의 체제가 석유라는 에너지원 덕에 굴러가고 있음을 지적한 것, 석탄과 석유 생산과정에서 노동자의 힘이 어떻게 조직화됐고 또한 어떻게 해체됐나... 다만 이러저러한 일이 일어났는데 그게 석유 지정학에서는 어떤 측면이 있었다, 이런 정도로 얘기해도 되는 걸 모두 '석유 때문이야'로 규정해버리니 앞부분 읽으면서 살짝 억지스럽다는 느낌도 들었다. 석유나 중동에 대해 처음 읽는 이들에게는 유익하고 흥미로울 것 같다. 석유정치와 석유경제를 초창기부터 큰 틀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점, 패권국가들이나 독재자들이나 거대기업들의 다툼 속에 가려졌던 중동 노동자들의 투쟁을 ..

딸기네 책방 2018.08.19

존 맨들, 지구적 정의란 무엇인가

지구적 정의란 무엇인가 GLOBAL JUSTICE존 맨들. 정승현 옮김. 까치 7/27 딱 봐도 까치에서 나온 책답다. 실은 그래서 이 출판사를 좀 더 좋아하는 면도 있다.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스튜어트 화이트의 를 읽다가 결국 못 버티고 -_-;; 존 롤스의 을 사서 읽었다. 둘 다 스크랩도 하지 못했지만. 실은 존 맨들의 이 책도 1월에 읽기 시작해서 7월에야 끝냈다. 그 사이에 이 책은 어디서 뭘 하고 있었으려나. 이제 만 사놓으면 될 것 같음. 이토록 일관된 디자인과 편집 컨셉트란 정말이지... 울집에 대체 이 출판사 책만 몇 권이 있는지 모르겠다. 몇년 새 나온 까치의 과학책들만 모아놨는데도 얼추 책꽂이 한 칸이 차던데 ㅎㅎㅎ 는 롤스가 정의론에서 뼈대를 세운 개념들에 기대어, 그것을 글로벌 확..

딸기네 책방 2018.08.14

헬레나 크로닌, '개미와 공작'

오래도록 읽지 않은 채 꽂아둔 책들을 꺼내어 읽어야지 하면서 두꺼운 책 목록을 만들었다. 그 중 첫 번째로 꺼내든 것이 헬레나 크로닌의 (홍승효 옮김. 사이언스북스)이다. 사이언스클래식이니 책의 질은 높을 것으로 보이고... 추천사를 읽는데 꽤나 재미가 있었고, 누가 썼나 봤더니 최재천 교수님이다. ^^ ‘협동과 성의 진화를 둘러싼 다윈주의 최대의 논쟁’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책의 제목이 주제를 그대로 보여준다. 개미는 협동, 공작(의 그 쓸모없어 보이는 화려한 꼬리깃털)은 성 선택을 상징한다. 다윈주의가 ‘해결하지 못한’ 것으로 여겨졌던, 다윈주의의 의붓자식 혹은 다윈주의에 반하는 증거 따위로 생각됐던 이타주의(협동)의 진화와 성 선택이라는 두 가지 테마를 잡아서 그것들이 다윈주의 역사 속에 어떻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