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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의 길'과 '좌파'의 토론

어제 앤서니 기든스와 윌 허튼의 대담을 읽었습니다. 제목은 '세계화 시대의 자본주의는 어디로 갈 것인가'하는 거였는데요, 번역이 좋지 않아 읽는 재미가 떨어졌지만 '망원경으로 조망하는 효과'는 충분했던 것 같습니다. 내용을 소개하면서, 저의 궁금증도 같이 얘기하고 싶네요. 재미있는 것은 두 사람의 태도, 즉 시각인데요, 앤서니 기든스는 다들 아시죠. 토니 블레어 노동당 정권의 브레인으로 꼽히는 사람이고, '제3의 길'이라는 노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윌 허튼은 사상적 스펙트럼에서 위치를 찾자면, 기든스보다 약간 왼쪽에 있는 사람인 듯 합니다. '옵서버'와 '가디언'지 편집장을 지냈습니다. 대담에서 드러나는 두 사람의 차이는 결국 '자본주의는 그 자체 좋은 것(혹은 나쁜 것)인가'하는 문제와, '노동자 계..

딸기네 책방 2000.12.18

괜한 걱정

어제 초등학교 친구 두 명을 만났다. '아이러브스쿨'에 가끔 들어가보지만, 사실 들어가봤자 나같은 사람은 별볼일 없다. 날 보고싶어하는 사람도 없고, 나 역시 특별히 보고싶은 사람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면, 바로 그 두명이다. 두 친구와 용케 연락이 되어 어제 만났다. 종로3가 피카디리 극장에서 2가 쪽으로 오는 길에 오른쪽에 있는 롯데리아로 오라고 친구가 나에게 신신당부를 했었다. 찾아가긴 잘 찾아갔는데, 전철역에서 헤매느라 한 10분 늦었다. 하필이면 어제는 핸드폰을 집에 두고 나오는 통에 애들이 나 기다리면서 굉장히 걱정했다고 했다. 내가 안 나오는 것은 아닐까 하고. 난 어제 우리의 만남을 정말 눈 빠지게 기다렸다. 국민학교 졸업한 뒤에 중학교 다닐 때에도 동네에서 ..

앞뒤로 열린 가구

며칠 전 가구를 만들었다. 여성잡지에 단골로 등장하는 홍대앞 '내가 디자인하고 내가 만드는 가구'에 주문을 했는데, 가장 맘에 드는 건 역시나 '내가 디자인했다'는 점이다. 물론 그렇다 해서 멋지게 폼나는 이쁜 가구는 아니니까 사실 '디자인'이라는 말이 주는 어감을 떠올리면 안 된다. 그저 집성목을 이리저리 잘라 만든 보통 나무 가구다. 그렇지만 나름대로 '설계'를 하다보니 재미가 있었다. 내가 중점을 둔 것은 가구를 앞 뒤로 개방하는 것이었는데- 여느 가구처럼 벽에 붙여 세워놓는 것이 아니라 마루 가운데에 놓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높이 150센티, 폭 130센티, 너비 30센티. 맨 아랫칸은 현관 쪽으로 여닫이문을 달았고, 그 위의 두 칸은 마루 쪽으로 책꽂이를 냈다. 맨 위칸은 양쪽을 모두 '개방'했..

이성과 욕망이 부딪치는 '섬'

섬 | 원제 Trazo de tiza 미겔란쏘 프라도 (지은이), 이재형 (옮긴이) | 현실문화연구(현문서가) '섬'이라는 공간은, 글쎄, 별로 가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다. 기껏해야 제주도나 거제도밖에 가본 일이 없는데 그 묘한 어감의 공간을 이해하기에는 아직 내 경험과 지각력이 못 미치는 것 같다. 스페인 작가 미겔란쏘 프라도의 '섬'은 아주 어둡고 아름다운 화면으로 구성된 그림책이다. 굳이 따지자면 '만화'인데, 현실문화연구에서 앞서 발간한 엥키 빌랄의 '니코폴'이 그랬던 것처럼 '예술적'이고 멋지다. 외딴 섬. 이 섬의 특징을 가리키는 표현은 '지도에 나와있지 않은 섬'이라는 말이다. 지도에 나와있지 않다는 것은 1차적으로 이 섬이 아주 작다는 뜻이면서, 한 차원 더 들어가면 이 섬이 인간의 환상..

딸기네 책방 2000.12.07

참새가 없는 세상

며칠전 누구누구와 이야기를 하다가 참새 이야기가 나왔다. 참새 얘기가 나온 것도, TV 덕분이었다. 오랜만에 TV에 비친 참새를 봤는데 반갑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했다. 참새가 사라졌다는 걸 그제서야 알았기 때문이다. 참새시리즈는 한때 유행하는 농담의 대명사였는데, 요즘에는 골목에서 참새를 찾아보기가 힘들다. 내 눈에만 안 보이는 걸까. 하긴, 골목 자체가 사라졌다고 해도 될 것 같다. '골목의 문화' '골목살이'가 없어진 꼴이니까. (골목에 대해서는 지난해에 경실련 도시문화센터의 김병수 부장이 나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면서 던진 화두인데, 언젠가는 글로 써보고 싶은 주제이기도 하다) 골목 얘기는 다음으로 미루고, 하여간에 참새가 사라졌으니 요즘 아이들은 아마 참새시리즈도 모르지 않을까. 내가 대학생일 때..

폴란드의 풍차

폴란드의 풍차 Le moulin de Pologne 장 지오노 (지은이) | 박인철 (옮긴이) | 민음사 | 2000-10-01 고대 희랍 사람들이 비극을 좋아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줄곧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의 비극을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 책을 쓰는 동안 장 지오노가 그리스의 비극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비극은 항상 운명과 함께 간다는데. 운명, 별로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데 어쩐지 낯설게 느껴지는 말이다. 더우기 나처럼 말초적인 드라마들에 몰두해 있는 독자한테는 다소 어렵기도 한 단어다. 운명은 선대의 실수나 악의, 또는 신의 저주 따위를 후대의 사람들이 극복해낼 수 없기에 생기는 일들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싶다. 우리 식으로 말하..

딸기네 책방 2000.11.24

앰버연대기

앰버연대기 로저 젤라즈니 (지은이) | 최용준 (옮긴이) | 사람과책 | 2010-07-09 판타지는 인류가 가져온 가장 오랜 문학 장르일 게다. 현대적인 판타지는 알다시피 톨킨이 '반지전쟁'에서 틀을 잡아놨다. 그 틀은 결국 '선과 악의 대립'인데, 착하고 용감한 주인공이 마계에 맞서 싸우는 게 가장 일반적인 구도다. 로저 젤라즈니의 소설은 '판타지'에 해당되기는 하지만 주제가 상당히 철학적이다. '앰버 연대기'는 무지무지 재미있어서 정말 '손에 땀을 쥐고' 다음 권을 펼쳐야 하는(무려 5권!) 간만에 만난 재미난 소설이었는데, '어렵다'는 점에서는 같은 작가의 초기 소설인 '내 이름은 콘라드' 못지 않다. 그렇지만 훨씬 흥미진진하고 스릴이 있어서, 읽는 동안 날마다 잠자기전 '밤을 새울까 말까' 망설..

딸기네 책방 2000.11.16

가죽 벗기기

(여러분, 제가 드디어 시를 썼습니다! ) 제목: 가죽 벗기기 호랑이의 가죽을 벗기는 전통적인 방식. 호랑이의 코와 입 부분에 십자형 칼집을 넣고, 호랑이를 묶어놓는다. 그 다음 호랑이의 똥꼬에 불을 놓으면 호랑이가 앗 뜨거 하면서 앞으로 뛰어나가겠지. 그런데 몸통이 묶여있으니, 알맹이만 처음에 만든 칼집으로 빠져나가고 가죽은 남는다. 호랑이는 이렇게 죽지 않고도 가죽을 남길 수 있다. 그럼 빠져나간 알맹이 호랑이는 어떻게 생겼을까. 기름기가 얇게 끼어있는 맨들맨들한 몸에 얼룩이 사라진 호랑이는 별로 무섭지는 않을 것이다. 겨울 나는데에는 좀 힘이 들겠지만. 이 방법은 개나 고양이 등 각종 포유류에 응용할 수 있을 것 같다. 같은 방법으로 거북이의 등딱지를 떼어낼 순 없을까. 거북이 등을 막대기 따위로 ..

일요일의 상상

밖은 추울까. 좀전에 잠시 햇빛이 나는가 싶더니, 또다시 하늘이 회색으로 변했다. 비나 눈이 올 것 같은 날씨다.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행복한 토요일이었던 어제는 아침 9시에 일어나 집 뒤편 가게에 갔다온 것 외에는 하루 종일 집 안에서 뒹굴며 잠을 잤다. 가게에 갔다오는 길에 보니 보도블럭에 떨어진 물 자국이 미끄러웠다. 설마 저게 얼음이랴 싶었는데, 차들 지나가지 못하게 막아놓은 시뻘건 드럼통 위에 고인 것이 분명히 얼음이었다. 가게 아저씨는 '얼음이 얼었네요' 하는 내 말에 무슨 봉창두드리는 소리냐는 듯이 '오늘 영하잖아요' 라고 했는데, 얼음이 언 것을 보니 그제서야 겨울이 왔다는 것이 실감났다. 오늘은 아예 찬 공기 속으로는 콧배기도 내밀어보지 않은채 집안에 틀어박혀 온돌공주 노릇을 하고 있다...

언젠가 바다 깊은 곳으로

언젠가 바다 깊은 곳으로 1, 2 마루야마 겐지 (지은이) | 박은주 (옮긴이) | 책세상 | 2000-07-10 제목은 멋진데 난 사실 바다가 무섭다. 우스운 소리 같지만 물이 너무 많아서다. 대학교 1학년 때 동아리 사람들이랑 부산 태종대에 갔었다. 거기서 절벽 밑의 바다를 봤는데, 낮인데다 햇빛이 좋은 날이라서 그랬는지 물이 하늘색이었다. 내가 "물 정말 많다"고 했더니 사람들이 당연한 소리를 한다고 비웃었다. 그런데 돌아보니 바위에 누군가가 "물 정말 많다"고 새겨놓은 게 보였다. 그래서 다들 배를 잡고 웃었다. 바다는 물 덩어리인데, 난 그게 너무 큰 덩어리라서 무섭다. 특히 밤에는. 난 아마도 바닷가에서는 살지 못할 것이다. 밤만 되면 검고 커다란, 상상도 못하게 커다란 물덩어리가 있는데 무서..

딸기네 책방 2000.1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