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냥과 버섯구름
오애리, 구정은. 학고재
미국이 세계의 거센 비판과 반대 속에서도 이라크를 침공한 지 어느 새 20년이 돼 간다. 폭격기가 하늘을 날고, 쫓겨난 독재자가 붙잡혀 처형을 당하고, 미군의 점령기를 거쳐 이라크에 새 정부가 들어섰다. 종파와 진영에 따라 나뉜 이들이 서로를 공격하고 테러를 저질렀고 너무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 사이에 7000년 메소포타미아의 역사를 간직한 바그다드의 국립 박물관은 약탈을 당했다. 미군이 들어가서 멋대로 유물들을 꺼내 ‘기념품’으로 가져갔고, 켜켜이 쌓인 문명의 두께와 역사의 깊이를 알던 이라크 사람들마저 일부가 유물들을 도둑질했다. 뒤이어 미국 언론을 타고 전해진 소식은, 이라크의 유물 가운데 몇 점이 인터넷 경매 사이트 이베이에 매물로 올라와 있다는 것이었다. 전쟁이라는 어마어마한 역사적 사건 속에서, 숱한 이들이 숨져 가는데 유물 한 점은 과연 얼마 만큼의 ‘뉴스 가치’가 있는 것일까.
이스라엘이 전투기를 띄워 팔레스타인 땅을 폭격한다. 전쟁 범죄가 얼추 잦아들고 나면 미국은 ‘로드맵’ 등등의 거창한 이름을 붙여 ‘중동 평화 구상’을 내놓는다. 무슨 무슨 협정들이 잇달아 체결된다. 알아듣기도 어렵고 맥락을 이해하기도 힘든 일들이 벌어진다. 미국의 대통령이 바뀌면 다시 판이 뒤집어지거나 흔들린다. 미국이 대사관 위치만 바꿔도, 어떤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역사를 잃고 터전을 잃고 때로는 생명을 잃는다. 그 ‘분쟁’ 속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혹은 죽어가는 사람들의 자리는 어디일까. 그들의 이야기는 어디에 있을까.
우리 저자들은 세계의 소식을 들여다보고 전달하는 일을 해왔다. 신문사와 통신사에서 오랫동안 일하면서 온갖 주제로 글을 썼고, 외국에 직접 취재를 다녀오기도 했다. 하지만 신문에 실리는 기사들은 그리 친절하지는 않다. 우리가 쓴 글들도 마찬가지였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지만 모든 걸 배경부터 일일이 설명해줄 수는 없으니 지금 당장 벌어진 일들을 전달하는 것에 치중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생략되는 것은 지나간 역사, 그리고 그 역사를 살아온, 지금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일 때가 많았다.
국제 뉴스를 접할 때에는 거리감을 느끼기 쉽다. 아무래도 남의 나라 이야기인 탓이 클 것이다. 또한 미국과 중국의 갈등, 유럽과 러시아의 대립, 아시아 패권 다툼 등등 너무 커다란 이야기들이 주로 오가는 탓도 있다. 그런 뉴스들을 보고 듣고 읽으면서 ‘나의 이야기’라고 생각하기는 쉽지 않다. 우리의 생활 감정과 동떨어져 있기 십상이니까.
게다가 국제 뉴스에서 들려오는 것은 대개 대통령, 총리 같은 정치지도자들이나 힘 있고 돈 많은 사람들의 발언과 행위들이다. 하지만 권력을 쥔 사람들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우리가 새겨들어야 할, 기억해야 할 목소리들이 있다. 평화, 여성, 인권, 소수민족과 원주민 문제, 환경 이슈 등에서 중요한 목소리를 내온 이들 말이다. 세상은 사실 그런 사람들이 만들어간다.
우리 주변의 물건들, 뉴스에서 스쳐 지나가는 장소들, 나와 상관 없어 보이는 사건들 속에 그런 역사가 있고 사람들이 있다. 어쩌면 지금 당장 미국의 조 바이든 대통령이 이스라엘과 아랍국가들 간에 체결된 ‘아브라함 협정’에 대해 하는 말들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 주변에 알게 모르게 스며들어 있는 세계의 단면들일 지도 모른다. 그 단면들이 쌓이고 겹쳐져서 지금의 우리를 만들고 있으니까.
이 책은 바로 그런 단면들을 들여다보자는 생각에서 시작했다. 휴대전화와 랩톱 컴퓨터, 무선 이어폰의 배터리를 충전하는 것은 너나 없이 모두의 일상이 됐다. 배터리의 기원을 찾다 보면 문명의 발상지라고 불리는 고대 메소포타미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런데 바그다드의 박물관에서 사라진 고대의 배터리는 대체 지금 어디에 있을까. 유물 한 점의 ‘뉴스 가치’는 언론에서 무시당하기 쉽지만 배터리와 바그다드를 잇는 연결고리들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레 고대의 문명과 대비되는 현대의 야만을 만나게 된다. 이스라엘과 우크라이나에서 민간인들을 공격하는 데에 쓰인 금지된 무기 백린탄의 잔혹성을 생각하면서 동화 속 성냥팔이 소녀와 어린 여공들의 파업을 만나게 되는 것처럼.
유럽에서 자전거가 대중화되자 콩고 사람들의 손이 잘려나갔다. 벨기에 국왕 레오폴트 2세의 식민지 착취와 토착민들을 상대로 벌인 만행을 다룬 문서나 책은 많다. 그 가혹한 수탈의 역사에 대해 유럽에서도 반성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았지만 그 모든 것이 그저 지나간 과거로 치부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미국에서 한 흑인 남성이 경찰의 가혹행위로 목숨을 잃었다. 그런 사건도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2020년 일어난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의 여파는 컸다. 흑인 노예들을 거래한 노예무역과 식민주의, 인종주의 전체가 다시 도마에 올랐다. 플로이드의 죽음이 벨기에에서 레오폴트 2세의 동상을 끌어내리는 격렬한 항의시위로 이어졌으며 아프리카 국가들이 공개적으로 과거의 노예제와 인종주의에 대해 비판 성명을 내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과거는 현재와 만나 ‘진행형’이 됐다.
책의 앞머리에서는 그렇게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물건들의 역사를 되짚어봤다. 이런 글들을 쓰면서 얻은 소중한 경험 중의 하나는, ‘남성 지도자’들에게만 비춰지던 조명에 가려진 그늘 속의 여성들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수영복의 종류로 더 유명해진 비키니, 태평양 산호초에서 솟아 오른 버섯구름. 방사능에 노출된 것 못잖게 그 섬 사람들을 괴롭힌 것은 미군에 의한 강제 이주였다. 이웃한 무루로아 환초에서는 프랑스가 비슷한 짓을 했다. 냉전 시절 핵무기는 세계를 얼어붙게 만든 공포의 근원이었다. 그 위협 속에서 인류는 실존을 고민했다지만 당장 집을 잃고 이 섬 저 섬으로 옮겨다녀야 했던 최대 피해자들의 운명에 대해서는 그리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핵무기와 소수민족, 군사기지와 토착민과 환경의 문제는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끊임 없이 이슈가 되고 있다. 북유럽 부자 나라 덴마크의 자치지역인 그린란드의 사례에서 보이듯 자원과 개발이라는 경제적인 이슈들과 연결돼 있기도 하다.
한껏 무게를 잡고 설명했지만 이 책에 실린 내용들은 여전히 그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삶의 무게에 비하면 가볍기 짝이 없다. 저자들은 역사학자가 아니고 뉴스를 전달하는 사람들이기에 학술적이라기보다는 현재의 사건들과 연결지어 해설하는 것에 초점을 맞췄고, 따라서 글의 깊이도 얕기만 하다. 그럼에도 우리가 먹고 마시고 쓰는 것들, 뉴스에서 한번 듣고 스쳐 지나가는 장소들, 흥미로운 화제 정도로 생각했던 사건들 속에 숨겨진 의미와 역사를 되짚어본 이 작업이 독자들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면 다행스러운 일일 것이다. 호기심을 충족시켜주는 것이 아니라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었으니 말이다. 부족한 글들을 책으로 엮어준 학고재 출판사와, 꼼꼼하게 원고를 읽고 다듬고 이미지들을 찾아준 구태은 편집자에게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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