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수상한 GPS

[구정은의 ‘수상한 GPS’]‘이란 지킴이’ 중국으로 향하는 유조선  

딸기21 2019. 5. 27.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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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 배의 이름은 ‘구마노가와’였다. 일본에서 만들어져 세계의 대양을 돌아다녔다. 길이 330m에 폭 60m, 최대 30만2200t의 원유를 실을 수 있는 거대한 유조선은 이후로 두 차례 소속 회사와 국적이 바뀌었으며 이름도 그때마다 달라졌다. 지금은 서아프리카 라이베리아에 선적(船籍)을 둔 ‘퍼시픽브라보’ 호다. 

 

대형 유조선 ‘퍼시픽브라보’호는 미국이 이란 제재를 강화한 뒤인 지난 17일 이란산 원유 200만 배럴을 싣고 걸프를 떠나 중국으로 향했다. 사진 마린트래픽닷컴

 

2001년 도쿄 서쪽 가와사키에서 제작된 배는 ‘갤럭시 나비에라 마리타임’이라는 회사에 팔렸다. 파나마에 사무실을 둔 회사의 소유였지만 선적은 라이베리아였다. 2017년 11월 구마노가와의 국적은 태평양의 섬나라 마셜제도로 바뀌었고 이름은 ‘실버글로리’가 됐다. 

 

이란 기름 싣고 중국으로

민간 상선은 소유주의 국적과 상관 없이 원하는 나라에 선적을 두는 ‘편의치적(FOC)’이라는 관행이 있다. 1920년대에 미국에서 항만 노동자들의 거센 투쟁으로 노동관련 규제가 늘자, 규제가 덜한 나라에 선적을 두는 관습이 생겼다. 돈 없는 나라들은 이런 상선들을 등록해주고 수수료를 챙긴다. 영국의 정보회사 IHS마킷에 따르면 2017년 3월 현재 세계 대형 상선들 중 8052척은 파나마에, 3574척은 싱가포르에, 3277척은 라이베리아에, 3244척은 마셜제도에 선적을 두고 있다. 
 

라이베리아에서 마셜제도로 소속이 바뀐 퍼시픽브라보는 FOC 관행을 충실히 따른 셈이다. 유럽 등에서는 이런 관행 때문에 각국 정부가 법을 집행할 수 없다며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세금이나 규제를 피하려는 기업 이익에 번번이 가로막힌다. 뭘 나르고 있는지, 누구 배인지 숨기고 싶어하는 이들에게도 FOC는 좋은 가림막이다. 
 

왕이 중국 외교부장(오른쪽)이 지난 17일 베이징에서 모하마드 자바드 자리프 이란 외교장관과 회담한 뒤 악수를 나누고 있다. 베이징 신화연합뉴스


2019년 2월, 실버글로리의 이름은 퍼시픽브라보로 또 한번 바뀌었다. 선적은 라이베리아로 다시 돌아갔다. 거대 유조선이나 화물선의 경로를 추적하는 베슬트래커닷컴에 따르면 배는 지난 3월 말 말레이시아 근방 말라카해협에 들어섰고, 4월 내내 말레이시아의 관문인 클랑 근방에 머물다가 이달 9일 호르무즈 해협에 들어섰다. 걸프(페르시아만)에서 오만해를 거쳐 인도양으로 이어지는 요충지이자 원유가 오가는 핵심적인 길목이 호르무즈 해협이다. 
 

배의 ‘공식’ 목적지는 인도네시아로 돼 있지만 이란 경제 전문매체인 부어스앤드바자르는 최종 기착지가 중국이라고 보도했다. 미국과 무역갈등을 빚고 있는 중국은 미국이 적대시하는 이란의 원유를 사들이고 있다. 원유를 중국으로 실어나르는 것이 퍼시픽브라보호 같은 배들이다. 퍼시픽브라보가 200만 배럴의 원유를 싣고 호르무즈를 떠난 것은 지난 17일,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장과 모하마드 자바드 자리프 이란 외교장관이 베이징에서 회동한 날이었다. 
 

미국은 한시적으로 6개월간 한국과 중국, 일본 등이 이란산 원유를 수입할 수 있도록 해줬다가 이달 2일부터 ‘유예’를 끝냈다. 퍼시픽브라보는 미국이 제재를 강화한 뒤 이란산 원유를 싣고 중국으로 간 첫 대형유조선이다. 이달 중순 마샬Z라는 유조선이 이란 석유 13만 배럴을 중국 항구에 하역했지만 제재 강화 전에 실은 것이었고 분량도 적었다.

석유대금 오가는 쿤룬은행
 

부어스앤드바자르에 따르면 퍼시픽브라보의 실소유주는 중국의 쿤룬(崑崙)은행이다. 쿤룬은행은 중국 국영석유회사 중국석유천연가스그룹(CNPC)의 자회사다. 쿤룬은행은 2006년 중국 내 석유생산 기지가 있는 신장위구르에서 창립됐다. 2009년 CNPC가 지분 77%를 사들여 대주주가 됐다. 2010년 이후로는 중국과 이란 석유거래 대금이 오가는 창구 역할을 하고 있다. 일루퉁(이란통)이라는 선박도 갖고 있는데, 이란 정예부대인 혁명수비대와 거래한다는 의혹을 받은 적 있다. 2012년에는 버락 오바마 미 행정부의 제재를 받기도 했다. 지난해 10월 이 은행이 이란과의 거래를 중단하겠다고 밝히자 이란이 바짝 긴장했다.
 

이란이 카타르와 공동개발하고 있는 걸프의 사우스파스 가스전. 중국은 2004년 이란으로부터 세계최대의 천연가스전인 이곳의 채굴권을 얻어냈다. 사진 게티이미지


하지만 퍼시픽브라보가 오가는 것에서 보이듯 중국과 이란의 관계는 끊어지지 않았다. 원유 200만 배럴을 싣고 가는 퍼시픽브라보는 중국이 미국의 이란 제재에 협력하지 않을 것이며, 미국의 압박에 맞서 중국과 이란이 더욱 밀착할 것임을 보여주는 신호다. 왕이 외교부장은 자리프 장관과 만난 뒤 “중국은 미국의 일방 제재에 결연히 반대하고, 이란이 정당한 권익을 지키는 것을 지지한다”고 했고, 트럼프 정부가 깨뜨린 이란 핵 합의(JCPOA·포괄적 공동행동계획)를 굳건히 지킬 것이라고 못박았다. 이란도 중국의 육상·해상 무역로인 일대일로 프로젝트에 적극 참여하겠다고 화답했다.
 

국제에너지기구(IEA) 통계를 보면 중국은 2017년 말 기준으로 하루 평균 1322만배럴의 석유를 썼다. 중국의 석유 수입선은 다변화돼 있고 이란의 비중은 아직 그렇게 크지 않다. 지난해 중국이 수입한 원유의 15.8%는 러시아산이었고 12.4%는 사우디, 10.4%는 앙골라, 9.4%는 이라크에서 왔다. 이란산 비중은 2011년 10%에 육박했으나 작년에는 6.3%에 그쳤다. 제재 탓이다. 이란의 원유 수출량은 지난 3월 하루 140만~165만배럴이다가 4월엔 102만~130만배럴로 감소했다. 이달엔 20만~60만배럴 선으로 줄어들 것이라고 로이터통신은 내다봤다.
 

그러나 중국 입장에서 이란은 미국의 제재를 빌미로 끊어낼 수 없는 존재다. 당장의 원유보다 중요한 것은 이란 내 에너지 채굴권이다. CNPC만 해도 이란 내 19개 천연가스전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2000년대 이후 두 나라는 계속 관계를 강화했다. 2004년 이란의 사우스파스 가스전에서 중국이 30년간 천연가스를 채굴할 수 있도록 한 계약이 체결됐다. 2007년에는 CNPC가 이란 북부 아바즈 유전 채굴권을 36억달러에 사들였다. 중국은 이란 남부와 카스피해를 잇는 송유관·가스관 사업에도 투자했다. 시노펙(중국석유화공)과 이란LNG는 같은 해 1000억달러 규모의 천연가스 공급계약을 맺었다. 2009년에는 이란 서부 북아자데간 유전을 공동 개발하기로 두 나라가 합의했다.

 


“3차대전 일어나도 지킨다”
 

중국과 이란 관계에서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은 2011년의 포괄적·배타적 협력협정이었다. 이란은 중국이 몇몇 유전과 가스전을 독점 개발할 수 있게 해줬다. 이 협정에 따라 중국 기업들은 이란의 특정 지역에서 탐사·시추·채굴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필요한 인프라를 마음대로 지을 권리까지 가졌다. 이 지역들에 드나드는 이란인들은 중국 측의 허가를 받아야 하며, 중국은 시설 보안을 위해 병력까지 주둔시킬 수 있다. 
 

그 대가로 이란이 얻은 것은 ‘안전보장’이다. 중국은 이란이 외국의 공격을 받을 경우 ‘자국이 공격받은 것과 똑같이’ 대응해주기로 약속했다. 프레스TV 등 이란 언론들에 따르면 당시 중국 해군소장 장자오중(張召忠)은 “중국은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난다 해도 이란을 보호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아직까지 중국과 이란의 연간 교역량은 그리 많지 않다. 2015년에 51억달러였다가 이듬해엔 31억달러 규모로 줄었다. 미국이 인상을 찌푸리면 중국도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고, 제재에 협력하는 시늉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의 이해관계는 전략적이다. 미국기업연구소(AEI) 분석에 따르면 지난해 중국의 해외 투자·건설계약은 전년대비 1000억달러 줄었는데 중동·북아프리카 지역에서만은 늘었다. 이 지역 국가들과 중국은 지난해 281억달러 규모의 계약을 새로 체결했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야심찬 일대일로 프로젝트에서 이란은 핵심 지역 중 하나다. 에너지 외에도 중국이 이란에 걸어놓은 판돈은 또 있다. 이란은 250억달러 이상을 들여 노후 철로 1만km를 2025년까지 새로 깔기로 했고 중국이 고속철도 건설을 맡았다. 계획대로라면 신장위구르와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등을 지나는 유라시아 철도가 이란까지 이어질 것이다. 중국의 걱정거리인 철강 잉여분도 이 공사에 흡수될 것이다. 이란은 중국의 차관을 들여와 중국 철강을 사고, 중국 기업들에 공사를 맡긴다. 2016년 중-이란 철로가 이어져 중국산 컨테이너가 테헤란 중앙역에 도착하자 양국은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했다.
 

2012년 미국이 제재를 강화했을 때 이란은 중국을 잡기 위해 발벗고 나섰고, 실제로 제재가 두 나라 관계를 굳히는 결과를 낳았다고 부어스앤드바자르는 분석했다. 이란과 거래했다는 이유로 미국이 중국 화웨이의 경영자를 체포하는 소동까지 벌어졌다. 하지만 베이징과 테헤란은 곡절 속에서도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 퍼시픽브라보는 원유뿐 아니라 중국과 이란의 전략적 관계를 재확인시켜주는 신호까지 싣고 가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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