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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 가을, 홍콩] 홍콩에서의 첫날밤

9월23일 토요일, 오전 8시50분 서울발 홍콩행 대한항공 603편에 몸을 실었습니다. 비행기에는 빈 자리가 더 많더군요. 9월에, 토요일 아침에 홍콩에 가는 사람은 많지 않은 모양입니다. 앞자리에서는 동남아인 부부가 어린 아들 둘을 데리고 탔는데 아이 둘이 3시간의 비행 동안 줄곧 떠들고 소리지르거나 아버지한테 야단맞아 울었습니다. 무지하게 시끄러웠다고 봐야죠. 이번 여행의 목적은 '관광'과 '휴식'이었습니다. 홍콩엔 보통 쇼핑하러들 간다지만, 저야 뭐 쇼핑할 돈이 없으니까요. 관광 계획을 잡아놓긴 했지만 불안한 것은 여전했습니다. 특히, 예약한 호텔의 바우쳐를 받지 못한 채로 출발한 거였거든요. 드디어 홍콩에 도착한 것은 오전 11시40분. 친절한 홍콩 사람들의 안내로 호텔에까지 오기는 왔는데, 아니..

황미나의 '레드문'을 둘러싼 의혹(?)

언젠가 제가 홈페이지에서 전지면씨와 '레드문'과 '총몽'에 대한 얘기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황미나의 '레드문'을 주말 동안 다시 읽었습니다.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만화대여점에 가서 10권까지 빌려다가 토요일날 다 읽었고, 일요일에는 그새를 참지 못하고 또다른 대여점에 가서 나머지 18권까지를 빌려다가 그 자리에서 다 읽었습니다. 'SF 액션 판타지'라고 책표지에 소개돼 있더군요. 말 그대로 SF와 액션, 그리고 판타지가 모두 들어있는 작품입니다. 평범한 고교생이던 '태영'이라는 남자애가 있습니다. 알고보니 태영이는 6살때 사고로 죽었고, 이 아이는 시그너스라는 별에서 온 필라르 왕자였습니다. 태영의 머리에 필라르의 뇌를 이식, 태영의 몸을 빌려 지구에 숨어살고 있었던 거죠. 태영과 필라르라는 전혀 다른..

딸기네 책방 2000.09.18

행복을 전해주는 메신저, '해피'

해피 하마 노부코 (지은이) | 대원씨아이(만화) '마스터 키튼'과 '몬스터'로 유명한 우라사와 나오키의 작품 중에 '해피'라는 만화가 있죠. 테니스 선수들 사이의 사랑과 경쟁, 우정에 관한 것인데 재미가 없어서 5권까지 보다가 덮어버렸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해피'는 우라사와의 '해피'가 아니라, 하마 노부코라는 여성작가의 '해피'입니다. 첫 표지를 알라딘에서 살짝 훔쳐오려고 했는데 우라사와의 것 밖에 없어서 실패했습니다. 하마 노부코는 개를 굉장히 좋아하나봅니다. 개를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기본적으로 '해피'는 맘에 들 겁니다. '해피'라는 이름의 맹인견과, 그 주인 카오리의 일상을 잔잔하게 그린 만화입니다. '맹인견'이라 하니 벌써들 아셨겠지만, 해피의 주인 카오리는 맹인입니다. 스물두살때 사고로..

딸기네 책방 2000.09.10

설명이 필요없는 <비천무>

비천무 김혜린. 대원씨아이 2000/08/22 지금 한창 영화로 상영되고 있죠. 과연 영화를 봐야 할까, 말아야 할까. 만화를 본 사람들은 영화를 보고 다들 실망했다던데...김희선이 비천무의 주인공 '설리' 역할을 맡았다는데, 얼굴만 갖고 과연 될까요. 순정만화 팬 중에 김혜린 모르는 사람은 없겠죠. 한국만화의 금자탑이자 불후의 명작이고 길이 남을 고전인 '북해의 별'의 작가 아닙니까. 솔직히 말하면 비천무는 북해의 별에 비해 좀 떨어집니다. 그렇지만 비천무가 그려지기 시작한 시점이 86년도라는 점을 감안해야겠죠. 일본것 갖다 베끼기, 캔디와 신데렐라의 짬뽕으로 일관하고 있던 이른바 '순정만화'라는 장르. 우리나라에서는 황미나를 계기로 일대 도약을 이루게 되는 거죠. 그런데 김혜린은 황미나랑 비슷하면서도..

딸기네 책방 2000.08.22

내 이름은 콘라드- SF도 이 정도면

얼마전 '은하전기'라는 황당무계한 에스에프를 읽었습니다. 파란 머리에 뾰족한 귀를 가진 不老의 우주인들이 등장하는 만화같은 책이었습니다. 오늘은 일주일째 쥐고있던 '내이름은 콘라드'를 다 읽었습니다. 일주일째 쥐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첫부분이 좀 어려워서 그랬을 뿐이고 초반부를 넘기고서는 너무 재미있어서 사실 어제 거의 다 읽은 겁니다. SF소설도 이 정도면, 철학서라고 해야할 겁니다. 책 주인인 마냐님은 이 책을 아주 높게 평가하지는 않으신 것 같은데, 전 정말 너무너무 재미있게 봤습니다. SF소설이면서도 문학적으로 매우 뛰어납니다. 이렇게 세련되고 독특한 책은 요 몇년간 처음 본 것 같습니다.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3일전쟁(핵전쟁)으로 지구는 방사능으로 오염되어 폐허로 변하고 돌연변이 괴물들이 오가는..

딸기네 책방 2000.07.21

아사다 지로, 지하철

지하철. 가장 서민적인 교통수단이 역사를 넘나드는 마법의 통로로 탈바꿈한다. 그러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이 여행에는 어떠한 낭만이나 환타지도 없다. 한 남자가 아버지의 궤적을 거꾸로 밟아가며 보고 싶지 않았던 아버지의 인생을 보게 되는, 가슴 답답하고 두려운 여행이다. 고누마 신지는 어릴적부터 대재벌인 아버지의 횡포와 독선에 짓눌려오다가 가출을 한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반항은 집을 버리는 것이었고, 또 아버지가 줄 수 있는 막대한 재력과 특권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신지는 아버지에게 구박만 받았던 어머니와 함께 조그만 집에 살면서 지하철 구내상가에 사무실을 둔 속옷회사의 보잘것없는 샐러리맨으로 살아나간다. 행복한 사람은 없다. 마음 좋은 속옷회사의 사장은 더이상 '발전'이라고는 꿈..

딸기네 책방 2000.07.15

이제는 미국이 대답하라

이제는 미국이 대답하라 마틴 하트-랜즈버그 (지은이), 신기섭 (옮긴이) | 당대 미국의 진보적 학자인 마틴 하트-랜즈버그가 쓴 '한국현대사'입니다. 원제는 '한반도의 분단과 통일'인데 번역자가 '이제는 미국이 대답하라'라는 다소 도전적인, 명쾌한 '격문'으로 제목을 바꿔 붙였습니다. 이 책은 조선시대부터 개항기까지 한국의 역사를 개관하는 것을 시작으로, 해방 이후 한국의 분단과 그 과정에서 미국이 저지른 '악행'들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좌파 소장학자인 저자는 그중 해방공간에서 인민위원회-인공을 중심으로 한 한국민들의 자생적, 조직적 건국운동을 집중 조명합니다. 미국이 이를 어떻게 짓밟고 제네바합의를 무시한채 한국에 친미정권을 수립했는지를 밝혀내고, 그것이 남북한의 사회를 어떻게 왜곡했는지를 설명합니다...

딸기네 책방 2000.07.11

스티븐 킹, 내 영혼의 아틀란티스

스티븐 킹이라는 작가의 이름은 많이 들어봤는데, 실제로 작품을 읽어본 것은 처음입니다. 역자에 따르면 킹은 96년 오헨리문학상을 받았고, 미저리 쇼생크탈출 등 영화화된 작품을 포함해 모두 36권의 소설이 전세계 33개국 언어로 번역돼 1억권 이상이 판매된 '초베스트셀러 작가'라고 하는군요. 번역자의 말이 과장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 소설, 참 재미있습니다. '마력'이 있다해도 될 것 같습니다. 존 그리샴이나 로빈 쿡처럼 헐리우드의 구미를 당기는 대중소설을 쓰는 작가인줄로만 오해하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내 영혼의 아틀란티스'는 아주 흥미로우면서도 진지합니다. 이 책은 5편의 연작소설로 이뤄져 있습니다. 첫번째 이야기인 '노란 코트를 입은 험악한 사나이들'은 바비 가필드라는 11살 소년이 겪는 ..

딸기네 책방 2000.07.09

파인만씨, 농담도 잘 하시네

1965년에 노벨상을 수상한 미국인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의 책입니다. 사이언스북스에서 출간했구요, 두 권으로 돼 있습니다. 원제는 'Surely You're Joking, Mr. Feynman!'입니다. '파인만의 책'이라고 했는데, 정확하게 말하자면 파인만이 주위 사람들에게 털어놓은 인생의 에피소드들과 추억, 그가 저지른 온갖 장난을 구술 식으로 정리해놓은 겁니다. 회고록이나 자서전이라고 하면 좀 무겁겠고, 에세이집이라고 하기에도 좀 그렇고...장르를 구분하기가 힘든 것은 이 파인만이라는 사람이 워낙 '별난' 사람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 책은 제가 북리뷰팀 주변을 기웃거리면서 건져낸 보석입니다. 마음에 드는 책을 연거푸 만나기가 쉽지 않은데, 올해에는 책 복이 있는 것 같습니다. 파인만은 191..

브레진스키, '거대한 체스판'

거대한 체스판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지은이) | 김명섭 (옮긴이) | 삼인 | 2000-04-01 '유라시아 변두리 인민'의 입장에서 봤을 때엔 참 거북스런 제국주의의 솔직한 고백이라고 할까요. '역사는 진보한다'는 명제, 세계는 인권과 자유의 길로 발전해야 한다는 믿음, 인간이 추구해야 할 것은 평화공존이라는 사고방식에 칼을 꽂는 발상들이어서 읽는 내내 목에 걸렸습니다.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폴란드 태생인데 '공산주의가 싫어서' 미국으로 건너갔다는군요. 역사의 진보에 대한 확신, 그리고 인권과 자유라는 것들은 근대 이래 서구에서 시작된, 그리고 서구가 제3세계에 이식시켜놓은 가치관입니다. 정치적인 수사로서가 아니라 그 본연의 의미만을 따지고 보자면 참 좋은 것들입니다. 그런데 결국은 이런 가치체계가 제..

딸기네 책방 2000.0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