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얘기 저런 얘기

내 그림자 중의 하나는

딸기21 2001. 3. 17. 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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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그림자 중의 하나는 모든 그림자가 그렇듯이 늘 나를 따라다니는데,
그림자 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고 정답게 생각하는 놈이다.
내가 간간이 사색을 할 때마다
내 뒤에서 나를 흘낏흘낏 바라보는 이 그림자는 가끔씩 건방지게도,
내 등뒤에서 고개를 내밀고 내 손이 하는 일들을 지켜보기도 한다.
내가 지뢰찾기에 열중해 있을 때, 내가 컴퓨터 고스톱을 치고 있을 때,
내가 홈페이지에다 시덥잖은 소리를 쳐넣고 있을 때
무슨 재미난 구경거리나 생긴 것처럼 들여다본다.

어린 아이들은 손가락을 자기 코 앞에 갖다대고 그걸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눈알을 가운데로 모으는 놀이를 한다. 난 어른이 된 지금도 가끔 그 놀이를 하는데,
손가락을 동원하지 않고 맨 얼굴로도 코 주위에 눈알들이 모이게 할 수가 있다.
그림자는 생선처럼 내 눈알이 가운데로 모이게 하면 아주 재미있어 한다.

오늘은 출근하지 않는 토요일이어서 하루 종일 그림자와 놀 시간이 있었다.
어제는 사실 꼬리뼈가 너무 아팠다. 꼬리가 나오려는 건지,
아님 누가 나한테 똥침을 놨는지,
꼬리가 무지무지 아파서 앉았다 일어나기가 힘이 들었다.

그래서 오늘은 늦잠을 자려고 마음을 먹었는데,
아침 8시가 되니까 그림자가 나를 깨웠다.
정은아 놀자, 정은아 놀자, 정은아 놀자.
나를 몹시 귀찮게 굴어서 아무 것도 하질 못했다.
소설책도 많이 읽고 인간게놈에 대한 공부도 하려고 했는데 그러지를 못했다.
동서남북으로 나뉘어진 나라에 관한 소설을 읽으려 하면 이 놈이 옆에 앉아서
너의 나라는 어떻게 됐냐고, 늘 네가 자랑하던 이끼로 덮여있는 마당이랑
옆으로 쓰러진 나무랑 푸른곰팡이는 어떻게 됐냐고
종알종알 떠들면서 성가시게 했다.

하는 수 없이 몇마디 대꾸해준 다음에
내 왼손 가운뎃손가락에 있는 별을 보여주었다.
내 그림자는 나와 똑같이 생겼지만 손가락의 별은 나한테만 있는 보물이다.
백설표 마크처럼 생긴 별을 자랑하고 나서
케잌 박스를 묶었던 초록색 끈을 가져다가 그림자의 손발을 묶고
중국집 스티커를 붙여서 입을 틀어막고 담요로 덮어버렸다.
녀석이 조용해진 틈을 타 부엌에서 멸치를 볶고 있는데,
어느 틈에 그림자는 내 옆에 와 있었다.
내 멸치를 세개나 먹고 나서 그림자는 실컷 낮잠을 잤다.

남편이 '카게무샤' 비디오를 빌려왔는데,
지금 그림자는 남편의 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열심히 비디오를 보고 있다.
일본 무사가 칼로 마룻바닥을 쾅 내리쳤더니 그림자는 놀라서 움찔했지만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남편은 지금 자기 옆에 누가 앉아서 같이 비디오를 보고 있는지도 모른채
텔레비전 화면을 뚫어져라 들여다보고 있다.
남편은 자기 옆에서 장난을 치고 간지럼을 태우는 것이 나인지,
내 그림자인지 분간을 못 할 때가 종종 있다.
남편 뿐만 아니라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그렇다.
그림자들은 돌아다니면서 제 주인을 흉내낼 때가 많기 때문에,
나와 함께 떠들고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이 과연 그 사람인지
그 사람의 그림자 중의 하나인지 구별이 안 되는 것이다.

내 그림자는 내가 자기네들을 잘 알아보지 못하는 게
내가 쭈그리고 앉아서
'옴마니 밤메홈' 같은 거나 흉내내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내 생각에는 그건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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