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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매킨토시-스미스, '아랍'

"14세기 전반기는 모든 것이 움직이는 드문 시기였다. 십자군 원정은 끝났고, 타타르족은 길들여져 이슬람을 받아들였으며, 세계는 그물망처럼 얽혔다. 킵차크 튀르크족 노예였던 아버지를 선왕으로 두고 이집트와 시리아를 다스렸던 맘루크 술탄은 칭기즈칸의 후손이며 중국 원나라 황제의 사촌이자 이라크와 페르시아를 다스렸던 젊은 타타르족 일 칸에게 애틋한 감정을 품었으나, 일 칸의 다른 사촌인 킵차크 칸의 딸과 결혼했다. 킵차크 칸은 비잔티움 황제의 딸과 결혼했는데, 황제의 서녀 한 명은 트레비존드의 황후였고, 사보이의 안나가 낳은 적녀 두 명은 각각 불가리아 왕자와 제노바의 귀족과 결혼했으며, 그 제노바 귀족의 계모가 ‘브라운슈바이크의 경이’라 불렸던 헨리 공작의 딸이었다. 혼인이 맺어졌고, 돈도 그랬다. 동서 ..

딸기네 책방 2021.01.28

[구정은의 '수상한 GPS'] 정치폭력의 역사에 눈감아온 미국

정권교체를 앞둔 미국이 연일 시끄럽다. 의회 폭력사태까지 일어났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지지자들이 6일(현지시간) 워싱턴의 의사당에 난입했다. 조 바이든 당선자의 대선 승리를 확정짓기 위한 상·하원 합동회의를 저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주방위군이 투입됐고 의사당 안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 의사당 부근에서 사제폭탄까지 발견됐다. 어쨌든 7일 새벽 각 주의 대선 선거인단 투표 결과가 인증되고 바이든은 제46대 대통령 당선자로 최종 확정됐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4명이 숨졌고 수십명이 체포됐다. 이후 검거작전도 계속되고 있다. 이 사건은 명백히 트럼프 본인이 부추긴 폭력사태다. 트럼프는 지난해 대선 전부터 거듭해서 선거부정 음모론을 퍼뜨렸고, 자신이 패배할 것으로 예상되자 결과에 불복하라는 메시지를 지지자들에..

마이클 돕스, '1945'

1945 From World War to Cold War 마이클 돕스. 홍희범 옮김. 모던아카이브 정말 길고 자세하다. 너무 상세해서 이렇게까지 읽어야 하나 싶었는데 뒤로 갈수록 잼나다. 철도교차점은 작센주의 주도인 드레스덴 북서쪽에 있었다. 러시아 측 전선에서 110킬로미터 정도 밖에 안 떨어진 이곳에는 소련군의 진격을 피해 도망친 피난민들이 들끓었다. 러시아인들을 놀라게 한다는 목적은, 오래된 작센 주 주도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 순수한 군사적 고려만큼이나 중요했다. 드레스덴 공습은 얄타회담 이틀 뒤인 2월 13일 저녁에 실시됐다. 영국 공군이 먼저 오후 10시 14분에 도심부를 고폭탄 500톤과 소이탄 375톤으로 융단폭격했다. “엘베강의 피렌체”로 알려진 이 바로크 시대 도시의 심장부가 불길에 휩싸..

딸기네 책방 2021.01.12

[Q&A] 한국 선박 나포한 이란

-한국 선박이 이란에 나포됐습니다. 지난 4일, 사우디아라비아를 떠나 아랍에미리트연합(UAE)으로 향하던 한국 국적 유조선 '한국케미'가 이란 혁명수비대에 나포됐습니다. 이란 언론 보도와 이란 정부의 입장을 종합하면, 유조선이 환경 오염을 일으켜서 붙잡았다고 합니다. 나포된 선원들은 한국인, 인도네시아인, 베트남인, 미얀마인 등 20명이고 이란 남부 항구도시인 반다르압바스에 구금돼 있다고 합니다. 이란 측은 이 선박이 ‘반복적으로 환경 규제를 위반했다’고 밝혔으나 선사인 디엠쉬핑 쪽에서는 “이란 혁명수비대에 끌려간 지점은 이란 영해가 아닌 공해인데다 환경오염은 일으키지 않았다”고 반박했습니다. -작년 1월에 이란 혁명수비대 사령관을 미군이 이라크에서 살해했지요. 호르무즈 해협의 긴장 높아지고 한국군 청해..

윌리엄 노드하우스, '기후카지노'

기후카지노 윌리엄 노드하우스. 황성원 옮김. 한길사 읽기 전에 좀 고민을 했다. 기후변화와 에너지에 대한 책을 또 읽어야 하나... 하지만 읽으면서 이 책은 기록을 꼭 해놔야지 싶었다. 저자의 스펙으로만 보면 이 분야 책들 가운데 독보적이다. 예일대 경제학 석좌교수, 2018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책은 그 유명한 상을 받기 전인 2013년, 미국 버락 오바마 행정부 때 낸 것이다. 교토의정서 체제는 끝났고(저자는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고 그런 측면이 실제로 있지만 국제사회의 대응체제를 어쨌든 만들었다는 점에서 한계만을 볼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파리 기후변화협정(2016년)은 나오기 전의 그 시기. 미국 조지 W 부시 행정부를 거치면서 '기후변화 스핀(기후변화 따위는 없다~ 과장됐다~..

딸기네 책방 2021.01.06

보스턴다이내믹스, 이날치, 현대차

보스턴다이내믹스(Boston Dynamics)는 로봇 매니아들에겐 도요타만큼이나 유명한 회사다. 1992년 매서추세츠공과대학(MIT) 연구자들이 만든 팀에서 출발했고, 소프트뱅크 그룹이 지분을 갖고 있다가 2020년 12월 현대자동차그룹이 인수했다. 한때는 미국 산업혁명의 중심지였고 이어 미국 노동운동의 중심이 됐던 매서추세츠주 월댐에 본사를 두고 있다. 이 회사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뛰고 달리고 던지고 잡고, 심지어 사람들에게 얻어 맞고 춤추는 로봇들이다. 예를 들면 스팟(SPOT)은 개 모양의 로봇인데 사방을 돌아다니며 ‘보고’ 움직인다. 핸들(HANDLE)은 두 바퀴 유모차에 긴 팔 하나가 달린 것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창고에서 무거운 상자를 나르고 쌓는 작업을 꽤 부드럽게 할 수 있다. 가장 ..

[구정은의 '수상한 GPS']미리보는 2021년, 메르켈의 후임은?

코로나19 때문에 힘겨웠던 2020년은 가고 2021년이 왔습니다. 올 한 해 세계에서는 또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지난해는 세계 사람들 모두에게 너무나 힘든 한 해였습니다. 해마다 연말연시가 되면 한 해를 돌아보고 새해를 그려보지만, 2020년을 거치면서 한 해 예측이 이렇게 무의미해질 수도 있구나 싶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도 2021년의 가장 큰 변화는 누구든 예측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미국의 정권교체이겠지요. 1월20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취임합니다. 도널드 트럼프 정부 시대가 세계에 미친 영향이 너무 컸습니다. 주로 악영향이 많았던 게 사실이지만. 바이든 정부의 출범이 세계 정치지형에 큰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보입니다. 무엇보다 트럼프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탈퇴했던 파리 기후..

2020년 읽은 책

1. 가짜 민주주의가 온다. 티머시 스나이더. 유강은 옮김. 부키. 1/8 2. 새로 쓴 베트남의 역사. 유인선. 이산. 1/28 3. 여성 연구자, 선을 넘다. 엄은희 구기연 등 12명. 눌민. 1/29 4. 붕괴. 애덤 투즈. 우진하 옮김. 아카넷. 2/5 정말 방대하다. 이런 걸 '역작'이라고 하는구나. 앞부분은 금융 용어가 많아 어질어질. 물리학이나 인도 서발턴 학자들 글보다 더 어렵다 @.@ 하지만 뒤로 갈수록 흥미진진.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와 이어진 유로존 위기는 이 책의 주제이자 줄거리이자 거의 전부이지만, 거기서 멈추는 게 아니다. 금융위기 대응이라는 디테일을 가지고, 국제-국내정치와 경제의 상호작용과 역학관계를 깊고 넓게 들여다본다. 저널리스트처럼 세세하게 설명하는데 읽다 보면 통찰..

마이클 영, '능력주의'

능력주의 마이클 영, 유강은 옮김. 이매진. 12/31 Meritocracy. '능력주의'라고 번역돼 있긴 하지만 무슨무슨 '크라시'가 붙는 것에서 보이듯 정확히 말하면 능력에 따른 지배, 능력계급주의다. 일단 쟁이고 보는 유강은 번역가가 옮긴 책. 오래도록 회사 책상에 놓아두기만 했다가 퇴사하기 전부터 읽기 시작했고, 늘 그렇듯 한참 시간을 끌며 두어장씩 넘기다가 결국 해가 바뀌기 직전에야 끝을 냈다. 책 표지도 크기도 팜플렛 같다. 두껍지 않고 군더더기도 없다. 제목이나 표지의 분위기와는 전혀 다르게, 사회과학 책이나 평론처럼 생긴 이 책의 장르는 소설이다. 1958년 영국 노동당 이론가였던 마이클 영이 쓴 것으로, 가상의 사회학자 '마이클 영'이 2043년의 영국을 말하는 내용으로 구성돼 있다. 세..

딸기네 책방 2020.12.31

신문기자 일을 그만뒀습니다

"니 몇년 됐노." "26년이요." "오래 했네. 고생했다." 오랜만의 통화에서 아버지는 이렇게만 말씀하셨습니다. 기자 아들, 기자 딸을 늘 자랑스러워하셨던 기자 출신 아버지. 이제는 기자 사위 하나만 남았네요. 몇달 전 제가 빌려준 난민촌에 관한 책을 읽고 난 후배가 그러더군요. 제가 밑줄 그어놓은 부분을 보니까 "당장이라도 출장을 떠날 사람처럼" 줄을 쳐놨더라고. 그 말 듣고 웃었는데 뒤에 혼자 곰곰 생각해보니 그 후배의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언제 어디를 가든 기사를 쓸 수 있도록 준비하는 마음으로 책을 읽고, 자료를 뒤지고. 하지만 기자로서 치열하게 살아왔느냐고 스스로 묻는다면 선뜻 '그랬다'고 답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항상 어딘가 딜레탕트하게, 재미있는 일만 해왔던 듯 하고요. 글을 쓰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