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880

후지타 쇼조 '정신사적 고찰'

일본 사람들의 책이라면 조금은 읽어보았는데 후지타 쇼조(이전 책의 표기는 후지따 쇼오조오였는데;;)의 글은 압권이다. 이번 책은 (조성은 옮김. 돌베개). 이전에 읽은 도 그렇지만, '정신사적 고찰'이라니... 이리도 무거울 수가 없다. 하지만 참아내야 하는, 기꺼이 껴안아야 하는 무거움이다. '텐노' 마루야마 마사오의 적자라고 하는 후지타는 '학자'가 아니라 '사상가'로 불린다. 글은 신랄한데 저널리스트들의 흔한 글쓰기와는 격이 다른 깊이가 있다. 책의 첫머리는 '골목에서 사라진 술래잡기'에 대한 분석으로 시작된다. 술래잡기에 대해 뭘 이리도 거창하게 해석했어, 라고 생각하며 책장을 넘기다 보면 '술래잡기에도 이런 구조와 철학과 과 구조가 있거늘 우리는 어느 새 잃어버렸다' 하는 진지한 자각이 자리를 ..

딸기네 책방 2014.06.09

제수알도 부팔리노, 그림자 박물관

가로등을 켜는 사람은 수염이 텁수룩한 신이나 마법사의 행동을 똑같이 흉내 냈다. 땅거미가 내릴 즘, 가로등 기둥에 사다리를 기대놓은 채 성냥 하나로 간단히 등 안에 숭고한 빛의 기적을 지펴 놓았다. 새벽에는 좀 서글퍼 보였다. 공중에 매달린 작은 유리 집의 불꽃이 희미해져 갈 때면 그가 살며시 나타나, 자객이 칼을 휘두르듯 심지 끄는 기다란 막대를 가볍게 쳐서 불꽃을 하나씩 끄곤 했다. 제수알도 부팔리노의 (이승수 옮김. 이레)에 나오는 구절이다. 10대의 어느 시기엔가, 독일 소설이나 뭐 그런 것들을 읽으면서 '점등사'를 그린 그림을 보았던 기억이 난다. 하나하나 손으로 불을 켜야 하는 램프등이라니. 부팔리노의 책을 읽다가 '가로등 켜는 사람'에 대한 추억담을 보며 문득 묘하게 환상적이었던 오래된 책의..

딸기네 책방 2014.05.30

팀 와이너, '잿더미의 유산'

잿더미의 유산한국전쟁에서 이라크전쟁까지 세계 역사를 조종한 CIA의 모든 것팀 와이너. 이경식 옮김. 랜덤하우스 5/26 내용이 내용인지라 재미도 있고, 알아두면 좋을 내용도 많았다. 그런데 이렇게 오탈자가 많은 책은... 태어나 두 번째로 본다. -_- (내용 정리) 2차 대전 뒤의 이탈리아 공작 제임스 포레스탈과 앨런 덜레스는 월스트리트와 워싱턴의 친구들과 동료들인 기업인, 은행가, 정치인 등에게 손을 벌렸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할 수가 없었다. 포레스탈은 해리 트루먼의 가장 가까운 동료이자 재무부 장관이던 존 W. 스나이더에게 갔다. 그리고 추축국 포획물에 대한 예탁금으로 변환시켰던 환율안정기금의 일부를 융통해달라고 설득, 동의를 얻어냈다. 그 자금 가운데 2억 달러는 유럽 재건비용으로 책정돼..

딸기네 책방 2014.05.27

2014년 4~5월에 읽은 책들

28. 아랍의 봄. 장 피에르 필리외 글. 시릴 포메스 그림. 해바라기프로젝트 번역. 이숲. 4/3좀 많이 간략하긴 하지만 나라별로 스르륵 한눈에 훑어볼 수 있어 좋다. 29. 애플은 얼마나 공정한가- 세계 50개 기업에 대한 윤리보고서 프랑크 비베. 박종대 옮김. 열린책들. 4/5 30. 장자. 오강남 엮음. 현암사. 4/25 8년만에 끝내다. 31. 사유의 윤리 -현대 프랑스 철학에 대한 헌사알랭 바디우. 이은정 옮김. 길. 4/30 32. 양자혁명: 양자물리학 100년사. 만지트 쿠마르. 이덕환 옮김. 까치. 5/7 심란함과 우울증을 달래준 양자물리학...이라고 하면 우습게 들리겠지만(파인만도 이해 못하겠다고 한 양자물리학을 내가 무슨 재주로 이해해;;) 그럼에도 흥미진진. 33. 리듬분석. 앙리 ..

사유의 윤리, 알랭 바디우가 프랑스 철학자들에 보내는 헌사

사유의 윤리 -현대 프랑스 철학에 대한 헌사알랭 바디우. 이은정 옮김. 길. 4/30 알랭 바디우, 이름만 알고 누군지는 잘 모르다가 지난달 이 은근 재미있어서 내친 김에 손을 댔다. 바디우가 '우리 자랑스러운 프랑스의 철학자들'에게 보내는 헌사다. 책의 원제는 쁘띠 판테온 어쩌구 하는 건데, 국내판 제목은 거기 비하면 몹시 거창하다. 오히려 부제 '현대 프랑스 철학에 대한 헌사'가 딱 맞는다. 무슨 책인지 잘 살펴보지도 않은 채 저자와 책 제목만 보고 가방에 넣은 뒤 지하철에서 펼쳤는데, 이 책이 '지하철에서 읽기에 적당한 책'에 들어가는지는 잘 모르겠다. 자크 라캉, 사르틀, 알튀세르, 들뢰즈, 데리다... 흐흐흐. 어차피 이 사람들의 생각에 대해서도 모르는 판에 이들에 대해 품평한 책을 읽는 게 무..

딸기네 책방 2014.05.01

가야트리 스피박,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 -서발턴 개념의 역사에 관한 성찰들가야트리 스피박 외 지음. 로절린드 모리스 엮음. 태혜숙 옮김. 그린비. 4/10 스피박의 글은 두어번 본적 있지만 늘 어렵다. 스피박 뿐 아니라 라나지트 구하도 마찬가지다. 말이 비비 꼬여 있다. 하지만 끈질기고 엄밀하고 재미있다. 유럽 철학 공부하는 사람들이 비비 꼬인 프랑스 철학자들의 글을 읽으며 얻는 지적 쾌감과 반짝이는 통찰력에 대한 감탄 등등을 나는 인도 서발턴 학자들의 글에서 얻는 것같기도 하다. 스피박의 대담 -마이너리티는 누구의 입을 통해 이야기하나 누가 민족국가를 노래하는가라나지트 구하, '역사 없는 사람들' 이 책은 스피박의 유명한 에세이(바로 이 책의 제목인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가 나온지 25년이 지나서, 그 에세..

딸기네 책방 2014.04.10

애플은 얼마나 공정한가- 세계 50개 기업에 대한 윤리보고서

애플은 얼마나 공정한가- 세계 50개 기업에 대한 윤리보고서 프랑크 비베. 박종대 옮김. 열린책들. 4/5 세계의 커다란 회사들은 '윤리적으로 볼 때' 어디가 나쁘고 어디가 훌륭한가. 그 기업들이 자체적으로 밝힌 내용과 외부(주로 평가기관이나 비정부기구들)로부터 받은 평가를 바탕으로 소개해놨다. 기업들 스스로 밝힌 내용을 참고로 하되 정보공개의 '투명성'에 방점을 찍고 있고, 기업의 개선 의지에도 높은 배점을 부여했다. 기업의 행위를 '윤리적으로' 따지는 게 간단치는 않다. 탄소발자국이나 노동조건과 같이 어느 정도 글로벌하게 합의가 된 기준도 있지만 정보보호 측면(일례로 책에서는 페이스북의 경우 평점을 보류했다)이나 기업의 '지속가능한 성공적 경영(수익성)' 같은 것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을 수 있..

딸기네 책방 2014.04.05

2014년 2~3월에 읽은 책들

13. 예닌의 아침. 수전 아불하와. 왕은철 옮김. 푸른숲. 2/3팔레스타인, 예닌, 사틸라. 이런 지명들이 나오는 것만으로도 이 책이 비극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책에 묘사된 비극의 깊이는 너무 깊고 생생해서 '예측'을 뛰어넘는다. 아름답다고 말하기엔 너무 슬픈 이 이야기를 '소설'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는 게 가장 큰 비극. 번역은 매끈하고 훌륭한데, 번역가가 아랍이나 팔레스타인에 대해 잘 몰랐던 듯. 이집트의 국민가수 움 칼툼을 문자 그대로 '칼트훔 어머니'라고 해놓고, 영어식으로 '시더 나무(백향목)', '배질(바질 -_-)' '허머스(아랍음식 후무스)' 해놓은 게 좀 거슬린다. 아라파트가 이끌던 '파타'를 '파테'라고 틀리게 쓴 것도 옥의 티. 14. 노예 12년. 솔로몬 노섭. 이세현 옮김. 새..

소외된 90%를 위한 비즈니스

소외된 90%를 위한 비즈니스폴 폴락, 맬 워윅 지음. 이경식 옮김. 김정태 감수 및 해제. 더퀘스트. 3/23 어이가 없을 정도로 부실한 책이다. 일단 혹평부터 하자. 유엔과 정부들이 지금까지 해온 제도적, 구조적인 빈곤 퇴치 노력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고? 아니올씨다. 그럼 누가 성과를 거둬왔나요? 성과가 미흡하므로 좀더 노력을 하자, 라고 이야기해야지 '성과 없었다, 이제부터 비즈니스 마인드를 갖춘 사람들이 기업활동을 통해 지구를 구하겠다'라고 하면 어떡하냐고. 며칠 전 읽은 마이클 에드워즈의 와는 정확히 대척점에 서 있는 책이지만, 굳이 두 책을 비교하고 싶지는 않다. 발상이나 기본전제의 문제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이 책, 는 함량 미달이기 때문이다. '적정기술은 죽었다'면서 '적정(기술 제품을 활..

딸기네 책방 2014.03.23

왜 기업은 세상을 구할 수 없는가

왜 기업은 세상을 구할 수 없는가. 마이클 에드워즈. 윤영삼 옮김. 다시봄. 3/22 박애자본주의의 한계를 지적한 책인 줄 알았기에 가뿐하게 손에 들었는데 내용이 그리 간단치는 않다. 박애자본주의의 한계에 더해, 기업마인드가 시민사회까지 밀려들어올 때 생기는 근본적인 문제 즉 더이상 필부필부의 참여로 사회를 밑바닥부터 바꾸겠다는 의지를 갉아먹는 문제를 역설하는 데 초점을 뒀다. 이렇게만 적으면 "뭐 예상되던 거 아니었어" 식의 반응을 보일 독자들도 있을 것 같다. 실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시민사회운동 해본 적도 없으면서. 저자는 시민단체나 민간단체에서 평생 일했던 사람이다. 시장의 논리와 경쟁의 논리가 밀려드는 시민사회의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바꾸고자 외치는 목소리가 참 절절하다. 후다닥 책장을 넘기긴 ..

딸기네 책방 2014.03.22