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863

강이, 나무가, 꽃이 돼 보라

석달 전 교토에 여행을 갔다가, 교토 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히가시혼간지(東本願寺)에 들른 적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오래된 큰 건물들이 일본에는 많지만, 특히나 이 히가시혼간지라는 절은 건물의 크기가 워낙 컸다. 정토진종의 절인데 안에는 사람들이 거의 없이 고즈넉했다. 그곳 갤러리에서 뜻밖의 전시를 만났다. 조용한 갤러리에서 갑자기 눈에 들어온 것은 한국인임이 확실한 어떤 문인의 이름이었고, 그 옆에는 일본어로 '재일(자이니치)코리안' 즉 식민지 시절 일본에 끌려갔거나 건너갔다가 정착하게 된 사람들을 소개하는 글이 실려 있었다. 이들은 남북한이 갈라지기 전에 일본에 간 이들이기 때문에 한국인도 북한사람도 아닌 '재일'이라고만 불린다. 일부는 조총련계, 일부는 민단계로 갈려 있지만 자..

딸기네 책방 2012.08.27

루이스 응꼬씨 '검은 새의 노래'

검은 새의 노래 Mating Birds 루이스 응꼬씨. 이석호 옮김. 창비(창작과비평사). 6/27 남아프리카공화국 소설은 존 쿳시의 말고는 본 적이 없다. 문화부 책상에 굴러다니는 것을 주워다놓고 2년 가까이 묵히고 있다가 이제야 읽었다. 확인해보니 원작이 출간된 게 1987년, 아직 백인정권의 서슬이 시퍼럴 때다. 남아공의 대표 작가 격인 쿳시가 백인인 반면, 이 소설을 지은 응꼬씨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흑인이다. 책은 한 흑인 청년의 옥중 고백 형식으로 돼 있다. 한글판 제목은 ‘검은 새의 노래’이지만 영문 제목은 ‘짝짓는 새들’이다. 화자인 청년은 흑인들 중에선 제법 교육받은 사람으로 대학물까지 먹었지만 백인 소녀를 성폭행한 죄로 사형선고를 받고 수감된 처지다. 스위스에서 온 정신분석학자는 청년..

딸기네 책방 2012.08.24

빛은 내 이름

빛은 내 이름 1, 2 veinte anos, Luz. 엘사 오소리오. 박선영 옮김. 대교북스캔 6/28 아르헨티나 ‘더러운 전쟁’ 때 벌어진 ‘도둑맞은 아이들’을 주제로 한 소설. 이사벨 아옌데의 만큼이나 흥미진진하고 재미있다.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말 그대로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한’ 소설이랄까. 정적이나 반대세력을 학살하는 군부독재정권. 여기까지는 수많은 비슷한 사례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아이 도둑질’에 이르면 ‘대체 무엇 때문에?’라는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반정부 세력으로 찍힌 사람들을 붙잡아 고문해 죽이는데, 그 중 임신한 여성 수감자들에게서 아이를 빼앗아 군인 가정이나 부유층 가정으로 넘긴 것은 대체 어떻게 봐야 한다는 말인가. 더군다나 아이를 낳은 여성들은 가차 없이 죽였다니..

딸기네 책방 2012.08.22

이슬람의 세계사 1, 2

이슬람의 세계사 1, 2 A History of Islamic Societies 아이라 M. 라피두스. 신연성 옮김. 이산. 8/21 이슬람 세계의 역사에 대한 교과서라 할 만하다. 800쪽 가까운 분량의 책이 두 권이다. 이산 시리즈로 나왔는데, 이 시리즈의 명성에 걸맞게 알차고 방대한 책이다. 일단 책 두께가 눈과 손을 압도한다. 전철 안이나 집 근처 카페에서 책을 읽을 때가 많은데, 워낙 두꺼워서 가지고 다니기가 힘들 정도였다. 이슬람의 태동에서부터 2001년 9·11 테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 직후까지의 역사를 줄줄이 훑었다. 지리적으로는 가히 이슬람 세계 전체를 아우른다. 오늘날의 중동(아랍과 이란) 뿐 아니라 중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남아시아(인도·파키스탄·방글라데시), 아프리카까지 망라했다. ..

딸기네 책방 2012.08.21

의혹을 팝니다- 기업의 용병이 된 과학자들

의혹을 팝니다- 담배 산업에서 지구 온난화까지 기업의 용병이 된 과학자들Merchants of Doubt: How a Handful of Scientists Obscurred the Truth on Issues from Tobacco Smoke to Global Warming에릭 M. 콘웨이, 나오미 오레스케스. 유강은 옮김. 미지북스. 5/16 정말 재미있었던 책. 일군의 미국 과학자들이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면서 세상을 어떻게 농락하려 하는지를 탐사보도처럼 추적했다. 냉전 시대에는 군비확산을 부추기면서 국방부와 손잡고 이익을 챙기다가, 냉전이 끝나니 잠시 끈 떨어진 신세가 되었던 ‘어용 과학자’들. 그러나 거대 기업들과 우익 언론들은 늘 이런 자들을 필요로 하게 마련. 이 못된 과학자들, 더 이상 ‘과..

봄 지나 여름으로 가는 사이에 읽은 책들

4/15 이언 윌머트, 로저 하이필드 '복제양 돌리 그 후' 4/16 마인하르트 미겔 '성장의 광기' 딱히 읽을 필요는 없지 않았나 싶다... 4/17 제이콥 브로노우스키 '과학과 인간의 미래' 4/18 클레이 서키 '끌리고 쏠리고 들끓다' 오랫동안 벼르고 별러서 읽었는데, 이제는 어느 새 '다 아는 이야기'가 되어버린... 4/28 라나지트 구하 '역사 없는 사람들' 5/13 리처드 W. 불리엣 '사육과 육식: 사육동물과 인간의 불편한 동거' 5/16 나오미 오레스케스, 에릭 M. 콘웨이 '의혹을 팝니다: 담배 산업에서 지구 온난화까지 기업의 용병이 된 과학자들' 5/17 아지즈 네신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5/20 마이클 토마셀로 '이기적 원숭이와 이타적 인간' 5/21 어니스트 칼렌바크, 마이..

아서 쾨슬러, '한낮의 어둠'

아서 쾨슬러의 (문광훈 옮김. 후마니타스)을 읽었다. 지난해 가을, 마포의 후마니타스 책다방 주차장에서 열린 책 싸게팔기 행사 때 사다놓았던 소설이다. 피아노 위에 아무렇게나 쌓아두고 있다가 일본으로 가져와서는 다시 아무렇게나 쌓아두고 있었다. 그러다가 엊그제 '안 하던 짓'을 하기 시작했다. 자기 전에 잠자리에 누워서 책을 보는 짓. 언제부터였을까? 소설이 아닌 책들을 주로 읽게 되면서부터 누워서 책 보는 것을 안 하게 됐다. 누워서 보는 책은 아주 재미있어야 하는데, 내가 보는 책들이 아무리 재미있다 하더라도 대개 밑줄 쳐가며 읽어야 하는 '정보성' 서적들이다보니 버릇이 그렇게 바뀌어버린 것 같다. 엊그제는 꽤 피곤했다. 이틀 동안 하루 너댓시간씩 비포장 도로를 걷는 가벼운 트레킹을 하고 집에 온 터..

딸기네 책방 2012.05.29

그들이 온 이후

지난 토요일에 딸과 함께 도쿄 우에노의 국립과학관에서 열리고 있는 에 다녀왔다. 잉카 문명의 여러 면모를 사진과 동영상으로 보여주면서 잉카 유물도 구경시켜주는 전시회였다. 재미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흔하게 열리는 '무슨무슨 문명 전시회'와 비슷하지 않을까 했는데 일본의 전시 수준은 그보다는 훨씬 뛰어났다. 일본인 학자의 해설 동영상은 물론이고 3D입체 영상까지 있어서 초등학교 5학년 딸도 아주 즐겁게 감상했다. 전시회의 부제는 '마추피추(우리식 표기는 마추픽추) 발견 100년'이었고, 전시품 중에는 유골(두개골)과 미라도 있었다. 그런데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마지막 황제 아타우알파의 처형 장면을 담은 1분여 짜리 애니메이션을 비롯해 스페인 침략자들의 잔인한 원주민 학살을 비중 있게 조명했다는 점이었다. ..

딸기네 책방 2012.05.22

추억의 ABE 목록- 원제/작가/재출간

인터넷에서 퍼다 모으고, 제가 덧붙였습니다. 그런데 원래의 ABE는 해적판(당시엔 저작권 개념도 없었지만)에다가 일어책 중역 의혹이 짙은 것들도 많아서, 책 이름 저자 이름이 좀 엉망입니다... 책이야 더할나위 없는 것들이었지만 ㅎㅎ ABE 1 : 나의 학교 나의 선생 (조반니 모스카, 허인 역) 추억의 학교 / 조반니 모스카 / 김효정 (옮긴이) / 우리교육 Ricordi di Scuola / Giovanni Mosca ABE 2 : 조그만 물고기 (에릭 크리스챤 호가드, 박순녀 역) The Little Fishes / Erik Christian Haugaard ABE 3 : 형님 (제임스 콜리어, 이가형 역) My Brother Sam Is Dead / James Lincoln Collier ABE ..

누가 민족국가를 노래하는가

누가 민족국가를 노래하는가 Who Sings the Nation-state?주디스 버틀러, 가야트리 스피박 대담 | 산책자 | 2008년 07월 굉장히 어려우면서, 또한 재미있었다. 누가 민족국가를 노래하는가? 주디스 버틀러와 가야트리 스피박은 모두 여성이다. 버틀러는 젠더와 관련된 정치이론을 발전시켜온 사람이고, 스피박은 서발턴 문제에 천착해온 사람이다. 책은 '국가/민족국가/주권'에 대한 두 사람의 대담을 싣고 있다. 페미니즘에 대한 책도, 서발턴의 목소리를 강조하기 위한 책도 아니다. 하지만 소수자의 감수성이 물씬 묻어난다. 여성, 원주민,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빼앗긴 자들, 팔레스타인의 난민들, 이 모든 소수자들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젠더 문제에 대해 정색하고 고민하거나 공부해 본 ..

딸기네 책방 2012.0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