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얘기 저런 얘기

은빛 여우

딸기21 2001. 3. 21. 0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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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에 조지 마틴의 판타지소설 '얼음과 불의 노래'를 열심히 읽었다.
얼마나 재미있게 읽었냐면, 내 몸통이 거의 소설 속으로 들어갔다.
판타지 소설에 흔히 나오듯이, 각 등장인물들에게는 가문의 문장이라는 게 있다.
나는 내 문장을 '은빛 여우'로 정했다. 왜냐? 멋있어보일 것 같아서.

얼음과 불의 나라는 동부, 서부, 북부, 남부로 나뉘어 있는데
주인공은 북부의 영주이다. 그러니 내 눈에 북부가 가장 멋있어 보일 수밖에.
실은 나는 추운 곳을 아주 싫어하는데,
주인공을 따라서 북쪽 나라에 살기로 했다.
주인공보다 더 훨씬 북쪽에.

북쪽 나라에는 언제나 늑대가 있다. 그러니 나도 내 문장을
늑대 종류로 정해야 하는데
주인공 집안의 문장이 바로 다이어울프(늑대)가 아닌가.
그래서 할 수 없이 나는 늑대와 제일 비슷한 여우를 고르고,
가장 멋져 보이는 '은빛'을 덧붙이기로 했다.
참고로 말하자면, 은빛 여우를 항상 데리고 다니는 나는
당근 검술이 뛰어나며
내 검은 가문 대대로 상속자에게 전해내려오는
은장도...가 아니고
설원의 달빛을 받아 푸르게 빛나는,
눈사람들이 달구어놓은 '문레이저'다.
실은 아킬레스처럼 백양나무 창을 쓸까 했는데
오로라가 빛나는 북쪽의 설원에 백양나무가 자라지 않을까봐서
양날검으로 바꿨다. 양날검을 고른 이유는
적들의 목을 한번에 많이 베기 위해서다.

그런데 나의 구상을 조금 바꿔야 하는 일이 발생하고야 말았다.
방금 전에 '선계전 봉신연의'를 보니까
주인공들이 무언가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닌다.
두 개의 구상을 어떻게 합칠 수 있을까 하고 궁리하다가
나는 은빛 여우를 타고 날아다니기로 결심했다.

이제 나의 여우는 말만큼 커져버렸다. 나는 거대한 여우를 타고
눈덮인 마을들을 지나 고블린이 설치는 삼림지대를 지나
남쪽으로 날아간다.
그럼 나는 여우를 타고 하늘을 나는데
빼미언니는 올빼미를 타고(이건 좀 폼이 나는군요)
마냐님은 당연 빗자루를 타고
아지님은 헬로 키티를 타고 날아간다.
(룰루는 걸어온다. 거북이를 줄에 매어 끌고서 터덜터덜)

나는 어렸을 때 꿈속에서 가방을 타고 하늘을 난 적도 있고,
책을 타고 날기도 했고,
심지어는 쓰레받기를 탄 때도 있다.
왜 그런지 모르지만 나는 항상 꿈 속에서 날아다녔는데
자유로이 훨훨 비상한 것이 아니라(쓰레받기를 타고 어떻게 비상을 하겠는가)
무언가에 쫓겨다녔다.

지금도 나는 역시나 오로라의 건너편에서 온 마왕을 피해
달아나는 중이다.
뒤에서 쫓아오는 적, 앞에서 기다리는 적.
적들은 나의 문레이저에 쓰러지고 잘려나가고 기어이 초토화될 것이다.


<룰루의 답글>

틀렸어요.
룰루는 파이어볼트와 양탄자를 놓고 고심하느라
거북이를 간혹 잃어버리기는 해도...
절대 걷지는 않죠.
왜냐
맨날 걸어다니는데
딸기언니가 은빛여우 타고 남쪽나라로 갈 때까지
제가 걸을리 없죠.
ㅎㅎㅎ

근데 저는 삼림지대를 지나다가
숲에 매료되서 내려앉을 거 같아요.
이런 저에게 '미셸 투르니에'는 마음아픈 이야기를 하더군요."책제목은 '예찬'인데 우째 이런일이"라고 생각하다가 진정한 예찬은 대상을 속속들이 알고 느끼고 이해한 후에도 찬탄할 수 있는 경지에서 가능한 게 아닐까 싶기도 하구요.

태어날때부터 땅에 발목이 잡혀있는 모든 식물들이 시달리는 강박관념 ...적도의 숲은 인간뿐 아니라 나무들에게도 지옥이다...나무들은 서로를 증오한다.나무는 좋은 의미에서 개체주의적이고 고독하고 에코이스트다...숲이야말로 집단수용소의 강제적인 혼잡 그 자체이다...숲속의 공기는 그 식물적 증오로 가득차 있다.산책자들의 폐에 달라붙어 가슴을 답답하게 하는 것은 바로 그 증오다...나무는 숲은 견디지 못한다.
숲을 화목한 공동체라고 생각하는 저에겐 참 이상한 예찬이었죠.

투르니에는 나무와 나무들의 숲 속에서 곁에서 함께 자라고 살아서 그런가봐요.
저는 숲없이 자라다 몇년에 한두번 만나서 그런가봐요.
또 뭐 숲이라도 다 같은 숲은 아니니까.

숲과 사회
나무와 사람
이해와 오해의 경계를 헤메는 룰루가
자꾸 횡설수설하는 건
물론
딸기언니의 환타지 취미 때문일거야. 분명해.
딸기를 멀리해서 본모습을 되찾자고
결심했습니다. 지금.


<딸기의 답글>

숲으로 내려간 룰루

2001/03/23

내가 은빛 여우를 타고 갈 때 밑에서 타박타박 걸어가던 룰루가
파이어볼트라는 무서운 이름의 방망이를 몰래 훔쳐와서
빗자루라고 주장을 하더니 내 앞에서 휘휘 돌고, 한바퀴 뒤집고, 시위를 했다.
미셀 투르니에가 뭐라고 말했는지는 모르지만, 들어보니 좀 무서워졌다.
숲은 나무들의 증오가 숨쉬는 공간이라고? 내 느낌이 바로 그렇다.
숲에 대한 내 생각을 그렇게 똑같이 써놨다니, 그 책을 한번 봐야겠다.
나는 열대의 정글에 들어가본 일도 없을 뿐 아니라 뒷동산에도 가지 않지만,
어쨌건 숲은 싫다. 투르니에 식의 반어법적인 예찬이 아니라,
난 숲속에 들어가면 그 끈적끈적하고 축축한 공기 때문에
상쾌해지기는 커녕 기분이 오히려 지저분해진다.

"바람 부는 어두운 밤, 누가 이렇게 늦게 말을 타고 가는가?
그건 아이를 안고 있는 아버지.
아버지는 아이를 따스하게
품에 꼭 껴안고 있다.

아들아, 왜 그렇게 떨며 얼굴을 감추고 있니?
아버지, 아버지 눈엔 오리나무 왕이 보이지 않나요?
왕관을 쓴 오리나무 왕이 땅에 끌리는 옷을 입고 있잖아요.
아들아, 그건 안개의 옷자락이란다....

...난 널 사랑해, 난 네 예쁜 몸을 가지고 싶어.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널 때려주겠다!
아버지, 아버지, 오리나무 왕이 날 데려가요!
오리나무 왕이 날 아프게 해요!

아버지는 덜덜 떨며 말을 재촉한다.
그는 신음하는 아이를 가슴에 꼭 끌어안는다.
너무나 힘겹게 그는 농장에 도착했지만
품 속의 아이는 벌써 죽어있었다"

괴테의 '오리나무왕'이다. 룰루의 글에 화답해,
미셸 투르니에의 책 중에서 골라왔다.
끈적끈적한 증오의 숨결을 좋아하는 룰루는 내가 대문호의 시를 낭송하고 있는데
새겨 듣지도 않고 파이어볼트를 타고 놀다가 갑자기 빗자루로
은빛여우의 배를 간질렀다. 여우는 화가 나서 룰루의 양탄자를 뒤집어버렸고,
대상도 없이, 굳이 있다면 자연 전체라고 할만한 상대를 향해
증오와 탄식을 번갈아가며 중얼거리던 나무들은
공중의 장난질을 참지 못하고 룰루의 머리채를 당겨 숲속으로 끌어내렸다.

그러면 그 다음에 룰루는 어떻게 됐을까.
자기가 좋아하는 숲속에서 독버섯을 따먹으며
알록달록한 얼굴로 계속 거기에 살고 있을까?
룰루는 나를 저주하면서,
호시탐탐 여우의 은빛 털을 몇가닥 뽑아다가
못된 요술을 부리는데 써먹을 생각을 하면서,
독버섯이랑 송진이랑 나방 몇마리를 잡아먹으면서, 복수를 다짐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판타지의 세계에서, 안티히어로가 승리를 거두는 일은 없다.
언젠가 룰루가 거북이 껍질로 만들어진 표창을 던진다 한들,
내가 거기에 맞아 죽는 일은 없다.

룰루가 어두운 숲길을 가는 나를 기습해오면
과감히 문레이저를 휘둘러 굴복시키고야 말리라.
나는 널부러진 룰루의 목에 잠시 칼날을 겨누었다가,
너그러이 용서하고 검을 거둘 것이다.
그리고 쓰러진 룰루의 가슴을 밟고 있는 여우를 불러들여
유유히 떠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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