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얘기 저런 얘기

H2

딸기21 2001. 3. 11.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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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테도 열일곱살이 있었을텐데, 대체 어디로 갔을까. 
바다 건너온 만화책이 이렇게 마음을 흔들어놓다니. 
내 마음은 지금 마구 흔들려서, 공중을 떠돌고 있다. 머릿속마저, 야구공처럼 어딘가를 한정없이 날아다니고 있다. 

열일곱살.
그 나이를 떠올리면서 칙칙한 교실과 여고괴담 분위기의 유관순 초상화, 무거운 도시락통 같은 걸 떠올려야 된다는 건 비극이다. 그래서 난 좀 다른 걸 떠올려보기로 했다.







내가 열일곱살 때, 서울올림픽이 있었다. 그날, 친구와 올림픽공원에 갔었다.
9월17일, 날짜도 잊어버리지 않는다. 올림픽 개막식 날이었으니까.
올림픽 공원에 갔다는 것 외에는 딱히 내세울만한 추억거리가 그날 벌어졌던 것도 아닌데, 내 머리 속에는 열일곱살에 대한 그런 단편적인 기억들만 떠오른다. 조각조각 흩어진 기억을 이어주는 건 강경옥 식으로 그려본다면 '약간 희뿌연 공기사이로 스며드는 햇빛'이다.

그래도 좋지. H2의 주인공은 히로와 히데오다. 
그리고 두 여학생 히까리와 하루까. 2쌍의 H2의 열일곱살 청춘스케치다.

유난히 성숙이 빠른 히까리와 유난히 성장이 느렸던 히로는 어려서부터 함께 자란 소꼽친구 사이. 그런데 코흘리개였던 히로는 중학교의 어느 순간에 히까리와 비슷한 키로 훌쩍 자랐다. 히까리가 '첫사랑'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세상에, 중2라는 나이도 이미 '너무 늦은 나이'였다. 히로한테는.

겉으로 보면 전국고교야구대회를 둘러싼 히로와 히데오의 경쟁과 우정을 그린 '야구만화'인데, 속을 보면 10대들의 성장을 담은 '사춘기 만화'다. 사춘기 아이들의 미묘하고 복잡하고 돌발적인 심리를 너무 잘 그려내서 기가막힐 정도다. 또 몹시 웃기다. 아주아주 코믹해서, 진짜로 혼자 만화책 들고 데굴데굴 구르며 봤다. 무려 34권이나 되는 책을 순식간에 해치워버리게 만든다. 그림은, 요즘 우리나라의 잘난척하는 만화작가들이 이미 옛날에 집어치운 소년중앙風의 명랑순정 터치다.

히데오의 야구감독이 독백처럼, 하는 말이 인상적이다.

"열일곱살은 너무 좋은 때이지만, 너희들을 부러워하지는 않는다. 나에게도 열일곱살이 있었기 때문에."

그럴까...그렇다. 적어도, '그런것 같다'. 열일곱살 때로 돌아가라고 한다면 난 가지 않을 테니까. 아무리 재미있으려고 노력해도 결국은 지겨운 학교, 입시, 어느 학교에나 있던 '미친 개' 선생, 학교 올라가는 힘든 언덕길, 그런것들이 먼저 떠오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냥, 이미 지나온 길이기 때문에 다시 가보고 싶지 않다고 하면 설명이 될까.
내가 히로라면, 혹은 히까리라면, 하루까라면 하는 생각은 정말 유아적인 상상일 뿐이겠지만 그래도 부럽다. 돌아가고 싶지는 않으면서도 부러운 열일곱살.

오랜만에 '나의 사춘기'를 떠올려봤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학교 복도 창문을 뚫고 들어온 햇빛이 머리속에서 안 지워져서, 붕 떠오른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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