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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놈 - 23장에 담긴 인간의 자서전

딸기21 2001. 3. 27. 11:36

게놈 - 23장에 담긴 인간의 자서전 
매트 리들리.
  

문과 공부를 한 다른 사람들에 비해, 나는 '비교적' 과학에 관심이 많은 편이다. 관심의 이유는 지적 호기심, 혹은 지적 허영심, 쉽게 말하면 '알고 싶은 게 많아서' 이고, 어렵게 말하면 내가 물질 중심의 사고관을 갖고 있기 때문인데, 이 모든 이유들을 한마디로 하면 '알고싶어서'다. 인식의 지평을 넓힌다는 것. 올해에는 특히 과학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할만한 소식들이 많았다. 내 호기심을 자극한 첫번째 것은 인간게놈지도가 완성됐다는 것. 인간게놈지도를 완성시킨 것은 두 집단인데, 하나는 '모험(벤처)적인 과학자' 크레이그 벤터가 이끄는 셀레라 제노믹스라는 '기업'이고, 또 하나는 '공리적인 과학자' 존 설스턴이 이끄는 HGP(인간게놈프로젝트)라는 단체다.
호기심을 부추긴 두 번째는 '광우병'이다. 신문 지상을 장식하는 프라이온이라는 이상하기 짝이없는 단백질, '변형프로이츠펠트 야코프병'이라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질병의 뉴스를 수시로 듣다보니 궁금증이 생기는 것은 당연했다.

매트 리들리의 '게놈'에는 '23장에 담긴 인간의 자서전'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아주 재미있고, 잘 쓰여진 책이다. 알다시피 인간의 염색체는 23쌍인데 그 중 성염색체를 제외한 22쌍의 염색체마다 지능, 학습, 우생학, 자유의지 따위의 주제를 결부시켜서 인간-유전자-환경의 문제를 설명한다. 영국 텔레그라프지의 과학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는 리들리는 정말 쉽고도 흥미진진하게 우리 유전자의 속성과, 그것들이 갖고 있는 의미와, 그 귀염둥이들에 대한 탐구의 역사를 설명한다. 리들리라는 유전자덩어리가 얘기한 것을 딸기라는 다른 개성을 가진 유전자덩어리가 해석한바에 따르면, 전자의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결정론을 거부하지 말라. 인간들은 지난 세기의 전반기에 나치스가 저지른 악행에 대한 과민반응의 결과, '유전학적 결정론'을 극단적으로 거부해왔다. 환경결정론에 기대어 '부모 탓, 교육 탓, 사회제도 탓'을 하면서도 희한하리만치 유전적 결정론을 거부해왔는데, 우리가 거부할 것은 '결정론'이 아니라 '숙명론'이다.

리들리의 비유 하나. 솥에 국을 끓이면서 비소를 넣으면 독이 되지만 그렇다고 요리하는 행위 자체를 독약 취급하면 안 된다. '요리사가 쓰면 식칼, 살인범이 쓰면 흉기' 식으로 '도구 무책임론'을 주장하는 것 같기도 한데, 나는 기본적으로 리들리의 생각에 동의한다. 과학만능론을 경계해야 한다는 소리가 높은데, 그렇다면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동차니 세탁기니 보일러니 하는 것들도 모두 포기해야 되지 않느냔 말이다.
어쨌거나 인류는 그동안-적어도 한 200년 전부터는- 모르는 것들을 알아내기 위해, 특히 과학의 영역에서 인식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 애를 써왔다. '게놈'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우리 유전자가 갖고 있는 의미와 그것들의 기능, 생성과정을 알기 위해 똑똑한 과학자들이 얼마나 수고를 해왔나 하는 것이다. 인간은 조금씩 성과를 거두고 있다. 나는 그 성과를 고맙게 생각하고, 그것들을 좋은 일에 자꾸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광우병이나 헌팅턴병에 대한 연구과정은 정말 흥미진진했다. 추리소설을 보는 듯한 기분으로, 내 유전자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